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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84) 희망의 순례자인 교회 희망 찾아 길 떠나는 순례자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9|조회수39 목록 댓글 0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84) 희망의 순례자인 교회

희망 찾아 길 떠나는 순례자

 

2025년 희년을 맞아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떠나며, 필자는 희년의 주제인 희망의 순례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 주제에는 교회가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간직해야 할 두 단어가 담겨 있다.

먼저 희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희년의 취지를 밝혔다. “다가오는 희년은, 우리가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쇄신과 새로 태어남을 미리 맛보게 하는 희망과 신뢰의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희년의 표어를 희망의 순례자들로 선정한 이유입니다.”

교황은 2014년 시복식을 기해 한국 교회를 방문했을 때도 한국 주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기억의 지킴이,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 주십시오.”

교황이 희망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이 시대가 어느 때보다 희망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력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기아와 감염병·자연재해 등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나고 있다. 경제와 정치의 위기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혼란을 겪고 있다. 암울하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많은 젊은이가 절망에 빠져 있다.

한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이유는 인간 삶에 나타나는 폭력성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와 상처, 인간 삶의 연약함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공감을 촉구하였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글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 준 것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망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가 위기에 처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교회로서는 더없이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교회는 인류가 염원하는 것보다 더 큰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는 희망으로 구원받은 존재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또한 교회는 언제나 희망을 찾았고, 자기가 찾은 희망을 증언하는 존재였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바로 그 희망을 오늘날 다시금 증언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희망을 찾지 않는 교회, 함께 꿈을 꾸지 못하는 교회, 희망을 증언할 수 없는 교회는 세상에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교회다. 다행히도 성령의 활동과 신앙인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계속해서 희망의 증인이 되어 세상 곳곳에서 희망의 여명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순례여야 한다. 희망은 찾는 사람, 궁리하고 모색하는 사람에게만 밝아오는 여명이다. 동방의 박사들이 잃었던 별을 찾아 다시 길을 재촉했을 때 별이 다시 떠오른 것처럼(마태 2,1-12 참조)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찾아 길을 재촉하는 순례자들이다.

희망이라는 단어에는 인간 삶에서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삶의 위기와 시련 그리고 인간 스스로는 찾을 수 없는 해결책. 그러나 바로 거기서 희망은 빛을 발한다. 희망은 우리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우리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향하도록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련을 딛고 희망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며, 교회 모든 구성원도 그들의 뒤를 따라 희망을 찾아 떠났던 순례자들이었다. 그렇기에 희망의 순례자는 바로 우리 각자의 이름이다. 그리고 희망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우리가 바로 세상에는 희망인 것이다. 2025년 희년을 희망차게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영성의 샘] 온전한 봉헌

 

본당에 오랜만에 부임하여 사목 생활을 하며 좀 더 깊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안전하고도 티 없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레지오 훈화를 준비하면서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다.”(‘레지오 교본3)라는 대목을 접하며 왜 성모님의 군단에게 꼭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강력하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성모 마리아의 깊은 겸손’, ‘온전한 순명’, ‘천사 같은 부드러움’, ‘끊임없는 기도등의 성덕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머물렀다.

그때 문득 나의 마음속에서는 단순한 봉헌이 아니라 온전한 봉헌이라는 마리아의 삶이 그려졌다. 사실 교회 안에서 봉헌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흠숭이다. 그분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그분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믿음 말이다. 그래서 나약한 인간은 봉헌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최상의 이끄심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며 감사를 드린다.

첫째로, 성모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시작되었다. 늙은 요아킴과 안나는 가장 예쁜 나이의 귀여운 딸을 봉헌해야 했다. 교회는 바로 이날을 마리아가 주님께 봉헌된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지낸다. 이렇게 마리아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봉헌되도록 맡겨졌다.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전통은 자녀들을 인간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돌려드림으로써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구원 계획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인간인 부모에 의해서 태어나지만 그 이후에는 주님의 손길이 거두어 주신다.

둘째로, 성모 마리아 자신의 봉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성모님의 자기 봉헌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어디일까? 그 대목은 단연코 예수님의 탄생 예고(루카 1,26-33)’ 장면이다. 인간적으로 보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앞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의 삶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전해졌을 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온전한 순종의 봉헌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심장이 찔릴 아들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당신 심장도 이미 꿰찔리시며 아들을 인류를 위해 내어주신 봉헌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 아들을 온전히 자신과 함께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셋째로,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에서 아름다운 모습의 본질이 나온다. 화가들이 그리는 마리아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젊고 아름답고 빛나는 성모님의 모습이다. 18세기 이탈리아 나폴리의 화가 사르넬리의 작품으로 몬테까시노 분도 수도원에 소장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보통 그렇게 표현한다. 다만 성모님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온전히 봉헌된 모습, 아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깊이 품고 묵묵히 따르는 모습,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고 바라보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성모님의 모습은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 앞에 온전히 봉헌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해 신성한 것이 돼

이처럼 모든 신심 가운데에서 우리를 예수님께 가장 잘 봉헌하게 하고, 친밀하게 일치시키는 신심은 바로 마리아의 온전한 봉헌의 신심이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봉헌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께도 봉헌하는 것이 된다. 참으로 모든 피조물 가운데 마리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친밀하게 일치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완덕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께 온전히 삶을 봉헌하는 데에 있다.

