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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51) 평신도와 성직자의 관계, 「교회헌장」 제37항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8|조회수33 목록 댓글 0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51) 평신도와 성직자의 관계, 교회헌장37

평신도와 성직자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교회헌장37항은 서로의 시각에서 그 관계를 성찰합니다. 첫 문장에서 공의회는, 1917년 법전을 참조하여, 평신도들이 교회의 영적 보화인 하느님 말씀과 성사 배령을 목자들에게서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목자들이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과 동시에, 평신도들도 그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 백성의 형제들 사이에 갖는 자유와 신뢰로 필요한 것과 바라는 것을 목자들에게 밝혀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특히 자신의 능력에 따라 교회에 유익한 것에 대해서 목자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한과 의무를 갖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기구들을 통하여 평신도들은 솔직하고 지혜롭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야 합니다. 공의회 후에 이런 취지에서 교구와 본당에 사목평의회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최근에 강조되는 시노드 교회의 정신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다만 대립의 관계가 아닌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이러한 관계 안에서 요청되는 평신도들의 의무에 관해 말합니다. 먼저 평신도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거룩한 목자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스승과 지도자로 교회 안에서 결정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또한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봉사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서 공의회는 이에 대한 목자들의 의무를 언급합니다. 목자들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이 갖는 품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그것이 증진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공의회의 이 언급은 제도적 규정보다는 윤리적 책무의 성격을 지닙니다. 따라서 목자들은 다음과 같은 권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먼저 평신도들의 현명한 의견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갖고 그들에게 교회의 봉사 직무를 맡깁니다. 또한 행동에 자유를 주고, 자발적으로 활동하도록 격려하며, 그들의 요청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평신도들과 성직자들의 권리 및 의무와 관련해서, 공의회는 무엇보다 서로가 친숙하게 교류할 때 교회에 많은 유익함이 주어질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공의회가 표방하는 정신에 평신도와 목자들이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럴 때 평신도들은 책임감과 열성으로 목자들의 활동에 결합할 수 있고, 목자들 또한 평신도의 경험에서 도움을 받아 영적이고 현세적인 모든 일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며,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세상에 대한 자기 사명을 완수하게 됩니다.

 

 

[교회의 언어] Buen camino(부엔 까미노, 스페인어) : 좋은 여정 되기를

부엔(좋은) 까미노()는 직역하면 좋은 길이라는 뜻으로,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좋은 순례길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서로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다른 이들이 각자의 동기를 가지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찾아서, 어떤 이들은 삶의 이유를 찾아서 순례길에 나섭니다. 그렇게 다양한 이들이 순례길에서 만나 함께 나누는 인사가 바로 부엔 까미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일종의 길을 가는 것으로 빗대어 표현하거나 이해합니다. 우리 각자가 때로는 다른 길을 가기도 하고, 때로는 길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상의 삶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하느님께 향한 길을 가는 순례자라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었고, 결국 식탁 자리에서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기억하며, 기쁘고 힘차게 인생길을 걸어가는 부활 시기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15) 유아세례만으로는 성체를 모실 수 없다?

유아세례 받았어도 정화와 조명의 시간 필요

 

모든 신자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에 일치해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삶의 정점이 성찬례, 곧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주로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야에 세례성사를 거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린이의 경우 세례를 받았더라도 10세 무렵 첫영성체를 하기 전까지는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 능력대로 이해하고 주의 몸을 신앙과 신심으로 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인식과 정성된 준비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교회법9131)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아세례를 받고 주일학교를 꾸준히 다니면 자연스럽게 첫영성체도 받을 수 있는데요.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주일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성인이 된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이 다시 성당에 오셔서 미사에 참례하셨다면 성체를 모실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별도의 준비와 예식 없이는 성체를 모실 수 없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는데,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유아세례는 온전한 세례가 아니라는 걸까요?

당연하게도 유아세례는 온전한 세례입니다.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요. 죽을 위험에 처한 분이 대세(代洗)를 받은 후 회복돼 신앙생활을 하게 됐거나, 다른 그리스도교에서 적법한 방식으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교회로 온 경우입니다. 모두 온전한 세례지만, 곧바로 성체를 모실 수는 없습니다.

