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신약 성경] 섬기러 왔다
꽤 오래된 일이라 그냥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큰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당에 신부님이 새로 오셨습니다. 축하 화분도 왔습니다. 리본이 붙어 있었습니다. “축 영전”이라고요. 너무 낯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런 화분을 보낸 사람은 뭔가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 화분을 리본도 떼지 않고 제단에 놓은 사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본당 신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어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고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가르침이 뒤따릅니다.
9장에서도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라고 가르치십니다.
10장에서 세 번째로 당신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옆자리에 앉게 해 주시기를 청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4)라고 말씀하십니다.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의 행동을 보면,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서도 그분이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알지 못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들이 매번 수난과 부활의 예고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냥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분이시니 제자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자에게서는 그가 누구의 제자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그가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지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알지 못하면서 당신에 대해 말하고 다니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에 대한 소문이 계속 퍼지기는 했습니다. 세 번에 걸친 예고에도 제자들은 아직도 그분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활에 대한 말씀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 부활 예고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도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의 제자임이 드러납니까? 수난하시는 그리스도, 그러나 수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임이 드러납니까? 우리는 부활을 믿고 죽을 수 있습니까?
[성경]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모두 유혹에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이들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내공이 있는지 냉철하게 가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에 나서기에 앞서 광야에서 이런 유혹에 직면하셨습니다. 유혹자든 악마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먼저 건드립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마태 4,6)
예수님은 세례 때 두 가지 놀라운 체험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마태 3,16 참조) 다른 하나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하는 소리를 들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만 겪으신 일인지 모두가 다 겪은 일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으로 시작하는 유혹은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각자가 품고 있는 자의식과 가치관에서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법이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일으키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14,13-21 참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빵을 나누어 먹었다는 식으로 합리적인 이해를 하려 하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펼쳐 보이셨다는 식으로 신비적인 것이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군중을 가엾이 여겨 병자들을 고쳐주셨듯이,(마태 14,14 참조)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이고픈 마음도 들으셨을 법합니다. 여기서 한 발자국 앞으로 더 가면 바로 유혹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닐까요? 자기 능력을 인정받고 싶고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면 말이죠.
사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세 가지 유혹에는 당신께서 공생활에서 거듭 맞부닥쳤던 사건이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 위치에 있던 대사제는 “내가 명령하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마태 26,63) 하고 재촉했고, 십자가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하고 모독했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실 때마다 성경 말씀 세 마디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이러저러한 유혹에 끌릴 때마다, 이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며 마음을 다스려보면 어떨까요?
[말씀의 우물] 구약의 중심 ‘신명기’
창세기에서 말라키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성경 낱권은 물론 다 중요합니다. 나름의 고유한 성격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다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신약에서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직접 다루는 네 복음서가 제일 중요하듯이, 구약 안에서도 신명기를 ‘구약성경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이집트 탈출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전해주는 역사서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역사서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성경입니다.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신명기를 잇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권과 하권, 그리고 열왕기 상권과 하권 저술에도, 신학적·역사적 관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아울러 신명기계 신학은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여러 예언자에게 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집니다.
신명기는 하느님 백성이 갖춰야 할 모습을 체계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신약에서도 자주 인용되며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형성에도 크게 공헌합니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친 악마의 유혹에(마태 4,1-11; 루카 4,1-13 참조) 세 번 모두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신명 8,3 참조)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 신명 6,16 참조)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신명 6,13 참조)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도 예수님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신명 6,5 참조)
독일 유학 시절, 예루살렘 단기 체류 유학생 선발 첫째 조건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쉐마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신앙 고백문(신명 6,4-7 참조)을 히브리어로 암송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4-6)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고 행동할 출발점이며 중심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도 신명기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모세의 예언직을 완성하는 참 예언자시라고 전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사도 3,22; 신명 18,15 참조)
바오로도 주저함 없이 신명기를 인용합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로마 10,8; 신명 30,14 참조)
신명기는 부자 되고 부자나라가 되는 비법을 전합니다. “너희가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을 것이고, 너희가 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는 하여도 그들이 너희를 다스리지는 못할 것이다.”(신명 15,6) 주님 뜻대로, 그분 말씀(규정)대로 우리가 살기만 하면!(신명 15,5 참조) 선택은 이제 우리의 몫이겠지요?
