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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1장. 예수님을 맞이하듯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2|조회수43 목록 댓글 0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1. 예수님을 맞이하듯

 

이번 주부터 우리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환대에 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환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말 사전에서는 환대(歡待)누군가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후하게 대접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누군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일입니다. 환대란 누군가를 기쁘게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일종의 환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1-12).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여부를 맞아들이다또는 받아들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데, 이 표현들은 누군가의 인격을 온전히 수락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빛”(요한 8,12)으로 오신 분을 이따금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쁘게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신앙이요,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환대란 결국 믿음의 행위에서 파생됩니다. 참된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듯, 다른 이들도 기쁘게 맞아들일 줄 압니다. 마치 예수님을 대하듯 그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예부터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고 대접하는 일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 왔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 가운데 손님 접대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합니다(로마 12,13; 히브 13,2; 1티모 3,2; 티토 1,8; 1베드 4,9 참조). 여기서 환대의 개념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필록세노스’(φιλόξενος)의 어원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φίλος)와 낯선 사람 또는 외국인을 의미하는 쎄노스’(ξένος)의 합성어로, 나그네나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이를 사랑으로 대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환대는 반드시 지인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잘 모르는 이를 접대하는 것에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가 환대해야 할 주요 대상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형제로 삼으셨고, 심지어 당신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중략)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38-40).

우리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환대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그분의 형제로 여겨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받아들이는 환대의 덕목을 실천하는 일에도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정성껏 대접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접대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요?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히브 13,2). [202614(가해) 주님 공현 대축일 인천주보 2, 정천 요한 사도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학처장)]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2. 하느님의 환대 방식

 

우리 교회가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면, 대체 그 환대 방식을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시는”(사도 10,34-35)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초대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이 혼인 잔치의 비유’(루카 14,15-24 참조)에서 드러납니다. 앞서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자, 집주인은 초대의 범위를 넓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루카 14,21)은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루카 14,23) 잔칫집을 가득 채우려 합니다. 누구든지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집주인이 차린 풍성한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대는 일부가 아닌 모든 이를 향합니다.

우리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서 하느님 환대의 구체적인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해 버리고, 궁핍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정신이 든 아들은 아버지께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더 이상 아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던 그는 아버지 집의 품팔이꾼이라도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반전일 뿐 아니라, 가히 충격적입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먼저 알아본 아버지는 아들이 다다르기도 전에 그에게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며 아들이 이전에 누리던 권위와 지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줄 뿐더러,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괘씸한 아들이 뭐가 이쁘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요? 아버지의 미련한모습은 하느님의 환대가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죄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닮은 외아들 예수님께서도 풍성한 잔치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르 14,24), 곧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는 잔치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4-55). 예수님의 환대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목숨까지 내어주는 희생이 오히려 사람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내어줌의 잔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나 환대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완성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성대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손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의 주인은 참된 양식과 음료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손님들의 시중을 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환대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2026111(가해) 주님 세례 축일 인천주보 2, 정천 요한 사도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학처장)]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3. 환대와 이웃 사랑

 

우리는 지난주에 주님께서 사람들을 친히 환대해 주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잔치에 초대되어 그분의 융숭한 대접을 받는 손님들입니다. 그 넘치는 은혜를 깨닫는다면, 손님의 역할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환대하는 주인의 역할을 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7)

환대에 관한 이 권고를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 내야 할지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마태 22,39 참조)을 실천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 필요한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입니다. 환대는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수동적 개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 주는 일이 곧 당신에게 해 주는 일이라 하시며, 그 일들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나열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이 일들은 환대하는 공동체인 교회가 이천 년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실천해 왔고, 지금도 실천하는 이웃 사랑에 관한 구체적인 사업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모시듯이, 이웃을 모시는 삶을 구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의 모범이 되는 인물을 루카복음 1029절부터 37절의 비유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강도의 습격으로 초주검이 된 유다 사람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데, 마침 사제와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됩니다. 둘은 모두 하느님을 위한 봉사직에 종사할 뿐더러 백성에게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로서 그에게 도움을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들은 길 반대쪽으로”(10,31.32), 마치 더럽고 부정한 것을 피하듯, 그를 지나쳐 버립니다. 이 유다인을 도와주려고 다가간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다인들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이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듯, 그의 연민은 사랑을 실천하는 동기로 작용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천으로 그 상처를 싸매 줍니다. 자기 노새에 그를 태우고 여관으로 직접 데리고 가서 밤을 새워가며 지극 정성으로 그를 돌봅니다. 다음날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맡기며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진정한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웃 사랑과 환대가 서로 공유되는 개념이라면, 사마리아인은 결국 환대하는 이들의 모범이 됩니다. 이웃을 피하기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적극적인 환대를 우리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26118(가해) 연중 제2주일(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 인천주보 2, 정천 요한 사도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학처장)]