이분들은 예비 신자들처럼 일정 기간 교리 교육을 받으며, 신자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고, 전례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첫 고해성사를 하고, 대세를 받은 분의 경우 보충 예식(보례), 다른 그리스도교의 경우 일치 예식을 하면 성체를 모실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유아 세례만 받은 어른들도 이 기간이 필요한데요. 교회는 이를 정화와 조명의 기간이라고 말합니다.(어른 입교 예식21)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회개하는 정화와 신앙의 빛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간이 되는 조명을 위해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성체를 모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단 첫영성체에만 정화와 조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라는 이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 이 위대하고도 거룩한 순간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1385) 바오로 사도도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된다면서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1코린 27-28 참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 앞에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한 번쯤 돌아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50)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평신도, 교회헌장36

 

교회헌장36항은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사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과 관련하여 필리 2,8-91코린 15,27-28의 말씀을 참조하면서, 그분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고 그로 인해 부활하고 승천하시어 그분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하고, 그분은 자신과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께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권한으로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왕다운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왕다운 자유 안에서 극기와 거룩한 생활을 통해 죄를 극복하고 물리칩니다. 나아가 제자들은 이 권한으로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형제들을 겸손과 인내로 그리스도께 인도합니다. 그분께는 섬기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나라가 평신도들을 통해서 확장되기를 바라십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 거룩함과 은총,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고, 피조물이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는 나라입니다. 이제 그 나라가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고, 세속 안에서 서로 거룩한 삶을 살아 세상이 그리스도의 뜻에 맞게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중요하기에, 그들은 자신의 역량과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한 활동으로,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창조된 재화를 계발하고 적절하게 분배하며,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자유 안에서 세계 진보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평신도들을 통하여 세상을 당신 구원의 빛으로 비추십니다.

또한 평신도들은 풍습을 죄악으로 몰아가는 세상의 제도들을 정의의 규범에 부합하도록 바로잡아, 인간의 활동과 문화에 도덕 가치가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세상이 마련되고 교회의 문이 활짝 열려서, 세상에 평화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끝으로 공의회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지니는 권리와 의무를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니는 권리 및 의무와 구별하도록 권고하고,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결합하여 현세의 모든 일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현세의 일에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과 조화가 신자들의 행동에 명백히 드러나야만, 교회의 사명이 현대의 구체적인 상황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세상 통치에 고유한 원리가 있음이 인정되듯이, 사회 건설에 종교가 배제되거나 탄압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언어] Sequentia(세퀜시아, 라틴어) : 부속가(屬附歌)

세퀜시아는 라틴어 동사 sequere(세퀘레: 따라오다)에서 유래한 말로 따름’, ‘계속함이라는 뜻입니다. 미사 중 알렐루야(alleluia)의 딸림(부속)노래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9세기 프랑스 지역 수도회에서는 알렐루야의 마지막 음절인 ’(ia: 하느님)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긴 선율을 이어붙여 노래했습니다. 이후 대중가요의 선율을 차용하고, 다양한 가사(prosa: 프로사)가 덧붙여지면서 11세기까지 5,000여 개의 부속가가 만들어집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는 무질서하게 늘어난 부속가를 정리하여 4개만(부활, 성령강림, 성체성혈, 위령) 허용했고, 18세기에 고통의 성모 기념일(915)의 부속가가 추가됩니다.

현재 부속가는 더 이상 알렐루야를 늘린 노래가 아니며 성대한 대축일의 주제를 담고 있는 찬미가로 2독서가 끝난 뒤에 노래합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성령 강림 대축일의 부속가는 반드시 노래해야 합니다. 반면 오늘(부활 제2주일)까지 이어지는 부활팔일축제성체 성혈 대축일’, ‘고통의 성모 기념일부속가는 선택입니다. 위령 부속가는 미사 때 부르지 않으며 시간전례(성무일도)의 찬미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 왜 성경에 공룡이 나오지 않는지

 

본당에서 소임을 하던 중, 한 초등학생 친구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신부님, 왜 성경에 공룡이 나오지 않아요?” 사랑스럽고 귀여운 질문이었지만 이를 어떻게 쉽게 설명하면 좋을까 망설였던 기억이 납니다. 이 질문 하나에는 생각해 볼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연과학은 진화론을 통해 생명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지만,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동물들의 경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전제로 서술됩니다. 이에 근본주의 개신교 교파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진화론 자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체를 즉각적으로 창조하셨으므로 애초에 진화 과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교회는 신앙과 과학 사이에 근본적인 대립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진화론 자체를 거부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생명이 발전해 왔음을 강조합니다. , 진화는 각 존재에 대한 하느님의 창조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흔히 우리는 유신 진화론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교회는 인간의 영혼은 물질적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도대체 창세기는 왜 이러한 진화 과정이나 공룡과 같은 고대 생물을 묘사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성경이 과학 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우주의 물리적 생성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창조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6일간의 창조는 하느님의 시간표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질서를 표현합니다. 인간이 흙에서 창조되었다는 묘사는 생물학적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피조물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숨을 받은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그리하여 비오 12세 교황님은 회칙 인류(Humani Generis)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의 초반부 111장은, 현대의 역사 서술 방식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진리를 전달하는 고유한 방식을 가진다.” 결국 과학은 생명이 어떻게발전했는가에 대한 자연적 차원을 논의하는 한편, 신학은 인간이 존재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극적 차원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자연과학과 신학의 두 방식은 다른 차원에서 동일한 진리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과학 기술 연구를 높이 평가합니다. 실제로 과학 연구는 가장 위대한 것과 가장 미미한 것을 탐구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부분에 반영되어 있는 하느님의 영광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리(신앙)는 진리(자연과학)와 모순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신약 외경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교회는 325일을 대축일로 지내면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주님잉태 소식을 전한 일을 기념합니다. 흔히 성모 영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루카 1,26-38에 전해집니다. 이 대목 첫머리에서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 마을의 마리아에게 보내셨다고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하고 인사하자 마리아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천사는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묻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하고 알려줍니다.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설명입니다.

