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6)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관계의 수용 '톡'하는 손가락 끝에 사랑의 온기 전해질까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0조회수38 목록 댓글 0[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6)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관계의 수용
'톡'하는 손가락 끝에 사랑의 온기 전해질까
오늘날 사람 사이의 소통 수단의 발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원하는 사람끼리의 소통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도 손쉽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 관계망을 통해 원하는 정보도 안방에서 온 세상을 주유하며 얻을 수 있다.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걱정도 있다. 이와 같은 편리함이 낳은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교황은 권고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적극 수용하도록 촉구하였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순기능을 잘 이용하길 바라셨다.
진정한 소통의 부재
그렇다면 우려하는 역기능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소통 수단의 발전이 진정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제적 만남과 나눔을 증진시키고 있는지 묻고 싶다. 사람 사이의 친교를 가능케 하고 서로의 완성에 기여하고 있는가? 소외된 사람까지 아우르며 모두의 행복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되묻고 싶은 것이다. 혹 그 역기능 때문에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원치 않으면, 리모컨 스위치 하나로 외부 세계와의 단절이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이를 일상화하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지 않는지 조심스레 묻고 싶다. 사람 사이의 실제적 만남과 사귐의 불편을 인내하며 감수하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남의 세계를 자신의 의식 속을 들여다보듯 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살피면서도, 실제의 세계에서는 서로 눈을 바라보며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여 이를 회피하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판단이 기우(杞憂)였으면 좋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혼자만의 세계 속에 갇혀 살고 있는가? 스마트폰 속의 세계에 빠져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건널목을 건너면서도 손바닥에 뭘 쥐고 거기에 열중한다. 학교 벤치에 앉은 학생들끼리도 각자의 세계에 빠져 대화가 없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온 세상이 중독되어 가면 갈수록, 사람 사이에는 심각한 관계 단절이 체험되고 있다. 교황은 이를 우려했다. “많은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서 벗어나 자기 사생활의 안락함 속으로 또는 가까운 친구들의 좁은 울타리 속으로 달아나며 복음의 현실적인 사회적 측면을 포기하고자 합니다”(88항).
복음을 전하려면 얼굴을 마주 봐라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가? 교황은 말한다. “복음은 과감히 다른 이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나라고, 곧 그들의 육체적 현존과 만나라고 끊임없이 초대합니다. (…) 강생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참 신앙은, 자기 증여, 공동체의 소속감, 봉사, 그리고 다른 이들과 직접 만나 이루는 화해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온유한 사랑의 혁명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88항).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음을 말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교황은 현대 사회의 유사 영성 운동의 폐해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면서 ‘영적 소비주의’ 그리고 ‘병적 개인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타인과의 관계가 배제된 운동들이다. 오로지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존재하는 직접적이고 개인적 관계밖에 없다. 뉴에이지 운동, 기 수련, 마음 수련 등은 이미 우리 사회를 한번 흔들어 놓은 것들이다. 교황은 현대 사회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나타나는 이유에 주목했다. 진정한 하느님을 만나고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힘써야 함을 역설했다(89).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대중 신심’을 제시했다.
대중 신심으로 신앙의 갈증 풀어야
대중 신심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인 대중의 신앙심 표현을 말하는 것으로 성인들의 유해 공경, 성당 방문, 성지순례, 거리 행렬, 십자가의 길, 종교 무용, 묵주기도, 메달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신심 행위를 의미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74항 참조). 교황은 대중 신심의 고유한 형태는 관계를 증진하는 힘이 있기에 개인주의적 도피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했다(90항). 사목자들이 이 대중 신심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길 원했고 적절하게 활용하기를 부탁했다. “대중 신심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성인들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심들은 몸과 얼굴이 있습니다”(90항). 한국 사회 안에서 대중 신심의 활성화와 그 적극적 표현 방법 그리고 신학으로의 발전은 깊이 연구해볼 과제라고 생각한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라 했다. ‘함께 사는 불편’을 감수하라고 했다. 하느님 사랑에 의탁함으로써 이 불편은 극복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형제의 일상의 거룩한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 치유된다. 이것을 ‘신비적이며 관상적인 형제애’라고 했다. “또한 이 형제애는 하느님 사랑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고, 좋으신 아버지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입니다”(92항). 더불어 살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공동체를 빼앗기지 맙시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7) 영적 세속성은 안 된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자
교황 권고문 「복음의 기쁨」이 발표된 후, 많은 분이 그 내용을 읽고 감동을 글이나 강연을 통해 전했는데, 그 중 많이 인용된 용어가 바로 ‘영적 세속성’이다. 겉은 영적인 양 거룩하게 치장하고 그 내부에는 속된 세계의 추악한 탐욕을 담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죄악성을 고발하는 말이다. 권고문에서 교황은 직접 그 의미를 설명했다. “영적 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93항). 교황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바리사이의 태도가 바로 ‘영적 세속성’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자기 만족에 빠진 사람들
교황은 영적 세속성의 해악을 두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지적하였다. 첫 번째로는 특별히 유럽 사회의 관념적 사상의 틀 속에서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영지주의자’들을 지적했고, 두 번째로는 규범을 통해, 혹은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여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에 빠져 버린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도록 했다(94항).
