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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1) 신앙 토착화의 도전 복음 정신 담은 가톨릭 대중문화 확산해야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9|조회수33 목록 댓글 0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1) 신앙 토착화의 도전

복음 정신 담은 가톨릭 대중문화 확산해야

 

문화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 또는 생활양식이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도덕, 종교, 학문, 예술 및 각종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국어사전).

삶의 구체적 표현 양식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분노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미 형성된 문화는 그 시대와 공간을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문화는 민족과 시대와 그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기도 하고 어둡게 만들기도 한다. 죽음의 문화가 있고 생명의 문화가 있다. 퇴폐 향락 문화가 있고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가 있다.

문화에 녹아 흐르는 그리스도교 정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화의 복음화를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 아니다. 지난해 1019일에 복자가 되신 바오로 6세 교황께서 1975년에 발표한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에서 이미 사용하신 개념이다. 문화를 복음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의 주제 신앙 토착화의 도전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신앙을 토착화시키기 위해 도전해 보자는 것이다.

복음의 기쁨에서 도전의 의미는 능동과 수동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경우는 거세게 문화적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고, 다른 경우에는 우리가 도전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오늘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앙을 토착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화를 복음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도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교회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2000년 이상 특별한 삶의 방식을 정착시켜 왔다. 우리는 이를 그리스도교 문화라고 일컫는다. 유럽 사회의 언어와 삶의 양식과 풍속, 학문과 예술 등의 모든 분야에 녹아 있다. 그 문화의 기저에는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희생과 헌신이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구세주께 해준 것이라는 말씀에 따라, 세상 안에서 살기 위해 노력한 2000년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다. 병든 이들을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 위로해 주었다(마태 25장 참조).

그야말로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2000년이었다. 건강한 서구 문화의 윤리와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화한 문화는 오늘날 세속주의의 맹공 앞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어, 단순한 신자 수보다 훨씬 큰 자산이 되어 있다(68).

문화 복음화를 통한 복음 토착화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토착화를 위해 문화를 복음화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69). 세속화한 나라에서는 장기간의 계획이 필요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를 지니고 문화의 복음화를 일구어내야 함을 역설했다. 문화적 경향을 복음의 빛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려면 이 시대의 상징과 기호와 코드를 읽어내야 한다. 대중의 의식 한가운데로 나아가 복음의 기쁨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목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성령께 의탁하고 그 빛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교황은 먼저 우리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우리 가톨릭 대중문화 속에서 복음의 빛으로 치유되어야 할 부정적 부분을 지적했다. 현재 우리 내부에 만연하고 있는 남성 우월주의,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 낮은 미사 참여율, 주술에 빠지는 숙명론이나 미신”(69)이 그것이다.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좋은 출발점이 대중 신심이라고 강조했다.

대중 신심이란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거룩한 전례를 통해 표현될 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부족의 특별한 문화적 표현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전례주년 축제에 따른 행렬, 9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인 공경, 성지순례, 피정 등의 형태로 존재한다. 교황은 대중 신심행위의 참가치에 주목하고 이것을 보다 보편적 문화로 확대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젊은이에게 신앙을 전수하려면

교황은 젊은이들에게 신앙이 전수되지 못하고 단절된 원인 역시 우리 안에 만연된 나쁜 문화의 영향임을 지적했다. 다음과 같이 하나하나 열거했다. “가정 안에서 대화 부족, 대중 매체의 영향, 상대주의적 주관주의, 시장만 배불리는 무분별한 소비주의,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사는 사목의 결여, 교회 기관들의 환대 부재, 그리고 다종교 상황 속에서 신앙의 신비를 지키고 되살리는 데서 겪는 어려움 등이 있습니다”(70).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2) 도시 문화의 도전

신앙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거듭나야

 

인간은 삶의 유용성 때문에 도시를 건축했다. 함께 모여 살면서 법과 질서의 필요성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국가가 출현하였고, 그곳에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의 학문이 발전하게 되었다. 도시민 삶의 질과 안정과 풍요와 가능성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국토교통부의 20147월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92%가 도시에 살고 있다.