 

 

 

 

[신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4. 부담보다 기쁨이 더 크기를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들였다”(마태 25,3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 주변의 이웃과 동일하게 여기십니다.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일이 곧 주님을 모시는 일이기에, 우리는 누군가를 환대할 때 늘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33-35 참조)이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환대란 결국 이웃을 남이 아닌 자기 자신처럼(루카 10,27 참조),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극진히 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맞이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 이것저것 일을 벌이다 보면, 마음이 산란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들이할 때 그런 경험을 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음식을 주메뉴로 할 것인지, 곁들이는 음식 가짓수는 얼마나 할 것인지, 또 양은 얼마나 할지, 음료와 디저트는 무엇으로 할지, 식탁은 어떻게 장식할지 등등, 생각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온 집안을 쓸고 닦으며 깨끗이 청소까지 해 놓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괜히 집들이한다고 했나 후회하기도 하고, 그냥 모든 게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애초에 가졌던 좋은 취지는 까마득히 잊고, 그저 해야 할 일들에 매몰되어 버리는 격입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루카 10,38-42 참조).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님을 모시게 되었는데, 얼마나 더 잘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마르타는 그 귀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려고 이것저것 많이 준비합니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10,40). 여기서 분주함으로 번역되고 있는 그리스어 페리에스파토’(περιεσπτο)는 혼란스럽고 산란해진 그녀의 마음 상태를 드러냅니다. ‘갖가지 시중드는 일에 매몰되어 버린 그녀는 주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기쁨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게다가 동생과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마음은 더욱 심란해집니다. 일을 돕기는커녕, “주님의 발치에 앉아”(10,39) 느긋하게 그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얼마나 얄미웠을까요? 마르타는 동생을 직접 나무랄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께 대신 질책해달라고 청합니다. 그 귀한 손님에게 사소한 집안싸움의 중재자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셈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마리아는 언니와 달리,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이 구원의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고, 그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시사할까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환대하는 대상 그 자체입니다. 일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곁가지 일들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정작 손님은 안중에 없어지고, 그와 함께 주님을 모시게 되었다는 기쁨마저도 사라질 것입니다. 거창한 접대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환대하는 이의 마음과 정성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손님맞이를 위해 많은 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그 손님을 주님처럼 모실 수 있게 된 기쁨이 더 커진다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참된 행복

 

마태오 복음 5장부터 시작되는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산에 오르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했듯이, 신약의 제자들에게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지난주에 우연히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는 구절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은 일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행복 선언들 가운데서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그날 저와 이야기를 나눈 분은 이 행복 선언들이 이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상이라는 건 정의 자체이며 현실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요. 이상은 우리에게 방향을 보여주고 우리를 이끌어주지만, 우리가 실제로 거기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들을 때는 수긍했는데, 다음날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구약 성경에 나오는 행복 선언들은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행복하리라.’고 미래의 일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 5장의 행복 선언은 어떨까요? 현실일까요, 이상일까요?

신약 성경의 행복 선언들에서 미래의 희망이 더해지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같은 구절은, 미래에 누리게 될 몫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을 듣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있고,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라는 구절에서 행복한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너희입니다. 그들은 모욕과 박해를 실제로 당할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마태 5장의 행복 선언은 이상일까요, 현실일까요? 문득 떠오른 대답은, 이 말씀을 믿으면 현실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믿습니까?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믿습니까? 그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이 행복 선언들은 현실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모세로서 산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인간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분이 율법을 완성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구약의 율법이 죄를 깨닫게 했지만 죄를 짓지 않게 하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율법은 어떨까요?

어떻게 보면 새로운 율법의 요구들은 옛 율법에서보다 더 어렵습니다.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도 겉으로 규정을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용감하게 산상 설교를 받아들이고 정말로 그렇게 살 때,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서 실현될 것입니다.

 

 

 

 

 

 

 

[성경] 세리가 복음서를 썼다고요?