첫 번째의 사람들, 즉 영지주의자들은 특정한 경험이나 사상이나 정보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이로써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고 마는 사람들이다(94항). 두 번째의 사람들, 즉 율법주의에 빠진 엘리트주의자들은 세상의 복음화에 투신하기보다는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토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해 버리는 사람들이다(94항). “두 경우 모두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참다운 관심이 없습니다. … 이러한 불순한 형태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다운 복음화의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94항).
사목 현장에 뛰어들어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으로 초대하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하며 눈물을 닦아주기보다는 탁상 공론을 사목의 전부인양 여기며 갑론을박하고 관념적 구원론에 도취되어 보내는 사람들 전체를 경계하도록 이르신 말씀이다. 그들은 온통 허영심에 빠진 자들이라고 일갈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알량한 권력에 만족하는 자들의 허영심을 부추기고, 또한 전쟁을 계속하는 군대의 병졸보다는 차라리 패잔군의 장군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허영심만을 키워 줍니다”(96항).
교황은 이들의 숨은 의도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보여준다. “이 음험한 세속성은 대립되어 보이지만 하나같이 ‘교회의 공간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지닌 수많은 태도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례, 교리, 교회의 특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 복음적 열정은 더 이상 없고 자아도취와 자기 만족의 공허한 쾌락만이 남게 됩니다”(95항).
종교적 겉치레를 벗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뒤에 전례 개혁이 있었다. 성령께서 교회 안의 공기를 새롭게 바꾸어 주셨다. 신선한 공기를 호흡한 교회 안의 하느님 자녀들은 건강하고 튼튼하게 성장하였고 자모이신 성교회 안에 새로운 자녀들이 수없이 새롭게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르페브르 대주교(1905~1991)였다. ‘성 비오 10세회’를 설립하여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과거의 라틴어 미사 전례 양식을 고집하였다. 교회로부터 최고 징계까지 받았으나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7년 7월 7일 자의교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을 발표하면서 이들을 다시 교회의 품으로 안으셨다. 이 자의교서는 성인이 되신 요한 23세 교황이 1962년 공포한 라틴어 미사 전례문에 따른 성찬 거행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꾸며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의회 후, 옛 전례 양식(Vetus Ordo)의 복원 문제와 같은 특별한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으로 베네딕토 교황님의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옛 전례 양식을 이념화시키거나 도구화시켜 그것만을 고집할 위험이 있기에 우려되기도 합니다”(「가톨릭 문화 생활」과의 인터뷰 중에서).
교황은 ‘영적 세속성은 안 된다’는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이 숨 막히게 하는 세속성은 성령의 순수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에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없는 종교적 겉치레 밑에 감춘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복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97항)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8) 우리 사이에 싸움은 안 된다
카인과 아벨 같다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특징은 사랑과 용서, 화해와 일치, 섬김과 나눔, 희생과 봉사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께서 그 가르침을 주셨고 모범을 보이셨다.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은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보잘것없는 질그릇 같은 우리를 선택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함을 우리 안에 담아 놓으셨는데, 그것이 우리 서로의 사랑과 용서, 화해와 일치, 섬김과 나눔, 희생과 봉사로 표현되고 있다.
