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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말씀의 우물] 속죄에 대하여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8|조회수37 목록 댓글 0

[말씀의 우물] 속죄에 대하여

- 폴란드 유다인 화가 마우리치 고틀리프의 <욤 키푸르에 회당에 모여 기도하는 유다인들>. 1878년 작품으로 고틀리프가 어린 시절 참례했던 욤 키푸르 예배 모습을 그렸다. 토라 두루마리 덮개에는 의로운 자 고() 마우리치 고틀리프를 추모한다는 다소 음울한 문구가 수 놓여 있는데, 인간의 죄의식과 정화를 향한 열망을 품고 있다.

레위기의 핵심 내용은 16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직 개별 고해성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속죄일(贖罪日, 히브리어 욤 키푸르), 속죄 예식 이야기입니다. 알게 모르게 저질러진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부정은 물론, 백성 전체의 부정을 씻어주는 정화 예식의 날이 거행됩니다. 이 속죄일 대정화 전례는 에즈라의 개혁 이후(기원전 40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해마다 한 번씩 욤 키푸르를 지내게 되는데 차츰 그날을 더욱 중요한 날로 여기게 되어 욤 키푸르 대신에 그냥 ()’이라고만 부르게 됩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산모의 정결례, 악성 피부병과 환자의 정결례 등 정결과 부정에 대한 긴 가르침(레위기 11~16장 참조) 끝에 가서 이스라엘의 대축일, 속죄의 날 예식이 나오며, 이 속죄일은 이스라엘 해방의 날이자 대정화의 날, 곧 대축일로 자리 잡습니다. 부정한 이가 정화되어 성소에, 나아가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부정에서 풀려나, 다시금 영원하신 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속죄의 전례는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대축제로 굳건히 자리 잡습니다.

특히 속죄 염소에 관한 전례 의식은 오늘날 우리 눈에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론은 그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는데, 제비 하나는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제비는 아자젤(불모지를 떠도는 귀신)을 위한 것이다.”(레위 16,8) 주님을 위한 제비(염소)는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데 쓰입니다.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서, 황소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속죄판 위와 속죄판 앞에 뿌린다.”(레위 16,15)

다음은 불모지를 휘젓고 다니는 귀신 아자젤을 위한 예식의 주요 장면입니다. “아론은 살려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 그러면 그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불모지로 날라 간다.”(레위 16,21-22)

사실 이와 비슷한 의식은 이스라엘 외에 다른 문화권에서도 나타납니다. 흔히 죄와 부정을 어떤 생명체나 물건 위에 전가하거나 아니면 그 생명체나 물건에 뒤집어씌워서 아예 없애버리는 방식입니다. 이는 우리 모든 인간 내면에 들어있는 죄의식에서 생겨난 정화 예식, 또는 속죄 예식으로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 내면 한쪽에 서려 있는 죄의식 또는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늘 치유와 화해를 목말라합니다.

속죄일 대정화 전례의 주요 예식은 산 채로 대기시켜 둔 염소에 두 손을 얹음으로써 백성의 죄를 그 희생 염소에게 온전히 전이시켜, 이 희생 염소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멀리 광야로 가져다 버리도록 하는 예식입니다

바오로의 의화론(로마 3,21-26 참조) 안에 레위기 16장의 속죄 예식이 깊이 뿌리 박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로마 3,25)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세례자

 

