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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6) 봉사하지 않고 지배하는 돈은 안 된다 하느님 앞에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8|조회수93 목록 댓글 0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6) 봉사하지 않고 지배하는 돈은 안 된다

하느님 앞에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이 있다. 여러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행동 양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 비굴한 행동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의 몰상식한 행위가 모욕적이고 밉살스럽고 눈에 거슬려도, 꾹 참을 수밖에 없다는 분노도 담겨있다.

가난 때문에 도둑이 될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과 인간의 한계까지도 느껴지는 속담이다. 그렇다고 이 속담을 빌미로 비도덕적이고 악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없고 그리되지도 않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물질 세계의 지배를 강력히 받고 있는지 잘 드러내고 있음은 틀림없다.

정당화할 수 없는 것들

배고픔을 참다못해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감옥살이했다는 장발장의 이야기는 가히 웅변적으로 인간이 무엇이고,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지닌 존재이고, 윤리와 도덕률 그리고 엄존하는 법체계 속에 살아간다.

장발장의 교훈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인간 세계에서는 도둑질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윤리이고 법률이다. 하물며 부자들이 하는 도둑질과 비도덕적 행위들은 얼마나 비난받아 마땅하고 처벌 수위가 높아야 하는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올바른 법치를 세워야 하는 국가 권력이 비윤리적인 경제 체제를 수립하고 악법을 제정한 뒤, 이를 부추긴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밀어닥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 시대를 살든지 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법규에 충실하며, 그 사회를 위해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될 것인가

교황은 돈을 우상화하여 시장의 절대 자율권을 인정함으로써 발생한 해악을 새로운 독재의 출현으로 규정하고 단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경제 활동과 산업 분야에서 윤리가 살아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윤리는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을 안내하고 이 길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 현대 사회에서 우상화된 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교황의 이와 같은 지적을 매우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다(57).

일례로 배아줄기세포연구 문제를 제시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미 수정되어 한 인간이 된 배아를 마음대로 조작하고 상품화하여 자본주의 시장에 내어 놓고자 한다. 엄청난 가치와 효용성이 있다고 여기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비윤리적인 문제에 슬그머니 눈 감으려 하고 있다.

교황은 이와 같은 현대 사회를 고발하면서 이런 경향 뒤에 숨어있는 악의 실체를 지적하고 있다. ‘윤리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이런 태도 뒤에 깔려 있다(57). 인간을 조작하고 타락시키면서까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감행하려는 사회적 경향의 죄악성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하느님을 거부한 인간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인간에게 맡겨진 대자연까지도 오염시키고 파괴하여 그 자체로 징벌의 결과를 맞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제 위치에 놓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바른 정신이 사회적 경향을 형성시키기 위해 서로 연대해야 함을 각성시키고 있다. 교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무엇보다도 정치지도자들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들에게 맡겨진 봉사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저는 정치 지도자들이 개별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하면서도 결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이러한 도전에 맞서도록 촉구합니다. 돈은 봉사해야지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은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고 존중하고 북돋워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깨워 줄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심 없는 연대성을 지니고 경제와 금융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윤리로 되돌아갈 것을 권고합니다”(58).

나눌 것은 충분하다

교황은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충분한 재화를 주셨기에 누구나 풍족히 사용할 수 있음을 가르치며, 세상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회 질서 안에서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지녀야 함을 이야기한다. 모든 인간이 지닌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 삶의 도덕률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보다 인간다워질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자신만을 위한 삶과 끝없는 소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무자비한 자율시장 독재의 권력으로, 약자들의 재화와 생명을 약탈하게 된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7) 폭력을 낳는 불평등은 안 된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들이밀 것인가?

지난해 12월에 국내 산업 현장의 노사분쟁을 다룬 신문 기사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앞 전광판에 씨앤앰 해고 노동자 2명이 올라 49일째 고공 농성을 하며 먼지와 소음, 전자파, 빛 공해 등에 시달리고 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혹한의 추위에 또다시 평택공장 굴뚝에 올라가 고공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해고 노동자 복직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굴뚝에 오른 것이 아니다.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리기 위해 올라왔다.’”

