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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티모테오 1서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1|조회수33 목록 댓글 0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티모테오 1

 

티모테오 1,2서와 티토서는 사목 서간으로 일차적으로는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사목자가 다른 사목자에게 교회의 조직과 사목 전반에 걸쳐서 쓴 편지입니다. 이 서간들, 티모테오 1, 티모테오 2, 티토서는 바오로의 권위를 빌리고, 티모테오와 티토라고 잘 알려진 인물들을 수신인으로 제시하면서 실제로는 당대 사목자들을 위한 권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서간들을 사목 서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세 서간의 주요 관심사가 바오로가 쓴 서간들과 같이 초기 교회의 열정적인 선교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세운 공동체의 관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신인이 개인이라 할지라도 서간의 내용은 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편지의 수신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티모테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면, 티모테오라는 이름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리스트라에서 46년경에 바오로 사도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50년경부터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로서 선교 여행에 동참하였습니다. 바오로의 대리인으로 테살로니카에 방문한 적도 있었으며, 코린토 선교에도 동참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형제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하느님의 협력자인 티모테오”(1테살 3,2), “믿음으로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모테오”(1티모 1,2)라고 이야기할 만큼 티모테오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11-2절은 티모테오 1서의 시작으로 여타의 바오로 서간들과 마찬가지로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에 보내는 감사의 내용이 없으며, 바오로의 사도직에 대해서 하느님의 뜻대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1,1)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도직과 그에 따른 이 편지가 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3-619절은 티모테오 1서의 본론으로 3가지 주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참 가르침과 거짓 가르침에 대한 구분입니다. 티모테오 1서가 작성된 1세기 말 즈음에는 영지주의와 관련된 여러 잘못된 생각이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두고서 신화나 끝없는 족보에 정신을 팔지 말라”(1,4)고 말하며 경고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율법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상기시킵니다. , 율법은 불경한 죄를 짓거나 불륜을 저지르는 등 죄인들을 단죄하고 그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율법 자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거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오히려 사목자들이 전해야 하는 건전한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알려주신 복음입니다. 그리고 율법 준수를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말하면서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거짓 교사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자신이 전하는 바를 믿고 성실히 지켜나갈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314-410절을 통해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율법 준수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를 실천했을 때 거룩해짐을 알려주고, 이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믿는 이들의 올바른 처신에 대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2장에서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세상을 등한시하며 살아가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올바른 삶의 모습,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제는 교회의 직무에 따른 규정과 지침입니다. 티모테오 1서가 작성된 1세기 말경 교회 공동체는 감독(주교 직분), 원로(사제 직분), 봉사자(부제 직분) 등 어느 정도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정통 교리를 지키고 신자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역할에 충실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밖에도 교회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를 말하면서 말, 행실, 사랑의 실천 등에서 모범이 되어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줄 것을 그리고 성경을 읽고 신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무엇보다 열심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품위가 있어야 하며, 부정한 이익을 탐내지 않고 흠잡을 데 없어야 합니다. 또한 신자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갖추며, 신자들로 하여금 가족을 돌보고 또 가족을 사랑하며 선행을 실천하도록 이끌고 홀로 남겨진 무의탁 과부들을 잘 돌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사제 직분에 해당하는 원로들에게 자신이 받은 직분을 거룩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직분에 따른 직무에 합당하게 잘못된 것은 꾸짖고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판단하며, 타인의 죄에 연루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자신의 행실을 돌보라고 당부합니다. 이처럼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진리를 수호하면서 흠 없이 살아가고 신자들을 존중하면서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620-21절은 맺음말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잘못된 지식와 망언 등에 사로잡혀 올바른 믿음에서 벗어난 이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믿음을 잘 지켜가라고 당부한 뒤 하느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축복의 기도를 바치며 편지를 마칩니다.

 

 

 

 

 

[말씀의 우물] 누구를 위한 성모송?