비 신앙인들도 이것을 보고 존경심을 가진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첫 대면을 하게 되고 의지적 동의 과정을 거쳐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매력’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느끼고 호칭하며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특별한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머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세상의 모든 공동체 안에서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적 친교의 빛나는 매력적인 증인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얼마나 아끼는지, 그리고 얼마나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함께하는지를 모든 이가 보고 존경하도록 하십시오”(99항).
교황은 이어 예수님 말씀을 인용해 간곡히 당부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공동체 안에 벌어지는 싸움들
그럼에도 불구하며 우리는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교황은 ‘우리들 사이에 싸움은 안 된다’며 이렇게 시작했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여러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까?…일부 그리스도인은 영적 세속성의 영향으로 권력과 특권과 쾌락과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며 이에 방해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툽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여 파벌을 만들고 경쟁 의식을 키웁니다. 그들은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교회 전체에 소속되기보다는 스스로 다르거나 특별하다고 여기는 이런저런 집단에 소속됩니다”(98항).
교황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그리고 여러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을 슬퍼하며 우리 사이에 싸움은 결코 안 된다며 이렇게 호소하였다. “일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심지어 봉헌된 사람들조차도 온갖 형태의 적대심, 분열, 비방, 모략, 중상, 복수, 질투, 그리고 자기들 생각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심어 주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실제로 마녀 사냥처럼 보이는 탄압마저 용인하는 것을 볼 때에, 저는 언제나 가슴이 미어집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복음화하겠다는 것입니까?”(100항).
삶의 매력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
‘복음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력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선교는 비 신앙인을 강제로 교회로 끌고 와 겁주어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매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보물이 ‘구원의 복된 소식’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소식을 전할 사명을 지닌 이들이다. 기쁨을 옷 입듯이 온몸에 입고,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매력이 감동으로 전달될 때,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들이 탄생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희생과 배려가 짙은 향으로 공동체 밖으로까지 전달돼야 한다.
싸움은 안 된다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을 돌아본다. 교황은 우리들 모두가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같은 배를 타고 같은 항구로 나아가는 공동체임을 강조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직자들끼리, 혹은 하느님 백성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존경심 없이 비난과 비방을 통해 상처를 입힌 사건들을 생각해 본다. 나쁜 표양이다. 서로 생각의 차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상대를 단죄하고 중상하여 교회를 분열시키고, 온갖 형태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말과 행동으로 모욕감을 주고 무례하게 상대에게 훈계하는 어조로 비난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우리 사이에 싸움은 안 된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29) 복음 선포
복음 선포, 성경 속 인물만의 몫이 아니다
교황은 제2장에서 현대 사회의 도전을 살펴본 후, 제3장에서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부여된 과업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완수되어야 할 사명에 대해 밝힌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것”(110항)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복음화 작업’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이와 같은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선포의 내용은 무엇이고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제3장에서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 선포, 즉 강론의 중요성과 의미 그리고 그 내용과 준비에 대해, 교황은 후반부에서 세밀하게 다룬다. 사목자가 모든 부분을 섬세히 살피도록 이끌며 책임을 강조한다.
제3장의 전반부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복음을 선포한다”는 내용으로 꾸며졌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예외 없이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제목과 함께 다음의 내용을 다루었다. ‘모든 이를 위한 백성’(112-114항), ‘다양한 모습을 지닌 백성’(115-118항), ‘우리는 모두 선교하는 제자이다‘(119-121항), ‘대중 신심의 복음화하는 힘’(122-126항), ‘개인에게서 개인으로’(127-129항), ‘복음화하는 친교에 이바지하는 은사’(130-131항), ‘문화와 사상과 교육’(132-134항). 구체적 내용을 차근차근 다루어 보겠다.
하느님 향해 나아가는 백성
교황은 먼저 ‘교회’의 최우선적 과업은 ‘복음화 작업’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교회는 무엇인가? 무엇으로 교회를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의 유기적이고 교계적인 ‘제도 교회’를 먼저 떠올릴 수 있는데, 교황은 그것 이상의 개념을 제시한다. 교회는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백성”(111항)이다.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순례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백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자녀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지상 여정을 순례하는 교회, 역사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 복음을 시대적 상황과 문화 속에서 선포해야 할 사명을 지닌 교회, 바로 그 교회의 ‘백성’을 의미한다.