불평등은 폭력을 부른다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사는 중동 지역의 분쟁들, 다민족 사회의 인종 간 갈등들, 부족 간의 문제 혹은 종교 문제로 인한 아프리카 대륙의 내전과 갈등들, 산업 현장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리 해고 등의 문제는 이 시대의 불안정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의지만 있다면, 그 내용을 쉽게 훤히 알 수 있다. 과학 기술과 통신 매체의 발달로 가능해졌다. 온 세상의 소식을 안방에서 접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말로 온 세상을 한 마을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차이가 있고, 어떤 곳은 위험해서 아예 발길을 끊고 사는 곳도 있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폭력의 불씨를 지니고 도처에 남아 있기에 그렇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큰 분쟁으로 번질 기세이다. 이 시대의 평화와 안정은 그렇게 위협받고 있다. 폭력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교황은 말한다. ‘불평등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 사이에 노정된 배척과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폭력이 뿌리째 뽑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못 사는 민족들이 폭력을 유발한다고 비난을 받지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온갖 형태의 공격과 분쟁은 계속 싹을 틔울 토양을 찾고 언젠가는 폭발하기 마련입니다”(59).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다른 곳에서는 음식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입니다”(53).

불평등을 양산하는 사회 경제 제도

교황은 사회 경제 제도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폭력을 낳는 불평등을 배태하고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언제나 분열을 조장하고 죽음으로 반대 세력을 몰고 가는 사회 구조는 악한 것이기에 개선되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지속 가능하고 평화로운 발전의 조건이 마련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을 인간의 삶의 터전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사회가 아니라, 약자와 힘없는 사람에게도 균등한 기회가 제공되고, 더 큰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아흔아홉 섬 가진 부자가 백 섬 채우기 위해 한 섬 가진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는 사회는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운영 체제는 무분별한 소비 지상주의와 결합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60). 백 섬 채운 자가 이를 자랑하고 빼앗긴 자는 나락으로 떨어져 폭력에 의존하게 되는 형국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저속하고 비열한 문화는 계속 이런 사회를 조장하고 광고하여 영웅주의와 패배주의의 양극화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소비지상주의 지양해야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경제 운영 체제는 무분별한 소비를 부추기고, 그 결과 걷잡을 수 없는 소비 지상주의가 불평등과 결합되어 사회 조직을 이중으로 손상시키고 있습니다”(60).

소비주의(consumerism)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비자 주권주의혹은 소비 지상주의라는 말로 번역된다. 서로 다른 의미이다. 소비자 주권주의는 소비자가 최우선이라는 의미로 소비자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1960년대 이후에 사상적 정치적 기반이 확립되었다. 소비자의 4가지 권리, 즉 안전할 권리, 알 권리, 자유 선택의 권리, 의사 반영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다.

반면에 소비 지상주의는 소비를 미덕으로 부추기는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교황이 권고문에서 사용한 용어의 의미이다. 소비를 마치 행복의 기준인 양 권장하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제 체제와 사회를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본가는 소비자의 욕망과 욕구를 부추기는 광고와 선전을 통해 소비만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 양 선전한다.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온갖 종류의 소비를 장려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별력을 잃게 된다.

우리나라의 무분별한 카드 발행과 신용불량자의 양산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소비 지상주의의 폐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경제 활동으로부터 소외되거나 불평등한 조건으로 소비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의 처지는 더욱 비참하게 된다. 사회적 불평등으로 배태된 폭력의 씨앗이 소비 지상주의의 문화 속에서 쉽게 발아해 어둠과 폭력과 죽음의 문화를 양산해 내고 있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8) 문화적 도전 (1)

반복음적 문화에 직면한 교회

교황은 선교 지향적 교회의 모습을 역설하면서 현대 사회의 도전을 나열하였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도전은 문화적 도전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교의 자유를 공격하며 증오와 폭력 사태로 번진 중동 지역의 극단적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준동, 고유 문화와 전통적 가치의 포기로 이어지는 세계화의 위험성,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신흥 종교 운동과 도덕적 상대주의 그리고 위기에 처한 가정과 혼인의 문제 등이다. 차례대로 살펴보자.

형제의 고통 외면 말아야!

인간의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중동의 현 상황은 인류 정신사를 퇴행시키는 것이다. 교황은 이라크와 시리아 등 중동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고 있는 현 상황을 아파하며, 사태 해결을 위해 세계인의 적극적 관심과 노력을 부탁했다.

