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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말씀의 우물] 죽음 후에는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9|조회수23 목록 댓글 0

[말씀의 우물] 죽음 후에는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이가 묻습니다. “죽은 육신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부활한 사람 모습은 어떠한가? 흔히 말하는 연옥은 어떤 모습인가?” 어떤 이들은, 마치 윤회설을 믿는 듯, 다음 생은 좀 다르게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이 세상에 다시 오는 다음 생은 실상 없습니다. 영원한 행복(구원) 아니면 어둠이 뒤따를 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주 선명한 답을 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죽은 후 부활한 사람의 모습을 세상 언어로 상세히 표현해 내기는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 안에서 부활한 사람모습을 찾아보는 일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신약성경 안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는 구절을 꼽으라면 다음을 들 수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사도는 죽은 이들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4) 사도는 설명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첫 인간)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이제 창조의 세 가지 차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지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 새로운 창조(creatio nova) 등입니다. 지속적인 창조는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피조물 세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을 이릅니다. 새로운 창조란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신비의 영역을 일컫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한(새로 창조된) 육체, 곧 주님의 자녀들이 도달하여 누리게 될 천상 신비의 모습을 이 세상의 육체와 대조시킵니다. 물질적이라 늙어가고 병드는 생로병사의 테두리에 갇혀 살아가는 가련한 육체가 있듯이, 천상 신비의 세계에 속해 영적이고 영광스러운 육체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하늘에 속한 몸체들도 있고 땅에 속한 몸체들도 있습니다.”(1코린 15,40)묵시록 저자 요한은 구원받은 성인들이 천상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명쾌하게 전해줍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3-4)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흔히 사람들은 죽은 후에 겪게 될 연옥을 시·공간의 틀에서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마치고 죽은 다음 맞이하게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말씀의 우물] 룻은 누구입니까?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를 담은 룻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나의 하느님은 임금님)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나의 사랑스러움)이며 두 아들의 이름은 마흘론(질병)과 킬욘(허약)이었는데”(1,1-2)

모압 땅에 정착한 후 얼마 안 되어 남편 엘리멜렉과 사별한 나오미는 두 아들을 혼인시킵니다.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애정, 원기회복)이었다.”(1,4) 10여 년이 지나자 두 아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차례로 세상을 떠나서, 결국 세 여인만 남게 됩니다.

나오미는 서글픈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쓰라린 여인)라고 부르셔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주셨답니다.”(1,20-21)

그러나 가슴 아픈 이야기는 1장에서 끝나고, 나머지 2장부터는 평화와 사랑과 축복이 넘쳐흐릅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펼쳐지는 보리와 밀 이삭줍기 이야기는 옛날 우리나라 논밭에서 펼쳐지던 이삭줍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나아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사이에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는 따뜻하면서도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면서 불행이 덮쳤다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는 행복이 솟아오릅니다.

룻기는 판관기 끝에 배치돼 역사서로 분류되지만, 내용을 보면 주님의 섭리를 깨우쳐주는 교훈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엿보게 해주는 장면을 봅니다. “주님께서 네가 행한 바를 갚아 주실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2,12)

룻기는 기원후 아가, 코헬렛, 애가, 에스테르기와 함께 유다인들의 다섯 주요 축제 두루마리(축제오경)’ 중 하나로 오순절이나 수확절에 봉독되기도 했습니다.(레위 23,15-21; 신명 16,9-11; 사도 2,1 참조)

룻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세사의 한 획을 보게 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마태 1,5-6) 모압 여인 룻이 다윗 임금의 증조모가 되었기에 마태오복음 1장은 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길이는 짧지만 그 내용이 더없이 따뜻하고, 풍요롭고, 평화가 넘칩니다. 그 덕에, 언제부터인가 저는 룻기를 읽거나 떠올릴 적마다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솟아나는 행복함과 치유의 힘을 느낍니다.

세대 차이로 인한 갈등과 가족 간의 어려움을 겪는 분이 요즘 참 많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룻기를 천천히 읽어 보시기를 곧잘 권하곤 한답니다. 제가 느끼는 행복과 치유의 힘이 여러분께도 전해진다면 좋겠습니다.