마르코 복음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습니다. 그러니 충실하게 그 줄거리를 따라가 봅시다. 마태오 복음에서 주로 보았던 예수님의 설교 말씀들은 이 마르코 복음의 줄거리 사이사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마르코 복음을 시작하면서, 이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읽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전해 주려는 것이지요. 그런 복음서에 시작하자마자 예수님이 아닌 세례자 요한이 등장하니, 그 인물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보아야겠습니다. 이번에 복음을 읽으면서 저에게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라는 구절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아니,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죄의 용서는 분명 대단히 강한 의미를 갖습니다. 2장에서 사람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 중에서도 죄의 용서는 다른 누가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면 이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 1장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마르코 복음 13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의 구절이나 12절에 인용된 말라키서의 구절은 메시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특히 말라키서의 말씀에 따르면, 마지막 때에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는 먼저 사자(使者)’가 와야 합니다. 말라키서 31절에서는 나의 사자를 보내니라고 하고 323절에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라고 하기 때문에, 나중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르 9,11)라고 묻습니다. 왜 이 질문을 할까요? 예수님이 메시아시라면, 그보다 먼저 엘리야가 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예수님은 요한이 그 엘리야였다고 암시하십니다. 이 마르코 복음 9장의 맥락에서 요한이 그 엘리야였다는 것은 요한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기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해 줍니다. 마르코 복음 1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요한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가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사람이었음을 밝힘으로써 그 다음에 오신 예수님이 메시아시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장면도 매우 짧게 소개되는데(마르 1,9-11), 여기에서의 핵심은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결국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7).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고 요한의 제자들도 많이 있었던 상황에서 마르코 복음은, 그가 뒤에오실 분을 예고하기 위해 왔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예수님께로 눈길을 집중시킵니다.

 

 

 

 

 

 

[성경 다시 보기] 마태오 5,3그 영()”()”

지난번에 살펴본 것들을 다시 한번 더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Spirit, πνευμα)”에 정관사 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번역상으로 알아듣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라는 글자에 정관사 가 없으면, 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알아듣고 그렇게 번역들을 하고 있으며, 정관사 를 붙여서 번역하면, “그 영은 하느님의 영, 즉 성령으로나, 하느님으로 알아듣게 되는데, 그 정관사를 넣어서 번역하고 있는 것은 독어판 공동번역(1980)과 독어판 예루살렘 바이블(1975)입니다. 우리말 번역본들은 가톨릭 것이나 개신교 것, 모두가 정관사 가 없이 번역하여, 을 사람들의 마음이나 심정으로 알아듣고 있습니다.

희랍어 본문에 충실하여 그 영이라고 번역해야 하며, 그것은 즉 하느님의 영이고, 성령이며 하느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τω πνευματι)”이 문법적으로 단수, 여격이니까, “그 영에또는 그 영 앞에라고 번역하여, “하느님께 가난한 사람들혹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알아듣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지 않고 부자라고 자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가난합니다. 가난하면 누구나 그 가난을 벗어나려고 힘쓰며, 남의 말에 자연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또한 자연스럽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낮추는 것이란 무엇을 못하거나, 안 한다고 하는 사양지심이 아니라, 말씀을 다소곳이 듣는 순종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순종하다라는 말을 뜻하는 희랍어 단어는 υπακουω(휘프아쿠오)아래에서 듣는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서에서 모범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성모 마리아, 요셉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당신은 몸 가져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했을 때, 마리아는 처음엔 강력히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 하는 일이라고 하니, “이 몸은 주님의 여종이니, 말씀하신 대로 하십시오하며 순종합니다(루카 1,26-38 참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몰래 파혼하려 했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알려주자, “사나이의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마태 1,18-25 참조). 예수님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르 14,32-42 참조). 하셨으며, 끝내는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11 참조).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장 어려운 덕목이 순종과 용서라고 합니다. 그것을 또한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부활하시어 당신이 가르치신 주님의 기도의 용서를 또한 실천하신 분이십니다(요한 20,19-23 참조).

그분은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가장 많은 군중이 모였을 때, 산으로 오르시어 자리에 앉으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시작한 것이 그 유명한 마태오 5-7장의 산상설교입니다. 그 서두의 말씀으로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들”, “가난을 면하고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다소곳이 듣는데 준비된 사람들”, 그래서 겸손한 사람들”, “이들이 행복하다라는 선언은 참으로 적재적소에 딱 맞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말씀을 듣는데, 말씀에 순종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일 것입니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티토서

 