저 자신도 사제 생활을 처음 시작하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상본과 함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성구로 삼아 항상 봉헌의 삶을 살고자 약속했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지만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해 더 몸부림친다. 그래서인지 요즘 더욱더 마리아처럼 나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지 깊이 되돌아보며 신앙의 철이 들어간다. 그리고 나의 봉헌 생활이 오로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가는지도 성찰한다.

그렇다. 우리의 온전한 봉헌의 삶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하여 신성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성모님의 군단이 마리아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근거이다.

 

 

 

 

 

[영성의 샘] 양심 성찰과 부활의 기쁨

마음을 금지하라!

1982년 김현준, 민해경 듀엣이 부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나오자마자 학생들의 열화 같은 지지를 받아 가요 프로그램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부모 뜻대로만 인생을 살 수는 없다는 가사가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노래가 돌연 방송과 음반시장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아이들에게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는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정부 당국이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 나올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법과 제도로 묶어 놓을 수 있을까요? 노래 한 곡 못 듣게 한다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얌전한 모범생이 될 리 없을뿐더러, 국가가 국민들을 불신하며 마음속까지 통제하겠다는 태도는 영 마뜩잖습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하려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사사건건 간섭하며 이것저것 잡아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적지 않지요. ‘헬리콥터 부모같은 신조어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인간을 믿으시는 하느님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창세 1,26-27)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양을 닮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를 닮은 자녀라면 무릇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 기질, 습관 같은 것들도 닮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품격과 존엄성, 관심과 생각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닮아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 존엄과 자유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7)

여기서 하느님 말씀의 방점은 단연코 모든 나무에서 따 먹어도 된다는 허락에 찍혀 있습니다. 최소한의 선만 지키되,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라는 신뢰와 사랑의 말씀이지요. 이 말씀이 통제와 금지의 말씀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일구고 돌보는 일을 맡겨 주시거나(창세 2,15), 협력자를 만들어 주실 리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인간이 손대지 말아야 할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그냥 두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불신하셨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 너희들이 잘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너희를 못 믿을 존재로 여기지 않겠다. 너희들이 내 말을 거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거야하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열매를 따 먹고 난 후에 하느님께서 곧장 추방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회를 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죄를 짓고 숨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자녀가 사고를 저질렀을 때 근심 어린 모습으로 어쩌다 그랬느냐고 묻는 자상한 부모님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용서하러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거절하고 서로를, 또 피조물을 탓하다가 낙원에서 추방당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다가오시는데, 사람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도망가는 형국입니다.

고해성사는 화해와 치유의 성사

올해 3월은 회개와 보속의 사순시기와 부활의 기쁨이 이어지는 달입니다. 주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성삼일로 절정에 달하는 신비를 더 잘 묵상하도록 교회는 판공성사를 받게 합니다. 문제는 이 성사가 부담스러워서 신앙을 멀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다가오실 때, 자기 죄의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화해의 기회를 차 던져 버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지요.

고해성사를 피하게 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 사목 경험을 돌이켜 보면 양심 성찰에서부터 걸려 넘어지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성찰을 하자면 많은 분들이 먼저 자신의 죄와 잘못부터 살핍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성찰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마음을 열기보다 자신에게 묻은 티끌과 흠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강박관념과 세심증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성사를 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모습에 자기혐오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용서하시는 하느님, 잘못을 저질렀어도 다시 일어나서 존엄과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양심 성찰의 첫 단계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할 거리를 찾아보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족한 면이 있어도 또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나를 알게 모르게 도와주었던 많은 형제자매들,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감사, 그렇게 감사할 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잘못을 성찰하는 일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잊고 혼자 사는 세상인 것처럼 착각했구나.’, ‘내 옆에 있어 준 형제자매들에게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내가 채권자나 된 듯 행세했구나.’ 같은 깨달음이 따릅니다. 고백과 보속은 그런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겠지요.

고해의 기쁨, 부활의 기쁨

고해성사는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꺼내 고백함으로써 심리적 후련함을 느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 정산하듯이 한 번씩 털어 보는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존엄하고 자유롭게 낳으신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는 일이고, 우리가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서 기쁘게 길을 가도록 바라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일생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리스도교 정신이 충만한 작품으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던 미우라 아야코 작가는 지금껏 절망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내일은 온다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내일일지는 몰라도 어쨌든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하루다.”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께 기쁘게 나아갈 수 있다면, 부활을 통해 선사 받는 새 생명의 기쁨도 더 벅차게 와 닿을 것입니다.