 

 

 

 

 

 

[성경 다시 보기]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오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희랍어 신약성서 본문을 어순으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행복한 이들, 그 가난한 이들 그 영에, “그 영(πνευμα-프네위마)가 어떻게 마음(καρδια-카르디아)라고 번역하여 알아듣게 되었을까요? 먼저 생각해 볼 것은

1) 성서의 다른 곳에 이와 같거나 비슷한 표현이 있는가, 2) 기존 번역서들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3)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그 뜻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에 해당하는 것은 루카 6,20(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과 루카 4,18(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입니다. 하지만 루카 6,204,18에는 마음이나 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를 살펴봅니다.

1.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진복자로다(신약성서 1960)

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공동번역 1977)

3.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200주년 1991)

4.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새번역 2005)

5.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관주성경전서 1961)

6. 마음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다(표준 새번역 1993)

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관주개정판 1998)

8.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성경전서 새번역 2001)

9. 복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영에(King James Version 1611)

10. 복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영에(American Standard Version 1901)

11. 행복합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Good News Bible 1992)

12. 복됩니다, 하느님 앞에 그 가난한 사람들(독일 공동번역 1980)

13. 마음의 가난한 사람들은 복됩니다(일본어 번역 1992)

14. 신빈적인시유복<神貧的人是有福>(중국어 번역 1968)

15. 복됩니다 가난한 이들은 영에 (불가따 - 라틴어 번역 1983)

1~4는 가톨릭 번역한 것인데, “마음이든 영으로든 모두 마음이 가난한것으로, 5~8(개신교 번역) 11, 13심령”, “마음”, “영적으로든 모두 사람의 마음을, 9~1015이 무엇을 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12(독어 공동번역)는 유일하게 하느님 앞에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희랍어 본문의 그 영에를 구체적으로 누구의 영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3) 희랍어 본문의 그 영(τω πνευματι)”이 무엇을 또는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밝혀야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이라고 표현된 그 단어는 그냥 이 아니라 정관사 가 붙어있어, 이미 앞에서 언급된 그 영을 뜻합니다. 그것은 마태 4,1성령의 인도로했는데, 희랍어 본문을 보면, “그 영에 의해서예수님이 광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 영이란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내려오신 그 영입니다. 그렇다면, 마태 5,3에서 언급된 그 영에란 하느님의 영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영은 성령이고, 성령은 또한 독어 공동번역처럼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가난한 사람이란 겸손한 사람으로 이해합니다(참고 스바니아 2,3; 독어판(1975) 예루살렘 성서의 해당 주).

 

 

 

 

[성경] 다윗의 자손

복음서의 첫 문장은 저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마르코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첫 문장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기쁜 소식(복음)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반면, 마태오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라는 첫 문장으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중시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마태오가 이 첫 문장으로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가 잘 나타납니다. 당대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할 지도자라는 뜻으로 통용되었습니다. 군중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마태 21,9.15) 하고 열광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요. ‘호산나는 구원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과월절 축제를 거행하면서 그 옛날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셨던 역사가 다시 벌어지기를 갈망했던 셈이죠.

또한, 다윗은 주변 국가와 전쟁을 벌여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데 성공한 임금이었습니다. 이에 기반해서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낼 수 있는 강력한 메시아는 그의 혈통에서 나올 거라는 열망이 고조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메시아(그리스도)가 되려면 먼저 다윗의 자손에 해당하는 혈통이어야 했습니다.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었기에,(마태 1,20 참조)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예수님께서도 다윗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어 마태오는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르는 족보를 다윗과 바빌론 유배를 중간에 넣어 14대씩으로 나열합니다.(마태 1,17 참조) 최고의 전성기인 다윗과 최악의 침체기인 바빌론 유배 시절을 거쳐 왔으니만큼, 이제는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가 되어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떨쳐버리고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할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병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보고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20,30) 가나안 부인도 딸이 마귀에 들렸다면서 같은 방식으로 자비를 청합니다.(마태 15,22 참조) 당대에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병에 걸린다고 여겼으므로, 치유 행위는 곧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아기 이름을 지어줄 때 이미 시사되었죠.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티모테오 2

 

