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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 해설을 시작하며 "복음의 기쁨" 읽었지만 어려우시다고요?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5|조회수40 목록 댓글 0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 해설을 시작하며

"복음의 기쁨" 읽었지만 어려우시다고요?

어느 시대이든지 교황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전 세계 신앙인들에게 참된 길을 제시하기 위해 끊임없는 가르침을 전달했다. 최근 교황들의 문헌만 떠올려보아도 쉽게 수긍이 간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전달받았던가!

 

인내를 지니고 곱씹어보면, 하나같이 주옥같은 말씀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온전히 소화해낼 우리의 능력이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도에 포기하거나 목차와 부분적인 내용 파악으로 적당히 만족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식견의 부족으로 그 내용의 깊이를 미쳐 다 가늠해내지도 못했고, 끝까지 읽어낼 인내력과 열정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교황 문헌은 언제나 어려운 글로 뇌리에 남아 있다. 문화적 장벽과 번역의 한계 그리고 철학적, 신학적 이해의 부족 때문에, 늘 고리타분한 글로 여기기 일쑤였다. 때론, 마치 이솝 우화의 여우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못 먹을 위치에 있는 포도를 그저 신포도 정도로 규정하여 자존심을 챙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래도 속이 불편해, 필자는 무의식 속에서도 웅얼웅얼 짜증을 냈다. 좀 더 편한 위치에 잘 익은 포도가 열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늘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권고문을 통해 본 프란치스코 교황

 

201311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고문을 냈다.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이다. 같은 해 313일에 교황 직위에 오르셔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놀라운 행보로 온 세상을 기쁨의 도가니로 만드신 분의 첫 권고문이다. 한국 교회에 교황 문헌 읽기 열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손에 잡히는 위치에 맺힌 포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알갱이의 감칠맛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역시 만만치 않다.

 

좋은 해설을 하실 분들이 세상에 많음과 필자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신문에서 내게 이 부탁을 한 것을 보면, 능력 있는 분들은 모두 겸손까지 갖춘 듯하다. 필자의 많은 흠 중에 하나가 거절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이것을 용기라고 여기는 분별력 결핍의 흠도 지니고 있다. 아무튼 만용으로 끝나지 않길 기도한다.

 

먼저 어떻게 해설을 써 나갈지를 밝혀 보겠다. 매회 마치 독립된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끝마칠 수 있도록 하겠다. 신문의 속성 때문이다. 신문은 손에 잡힌 논문집이나 문학 작품을 독자가 원하는 시간만큼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기쁨원문의 내용에 충실하되, 사람들 공감을 이끌어 내는 감성적 표현에 집중할 것이다. 인내력을 지니고 끝까지 읽어나갈 추진력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필자가 한국 교회의 사목자이기에 구체적 상황을 적용할 때는 우리의 현실 상황에 비추어 설명할 것이다. 주관적 이해가 객관적인 것처럼 소개될 수도 있다.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 생각한다. 몇 회 분량이 될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차근차근 순서대로 써 나갈 참이다. 오늘은 권고문을 통해 느껴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인상을 적어 보겠다.

 

새 교황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능력을 지닌 분이다.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말 가운데 소통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분은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아니 적어도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그분 자신의 말과 가르침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감성적인 언어로 공감을 형성시키고 고통받는 이들과 소외되고 배척된 이들을 향한 연대의 표시와 자세로 모두를 열광하게 만든다. 그래서 필자도 자연스레 그분의 평일 미사 강론까지 경청하며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까지 송두리째 표현하기에 참으로 설득력 있었다. 그 태도와 표정의 진지함은 진실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면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속내를 보여주기에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오랜만에 맛본 감정이다. 식상한 정치인들의 외교적 수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권고문에 사용된 표현과 내용은 그분의 평일 강론이나 다른 곳에서의 인터뷰 내용 그리고 교황이 되기 전에 작성한 문헌의 내용과 표현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권고문은 그야말로 교황이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예술적인 상징과 이미지까지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할 줄 아는 분이시다. 교황은 예술가를 정의하면서, 인간 삶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실재를 아름다움으로 승화하여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황도 훌륭한 예술가이다. 문학작품과 회화 그리고 음악과 영화까지 인용하시며 설명하신다. 대충 겉멋만 내지 않는다.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그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필자에게 특별한 감동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부분이다. 그 내용의 깊은 맛과 인간적 멋스러움까지 노출시켜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 줄 아는 훌륭한 예술가이다.