티토서는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저자가 작성하였으며, 신생 교회 공동체인 크레타 교회 공동체와 티토로 대변되는 크레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고 또 그릇된 가르침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티토서는 같은 사목 서간인 티모테오 1, 티모테오 2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운영, 지도자의 자질 및 교회 조직 체계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서간과 비교했을 때 내용이 짧으며,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두 서간보다 먼저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티모테오 서간의 수신처인 에페소 교회와 비교했을 때 티토서의 수신처인 크레타 교회 공동체가 아직 덜 발전된 신생교회 공동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1-4절은 티토서의 머리말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티토를 향해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라고 이야기하면서 티토를 향한 친분과 더불어 티토서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하듯이 사랑의 마음에서 전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15-9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신생 교회 공동체인 크레타를 이끌어갈 지도자에 대한 자격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먼저 원로와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오늘날 사제 직분에 해당하는 원로에 대해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며, 아내와 자녀 등 가족에 충실하며 품행에 있어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주교 직분에 해당하는 감독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겸손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로우며 전해받은 말씀을 굳게 지키면서 타인을 격려하고 잘못된 사람을 올바르게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초대 교회의 교계 제도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면, 원로는 공동체 안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담당하였습니다. 각 교회는 원로들을 임명하였으며, 그들은 사도들과 협력하여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었고 때로는 받은 성령의 은총에 따라 안수와 예언의 직무를 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두세 사람의 증언이 없으면 이들에 대한 고발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할 만큼 교회의 지도자인 원로들을 존중했습니다.

한편 감독은 원로와 비슷한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맡은 임무나 기능에 따라 구분되었는데 원로는 신분을 나타내고 감독은 직책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원로 신분으로 감독의 직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과 그들의 협력자들은 신앙이 깊은 신자들을 원로로 뽑았으며, 그들 중 학덕이 뛰어난 사람에게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직을 맡겼습니다.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 전통에 따라 원로들이 집단으로 교회를 지도했으며,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설립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로마 제도의 영향으로 감독들이 단일 지도 체제로 교회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훗날 1세기 말경에 이르러서는 사도들과 사도들의 직제자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원로들의 단장 격인 감독의 권위가 커지게 되었고 이들이 사도들의 직무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110-16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크레타 교회 신자들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고발하고 이를 경고합니다. 사람들은 크레타에 사는 사람들을 두고서 거짓말쟁이, 고약한 짐승, 게으른 먹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크레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은 이러한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부정한 이익을 취하지 않으며 겉과 속이 다른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경계하고 그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21-311절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전한 삶과 믿음에 관한 여러 가지 지침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이, 성별, 신분 등에 따른 올바른 삶의 태도를 이야기 합니다. 또한 타인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굳게 믿고 이에 따라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친절하고 온유하게 대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가정 규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교회 공동체가 작은 가정들이 모여서 생겨난 조직이며, 교회를 하느님의 가정으로 보고 있는 사목 서간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가정의 구성원들이 하느님 안에서 바른 모습으로 자라나면 그들이 모여서 이룬 개별 교회도 그리고 더 나아가 보편 교회도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크레타 교회에 바오로 사도가 요구하는 가정 규범은 당시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가 건전한 시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하던 이상적인 덕행과 일치합니다. 또한 211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의 은총과 함께 최종적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기다리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더해집니다.

마지막으로 312-15절은 맺음말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니코폴리스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라고 당부한 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안부를 전하며 편지를 마칩니다.

 

 

 

 

[말씀의 우물] 연옥은 무엇입니까?

연옥(Purgatorium)’은 본디 라틴어 ‘Purgatio(정화)’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연옥 본연의 의미는 정화하는 곳 또는 정화 과정을 뜻합니다. 갇혀 있는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지난날 나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되돌아보며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마음 아파하며, 주님께 또 이웃에게 저지른 거짓, 교만, 배반 등 부끄러움을 뉘우치고 속죄하는 정화 과정으로 보면 연옥에 대한 이해가 보다 수월할 것입니다.

독일 신학자이자 사제인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연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만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일생 사랑하시던 그 선하심과 사랑의 척도를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 눈이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선, 무정함, 냉혹함, 이기주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평생 쌓아 올린 모든 자기기만과 환상이 일순간에 붕괴할 것이다. 우리 자신을 감싸고 있던 가면들이 벗겨질 것이다. 이는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우리 앞에서 찬란히 빛나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본디 존재했어야 할 참모습과 실제로 존재했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게 될 것이다. 심판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연옥이다.”(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44~45, 이석재·신교선 신부 공역)

그때 비로소 나는 삐뚤어지고 일그러진 생전의 내 모습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며 우리가 일컫는 연옥, 곧 정화 과정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 나그네 살이 하는 동안, 욕심과 위선 등으로 일그러진 실제의 우리 모습과 동시에, 한없이 크신 주님 자비와 선하심과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로핑크는 말합니다.