[다시 만난 신약 성경]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분이 누구시기에?”(마르 4,41) 이것이 마르코 복음서를 읽으면서 물어야 할 질문이었습니다. 사실은 1장 1절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혀 놓았지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주기 위해서 저자는 이 책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오실 분이 누구신지를 말했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회당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다른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고을들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을까요? 아닙니다. 만일 여기서 알아보았다면 이미 복음이 끝났을 것입니다. 숫자가 많아서 군대라고 불리던 마귀 떼를 몰아내시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5,17)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에도, 예수님의 가족을 알고 있던 이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합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이 마음에 걸린 듯,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고(6,14),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라고도 생각합니다(8,28). 마르코 복음 전반부에서는 이분이 과연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이 계속 나오고 있는 셈이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은 의문을 불러일으키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고 대답합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까지도 당신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분을 아직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한편으로 베드로는 분명히 정답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의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음 장면부터, 그가 예수님이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알지 못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지난주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기적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분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역시 같은 길을 가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다 알아서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문장을 쓰면서 뭔가 위로를 느낍니다. 마르코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관한 그 많은 토론을 다 거치지 않아도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분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지라도, 감히 그분을 다 안다고 나서지 말고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 질문을 던지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서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9)라고 물으십니다.
[말씀의 우물] ‘구약의 복음서’ 탈출기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토대를 마련해준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에 흔히 ‘구약의 복음서’라 부릅니다.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노아와 관계를 맺으시고, 이어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에 반해 탈출기에서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그들과 관계를 이어가십니다.
이렇게 볼 때 탈출기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태어나게 하는 책입니다. 물론 탈출기는 앞서 나오는 창세기와도, 또한 뒤따르는 레위기나 민수기와 신명기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이들 다섯 권의 책을 오경이라 부릅니다.
유다교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과 그에 얽힌 체험은 이스라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 가정에서 해마다 되풀이하여 거행하는 파스카 축제 예식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또한 이집트 탈출 사건을 파스카 전례와 연결합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사건의 완성으로 봅니다. 묵시록은 수난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집트 탈출 기념, 곧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서 제물이 되는 어린양으로 묘사합니다.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묵시 5,6)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정체성, 주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건 두 가지를 꼽자면 이집트 탈출 사건과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차츰 주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친히 주도하신 사건으로 가르치고 또 받아들이게 됩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탈출 13,14-15)
이집트 탈출 사건은 차츰 유다인들의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습니다. “너희는 주 하느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신명 26,5-9)
탈출기는 이집트에서 짓눌려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을 담은 이야기로, 탈출기에 나오는 하느님은 억압받아 고생하는 이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또한 이집트 탈출의 목표는 억압에서 풀려나 ‘맘껏 주 하느님을 예배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7,26; 8,16; 9,1; 9,13 등)
이같이 탈출기는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해주고, 훗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어줍니다.
주님 말씀을 읽을 적마다 저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
[다시 만난 신약 성경] 기적
오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마태오 복음을 읽으면서도 기적들을 잠깐 살펴보았지만, 마르코 복음의 앞부분에도 여러 기적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혹시 이 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얘기를 대략은 들어서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기적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이 이야기를 썼을까요? 어쩌면 그 기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1장에서 이미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가 나온 다음, 예수님은 기적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알리고 퍼뜨리기는 합니다. 더구나 마귀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러운 영이 하는 말이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십니다.
복음서에서 기적 이야기들을 골라가며 읽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어쩌면 이것이 마르코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적을 본 사람의 반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복음서는 전체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입니다. 복음을 다 읽으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시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라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워했던 반면에 나는 그 제자들보다 믿음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약한 제자들은 남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발견해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점에서 기적들에 대한 마땅한 응답은, “이분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2장에는 좀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실 때, 율법 학자들은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죄를 용서하시는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아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맹점이지요. 결국 관심은 이분이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으로 집중됩니다.
역설적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율법 학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욕심을 부리지도 자만하지도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복음을 읽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분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입니다. 기적을 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을 데려와 치유를 받게 하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분이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이신 예수님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발견하기에 이르도록, 기적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갖게 합니다.
[성경] 세례를 받아
마태오복음의 1-2장이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다루었다면, 3장부터는 그분의 공생활을 다룹니다.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고 전합니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당대에서는 획기적인 유다교 혁신운동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속죄 예물을 바치는 대신에 요르단강에 온몸을 푹 잠그는 예식을 통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선포했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에 어느 정도 참여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활동을 하셨다고 전합니다.(요한 3,22 참조) 그뿐인가요. 사도 베드로도 사람들 앞에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38) 하고 선포합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활동은 서로 연관성이 많았다는 것이죠. 오죽했으면, 헤로데 임금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을까요.(마태 1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과 동시대에 공생활을 시작했기에 늘 비교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비난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마태 11,18-19 참조) ‘비교’는 자칫하면 ‘오만’이나 ‘비난’으로 둔갑하기가 쉽죠. 사목자나 단체장이 바뀌었을 때 전임자는 이렇게 했는데 후임자는 왜 이렇게 하는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마음의 평화는 사라지고 갈등과 험담이 곧잘 튀어나오지 않던가요?
그럴 때 상대방의 위치와 역할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을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하고 추켜세우십니다. 상대방의 권위를 높여준다고 해서 내 권위가 손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당신께 세례 주기를 주저하자 예수님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응답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의로움을 추구하는 생활 태도! 바로 우리 신앙인이 보여야 할 자세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