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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말씀의 우물] ‘나’(Adam, 사람)는 누구인가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0|조회수29 목록 댓글 0

[말씀의 우물] ‘’(Adam, 사람)는 누구인가

사람의 아들아’(히브리어 Ben-Adam, 벤 아담)라는 표현은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만 100여 번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생로병사, 곧 생성 소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에 비해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아람어 Bar-Enash)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사람의 아들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가 섬기게 될 영원한 임금님을 뜻합니다.

이미 전기 유다교 전통에서부터,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이분이 바로 다윗 집안에서 나올 구세주(메시아)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네 복음서에서도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본디 사람(Adam, 아담)은 영원하신 분을 닮아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이어서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자손이 번성하도록 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잘 가꾸고 다스리도록 축복해 주십니다.(창세 1,28 참조)

악마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한 첫 인간은 그분을 피해 숲속에 숨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 아담(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히브리어 Ayekah)”(창세 3,9)

이 물음은 그분께서 어제도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실존 전체를 꿰뚫어 보시며 던지시는 그분의 물음은 실은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축복의 주인공들입니다. 나아가 첫 조상 아담이 지은 원죄의 늪에서, 세례성사로써, 그리스도를 입은 새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5)

바오로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2코린 5,17)

세상에서, 온 우주를 통틀어 ()’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잘 가꾸어 가도록 우리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이제 우리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결법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먼저 의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깨달음과 함께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세 율법의 초석으로 가르치십니다.(마태 22,37-39 참조)

우리의 생각과 능력만으로 무슨 일을 하기보다는, 다음 말씀으로 기도드리며 일을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양과 염소

98세 수녀님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여러 수녀님들이 베닐데 수녀님은 벌써 천국에 계실 거야.”라고 했습니다. 저도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큰 설교 다섯 편 가운데 마지막은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설교입니다. 그 내용을 다루기 전에 21~24장의 간략한 줄거리를 잠시 살펴봅시다. 21장에서 예수님은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22장은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이고, 23장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내용입니다. 24장에서는 종말을 앞두고 일어날 재난들을 예고합니다. 그다음 25장에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를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 첫 장에서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맞아들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였고, 헤로데와 악마는 그분이 오시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충돌이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21,9)라고 환호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렇게 외치는 아이들을 불쾌해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늘 나라를 기다리고 메시아가 오실 날을 계산하고 준비하는 사람들 같았지만, 막상 그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고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하시는지 따졌습니다. 사람들이 두 부류로 갈라지는 것이 보이시지요?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입니다. 성전을 장사 수단으로 삼고 그 덕분에 살아가지만, 결국 예수님께 쫓겨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의 탁자는 둘러엎지 않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는데, 이 사람들의 탁자는 둘러엎으셨습니다. 이들은 성전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성전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2장 혼인 잔치의 비유에는 초대를 거부하고 오지 않는 이들과 뜻밖에 잔치에 오게 되는 이들이 나오고, 또 그중에도 준비 없이 왔다가 쫓겨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23장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선자라고 일컬어지고, “불행하여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단순한 악인들보다 남들 눈에 의인으로 보이려고 가장하는 이들이 더 위험한 듯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황폐해질 걸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23,37)라고 탄식하십니다. 그렇게도 찬양받던 하느님의 도성이, 그 성전이 다 무너지리라고 예고하십니다. 24장에서는 그날을 앞두고 닥칠 환난들이 제시되는데, 그날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인이 식솔을 맡긴 종처럼, 밤에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길 떠난 주인을 기다리는 착한 종처럼, 언제 심판이 오더라도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25,32) 사람들을 갈라놓으시는 날이 예고됩니다. 하늘 나라를 차지할 사람들과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갈 사람들이 나뉩니다. 오른편에 선 사람들이 있고, 왼편에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며 매일을 살아간다면, 지금 종말이 닥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 저녁 천국에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우물] 혜성처럼 나타난 여인

유딧은 어떤 기적이나 외부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지혜와 기도와 덕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 속에 유다 왕국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원로 우찌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 13,18)

이 유딧 칭송은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천사 가브리엘의 성모 마리아 찬송과 맥을 같이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루카 1,41-42) 일찍이 성 예로니모는 유딧을 훗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여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울러 우리 신앙인들은 유딧처럼 악마와 죄(폭력과 전쟁)머리를 잘라 내야’(유딧 13,7-8 참조) 한다고 했습니다. 유딧은 미인계를 쓰지 않고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품위 있게 행동하며, 매사에 철저하고, 치밀한 계획 속에 자신과 민족의 정당방위로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입니다.