그의 말대로, 각자의 죽음에서 나는 나 홀로가 아니라 나와 함께했던 모든 이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봅니다. 세상에서 내가 함께했던 부모님과 형제자매, 배우자와 가족, 친척과 친구, 내가 돌보던 이들, 나를 위해주던 분들 모두가 마치 거미줄처럼 엮여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을 통하여 우리 영혼만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점을 사도 바오로가 분명히 밝혀줍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2)

로핑크는 이어갑니다. “죽음에서 육신과 영혼과 함께한 인간 전체가, 곧 자신의 온 생애와 더불어 자신의 세계와 함께 자기 생애의 고유한 자기 업적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간다.”(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54)

이처럼 우리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천상 영혼과 천상 육신으로 부활하여 천상에 걸맞은 지복직관의 세계에서 주님을 뵙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주님 품 안에서 우리보다 앞서간 모든 선조도 만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도움이 되어준 모든 이들,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게(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주었던 분들, 이웃과 이웃이 되어준 나라와 민족까지도 만나게 되어 다 함께 천상 축제에 참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순간포착! 성경에 이런 일이] 니네베의 임금(요나 3,9)

 

하느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듣고도 그 길로 도망갔다가 물고기 배 속에 사흘이나 갇혀 있어야 했던 요나 예언자! 참회의 기도도 잠시, 다시 받은 소명이 영 내키지 않는 태도를 숨기지 않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데만 사흘이 걸리는 성읍인데 하루길만 걷고서는 회개에 대한 권고도 없이 40일 뒤 멸망할 것이라고 무성의하고 건조하게 외쳤기 때문입니다(요나 3,3-4 참조). 그도 그럴 것이 니네베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당시의 패권국가 아시리아의 수도였기에 민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는 것이 예언자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번영과 영적 타락으로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요나 4,11)” 있는 도시를 어떤 기회도 주지 않고 멸망시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강대국의 심장부에서 피지배국의 이방인이, 그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외치는 멸망의 선포는 사실 설득력이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니네베의 모든 사람들은 즉시 그 외침을 여겨듣고 반응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니네베 임금의 태도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공포를 조장하는 요나 예언자를 붙잡아 목을 날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는 백성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더 앞장서서,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9) 이러한 모습은 멸망을 원하는 예언자와 회개를 원하는 하느님 사이의 대결에서 하느님이 완벽하게 승리하셨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니네베 임금은 참된 통치자란 어떤 존재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부국강병도 좋지만 그는 무엇보다 나라 한 구석에서 울려 퍼지는 양심을 일깨우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인 민심을 민감하게 읽고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보다도 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민주국가의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려던 죄로 법의 심판을 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한때 이 나라의 통치자였던 사람과 그 부역자들과는 참으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한편으로, 우리 각자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한 나라의 임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작은 소리로 울리는 양심과 신앙의 경고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얼마나 진실된 회개를 이루며 사는지 니네베 임금의 이야기가 돌이켜 보게 합니다. 그가 보여준 옳고 그름에 관한 예민한 감각과 죄의 결과에 대한 위기의식, 그리고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임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회개의 정신이 중요한 이 사순시기에 요나서의 니네베 임금과 그 백성들을 좋은 표양으로 삼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오랜만입니다. 마태오 복음 마지막을 건너뛰기는 했지만, 새 달을 맞이해서 마르코 복음으로 가려고 합니다. 사실 그 건너뛴부분이 문제가 되기는 합니다. 흔히 마태오 복음의 특징으로 다섯 개의 긴 설교를 말하고 우리도 그 설교들을 중심으로 마태오 복음을 읽었는데, 그러다 보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부분을 건너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건너뛰게 되는 것이지요. 그 부분은 마르코 복음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마태오 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라는 구절로 시작했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동방 박사들과 첫 제자들은 받아들였고 헤로데와 바리사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시면서 끝났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전파해야 하는 때가 된 것이지요.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각 복음서의 첫 구절에서, 그 복음의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약을 다시 읽으면서 늘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지요. 이 책을 왜 썼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르코 복음에서도, 복음서를 쓴 목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요. 마르코 복음을 쓴 저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려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론의 역사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이 문제가 되는 시기가 있고 신성이 더 문제가 되는 시기가 있지요. ‘정말 사람이셨는가? 겉모양으로만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 아닌가?’