 

솔직한 분이다. 용기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금기와 터부시 되었던 내용을 공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우리들 모두가 범죄의 말 없는 공모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속죄하며 용서 청하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격려하고 자극을 주신다. 계속해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분으로 비칠 것이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 복음의 기쁨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복음의 기쁨의 탄생 배경에는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2012107일부터 28일까지)가 있다. 주교 시노드(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수를 위한 새복음화였다. 시노드를 폐막하면서, 그 결과물로 58개 제안문을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 올렸다. 교황은 시노드 기간 중인 1011일에 신앙의 해를 개막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20131124일에 새 교황 프란치스코는 신앙의 해를 폐막했는데, 그때에 교황 권고문인 복음의 기쁨을 냈다.

교황의 현실 인식

교황은, 이 권고문을 내기 3개월 전에, 예수회 잡지 가톨릭 문화 생활(Civilta Cattolica)과의 인터뷰를 통해, 복음의 기쁨의 뼈대가 되는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오늘날의 교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저는 오늘날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줄 능력을 신장시켜야 합니다. 그들 가까이 있어야 하고,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과 같습니다. 중상을 입은 사람에게 콜레스테롤과 혈당의 높은 수치 여부를 묻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일단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다른 것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처부터 치료해야지요. (한 번 더 강조하시며) 상처부터 치료해야지요()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교황의 현실 인식이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며 죄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불길을 불어넣어 주신 것처럼, 교황은 그렇게 하길 원하고 있다.

 

- 순교 복자 124위는 시대적 부조리와 극심한 신앙의 탄압 속에서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다 주님 품에 안겼다. 그림은 프란치스코 교황 시복식 중에 공개된 124위 복자화.

 

예수님 만남 통해서만 치유 가능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교황의 생각은 무엇인가?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현실 세계의 죄악과 고통으로 얼룩진 슬픔,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공허와 외로움을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구원밖에 없고, 이는 오로지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복음의 기쁨1).

 

복음의 기쁨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교황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체험 없이는 그 누구도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만일 신앙인 가운데 누군가 무미건조하고 타성에 젖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분과의 밀도 있는 인격적 만남을 요청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이 만남으로 시작되고 유지되며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분에 대한 신앙을 통해 천국의 삶을 희망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하여, 당신이 진정한 승리자이심을 확인시켜 주신 분이다. 비도덕적이고 부조리하며 까닭 모를 고통과 죽음 앞에 모두들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죄인들의 만행으로 의인이 죽임을 당하고 하느님 어디 계시느냐며 울부짖고 있는 인류에게, 부활하신 그분께서 답을 주셨다. 삶의 궁극적 이유와 목적은 그 죽음 너머에 있음을 밝혀주셨다. 당신이 그 죽음을 이겼다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추종자들에게 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믿는 자는 다시는 삶의 부조리함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초월적 생명을 누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분의 첫 인사말 너희에게 평화 있기를!”의 참된 의미가 이것이다.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신앙인의 평화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거듭 말한다. 하느님은 의인의 죽음을 불쌍해 하며 하늘을 향해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 의인들은 예수그리스도처럼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확증이시다. 이에 대한 믿음만 간직한다면 다시는 몰이해도 없다. 주님께 대한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의 어둠은 모두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 없는 이들의 죽음, 범죄의 희생자들, 사건과 사고의 피해자들, 전쟁의 사망자들, 이 지상에서 삶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사람들의 비통한 죽음까지도, 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하느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의인의 죽음은 역사 안에서 죄인의 죄악성을 드러내 주고, 인류의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며 하느님 나라에 더욱 나아갈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짊어지고 이 역사의 여정을 걸어야 할 십자가인 것이다. 이 지상에서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분과의 진정한 만남 없이 현실 세계에서의 완전한 기쁨과 평화는 있을 수 없다. 그 만남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회칙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결단이나 위대한 사상에 대한 동조나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다7).”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3) 초상집 상주의 얼굴

-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사람의 얼굴 역시 기쁨으로 넘쳐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울하고 슬픈 표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초상집 상주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 결코 안 됩니다”(10).