신앙의 눈으로 도시 속 하느님 찾아야

교황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분이다. 그 관구 1300만 명의 최고 목자로 일하면서 도시 문화의 다양함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일찌감치 포착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영적인 관상의 태도로 도시를 바라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곳에서 삶의 애환을 나누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도시 안의 집들과 네 거리와 광장에 살고 계시는 하느님을 식별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지니라고 주문하면서, 그분의 현존양식은 다음과 같이 읽혀진다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시민들 가운데에 머무르시면서 연대와 형제애를 증진해 주시고, 선과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을 북돋워 주십니다”(71).

다시 말해 도시 사람들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삶의 의미와 정신적 의지처를 찾고자 진지하게 노력할 때, 그들 사이에 연대와 형제애가 증진되고 선과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이 불타오르며, 그것이 하느님 현존의 표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2007아파레시다문헌(514)에 이미 나온다. ‘하느님은 도시에 살고 계신다는 제목하에 내용을 전개하였다. “하느님의 현존은 조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발견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비록 더듬거리며 막연하고 무턱대고 찾는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찾는 이들에게 당신을 숨기지 않으십니다”(71).

도시 속 교회의 역할

교황은 도시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복음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도시 한가운데에 복음의 기쁨을 가져가 선포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시의 성격과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시가 다문화 사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도시에서는 어떤 연결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인간 관계, 새로운 문화 공간과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생겨납니다”(74).

도시에는 시간과 공간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으로 말미암아 도시 문화가 형성된다. 그 한가운데에서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도시에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들이 공존하면서도 자주 분열과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데, 교회는 그들 사이의 대화의 촉진자가 되도록 부름 받는다.

도시의 착한 사마리아인

2011년 추기경 시절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도시 사목 총회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요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족과 역사와 문화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서로 다릅니다. 시민권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고 반쪽 시민의 권리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으며 도시의 잉여 인간들로(남아도는 사람이란 뜻으로 쓸모없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취급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배척된 이들, 외국인들, 체류 허가증이 없는 사람들, 교육받지 못한 어린이들,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과 병자들도 있습니다.”

교황은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덧붙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도시에서 마약과 인신매매, 소수자에 대한 학대와 착취, 노인과 병자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을 지나쳐 버릴 수 없습니다”(75).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연상될 만큼 교황은 지금 도시에서 상처 입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신앙인들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상황이 노정된 도시 안에서 복음 선포자는 인간 생명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자가 되어야 함을 교황은 강조한다. 국가가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가 그 누구의 근원적인 인간 생명의 보존과 유지와 완성의 권리를 제한하고 강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 선포는 인간 생명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에 넘치도록 생명을 부어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75).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3)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

마음 식은 선교 일꾼에게 성령의 열기를

 

2장 끝에서, 교황은 교회를 위해 헌신적인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목 일꾼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현재의 세계화된 문화 상황 안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유혹들에 대해 성찰했다. 이 유혹들은 그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병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목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교황은 다음과 같은 소제목으로 유혹의 내용들을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수용과 거부의 분명한 태도를 취하도록 이끌고 있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라는 것이다. 특히 사목자들이 빠질 수 있는 나쁜 유혹들의 종류와 형태를 구체적으로 지적함으로써 특별한 경계를 당부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교 영성의 도전에 대한 수용(78-80) 이기적인 나태는 안 된다(81-83) 무익한 비관주의는 안 된다(84-86)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새로운 관계의 수용(87-92) 영적 세속성은 안 된다(93-97) 우리 사이에 싸움은 안 된다(98-101) 교회의 또 다른 도전들(102-109).

교황은 제목을 붙이면서 아니오를 분명히 구분하였다.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함을 강조했다. 받아들일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거부해야 할 것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 설명을 시작해 보겠다.

개인주의와 정체성의 위기

먼저 선교 영성의 도전에 대한 수용(78-80)’을 살펴보자. 주제의 의미는 이러하다. 올바른 선교를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영성이 있는데, 오늘날 선교 일꾼들에게 만연한 개인주의와 흔들리는 자기 정체성그리고 의기소침으로 인해 이와 같은 영성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습득되어 있을지라도 그 열정을 빼앗겼기에 효과적으로 성령께서 일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일꾼들이 열등감에 빠져 있어서다.