고통과 재난은 어디서 올까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고통과 재난을, 흔히 율법을 어기거나 잡신 공경’(에제 36,18 참조) 등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데 대한 징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유딧기와 욥기에서는 고통과 재난이 우리 자신이나 민족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명백히 밝혀줍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도 시험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가까운 이들을 깨우쳐 주시려고 채찍질하시는 것입니다.”(유딧 8,25-27)

유딧기는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전해주는 책이 아니라 이를 재해석해서 교훈을 주고자 하는 해설서 미드라쉬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그 핵심 줄거리는 실제 사건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유딧기의 주요 신학 몇 가지를 짚어 봅니다. 우선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지고의 하느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인간에게, 곧 개인 또는 민족에게 허락하신 시련의 기간이나 범위를 그 누구도 예측하거나 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분의 섭리와 우리 미래는 작은 요인들을 통하여 실현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유딧기 안에는 위로부터 오는 기적이나 아무런 사건도 보이지 않습니다. 베툴리아 주민 모두가 벌벌떨 때 원로 우찌아는 제안합니다. “만일 닷새가 지나도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응답)이 오지 않으면”(유딧 7,31) 적군에게 항복하고 성을 내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극한 상황에서 유딧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또한 유딧기에서는 율법 준수의 테두리에 얽매이거나 선민 이스라엘 보호에만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율법이 금하는 암몬족 아키오르(신명 23,4 참조)를 이스라엘 공동체로 받아들입니다.(유딧 14,10 참조)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유딧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만난 신약 성경] 밀과 가라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 마태오 복음서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긴 설교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5-7장의 산상 설교와 10장의 파견 설교를 보았습니다. 이제 마태오 복음서의 나머지 설교들을 보겠습니다.

13장에는 하늘 나라에 대한 설교가 나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그리고 그물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대략 알만한 내용들이지요. 이 비유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섞여 있음’ ‘불완전함입니다. 뿌려진 씨들이 모두 잘 자란 건 아닙니다.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면, 그 밭에는 가라지도 함께 자랍니다. 겨자씨나 누룩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습니다. 보물과 진주는 숨겨져 있습니다. 그물에도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섞여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25최후의 심판에 관한 설교와 함께 읽어야 할 거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섞여 있음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 섞여 있는 것들이 갈라질 날이 올 것입니다. 완성될 때의 하늘 나라와, 그날을 향해 가고 있는 하늘 나라의 차이라고 하겠지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을,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포하시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그 하늘 나라는 자라나는 씨앗처럼 존재합니다. 카를로 M. 마르티니 추기경의 말씀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가라지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라지가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하늘 나라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자신이 생각하는 하늘 나라와 지금 눈에 보이는 하늘 나라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복음 말씀에 맞추어 하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수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완성 때의 모습만이 아니라 밀가루 속 누룩과 같은 모습으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이 가라지를 한없이 내버려두시는 것도 아닙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13,30). 내버려두는 것은 수확 때까지입니다. 가라지로 그냥 살아도 되는 건 아닙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니 가라지로 살아도 불태워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가라지의 비유라는 짧은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도 입맛에 맞는 구절만 골라 읽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분명히, 가라지가 불에 태워질 것이고 나쁜 물고기는 그물에 들어왔더라도 밖으로 던져질 거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시 18, 교회 공동체에 관한 설교로 가 봅시다. 여기서는 되찾은 양에 대해 말하고,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무책임할 수 없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와 내가 함께 하늘 나라에 있으려면, 하늘 나라라는 씨앗이 온전히 자라날 수 있으려면, 그가 떨어져 나가도 괜찮은 건 아닙니다. 어린이같이 작은 사람이라고 그냥 버릴 수 없고,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라고 그냥 잃은 채로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중요하고, 또 하늘 나라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기 형식에 말씀을 담아

 

복음서가 생겨나던 상황이 루카 복음서 첫머리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루카 1,1) 그중의 하나가 바로 마태오 복음서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복음서 가운데 28장으로 가장 깁니다. 마르코 복음서가 16, 루카 복음서가 24, 요한 복음서가 21장이니까요. 그 정도 분량이면 처음부터 혼자 집필하기는 어렵습니다. 자료를 모아서 써야지요.

어느 자료일까요? 성서학계에서는 마태오가 마르코 복음서와 예수 어록을 바탕으로, 별도로 모은 자료를 엮어서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했다고 봅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는 내용만이 아니라 표현까지도 똑같은 부분이 많아서 공관(共觀) 복음서로 불립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에는 없는데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 함께 나오는 내용이 예수님의 말씀뿐이라 예수 어록으로 불립니다.

마태오복음 5장의 소제목은 다음과 같이 열거됩니다. 참행복(루카 6,20-23), 세상의 소금과 빛(마르 9,49-50; 루카 14,34-35), 예수님과 율법. ( ) 안은 이와 유사한 성경 구절이 어디에 나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로 보아 참행복은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예수 어록이고, ‘세상의 소금과 빛은 세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내용이고, ‘예수님과 율법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서부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까지 예수님의 공생활을 전기(傳記)라는 틀로 처음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마르코 복음사가입니다. 오늘날의 전기는 주인공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고대의 전기는 주인공의 성격을 고정해 놓고는 말씀과 행적을 모아 주인공의 명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소설 춘향전에 나오는 변 사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악인의 전형으로 제시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전기의 특성을 복음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복음서는 우리에게 알리는 기쁜 소식이 담겨 있다는 거죠. 복음서를 읽을 때나 들을 때나 기쁨으로 맞이하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 기쁨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생동감 있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마태오는 마르코가 세워놓은 전기의 틀에 예수 어록을 넣어서 다섯 개의 행적과 말씀으로 교차 편집했습니다. 산상 설교(마태 5,1-7,29), 파견 설교(마태 10,1-11,1), 비유 설교(마태 13,1-53), 교회 설교(마태 18,1-35), 심판 설교(마태 23,1-25,46) 등 다섯 번의 설교를 다섯 번의 행적과 번갈아 제시합니다. 더불어서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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