 

성모송은 성경 어디에 나올까요? 또 누구를 위한 기도문일까요? 우리가 미사를 비롯하여 기도를 시작하고 마칠 때 바치는 가장 짧은 기도문인 십자성호가 마태오복음 2819절에서 나왔듯이, 성모송 앞부분도 루카복음 첫 장에서 나왔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인사합니다. 뒤이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자,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모님께 찬미가를 읊어 올립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성모송 전반부는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인사가 합쳐져 이루어집니다.

성모송 후반부는 성모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며 주님께 올리는 기도와는 모양새가 다릅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는 베푸소서!”라는 형식으로 직접 청원 양식인 반면, 성모님께는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대신또는 우리를 위하여주 하느님께 전해달라는, 빌어달라는 전구기도입니다.

아울러 루카복음 첫 장에 나오는 두 여인의 만남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여인의 만남입니다. 그때 태중에서는 선구자 요한 세례자와 온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 만나십니다. 엘리사벳은 외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요한 세례자)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그렇다면 성모송은 누구를 위한 기도문인가요? 전반부가 성모님 찬가라면 후반부는 청원기도입니다. 여기서 지금(hic et nunc)’ 성모송을 봉헌하는 나 자신과, 믿는 이들과, 나아가 온 인류를 위한 기도입니다. 저희 죽을 때에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에게 쉴 새 없이 매 순간 한 발짝씩 다가오는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도록 주 하느님께 전구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저는 2001년 안식년 어느 날 성모송의 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 성모송은 우리 믿는 이들과 온 인류를 위하여 주 하느님께 빌어달라는 기도구나라는, 평범하면서도 깊은 뜻을 깨닫는 축복을 누리게 됐죠. 특히 이제(nunc)’우리 죽을 때에(et in hora mortis nostrae)’라는 표현 안에서 그저 쉼 없이 주님께 전구해 달라는 뜻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제(지금)’를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모송을 봉헌하는 우리는 성모님께 실로 엄청난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나와 우리 모두의 참 행복을 주님께 끊임없이 빌어달라는 기도니까요.

 

 

 

 

[다시 만난 신약 성경] 기적과 부르심

지금쯤 이렇게 진도를 나가면 언제 신약을 다 읽을까?’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번 주까지만 이렇게 천천히 걸어갈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계획이 없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교과서처럼 체계적으로 쓰지 않으려고 아무런 계획 없이 아무 책도 참고하지 않고 그냥 신약성경만 뒤적이며 쓰고 있습니다. 책갈피 사이에서 무엇인가 나타날 때까지 그냥 읽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마태오 복음 8-10장입니다.

기적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고치시고, 백인대장의 종을 멀리서도 고쳐주시고,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십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눈먼 사람과 말 못 하는 사람도 고쳐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낫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마태 8,16)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병자와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 나타난다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기도를 청하고 손길을 청하고 치유를 청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환영하고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 했을까요? 이 기적 이야기들 사이에 다른 색깔을 띤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지만,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기적 이야기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었기에, 그의 믿음을 칭찬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지 않은 유다인들에 대한 질책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이 마귀들을 돼지 떼 속으로 보내시자, 그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께 떠나가 주시기를 청합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9,2) 하시자, 율법 학자들은 속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적들만으로도 이미 예수님은 사람들을 평온하게 두지 않으십니다.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으려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다시 흔들어 놓으십니다. 그분을 따르겠다고 나서도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8,20)라고 하시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을 불러 파견하실 때는,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당신 제자들을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따라나서시겠습니까? 기적만 보고 쉽게 따라가려 했다면, 다시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8). 스승이 당하신 박해와 미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 거부를 생각하지 않고 따라나선다면, 곧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귀를 막을까요? 마태오 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오는 일어나”(9,9) 그분을 따라갑니다. 복음이 우리 귀에 들어왔다면, 우리가 마태오 복음을 읽고 있다면,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성경 다시 보기] 믿는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1. 얼마 전에 아는 지인이 어느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일 그 세례식에 참여하러 갔습니다. 그분은 연세가 80 중반이고, 옛날에는 수의사로 활동하셨고 지금도 가정형편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녀들도 다 잘 되어있어, 뭐 별로 아쉬운 것이 없는데, 그 연세에 새삼스럽게 신앙을 갖고자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분 친구분의 권면이 한몫하였고, 그분께 시집온 부인이 예전에는 신자였는데, 시가가 불교 집안이라 냉담을 했답니다. 그분이 예비자 교리에 나가자 그 부인도 같이 예비자 교리반에 빠지지 않고 나가서 그분이 영세하는데, 적극 협조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득 제가 평소에 가졌던 의문은, 어떻게 그분이 신앙을 갖기로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 자신의 결단인가? 아니면 주변의 권유 때문인가? 또는 하느님의 섭리인가?