따라서 이 모든 부정적 상황을 직시하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여 선교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요구되는 선교 영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도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기도하고 세상에 투신하여 새 복음화를 완성하라는 의미이다.

교황은 무엇보다도 사목 일꾼들이 기능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들 삶의 내밀한 선택에 충실하고 열정적으로 투신할 것을 촉구했다. 개인의 자유와 휴식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일꾼의 태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만연하는 개인주의와 정체성의 위기와 의기소침의 해악을 지적하였다(78). 그들은 위축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활동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불행하게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복음화 활동을 억지로 하고 있고, 거의 힘을 쏟지 않으며, 매우 한정된 시간만 할애하고 있습니다”(79).

상대주의, 성령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더욱 위험한 것은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경계를 당부했다. 현재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회개하여 성령께 도움을 청함으로써 일꾼의 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상대주의의 늪에 빠져 현재의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웅크리고 앉아 마냥 맥 놓고 사는 것은 최악이라는 것이다. 교황은 이것을 아주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이 실천적 상대주의는 마치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결정하고, 다른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목표를 세우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다시는 없는 것처럼 일하는 것입니다”(80).

이런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싶다. 선교 영성에 있어서, 교황이 해악으로 지적한 사목 일꾼들의 개인주의와 정체성의 위기와 의기소침(열정의 감소)은 한국의 사목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인가? 그렇다면 그 내용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4) 이기적인 나태는 안 된다

이기적 나태, 하느님 주신 사명 거절하는 행위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하다고 외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굶주림 속에서도, 지금 울고 있을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고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더라도, 하늘에서 받을 큰 상을 생각하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렇게 산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세상 속에서 모진 핍박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철석같이 믿고 기쁨 가운데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기쁨은 선교 활력이 되어 선교 일꾼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들은 땅끝까지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들의 발걸음을 지치지 않도록 만드는 힘의 원천은 바로 기쁨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잃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행복하여라!”

기쁘지 않은 선교 일꾼

교황은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이 기쁨을 잃지 않도록 당부하셨다. 만일 이 기쁨이 사라져 버리면, 선교 일꾼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어 길 한가운데에 힘없이 주저앉아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구 교회의 신앙인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되는 무기력증은 바로 이와 같은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기쁘지 아니한 사람은 희생과 봉사를 달가워하지 않고 교회를 위한 선교에도 뛰어들지 않는다. 시간과 능력이 있음에도 책임 맡기를 거부한다. 오로지 개인의 즐거움만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자 한다. 교황은 이와 같은 상태를 이기적인 나태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기적인 나태는 안 된다”(80).

나태란 자신의 일을 싫어하고 게으름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 피로나 역부족 상태에 있어서 일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무기력에 빠져 기피하고 혐오하고 실망하며 변덕을 초래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거절하는 것이기에 칠죄종(七罪宗) 가운데 하나이다. 교황은 이와 같은 나태(懶怠)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 란 말까지 붙였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선교 일꾼이 이기주의자이고 나태에 빠진 생활을 한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교황은 강하게 이런 삶을 거부한다.

사목적 나태에 빠지는 이유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기쁨이 증발한 원인은 무엇인가? ‘이기적 나태의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교황은 이렇게 설명한다. “언제나 문제는 과도한 활동이 아니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활동, 곧 적절한 동기가 없고 영성이 스며들지 못하여 즐겁게 수행하지 못하는 활동입니다. 그 결과 활동은 필요한 것이라기보다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심지어 때로는 병들게 합니다. 이 활동은 만족스럽고 행복한 피로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를 긴장시키고 힘겹게 만드는 것이고, 불만스럽게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참을 수 없이 피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82).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 활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지금 하는 일은 외부에서 부과된 노동에 불과하여 시간과 더불어 추진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어야 하고 필요한 영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와 같은 활동을 하는 궁극적 이유와 목적을 온전히 파악한 사람은 자신의 임무(mission)를 기쁘게 수용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교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목적 나태에 빠질 수 있음도 지적했다. 몇 가지 원인을 열거했다. 과도한 계획, 실현 불가능한 계획, 특정 계획에 대한 집착, 즉각적인 성과 기대, 비판과 십자가의 불수용, 인내심의 부족 등이 그것이다(82).