 

교황 권고 가운데 제일 처음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표현이다. 부활 시기 없이 사순 시기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도 있다고 했다. 복음의 본질은 기쁨을 동반하고 있고, 이웃에게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그것의 속성인데, 우울하고 슬픈 표정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는 완곡한 표현이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교황이 지니고 있는 생각을 일상의 표현으로 옮긴 것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이다. 세상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 소식을 전하여 믿는 이들은 누구나 구원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명을 받은 자들이 초상집 상주의 표정으로 우울하게 살아간다면, 그 복음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작용하겠느냐는 말씀이다. 억지로 사람을 성당으로 끌고 와 신앙인으로 만들 수 없다. 교황은 복음 자체가 지닌 매력을 통해 사람들이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쁜 소식 전하는 사람의 얼굴

복음의 기쁨국제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발달 장애인들의 국제 공동체 라르슈’(L’Arche)를 만든 장 바니에(Jean Vanier)가 첫 발제자로 나서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어느날 브라질의 장애인 보호 시설을 방문했는데 40개나 되는 침실의 아이들 가운데 누구도 울지 않았다고 했다. 모두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고 했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상태라면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적 우울증 상태인 것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세상의 한가운데서, 그리고 변두리까지 복음의 기쁨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지닌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이다. 우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울음과 웃음을 들어주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장 바니에는 마법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라고 했다. “당신은 내게 필요합니다.” 존재 가치를 일깨워 주는 말이다. 상대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도록 만든 사탕발림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깨닫고 고백하는 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성이 진실을 바탕으로 이 수준까지 올라와야 한다. 누구나 존엄하며 구원으로 초대되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복음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선포되어야 할 복된 소식이다. 기쁨 덩어리인 것이다. 그런데 복음 선포하는 사람이 초상집 상주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말이 되겠는가.

 

 

마음이 식은 이들을 도와야

 

극심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탐욕과 피상적인 쾌락에 빠져 지내는 신앙인들이 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진정한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2).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냉담자라고 부른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 교황은 기도하기를 강권하였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에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3).

 

냉담자에게 이 말씀이 감동적으로 작용하여 회개를 불러일으키면 좋겠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적극적 도우미가 필요하다.

 

 

복음화, 새로운 표현 · 방법으로

 

교황은 참된 신앙인들의 적극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복음의 기쁨을 냉담자에서 회복시켜주기 위해 새로운 복음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 했었던 방식이 효과적이지 못하다면 새로운 방법과 표현을 찾아야 한다.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원천으로 돌아가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고자 노력할 때마다 새로운 길들이 드러나고, 창조적 방식들이 보이며, 또 다른 형태의 표현들과 더욱 설득력 있는 기호들과 오늘날의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 어휘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모든 참다운 복음화 활동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10).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 교회의 선교적 변모

전투하는 지상교회, 일어나 참호 밖으로...

사제로 축성된 사람들은 최전선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전방으로 나가야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고 있다.

 

복음의 기쁨5장으로 구성되었다. 각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교회의 선교적 변모,

2-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

3-복음 선포,

4-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5-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이곳에서는 1장 제목의 의미를 다루겠다.

타성에 젖은 교회의 그늘

1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교회의 선교적 변모’. 이 제목의 의미는 교회가 선교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는 제 발로 성당을 찾는 사람들만 관리하는 교회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사실 이 용어는 유럽이나 남미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이다. 태어나면서 모두가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사는 그곳에서 사목자들 삶의 양태는 오로지 그들을 관리하는 것이 전부인 셈이다. 더 선교할 곳도, 사람도 없다. 변방으로 나아가 비신앙인을 회두시켜 세례를 받게 하고 그들이 신앙인으로 살도록 만드는 것을 선교 혹은 전교라고 할 때, 그렇다. 유럽과 남미는 더는 복음화할 곳도, 사람도 없는 곳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복음화를 세례를 주는 것으로만 이해할 때, 그렇다. 이제 선교사도 필요 없다. 오로지 신자들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목자면 족하다. 그렇게 유럽과 남미는 길게는 1000, 짧게는 500년을 살아왔다.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리스도교가 문화와 전통으로 자리 잡은 그곳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복음화되었다고 믿는 곳의 실제 신앙인은 얼마나 되는지 반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가 30%밖에 되지 않는다. 오랜 타성에 젖은 목자들은 비록 경건하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나, 선교의 역동적 모습은 오래전에 실종되었다.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타성에 젖은 삶의 태도로 성사 집전을 하고 고답적이며 교조적인 주일 강론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다. 때로는, 사제가 되려는 성소자들의 신학교 지원 동기가 그와 같은 평온한 사제의 삶이라는 고백까지 들릴 정도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본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신심 깊은 사제는 신앙심 깊은 신자들과 즐겁고 행복한 만남으로 자신의 책무를 이행하며 안정적인 일과(日課)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새복음화를 위한 창을 열어야

 