 

 

 

 

 

[영성의 샘] 예수 성심 대축일과 성심성월

1. 예수 성심

성심은 가톨릭 신앙인이 아니라도 한 번쯤은 들어본 단어일 것입니다. ‘성심병원이나 성심약국처럼 유독 병원이나 약국 이름으로 많이 쓰는 말이지요. 성심(聖心), 거룩한 마음이라 하면 종교적인 뜻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막상 뜻을 설명하자면 난감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다음 금요일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유월 내내 성심성월 기도를 바칩니다. 매달 첫 금요일에 바치는 성시간도 예수 성심께 봉헌된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심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 신비의 어떤 면을 기념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성녀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게 환시를 보여주셔서 성시간을 지낸다는 역사적 유래에 대해서는 많이 듣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했나 봅니다.

2. 심장의 의미

예수 성심은 영어로 Sacred Heart라고 씁니다. 마음 대신에 거룩한 심장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백성들, 나아가 서구 문화는 심장에 특별한 의미를 뒀습니다. 서양 학문 전통의 큰 기둥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에 영혼이 머문다고 주장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였습니다. 서양 의학의 근간을 세운 갈레노스 역시 인간 영혼이 심장에 머문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심장은 단지 하나의 장기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이 담긴 결정체로 다뤄졌던 것이지요.

3. 심장과 갈비뼈

구약의 전통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창세기 2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실 때, 사람 몸에 있는 3백 개가 넘는 뼈 중에서 하필이면 갈비뼈를 빼서 만드셨다지요. 왜 하느님은 튼튼한 다리뼈나 두개골이 아니라 기침만 잘못해도 부러지는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을까요?

어떤 이는 갈비뼈가 하나쯤 없어도 별 지장이 없는 것이라서 그러셨을 것이라고 합니다만, 성경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먼저 창세기 220절은 홀로 있는 인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혼자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을 상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로운 인간입니다. 이 인간에게 짝이 생기려면 먼저 필요한 일은 닫혀 있는 마음을 열고 빗장을 푸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이 쉽지 않으니 하느님께서 아담, 곧 사람을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를 빼내서 협조자를 만들어 주십니다. 심장을 둘러싸는 갈빗대를 빼셨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심장, 영혼의 거처인 심장을 둘러싸던 빗장을 풀어주셨다는 이야깁니다.

또 이렇게 빼낸 갈빗대로 사람의 협력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이 서로에게 서로 심장을 보여주고 또 보호해 주는 관계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자기 세계에 꽁꽁 매여 사는 사람에게는 협조자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상대가 없는 삶입니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라고 불리기 민망한 모습이지요. 사람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온전한 삶을 누리려면, 자기 심장을 감싸고 있던 갈빗대를 적어도 하나쯤은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고 사랑받는 협조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은 삶이고 하느님께서 뜻하신 삶입니다.

4. 상처와 심장

예수 성심의 신비는 바로 그런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심장을 드러내신다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옛 신앙인들은 예수 성심을 늘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와 함께 생각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찔리신 그 상처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심장, 예수님의 전 존재, 가장 내밀하고 본질적인 그분의 인격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문이시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을 때 여러분에게 그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무엇이 흘러나왔는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들어가고자 하는 곳을 선택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로 여러분은 정화되고 그 피로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설교집, 311,3)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중세기에 특별히 두드러졌습니다. 베르나르도, 보나벤투라, 루갈다 성인같이 학식과 성덕으로 유명한 많은 성인들이 이 신심을 발전시키고 권장했습니다. 성인들은 예수님의 상처를 드러난 그분의 심장에서 자비의 자리, 약속의 땅, 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신심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발전을 거듭합니다. 얀센주의자들이 하느님의 엄격한 심판을 주장하였을 때에,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효과적인 대응책이 되었고, 신자들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의 성심으로 상징되는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유독 하느님의 심판을 강조하면서 엄격한 규율과 규칙만을 강조하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통해 당신의 심장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일깨운 것이 예수 성심 신심이었던 것입니다.