무기력증에 빠진 미라가 될 것인가

사목 일꾼들의 근본적 회개가 요청된다. 그렇지 않고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그리고 일상과 타협하여 안주하다 보면, 아주 큰 위험이 자리하게 된다. 교황은 이 위험을 회색의 실용주의라고 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앙이 약해지고 편협해집니다”(83).

교황은 무기력증에 빠져 열정이 서서히 소진되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박물관의 미라로 비유하며 이는 환멸과 슬픔을 불러온다고 했다. 교황은 문학 작품의 표현을 이용하여 당신의 생각을 호소력 있게 전달했다. 환멸과 슬픔은 악마의 가장 귀중한 영약”(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교황은 힘주어 이렇게 강조했다. “복음화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5) 무익한 비관주의는 안 된다

승리한 예수님을 따르는데 무엇이 두려운가?

 

약속된 승리는 꺾이지 않는다

요한 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서 잠시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도 하셨다. 물론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시 나타나면 그 누구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죽음을 정복한 승리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마지막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들이 세상에서 고난도 받겠지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더 이상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분은 영원한 승리자이고 그분의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이 될 것이다. 악인들이 득세하고 악행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맹위를 떨칠지라도 최후의 승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말씀이다. 그러니 인내하고 이미 승리자로 행세하며 악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말씀이다.

교황은 이 종말론적 기쁨을 잃지 않도록 우리 신앙인들에게 확신을 준다. 세상의 악과 교회 안의 크고 작은 스캔들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악이 그리고 교회의 악이 우리의 헌신과 열정을 줄이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악을 우리의 성장을 돕는 도전으로 받아들입시다”(84).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빛의 자녀인 우리들은 더욱 굳건히 이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시련을 받으면 더욱 강건해지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교황은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도 인용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전진해야

교황은 현실 세계의 어둠을 직시하였다. 서구 사회의 일부에서 확인되는 영성의 사막화’, 즉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적 뿌리를 없애버리면서 하느님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와 중동 지역의 잔혹한 현실을 언급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에 대한 잔인한 살인과 추방으로 2000년 넘게 이어온 신앙의 터전에 이제 신앙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우리 신앙인들이 이와 같은 사막한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도록 간곡히 당부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강론을 인용했다. “바로 이 광야, 이 공허에 대한 체험에서부터, 우리는 믿는다는 것의 기쁨을,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막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자신의 삶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늘 깨어 있으면서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86).

교황은 우리를 비관론자로 만드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누구도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없습니다. 확신 없이 싸움을 시작한 사람은 이미 싸움에서 절반은 진 셈이고, 자신의 재능을 묻어 버린 것입니다. 설령 우리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85). 우리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힘이 나타난다고 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따라서 우리는 약한 자들이 아니다. 이미 충분한 은총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을 전율과 공포로 떨게 만드는 전투 요원들이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언제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악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온유함으로 우리는 이 깃발을 들고 갑니다”(85).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희망을 빼앗기지 맙시다!”(86).

아름다운 동해안의 화진포를 향해 가다가 어느 군부대 앞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겨 놓고 싸우는 부대.” 돌아올 때에는 양구 쪽의 최북단 지역을 둘러보았는데, 이번에도 군부대 앞의 글귀가 관심을 끌었다. “적을 전율과 공포로 떨게 만드는 부대.”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 이겨 놓고 싸운다는 뜻이다. 싸우기 전에 이미 적의 숫자와 무기와 병법과 예상되는 공격 방법을 파악했고 우리 병력과 화력으로 승리할 수 있는 방법까지 준비되었다면, 전투의 결과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오직 승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겨 놓고 싸우는 부대이다. 이 정도면 겁 많은 병사도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으로 전장에 나아갈 것이다. 이렇게 준비된다면, 이런 지략을 지닌 장수(將帥) 밑에 있다면, 병사들은 용맹스럽고 담대해질 것이다. 승리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그야말로 적을 전율과 공포로 떨게 하는 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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