이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입니다. 이 대화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선 마리아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확연히 드러냅니다. 숙고하고 질문하고(반문이나 의심이 아니라 순수한 물음입니다) “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응답에 앞선 마리아의 숙고와 질문은 그 응답이 로봇이 할 법한 기계적·수동적 응답이 아니라 자신의 온전한 의지와 존재를 다 해서 드리는 적극적·능동적 응답임을 암시합니다. 이 응답은 주님 탄생이라는 전대미문의 구원 사건이 실현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응답은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줄곧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그 울림은 다양한 교회 문헌과 성화 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신약 외경 야고보 원복음과 차명-마태오 복음입니다.

야고보 원복음(Protoevangelium Jacobi)

150년경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성모 영보를 두 단계로 소개합니다. 마리아는 우물과 집에서 잉태 소식을 접하는데, 처음에는 우물에서 목소리가, 두 번째는 집에서 천사가 알려줍니다. 이 책에서 마리아는 세 살 때 하느님께 봉헌되어 성전에서 자라다가 12살 때부터 요셉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셉이 동정녀 마리아를 보호할 책임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15살 즈음에 예루살렘 대사제의 명으로 집에서 성전 휘장을 짜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가 물을 길으러 우물에 갔을 때 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너는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다.” 마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자 두려워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자주 실로 휘장을 짜기 시작합니다.

이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잉태 소식을 알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만인의 주님 눈에 들었다. 너는 그분의 말씀으로 잉태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마리아는 마음속으로 내가 살아계신 주 하느님에 의해 잉태하여 다른 모든 여인과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읽은 천사가 답합니다. “그렇지 않다, 마리아야. 하느님의 힘이 너를 뒤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너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자 마리아가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여종이 그분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뒤 마리아는 휘장을 완성하여 성전의 대사제에게 가져갑니다. 대사제는 마리아를 축복하며 마리아야, 주 하느님께서 네 이름을 크게 하셨으니 너는 이 땅의 모든 세대들 가운데서 가장 복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모 영보가 마무리됩니다(야고보 원복음 11, 본문은 송혜경, 신약 외경 1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 원복음에서도 마리아의 적극적인 응답은 예수님 탄생을 실현하는 초석이 됩니다. 루카 복음서와의 차이는 마리아의 잉태를 말씀으로 인한 잉태로 소개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마음속20260220134316_1202471882.jpg 생각을 전하여 그녀의 질문이 의심의 표출이 아니라 잉태와 출산 방식에 대한 순수한 물음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사건의 배경이 마리아가 물을 길으러 우물에 갔을 때와 성전 휘장을 짜고 있었을 때라고 하는 점도 중요합니다. ‘생명의 상징인 물을 길으러 나갔다는 것은 생명의 오심을, 성전 휘장을 짜고 있었다는 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의 몸을 위한 자리, 마리아가 자기도 모르게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주님이 오실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는 의미이지요. 이는 차명-마태오 복음서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차명-마태오 복음서 (Evangelium Pseudo-Matthaei)

6~7세기경에 만들어진 차명-마태오 복음서는 성모 영보를 사흘간의 사건으로 묘사합니다(8-9). 첫째 날, 마리아는 자주 실로 성전 휘장을 짜는 임무를 맡고(8), 둘째 날 우물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너는 복되다, 마리아야. 네가 네 마음 안에 하느님을 위한 처소(Habitaculum Deo)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보라.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네 안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너를 통하여 온 세상을 비출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사흗날, 마리아가 휘장을 짜고 있을 때 천사가 다시 나타나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 눈에 들었다. 보라, 너는 잉태하여 임금을 낳을 터인데 그분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다스리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차명-마태오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자기 마음안에 하느님의 처소를 미리 준비해 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마리아가 마음안에 빛이 머물 하느님의 처소를 마련해 두었기에 빛이신 그분께서 내려와 머무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빛이 온 세상을 비추게 된 것이 마리아가 내어 준 마음덕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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