5. 상처를 통해서 마음을 열기

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도 한 번쯤은 서로 마음 상할 일이 있겠지요. 성향이 다르고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한 단체를 통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주고받는 말 속에 서로 상처를 줄 일도 생길 수 있고, 또 그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마음의 벽을 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닫힌 마음을 규칙이나 규율 같은 것으로 억지로 뚫어 보려고도 합니다.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하려고 법과 규칙을 앞세우는 경우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심성월에 우리에게 상처 입은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그 상처를 통해서 당신의 심장을 열어 보이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높이 세웠던 내 마음의 벽을 다시 보게 합니다. 인간은 상처를 통해서 서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심장을 드러내고 보호해 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영성의 샘] 묵주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동반자

 

첫영성체를 하던 날 새하얀 5단 묵주와 로사리오의 성모님 상본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묵주는 항상 주머니 한자리를 차지하는 필수 소지품이 되었습니다. 본당 주일학교에서 신앙학교를 가면 늘 하던 조별 게임이 있었는데, 각자 몸에 지닌 소지품들을 모두 꺼내 일렬로 늘어놓고 그 길이를 재서 가장 긴 팀이 승리하는 게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한바탕 주머니를 뒤지면 별의별 물건이 다 나오는데 하다 하다 휴지 조각이나 껌 종이까지 소지품이라 우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내 주머니의 5단 묵주는 가장 유용하고 강력한 승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기억에 묵주기도를 매일 열심히 바쳤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묵주는 항상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묵주가 심심한 손을 달래는 장난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지만, 시험 때 책상 위에 얹어둔 묵주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대신학생이 되고서야 매일 시간에 맞춰 묵주기도를 바치게 되었고, 침대에 누워 묵주기도를 바치며 잠을 청하는 것이 루틴이 되었습니다. 가끔 묵주를 손에 쥔 채 잠이 들어 뒤척이는 바람에 사슬로 묶어진 묵주가 동강동강 잘려 못쓰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내가 머무는 곳 어느 곳에나 묵주가 한두 개는 놓여 있고, 주머니에 항상 함께하는 소지품이 된 묵주는 산책의 동반자이고, 걱정의 위로자가 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묵주가 병자성사의 선물로 교우들에게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묵주는 그리스도 신자의 위로자이며 동반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항상 주머니에 있어야 하는 것 중의 하나이며, 없으면 내 영혼이 무언가 빈 것 같이 느껴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천주교대구대교구청 경내에는 성모당 성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마사비엘 성모 동굴을 본떠서 만들어진 이곳에는 매일 수많은 교우들의 방문과 묵주기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특이 성모 성월과 묵주기도 성월에는 더욱 많은 교우들이 방문하고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모당은 대구교구의 시작(1911)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지입니다. 당시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님께서는 부임 직후 루르드의 성모님을 교구 주보로 선포하고, 성모님께서 주교관과 신학교를 건립하고 주교좌성당을 증축하도록 도와주시면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닮은 성모동굴을 지어 바치겠다는 허원을 드린 바 있었습니다. 당시 가난하던 교구의 사정에 이 같은 큰일을 동시에 이루기란 꿈같은 희망일 수도 있었으나 많은 분들의 기도와 희사 덕분에 모두 이룰 수 있게 되었고, 1918년에 성모당 건립을 완공하여 봉헌하였습니다. 성모당 동굴 위에 원죄 없으신 잉태께 바치는 허원에 의하여라는 라틴말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성모당을 봉헌하게 된 뜻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가 이러한 허원의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인도하기도 합니다.

묵주는 바로 우리들 간절함의 동반자

원죄 없으신 잉태께 바치는 허원에 의하여(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라는 이 허원의 말씀은 우리가 지내는 묵주기도 성월의 기원과 의미와도 닿아 있는 말씀입니다. 1571년 터키 함대의 침공에 적의 절반도 못 되는 병력으로 싸워야 했던 절박한 상황에서 비오 5세 교황은 온 가톨릭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교황의 호소에 따라 교황님과 성직자, 신자들은 물론 함대에 있는 장병들도 전심으로 묵주기도를 바쳤는데, 1571107일 벌어진 레판토 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자들과 교회는 이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성모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하여 1572107일을 승리의 모후 기념일로 제정하였고, 1960년 교황 요한 23세는 107일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1883년 레오 13세 교황님께서는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묵주기도 성월은 우리 허원의 간절함이 드러나고, 또한 그 허원이 성모님의 전구에 힘입어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는 특별한 시기라 생각합니다.

매일 사무실을 오가는 길이나 기도를 위해 성모당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에서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들 손에 정갈하게 쥐여 있는 묵주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허원을 갖고 있을 것이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습에서 허원의 간절함이 배어 나옵니다. 허리가 굽은 어느 노 수녀님의 손에 들려진 묵주도, 양팔을 들고 기도하는 어떤 어머니의 묵주도 모두 그들의 간절함의 동반자들입니다. 우리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묵주는 바로 우리들 간절함의 동반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묵주기도 성월을 지내면서 그 동반자가 책상 서랍이나 주머니에만 있지 않고 항상 내 손에 들려 있고, 그래서 우리 삶이 원죄 없으신 잉태께 바치는 허원에 의하여(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은총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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