아주 큰 문제가 있다. 그곳에는 실제적 신앙생활을 포기한 70%의 사람들이 있다. 목자는 교회 밖의 그 양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도록 파견된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며 살았다. 그래서 교회 내부로부터 재복음화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복음화시켜야 된다는 의미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옷을 중도에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열정과 방법과 표현으로 그들을 다시 복음화하는 것을 교회는 새복음화라고 명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선교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적으로 전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은 제1장의 제목을 교회의 선교적 변모라고 정했다. 교회는 선교를 위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교회의 모습을 강조하면서 그리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유럽과 남미 교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어느 정도 안정화된 본당의 사목자들은 열심히 사는 신자들과 큰 문제 없이 안주하며 내적 평화 속에서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새롭게 본당을 낼 때에는 사제관과 성당 그리고 신자들이 제대로 갖추어진 곳에 사제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에 복음화해야 할 90%의 비 신앙인을 위해 목자를 파견해야 한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지상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최전선에서 조금이라도 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목자는 전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제관에 머물며 참모들에 둘러싸여 호의호식하며 지내라고 사제로 축성된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울려퍼지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이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 제자 공동체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

복음의 기쁨나누면 선교의 기쁨얻는다

2014년 부활 성야 미사에서 초를 들고 입장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선교는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의 사명이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작성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있어서 확실한 출발점이 있다. 교회는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선포해야 하는가? 교회 밖의 모든 이에게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일갈하신다.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이 기쁨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권과 백성들에게 전달되어 그들도 이 기쁨을 누려야한다는 것이다. 이 풍진 세상의 모든 고뇌를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복음의 기쁨이 어떻게 전달되는가? 전달 방식을 묻는 질문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전달된다. 이 기쁨은 예수님과 만남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할 책무는 교회에 있다. 교황은 권고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1).

 

 

만남을 통해 전하는 복음의 기쁨

교황은 권고문 전체를 통해 이 기쁨을 여러 가지 형용사로 표현하며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새로운 기쁨, 창조적 기쁨, 영적인 기쁨, 심오한 기쁨, 내밀한 기쁨, 광대한 기쁨, 주체할 수 없는 기쁨, 영원한 기쁨, 가득한 기쁨, 신앙의 기쁨, 종말론적 기쁨.”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의 추기경 시절에 신앙의 해를 개막했는데, 그때에 이렇게 말했다. “빛의 표시로, 그리고 우정과 기쁨과 자유와 신뢰의 표시로 교회의 모든 문을 개방합시다.”

 

이제 그분이 교황이 되어 그 신앙의 해를 폐막하며 온 세계에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른 표현으로 호소하고 있다. “장벽을 높이 세워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교회가 아니라, 경계를 없애고 문을 개방하여 모든 이가 예수그리스도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만남이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통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선교는 복음의 열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형성된 공동체가 제자단이다. 사랑 가득한 그분의 자비의 눈길을 의식하고 주체할 수 없는 내적 기쁨을 느낀 사람들의 공동체다. 마냥 기쁨에 겨워 죽는 날까지 용약하며 자신들만을 위한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다. 이 기쁨은 더욱 확장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부르고 그에게 같은 기쁨을 누리도록 만드는 내적 추진력을 지닌 기쁨이다. 우리는 이를 선교의 기쁨이라 부른다. “제자들의 공동체의 삶을 가득 채우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입니다”(21).

 

교황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일흔 두 제자들의 선교여행의 결과로 발생한 기쁨(루카 10,17)이었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철부지들로 대변되는 가난한 이들과 작은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아버지를 찬미하며 예수께서 느끼셨던 기쁨(루카 10,21)이다.

 

이와 같은 기쁨을 선교의 기쁨이라 한다. 사도들의 설교로 오순절에 개종한 사람들의 첫 반응 역시 이 기쁨(사도 2,6)이었다. 나와 같은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기쁨이다.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기쁨이다. 함께 하는 이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살아가는 기쁨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신장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선포된 복음이 지금 열매 맺고 있다는 표지입니다”(21).

 

이 선교의 기쁨은 세상의 논리를 초월한다. 선한 사람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욱 기뻐하는 하느님의 논리다. 우리들 마음속에도 이 이상한 논리를 수용하는 곳이 있다. 성경에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은전 열 닢을 가진 여인이 한 닢을 잃은 뒤, 찾기 위해 등불을 들고 노력하여 은전을 되찾자,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루카 15,9). 잔치 비용이 은전 열 닢을 초과하는 낭비를 초래해도 수용하는 것이다. 한 닢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이 은전 열 닢의 가치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이성이 모르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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