 

무엇보다도 상대주의적 무관심을 경계하였다. 내가 사는 곳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다른 나라와 민족에게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태와 폭력, 살인과 전쟁에 눈감고 지나치려는 태도이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과 공동체가 이와 같은 폭력과 살인 그리고 테러 행위를 규탄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고통 가운데 도움의 손길을 간청한 이라크의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전하면서, 당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를 남긴 베네딕토 16세 교황 말씀이 상기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공통의 역사를 지니며, 서로 다름 속에 존재하는 같은 백성입니다. 서로의 상이성 속에서도 공통의 역사를 지니며 공동의 합의된 결정을 지녀야 하는 같은 백성이라는 인식을 다시 구축해야 합니다(‘세상의 질문 일곱 가지와 교황의 답변중에서).”

약육강식 세계화의 위험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가능케 된 세계화, 인류가 사는 전 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인식하게 만든 세계화의 위험성을 교황은 이렇게 지적했다. “수많은 나라에서 세계화는 고유한 문화적 뿌리의 급격한 훼손을 의미하고, 또한 경제적으로는 발전했으나 윤리적으로는 빈약한 외래 문화 사조의 침입을 의미합니다”(62).

진정한 세계화란 민족의 고유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 당당히 자신들 문화의 아름다움과 가치의 고유성을 드러내고 이것이 인류 문화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에 기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약소국가의 문화를 잠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경제적 부문에서 개방과 무한경쟁의 시대를 열었고, 그 결과 글로벌 기업은 무차별적으로 약소국가의 시장을 점유하게 되었다. 거대한 자본의 힘은 약소국가의 영향력마저 약화시켜 버렸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무한 탐욕과 자유주의 시장경쟁의 절대적 독재만이 세계를 장악해 버린 듯하다.

이와 같은 세계화의 경향은 윤리마저도 거추장스럽게 여기게 하였다. 오로지 돈과 쾌락의 우상만을 좇는 문화를 양산했다. 교황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했다. 모두가 높은 경각심을 갖고 비판 의식을 높일 것을 주문한다. 무비판적 추종과 답습, 몇몇 초강대국 문화에로의 편입과 보편화가 올바른 세계화로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신흥 종교 문제 해결 대책은

교황은 신흥 종교 운동의 확산을 또 하나의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 신앙은 신흥 종교 운동의 확산으로 도전받고 있습니다. 일부는 근본주의의 경향을 띠고, 일부는 하느님 없는 영성을 제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신흥 종교 운동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파고들어, 개인주의가 팽배한 문화 속에서 세속적 합리주의가 남긴 공백을 메우려고 합니다. 일부 세례받은 이들이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또한 특정 구조와 일부 본당과 공동체들의 냉랭한 분위기, 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단순한 문제든 복잡한 문제든 이에 대응하는 관료적인 태도에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많은 곳에서 행정적 측면을 사목적 측면보다 우선시하고, 복음화의 다른 형태들은 뒷전으로 물리고 성사 집전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63). 우리 한국의 사목자들이 깊이 반성해 볼 대목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신흥 종교인 신천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영적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신흥 종교를 통해 그들의 고통에 대한 즉각적 해결책을 찾고자 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교육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모두를 경험하면서, 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현재의 노력이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판단하는지, 아니면 사목적인 면에서 다른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는지, 평가해 볼 일이다.

계속해서 교황은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상대주의의 도전과 가정과 혼인의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다룬다. 이 부문은 다음 회에 다루어 보겠다. [평화신문, 2015412, 홍기선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19) 문화적 도전 (2)

도덕적 상대주의 앞에 흔들릴 수 없는 것들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대 사회의 문화적 도전으로 제시한 내용 가운데, 중동 지역의 극단적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준동으로 위협받는 종교의 자유 문제, 고유 문화와 전통적 가치의 포기로 이어지는 세계화의 위험성, 그리고 물질주의, 소비주의, 개인주의의 폐해로 나타나는 신흥종교 운동까지 다루었다. 이제 도덕적 상대주의와 위기에 처한 가정과 혼인의 문제를 살펴보겠다.