예수님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 예를 들면 열두 제자 같은 이들에게 예수님이 사람이시라는 것은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함께 걸어 다니고 함께 먹고 고생도 함께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사형에 처했습니까? 자기들이 눈 앞에 보고 있는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그들의 믿음은 이분이 하느님이심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쓴 사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라는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은 복음서이지요. 핵심을 간략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이 복음서에서 주로 보려고 합니다.) 전체 16장인 이 복음서의 한가운데에서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고 고백할 것이고, 나중에는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쓴 사람이 바랐던 목표는 아마도, 이 복음을 읽는 우리가 , 이분은 정말 하느님의 아드님이셨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뒤집어서 질문을 해 보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할 수 있을까요? 복음을 읽으면서 찾아 봅시다.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바르티매오 (1)

 

지금부터 우리가 만나 볼 인물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이 이름은 마르코 복음서에만 나오지만, 병행구는 마태오 복음서(20,29-34)와 루카 복음서(18,35-43)에도 들어있습니다.

기원후 30년의 파스카가 머지않은 어느 봄날,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고 계십니다. 이 마지막 여정 중에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하룻낮 거리에 있는 도시 예리코에 이르셨을 때, 예수님은 한 눈먼 거지를 만나시게 됩니다.

그런데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마르코 복음서(10,51)의 말씀을 보면, 이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보지 못한 것보다 멀쩡하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고통은 더 컸을 것입니다.

이 가련한 사람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 하지만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이니, 이것은 사실 이름이라기보다는 그가 티매오라는 사람의 아들임을 알려줄 뿐입니다. 우리는 그의 진짜 이름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에도 바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의 경우는 다릅니다. 시몬 바르요나는 그가 요나라는 사람의 아들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그의 이름이 시몬임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네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러 소경과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치유한 많은 이들 가운데 이 사람만이 호칭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바르티매오가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예리코라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예리코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진입할 때 첫 번째로 정복한 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은 놀랍게도 군사들의 칼과 활이 아니라 사제들의 뿔 나팔 소리와 백성들의 함성으로 정복되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소경 바르티매오 또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람들이 그를 말리려 해 보지만, 그의 열정적인 외침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리코 성벽이 무너질 때까지 뿔 나팔과 함성을 질러댔듯이 바르티매오도 예수님을 둘러싼 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주님께서 그를 보아주실 때까지 고함을 질러댑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202631(가해) 사순 제2주일 가톨릭안동 3]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바르티매오 (2)

 

그동안 바르티매오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구걸을 위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수없이 간절하게 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외침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위 문장의 단어 나열 순서를 보면 다윗의 자손이 가장 강조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나자렛 출신의 예수라 하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바르티매오는 다윗의 자손이라 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예수께 관하여 들은 말씀만으로 그분의 정체를 알아차립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로마서의 말씀(로마 10,17)은 참말입니다. 예수님을 뵙지 않았지만 믿고 있는 우리 모두 또한 그 증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기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고귀한 혈통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기 위해 이 호칭으로 부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혹은 유다 전승에 의하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에 구마 능력과 더불어 치유의 능력도 포함되었다고 하는데, 그 능력이 후손들에게도 유전되었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불렀을 리도 없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예수께서 부르셨을 때 바르티매오가 겉옷을 벗어 던지고 그분께로 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번역에 기초하여 바르티매오의 행위가 죄를 벗어버림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 겉옷을 치워버리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바르티매오는 그의 앞에 깔려 구걸통의 역할을 했던 옷을 걷어차 버리고 예수께 다가갔다는 말입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구걸통을 버린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아포발로는 신약성경에서 딱 한 번 더 사용되는데, 히브 10,35에서 이 단어는 완전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전적인 투신을 위한 완전한 포기는 부르심 받은 제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렸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렸습니다. 이처럼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예수님의 제자됨을 포기하고 슬퍼하며 떠난 젊은 부자 청년과 달리 바르티매오 또한 전 재산을 포기하고 예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202645(가해) 주님 부활 대축일 가톨릭안동 3]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바르티매오 (3)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도 라뿌니로 변합니다. 이는 나의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우리말 성경에는 스승님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신약성경에 딱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요한 20,16).