티모테오 2서는 티모테오 1서 그리고 티토서와 함께 사목 서간으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다른 두 서간이 교회의 조직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티모테오 2서는 교회 조직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며, 개인적 서신이 주로 담긴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티모테오 1서와 달리 바오로 사도의 감성적인 고별사가 내용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의 친서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개인이 발송하는 서신의 형태로 고별사를 전달하는 다른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제자 중 한 명이거나 후대의 인물이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서 작성한 서간이라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수신인 역시 티모테오 1서와 마찬가지로 바오로와 친숙한 티모테오라는 인물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다만 티모테오 2서는 1서에 비해 티모테오라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첨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에우니케와 할머니 로이스가 유다인으로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언급, 티모테오가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읽었다는 내용 등은 티모테오로 대변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다교와 연결 선상에 놓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1-2절은 머리말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향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는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13-418절은 티모테오 2서의 본문으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권고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의 좋은 행실에 대한 기억과 감사를 표현합니다. 현재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고난을 겪고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런 중에 자신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티모테오를 기억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 뒤 사도 바오로는 신앙의 유산으로 이어받은 티모테오가 간직한 진실한 믿음을 격려한 뒤 안수로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라고 격려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수감된 바오로처럼 그의 동반자였던 티모테오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는데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의탁하면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위해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해냄으로써 복음을 위한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페소에서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 봉사했던 오네시포로스 집안을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합니다.

2장에서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님의 군사라고 부르면서 이에 합당하게 개인의 일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를 군사로 뽑은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2,11-13)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이며,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지금의 고통을 견디면서 성실하게 복음을 증거하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살리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속된 망언을 피하고, 거짓된 가르침에 속지 말며,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살아가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한 태도로 대해서 그들이 회개하여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이야기합니다.

3장부터 418절까지는 여러 가지 권고가 등장하는데 먼저 마지막 때의 타락상과 이에 따른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가르침과 지시가 전해집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힘든 시기를 겪게 되는데 사치와 허영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람들을 중상모략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기를 잊어버린 사람들, 난폭하며 선을 미워하는 사람들, 배신이 난무하고 쾌락을 쫓는 사람들, 욕정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여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낙오자로서 진리에 대항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것들을 먼저 상기시킨 뒤 자신이 전한 가르침에 따라 끈기를 가지고 주어진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면서 성경을 통해 깨달은 구원의 지혜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지녀야 할 거룩함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없이 성실하게 말씀을 선포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호기심에 사로잡혀 잘못된 미신과 신화에 빠져들더라도 복음 선포자는 끝까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의로움의 화관을 쓰게 될 순교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야기한 뒤 테마, 크레스켄스, 티토 등 자신을 도와주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으니 자신을 도와줄 마르코와 함께 서둘러 와달라고 부탁합니다.

419-22절은 맺음말로 자신을 도와주었던 프리스카,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인사와 축복을 전합니다.

 

 

 

 

[말씀의 우물] 예수님의 희년 선포

 

예수님의 희년 선포 내용은 신약성경에는 루카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 회당 예배 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주님의 은혜로운 해(희년)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희년은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 해로 지정됩니다.(레위 25,8-55 참조) 그러나 실제로 희년이 실행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만큼은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다음 구절이 희년의 기본 정신을 잘 설명해 줍니다. “땅은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우리의 모든 소유는 영원토록 우리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위임받아 돌볼 뿐입니다. “너희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너희 곁에서 허덕이면, 너희는 거들어 주어야 한다.”(레위 25,35)

예수님께서는 희년 선포에 이어서 곧바로 그 희년의 성취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궁극적 희년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의 성취(완성)는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까? 예수님의 희년 선포에 뒤따른 루카복음 전체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희년의 성취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희년 선포의 첫 번째 성취는 회당에서 더러운 영(마귀)을 쫓아내시는 단락에서 잘 나타납니다.(루카 4,31-37 참조)

여러분은 희년이라고 하면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저는 여러 교우분으로부터 희년을 맞이하여 전대사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 뜻깊은 은사도 좋지만, 희년의 참뜻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 더욱 큰 축복이라고 봅니다.

레위기 25장에 보면 먼저 매 일곱째 날이 안식일, 일곱 번째 해는 안식년, 그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이어지는 오십 번째 해를 희년으로 지내게 됩니다. 엿새에 걸쳐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일곱째 날은 쉬십니다. 그날은 거룩한 날로 주님을 기억하며 일손을 멈추고 쉬면서 그분께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일곱 번째 해는 안식년으로 땅까지도 쉬도록 하고, 희년이 되면 땅도 되찾고 모두가 주님 축복 속에 새로 출발하도록 묶인 데서 풀려나는 거룩한 해방의 해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1코린 6,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궁극적 희년을 어떻게 맛볼 수 있습니까? 먼저 치유의 말씀 안에서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루카 17,21 참조; 마태 12,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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