윤리 근간 흔드는 도덕적 상대주의

오늘날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조가 있다면 바로 도덕적 상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은 절대적인 윤리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개인의 판단과 결정은 어떤 것이든지 존중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분 없이 무조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선악 기준의 절대성 적용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의 문제까지도 각자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처리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락사의 정당성과 합법화를 주장하고 동성 혼인의 합법화도 추진하면서 윤리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윤리적 선악은 행위자의 행위가 일어난 상황과 공동체의 관습 및 개인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 주장하며, 많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윤리가 왜곡되고 개인과 집단의 죄의식이 희박해졌다(64). 하느님의 절대성이 인간의 삶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선악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절대적 회의주의에 빠지게 하고,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게 만든다.

이는 특히 변화에 매우 민감한 사춘기와 청년기의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쳐 윤리적 방향 감각의 전반적인 훼손을 가져왔다”(54). 특히 생명을 다루는 분야에서 많은 물의를 빚고 있다. 자살과 안락사 문제, 비도덕적 피임과 낙태 문제, 시험관 아기와 줄기세포 연구 문제, 동성혼인 문제 등은 대표적이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도덕적 가치들 안에서 우리가 성숙해지도록 이끄는 교육이 필요합니다”(65).

위기에 처한 작은 교회, 가정

이제 위기에 처한 가정과 혼인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먼저 교황은 가정의 의미를 언급하면서 오늘날 가정의 유대가 심각하게 약화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가정은 어떤 곳인가?

가정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전이고, 하느님을 배우는 학교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 희생과 헌신, 성실과 신의를 바탕으로 형성된 작은 교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참 인간으로 성장하고, 훈육되며, 구원받습니다”(2014년 춘천교구장 성탄 메시지 중에서).

이와 같은 가정은 그 자체로 권리를 지니는데, 1980년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정의 권리를 천명했다.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이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가정을 건설하고 생계 유지를 위해 적절한 수단을 소유할 권리를 지녔다. 생명 전달과 자녀 교육에 관한 책임을 이행할 권리, 친밀한 부부 생활과 가정 생활의 권리, 결혼 제도를 통한 안정된 생활의 권리, 가정의 신앙을 실천하고 전파할 권리, 가정의 전통과 종교적 문화적 가치를 따라 자녀를 양육할 권리, 육체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권리, 적당한 주택을 가질 권리, 공권력을 지닌 자들과 그 하급 권력자들 앞에서 표현하고 대표할 권리, 다른 가정들이나 단체들과 연합체를 구성할 권리, 적절한 기구와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 마약과 알코올 중독, 음란물 등에서 미성년자를 보호할 권리, 가정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 적당한 오락과 시설을 즐길 권리, 노인의 가치 있는 삶과 죽음을 보장할 권리, 더 나은 생활을 찾아 이주할 권리”(요한 바오로 2세 권고문, 가정 공동체중에서).

국가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배려

이와 같은 가정의 권리가 국가와 사회 안에서 온전히 보장되고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법률과 제도가 가정의 권리를 온전히 보호하고 지원하지 못하여 겪는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사목자들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소위 말하는 특수 사목적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한 번 열거해 보겠다.

이민 혹은 이주 노동자 가정, 장기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가정(기러기 가정), 죄수, 피난민, 망명자의 가정, 대도시에서 실제로 버림받은 생활을 하는 가정, 집 없는 가정, 외짝 부모의 가정, 장애인이나 마약 중독 자녀를 둔 가정, 알코올 중독자 가정, 문화적 사회적 환경에서 소외된 가정, 정치적 이유나 다른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는 가정,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는 가정, 본당과의 접촉이 쉽지 않은 가정, 종교 때문에 폭력이나 부당한 처우를 받는 가정, 10대 결혼 부부 가정, 생활고 속의 혹은 홀로 사는 노인 가정”(가정 공동체중에서).