바르티매오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히 눈의 치유를 원했을까요? 눈이 보이게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막상 바르티매오가 눈을 떴을 때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있던 그가 이제 길 위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께서 치유한 다른 많은 사람은 저마다 제 길을 갔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만난 예리코는 더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아니라 십자가 길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니 결국 바르티매오가 선택한 것은 비록 그가 예상치 못했다 하더라도 제자로서 수난의 길을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난 예고 뒤에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를 단순히 여러 치유 기적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전형적인 치유 이야기의 구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소명 사화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르티매오를 부르시자, 그는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것도 이제 환호하는 군중에 둘러싸인 스승과 함께하는 찬란한 영광의 시간이 끝나고 하룻밤 새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 번이나 부정해야 하는 잔인한 십자가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때 말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아쉽게도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뒤의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상치 못한 그 모진 시간을 제자로서 끝까지 잘 견디어 낸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가 그의 이름을 복음서 안에 기록해 잊히지 않게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 말씀에서는 놀라운 치유 기적보다 바르티매오의 제자 됨됨이가 더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르코 복음서가 바르티매오의 이름을 소개하는 부분은 독특합니다. 그리스어 원문을 읽으면, 다른 모든 곳에서는 아들의 이름뒤에 누구의 아들이라는 설명이 덧붙는데(우리말 성경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10,46에서만 티매오의 아들이 바르티매오를 앞서고 있습니다. ‘티매오의 아들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앞도 볼 수 없었고 비천한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보고도 믿지 못할 때 보지 않고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으니, 그의 이름 바르티매오가 의미하는 바처럼 영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성경] 그분의 별을 보고

 

마태오복음 1장이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심을 밝힌다면, 2장은 당대에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있는가 하면,(마태 2,1-2 참조)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를 알면서도 경배하러 가지 않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도 있었습니다.(마태 2,4-6 참조) 나아가 헤로데 임금은 경배하러 가겠다고 거짓말하면서 사람들을 보내어 학살 사건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마태 2,16 참조) 우리는 이중 어느 무리에 가까울까요?

동방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 이끈 것은 이었습니다. 그들은 천문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통찰하던 점성술사 또는 천문학자들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는 가운데 아기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예견할 수 있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들의 전문 지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간파했습니다. 그뿐인가요. 헤로데는 임금이라는 권력으로 동방 박사들을 불러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마태 2,7 참조)

누구나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모르는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죠. 동방 박사들은 탄생 시기는 예견했지만 어느 장소인지 몰라서 예루살렘에 와서 수소문했습니다.(마태 2,1-2 참조) 헤로데 임금도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시켜 탄생 장소는 알아차렸지만, 그 시기는 몰라서 동방 박사들을 불러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러 가는 길은 이처럼 혼자만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것이죠.그런데 동방 박사들만이 그 길을 끝까지 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가장 우선적인 동력은 일상 가운데서 접한 남다른 조짐이었습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 2,9) 그들은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그 별을 꾸준히추구했기에 알찬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동력은 열려 있는 태도였습니다. 낯선 지역인 예루살렘에 와서는 망설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장소를 알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묻고 또 물었을 겁니다.

반면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성경 지식으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았지만, 실제로 경배하러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 복음서 후반부에서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3)는 꾸지람을 받았는지도 모르죠.

우리는 예수님을 경배하러 떠나온 여행길에서 어디쯤 와 있을까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동방 박사들처럼 사람들에게 거듭해서 물어보기는 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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