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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다시 만난 신약 성경] 백인대장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6|조회수45 목록 댓글 0

[다시 만난 신약 성경] 백인대장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사람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아주 교과서적인 설명으로 시작했던 마르코 복음서는,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는 데서 한 번 그 답이 나오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는 백인대장의 고백으로 다시 마지막 답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가 눈에 띕니다.

첫째는, 베드로는 수난 예고를 듣고 (부활 예고는 거의 안 들은 것으로 치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을 말리려 했던 반면에, 백인대장은 다른 장면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지 않으므로 너무 많은 상상을 할 수는 없지만, 베드로가 생각한 그리스도와 백인대장이 생각한 하느님의 아드님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의 예고와 그에 뒤따르는 가르침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그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모습은 강력한 계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게 하셨다면 믿었을까요? 혹시나 믿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니라 다른 어떤 인물을 믿은 것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길을 가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알아볼 수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임을 알아보듯이, 예수님의 죽음이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순간이 됩니다. 어쩌면 백인대장은 베드로와 달리, 하느님의 아드님은 어떠해야 한다는 판단이 없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리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솔로몬이 아기를 반으로 가르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고 아기 어머니를 알아보듯이, 백인대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아들을 알아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거기서 확인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는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 알려주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마르 1,1)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그리스도라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리스도이고 그들의 우상일 따름입니다.

둘째는, 백인대장은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수난과 부활을 지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신비라는 말을 하지요. 그런데 백인대장은 부활을 보지 않고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부활보다 눈앞에서 본 죽음이 더 믿기 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있었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십니다.

 

 

 

 

[성경 다시 보기] “하늘나라하느님의 나라

 

하늘나라는 마태오에만 나옵니다(34). 창세기 1,1절에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들 מימשׁה과 땅을 זראה 창조하셨다. 하늘은 복수로 땅은 단수로 표현됩니다. 마태오에서도 늘 하늘은 복수입니다. 그 하늘들의 그 나라(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2코린 12,2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하늘이 여러 층으로 보입니다. 하늘을 복수로 말하는 것은 유다이즘의 관습적인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태오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4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12,28; 19,24; 21,31.43). 마태오의 하늘나라나 다른 복음서의 하느님의 나라가 같은 뜻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태오 11,11에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그러나 루카 7,28에서는 하늘나라 대신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니 말입니다.

아마도 마태오에서는 하늘이라는 표현으로 하느님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말에도 하늘이 알고 땅도 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나? 여기서 하늘이란 하느님을 땅은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기보다는 그분을 상징하는 다른 표현인 하늘을 언급하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하늘나라하느님의 나라가 같은 뜻이라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 하늘나라가 우리가 죽어서 가야 할, 소위 말하는 천당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와야 할, 현세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야 할 장소인지를 말입니다.

우선 주님의 기도를 볼까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이 다스리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 의해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태오 5,19를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계명들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큰 사람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즉 계명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알고 실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현세에서 우리가 할 일들입니다. 하늘나라를 비유하는 대목들도(마태오 13; 마르코 4; 루카 8)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그 개념을 파악하는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느냐 아니하느냐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태오의 최후 심판 대목(마태 25,31-46)도 그렇습니다. 즉 형제들에게 해 준 것이 하느님께 해 준 것이라는 실천을 말합니다(40),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이들은 영원한 징벌로 떠나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떠나갈 것입니다(45절 이하).

그러니까 신약에서 말하는 하늘나라(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느냐 않느냐에 중점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태오 11,11(루카 7,28 참조)의 세례자 요한의 평가는, 주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 그것으로 그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일지는 몰라도, 그것을 알고 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하늘나라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죽어서 천당 간다는 그 표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우도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할 수 있겠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희랍어로 파라데이소스”(παραδεισος), 히브리어의 파르데스”(סדרפ)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우리가 아는 파라다이스인데, 이 말은 신약에서 3번 나옵니다(루카 24,43; 2코린 12,4; 묵시 2,7).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필레몬서

 

필레몬서는 한 장, 25절로 이루어진 짧은 성경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3번째 선교 여행 가운데 에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는 여러 편지를 작성하게 되는데 필레몬서도 그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필레몬서는 바오로 사도가 필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노예 오네시모스를 만나 그를 회심시킨 뒤 그에게 자유를 얻어 주기 위해서 주인인 필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사회는 원로원과 로마 관리, 지방 유지, 소지주 · 가게 주인 · 장인, 자유민, 노예 등 복잡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신분사회였습니다. 원로원과 로마의 관리는 지방 정치와 경제 및 군사를 담당하였으며 지방의 유지들은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소지주와 가게 주인 및 장인은 중인 계층을 형성하였으며, 자유민은 주인이 선처를 베풀거나 주인에게 몸값을 지불함으로써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예는 제일 하층민으로서 전쟁 포로로 잡혀 오거나 노예 사냥꾼들에게 유괴된 사람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해 팔린 사람들과 노예 부모로부터 태어난 씨종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필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스는 노예였으며, 당시 노예들은 광물을 채굴하거나 건축 등 중노동에 주로 동원되었으나 그중에서는 가사와 육아를 돕는 가정 노예도 있었고 학식이 있는 노예인 경우에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거나 주인 자녀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네시모스의 경우 필레몬의 집에 속한 노예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1-3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먼저 필레몬과 필레몬의 집에 모여있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4-7절에서 필레몬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칭찬을 이어갑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19)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필레몬은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필레몬은 공동체에 사랑을 베풀었고, 그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처럼 필레몬이 하느님의 사람이며,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칭찬합니다.