2. 이런 생각이 들자, 또 다른 영세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저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라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강한 스트레스를 받자 건강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나에게 문득 찾아와서, “황 신부, 내가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노?”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법을 알려주었더니, 소속된 본당에서 혼자 영세하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퇴원하라 했는데, 그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서, “레지오단장을 하고 주일미사 때는 복사도 빠짐없이 하고 있습니다. 병이 믿음의 계기가 된 것일까? 그것도 하느님의 섭리일까?

3.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신자는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저의 질문에, “저는요,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예비신자를 모집하는 현수막을 보고 스스로 성당을 찾아가서 신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는 그냥 두어도, 언젠가는 제 발로 신앙을 찾을 테니까, 그때까지 하느님께서 기다려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4. 한 할머니는 대단한 불자였습니다. “반야심경도 줄줄이 외우십니다. 이분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이유는 자녀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니, “제삿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자신이 종교를 바꾸는 게 더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5. 우리 집안은 4대째 신자입니다. 제 선친이 살아계실 때, 몇 번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께서 신자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아버지는 아닐 것이다.” 하십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나 같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미리 가톨릭 집안에 심어놓지 않으면, 제 발로 스스로 신앙을 가지지 않을 것이니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하게 됩니다.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발간된 개창 가톨릭 성가1번으로 나오는 나는 믿나이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택하여 성회 안에 부르시니, 진심 감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스스로 결정하여 믿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나를 신앙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이 여러 가지 방법이나, 시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믿음은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10에도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여기서 믿어라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입니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또는 믿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나 자신의 결단 외에, 보이지 않는 내 바깥의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의 우물] 그분 이름을 거룩하게

 

구약과 유다 문헌에 주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첫째, 율법학자나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를 때 이스라엘 백성(믿는 이들)이 주님의 가르침과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레위 22,32; 신명 32,51; 이사 8,13 참조) 너희는 나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나의 거룩함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드러나도록, 너희는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레위 22,31-32)

둘째,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완성될 인류 구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뭇 민족이 보는 가운데 주 하느님께서 의로운 판관이며 구원의 완성자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계시하십니다.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에제 36,23)

스위스교회의 주보 성인 브루더 클라우스(1417~1487)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아인지델른 베네딕도 수도원 성지까지 약 50km를 성지순례 하는 동안 주님의 기도만 봉헌했답니다. 몇 번이나 바쳤을까요? 단 한 번도 못 바쳤다고 합니다.

놀랍지만 당연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며 기도하다 보면, 그 첫 소절 안에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될 듯합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야고 4,14)인 우리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느님께 감히 직접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클라우스 성인은 이런 물음을 놓고 아마도 10시간 묵상으로도 그 오묘한 신비를 한껏 깨닫기에는 결코 흡족할 수 없었을 듯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실상 지상 최고의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온 우주 안에 둘도 없이 단 하나뿐인 나를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를 어찌 몇 시간 안에 단 10%라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고해성사 보속으로 가끔 주님의 기도를, 뜻을 생각하시면서 천천히 한 번 바치시겠습니까? 아니면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시겠습니까?”라고 교우분들께 제안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런 기도 매일 합니다라면서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를 마치 대단치 않은 기도로 여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이 글을 읽으시는 교우분들께서는 주님의 기도 봉헌 때마다 에제키엘서 36장에 나오는 구원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분의 축복이 이미 우리 안에서 활짝 피어오르리라 믿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해주는 날, 성읍들에는 다시 사람이 살고 폐허는 재건되게 하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황폐하였던 이 땅이 에덴 정원처럼 되었구나하고 말할 것이다.”(에제 36,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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