순례의 종착지는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백성들은 자신들이 부름받은 시대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이와 같은 백성들의 움직임을 ‘순례의 여정’이라 표현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여정 속에서 만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며 만민을 ‘백성의 무리’(교회) 안으로 모으는 역할을 한다. 그와 같은 사명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십자가 짊어지고 여정의 끝을 향해
이 백성의 순례 여정은 지금까지 2000여 년이 흘렀다. 지나온 여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이 여정 속에서 겪게 될 박해까지도 각오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미 지나온 시간의 학습 효과도 크다. 그들은 순례의 여정이 가져다줄 모든 고달픔을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인식하고, 자신들이 선택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역사의 최종 완성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게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실 때에 이렇게 표현하셨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하느님 백성은 어느 시대이든지 하느님의 나라가 당하고 있는 폭행을 목격하고 그 아픔을 겪으며 살아왔다. 교회 밖에서 밀어닥치는 박해와 폭행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 내부에도 온갖 분열의 원인인 악이 언제나 존재했다. 지금도 끊임없이 분열을 획책하는 악한 세력들이 머리를 치켜들고 우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거친 표현으로 독한 기운을 이곳저곳에서 토해내고 있다.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30) 모든 이를 위한 백성
절망에 빠져 길 잃은 이들에게 복음의 빛을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권고문은 ‘복음의 기쁨’이란 말로 시작하는데(incipit),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1항).
죄와 슬픔에 빠진 현대인
지난 5월 13일에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산 자살자의 수중에는 다음과 같은 유서가 있었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철자가 틀린 것도 있지만,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기에, 그대로 옮겨 보겠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수없이 내 머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살아있으니깐 살아가는 것 같다. 하기 싫고 힘들고 그럴 때 잠이라는 수면을 하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너무 편하다. 깨어 있는 게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인다. 내 자아감, 자존감, 나의 외적인 것들, 내적인 것들 모두 싫고 낮은 느낌이 밀려오고 그렇게 생각한다. 죽고 싶다. 영원히 잠들고 싶다.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박증으로 되어간다….”
왜 사는지, 존재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해 세상이 싫다고 했다. 깨어 있다는 것 자체를 고통스러워했다. 차라리 수면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편하다고 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냥 잠자고 싶다고, 그대로 지속적인 없음(無)으로 존재하고자 했다. 현대인의 내적 공허와 외로움 그리고 죄와 슬픔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현대인은 정신을 잃고 미쳐가고 있다. 그들에게 삶의 기쁨을 선물하고 인생의 절대적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답이다. 인류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분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음 선포이다.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다.
교회, 만민을 구원으로 이끌어야
하느님 백성으로 설명되는 교회는 만민을 위한 것이다. 어느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시대의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이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당신의 아드님과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설립하셨다. 따라서 교회를 구성하는 하느님 백성이 제구실을 다 하려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알려야 한다. 하느님 백성의 사명은 신분과 지위, 남녀노소의 구분과 차이가 없다. 누구나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때와 장소의 구분도 없다. 언제, 어느 때든지 기회 닿는 대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황은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타적인 엘리트 집단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113항).
따라서 이제 교회는 ‘구원의 성사’로서 하느님의 은총을 모든 이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은 이를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19).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 백성이 나타나기를 지금까지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이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탄식하며 고통 속에서 갈망하고”(로마 8,22) 있었다고 표현했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슬픔 가운데 울부짖고 있다는 것이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이는 구원의 도구로서 은총을 전달하는 교회를 통해 완성된다. 교회의 모든 백성이 그 책무를 완수할 때 가능한 것이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어둠으로 내려가야 하는 부담스러움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 내려가 복음을 선포하고 예언의 말씀도 전해야 한다.
고난을 겪어도 희망이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뛰어내려가 연대하고자 함은 교회의 참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결코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상처 입은 자들의 야전병원이 되어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그들을 밝은 빛이 머물고 있는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 세상의 죄악 때문에 깊은 내상을 입고 신음하며 악한 기운만 남은 그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 온전히 치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그와 같은 결과를 야기한 근원적 악을 뿌리 뽑기 위해, 큰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이 싸움은 십자가의 희생과 용서와 사랑의 싸움이다. 그들과 함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온갖 독한 말로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그들의 눈에서 기어코 피눈물을 쏟게 만들겠다는 복수의 싸움이 아니다. 지루하고 긴 싸움이 될 것이다. 가해자의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가 하나가 되는 날까지 계속될 싸움이다.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