8-22절은 필레몬서의 핵심으로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스와 관련한 부탁을 건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에페소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며, 수감 중에 오네시모스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가 회개하여 신자가 되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스가 전에는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난 뒤 오네시모스를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자유롭게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필레몬에게 바로 되돌려 보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네시모스를 일정 시간 동안 데리고 있었던 것은 그를 숨겨준 것이 되기 때문에 위법한 일이 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일을 선택한 뒤 그를 돌려보내는데, 그를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아울러 형제라고까지 소개합니다. 여기서 노예 제도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생각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에게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유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갈라 3,28; 1코린 7,22-23 1코린 12,13; 참조). 노예 제도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이러한 입장 표명은 사실상 노예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지만 그는 복음 선포자로서 이를 선택하였고,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필레몬에게도 같은 마음을 가져줄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분 제도 자체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 제도의 한계를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로, 그리스도인의 최고 원리인 사랑으로 극복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17)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대하듯이 따뜻하게 형제로 맞아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필레몬을 비롯해서 크레타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앞서 살펴본 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19)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필레몬이 그에게 신세 진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무스 일과 관련해서 필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스스로 복음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20)라고 말하면서 필레몬의 복음적 선택이 바오로 사도 자신에게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마지막으로 23-25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함께 수감되어 있는 에파프라스 그리고 자신을 돕고 있는 마르코, 아리스타르코스, 데마스, 루카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함께 끝인사를 전한 뒤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며 편지를 마칩니다.

 

 

 

 

[말씀의 우물] 요나서의 가르침

 

흔히 예언서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신탁, 즉 예언자가 전해주는 하느님 말씀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1-2) 그러나 요나는 말없이 주님 말씀을 등지고 야포로 가서 타르시스로 가는 이방인의 배에 오릅니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

한편, 뱃사람들과 니네베 주민들은 바삐 대비하고 행동합니다. 폭풍이 일어 생사가 위태로워지자, 선장이 배 밑창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요나에게 외칩니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6) 이렇게 그들은 요나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도 하느님 뜻에 순응하는 듯 움직입니다.

거친 풍랑 속에서 큰 물고기에게 통째로 먹힌 요나는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주 하느님께 있는 힘을 다해 기도드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신비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요나 2,3) 기도 중에 요나는 깨닫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요나는 두 가지를 체험하며 배웁니다.

 

첫째 가르침은, 예언자로서 선포해야 할 사명이 너무 버거워서 겁에 질려 말(선포)을 못 한다 해도 그의 존재만으로도 주님 말씀이 효력을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반벙어리가 된 요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바다도 큰 물고기도 바람도 뱃사공들도 다 덜덜 떨게 하십니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요나 1,15) 이를 본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요나 1,16)

 

요나서의 또 다른 가르침은 주 하느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니네베 사람들 곧 이방인들도 아끼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느님 보편 구원 의지의 계시입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요나 3,3)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요나 4,11) 위에서 사흘은 충만의 숫자이며 십이만은 수학적 또는 통계수치를 뛰어넘는, 주님의 보편 구원 의지를 돋보이게 하는 상징적 수요 구원의 숫자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읽을 적마다 더없이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인간애를 느낍니다. 요나를 살리고자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들이끝까지 최선을 다하니 얼마나 감동입니까?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요나 1,13) 그때 사공들의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또 어땠습니까? 생사가 오가는 위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과연 그것은 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요나 1,14)

 

 

[말씀의 우물] 성결법이란?

 

레위기 17장부터 26장까지 나오는 성결법에 대해 잠시 함께해 보고자 합니다. 성결법전으로도 일컫는 성결법은 ,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그분께서 친히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인들은 주 하느님의 거룩하심(聖性, 성성)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20,7)

성결법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성화(聖化)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성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먼저 짐승을 잡을 때도, 그것을 제물로 바칠 때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피든 피를 먹으면, 나는 그 피를 먹은 자에게 내 얼굴을 돌려, 그를 자기 백성에게서 잘라 내겠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0-11)

당시에는 피를 모든 생물체의 생명()이라고 보았습니다. 피를 먹거나 함부로 다루면 생명체의 주인이신 하느님 자리에 오르려는 시도가 되므로, 이는 곧 그분께 불경죄를 짓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부부관계가 아닌 성관계나,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거나 짐승과 교접하는 일체 행위는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하나라도 저지르는 자는 모두,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레위 18,29)

레위기는 이어서 주 하느님과 부모 공경은 물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레위 19,2-3)

아주 큰 죄에 대한 형벌 규정을 봅니다. “제 자식을 몰록에게 바치면,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2) 사제직의 성스러움, 품위 유지에 관한 규정을 봅니다. “사제들은 머리를 밀거나, 수염 끝을 깎거나,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자기들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사제는 자기 하느님에게 거룩한 사람이다.”(레위 21,5-7)

제물을 성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일러,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봉헌하는 거룩한 예물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하여라.”(레위 22,2)

안식일과 축일 규정(레위기 23장 참조), 성소(聖所)와 그 유지 지침(24)에 이어서 안식일과 희년 규정이 뒤따릅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10-11)

옛날 이스라엘의 성결법은 주님께 성스럽게 다가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 절정을 우리는 레위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속죄일(욤 키푸르)’에 거행하는 속죄 예식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 해에 한 번씩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너희의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라.”(레위 16,34)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화에도 그 기본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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