힘든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 이웃들, 힘들지만 기쁘게 삶을 일구고 있는 그들을 위해, 교회는 노력해야 한다. 교황은 특별히 가족 간의 유대가 약화하고 있음을 걱정하였다. “세계화된 후기 현대의 개인주의는 인간 관계의 발전과 안정을 약화시키고 가족의 유대를 왜곡시키는 생활 양식을 조장합니다. 사목 활동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가 친교를 요구하고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친교는 인간들의 유대를 치유하고 증진하며 강화합니다”(67). [평화신문, 2015426, 홍기선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0) 문화적 도전 (3)

혼인, 하느님 앞에 맺은 확고한 계약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대 사회의 문화적 도전으로 다룬 내용 가운데, 마지막으로 혼인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교황은 변질되어 가는 혼인의 양태를 지적하면서, 혼인의 특성과 그 의미를 강조하였다. 가정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말했다.

혼인은 이제 단순한 정서적 만족의 한 형태로 여겨져, 어떠한 방식으로든 혼인할 수 있고 또 저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주교들의 가르침대로, 혼인은 본래 덧없는 사랑의 감정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겠다고 동의한 배우자들이 맺은 확고한 계약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66).

혼인 서약이 부담되는 사람들

2014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제3차 임시총회(105~19)에서 다룬 내용도 가정 사목과 복음화이다. 오늘날, 동거하면서 혼인을 미루는 젊은이들과 이혼 후 재혼한 부부들의 신앙생활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모든 문제의 기저에는 가톨릭 혼인의 특성인 단일성불가해소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많은 젊은이가,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다는 혼인서약을 힘들어 한다. 한번 체결된 혼인은 결코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도 엄청난 부담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일단 한 번 살아보고, 자신 있으면 그때 가서 정식으로 혼인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 결과, 동거 기간이 길어지고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법적 지위 문제까지 불거졌다. 일반 시민법과 교회법의 모든 부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혼을 거쳐 재혼으로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는 부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에게 교회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의 하느님 법을 지키면서, 어떻게 이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는지, 현대의 교부들에게 성령의 지혜가 내리길 기도한다.

혼인의 특성, 더욱 철저히 교육해야

말이 나왔으니,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혼인의 특성인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에 대한 교육의 문제이다. 이 혼인의 특성에 대해, 그 참된 의미에 대해, 심도 있는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철저한 혼인 전 교육이 필요하다.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혼인의 안정성이 확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합의로, 혹은 일방의 계약 불이행으로,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것이 혼인이라면, 전인적인 투신이 가능치 못하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의 삶에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미래의 삶 전체를 어떻게 투신할 수 있겠는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 희생과 헌신, 성실과 신의를 다짐하는 혼인서약문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단어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 불러 모아놓고 박수받으며 했던 맹세와 다짐이, 한 달이 못 되어, 우스갯거리로 전락해버린 경우를 너무도 쉽게 주변에서 보고 있다.

두 사람이 비록 지금은 성숙한 혼인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을지라도,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면, 그것 외에 다른 선택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삶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아름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의로, 또는 일방의 배신 때문에 혼인이 폐기되고 또 다른 사람과의 새 출발이 가능하다면, 혼인의 성격과 목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교회는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하느님의 법으로 받아들이기에, 새로운 형태의 혼인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 문제는 다시는 진행하지 않겠다. 다만 현재의 혼인 특성의 의미를 좀 더 심화시키고자 몇 가지 질문을 첨가하고 싶다

혼인의 불가해소성

먼저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혼인할 시점의 남녀 배우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배우자가 혼인 후,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른 사람과 소위 말하는 늦바람이 났다면, 그리고 당신들의 혼인생활도 권태롭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면, 당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교회는 배우자를 용서하고 끝까지 혼인생활을 유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가 용서를 청하지도 않고 그 생활을 끝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찌하겠습니까? 배우자가 딴살림을 차리고 나갔습니다. 당신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그 배우자를 기다리겠습니까?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와의 재산상의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회법적인 이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적으로 두 사람은 여전히 부부입니다. 다른 사람과 절대로 재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위의 질문은 교회 안의 혼인이 합법적이고 유효하게 성사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것이 많기에 만들어 보았다. 더욱 발전시켜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으로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혼인할 당사자가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면, 혼인의 특성을 수용하지 못했기에 그 혼인은 유효한 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법원에서 그 진위를 가려줄 것이다. 오늘 혼인 문제를 다루면서 상당히 멀리 왔다. 본 주제로부터 슬쩍 벗어나 외도한 것 같아서 조금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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