 

성경2026년 한 해에 걸쳐 마태오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개해 드리는 코너입니다. 복음의 주요 특징부터 시작해, 묵상이 필요한 주요한 지점을 짚어가며 독자들과 함께 마태오복음을 읽어 나가고자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네 복음서 가운데 제일 앞에 나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27권의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앞에 자리 잡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누가 썼을까요? 교회 전승에서는 세리 마태오를 저자로 여깁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이전에 세리였다는 과거의 신분이나 출신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복음서 작품만으로 인정받아 신약성경 첫 자리에 뽑힐 수 있었던 거죠.

마태오라는 이름은 공관 복음과 사도행전에 4차례 제시되는 제자 명단에 모두 나옵니다.(마태 10,2-4; 마르 3,16-19; 루카 6,14-16; 사도 1,13 참조)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 10,2-4)

그러니 교회 전승에서 마태오를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여기게 되었죠.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60-130년경)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마태오가 히브리어로 된 말씀을 모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130-200년경)도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동안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했다고 하거든요. 기원후 2세기경의 복음서 사본에도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마태오가 복음 저술과 관련되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저자로 명시되는 인물이 정확히 누군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마태오복음이 마르코복음과 예수님의 말씀 모음집(예수 어록)을 바탕으로 저술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마태오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고,(마태 10,2-4 참조) 마르코와 루카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협력자입니다.(사도 12,12; 2티모 4,11; 콜로 4,14; 필레 1,24; 1베드 5,13 참조)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다른 제자의 협력자가 저술한 마르코복음을 바탕으로 집필했을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더구나 제자라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직접 체험한 목격담이 나올 법한데 일절 나오지 않거든요. 그러기에 교회 전승으로 내려온 마태오라는 이름을 편의상 저자로 부를 뿐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태오의 소명 이야기가 나옵니다.(마태 9,9 참조)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불렀던 방식과 똑같습니다.(마태 4,18-22 참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라고 하자 그대로 따릅니다. 당대 사람들이 미워했던 세리도 다른 제자들처럼 똑같이 제자로 부르셨고, 그대로 따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죠. 어찌 되었든 저자의 신분이나 출신에 대한 편견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점이 아주 놀랍습니다.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 요나 예언서

 

내용상 시대와 저작 시대의 괴리감

요나 예언서는 열두 소예언서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소명을 받은 요나가 하느님이 보낸 곳의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면서 시작되는 흥미로운 이야기, 바다에 빠졌는데도 죽지 않고 물고기의 배 속에서 사흘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화 같은 이야기, 요나의 짧은 심판 신탁에 아시리아의 모든 백성이 단숨에 회개하여 화를 면하고 구원되는 놀라운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며 많은 사람에게 재미를 유발하며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요나서의 독특함 중 하나는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이 중심이 되는 여느 예언서들과 달리 요나서는 한 예언자에 관한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먼저 그 내용을 보면 니네베를 수도로 삼은 아시리아 제국이 번성했던 시기로 설정되어 있지요. 그래서 요나 예언서의 내용에서 설정된 시대 배경은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하기 전인 기원전 8세기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가 가지고 있는 문학 양식, 강조하는 신학적 가르침은 훨씬 후대의 작품임을 짐작게 해줍니다. 실제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라는 한 구절의 말로 대제국 아시리아의 임금부터 짐승까지 회개하였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 또 가로지르는 데 사흘이 걸릴 정도로 크게 설정된 도시의 규모는 과장된 표현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나 예언서를 기원전 5세기 이후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된 예언형식의 문학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면 기원전 5세기에 기원전 8세기를 배경으로 삼고, 예언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저자가 전하려고 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폐쇄적이고 편협한 배타적 민족주의 고발

기원전 5세기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하며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을 복구하며,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기를 다짐하던 때입니다. 특히 에즈라와 느헤미야는 민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유다인이 아닌 사람과 상종하지 말고, 만약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이 있다면 이혼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도성에서 내보내라고 명령하며 종교적, 민족적 분리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요나서의 저자는 폐쇄적이고 편협한 배타주의에 빠져있던 당시의 종교와 사회지도자들의 모습을 주인공 요나로 풀어냅니다.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1,9)라며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한 사람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2)라고 할 만큼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지 않고 그분을 피해 타르시스로 가는 배에 오르고, 배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숨었으며, 풍랑을 만났을 때 신들에게 비는 뱃사람들과 달리 기도도 하지 않고 잠만 잤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시리아가 구원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는 하느님을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과 권능을 알면서도 거부한 사람입니다. 기원전 5세기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며 종교와 사회 개혁에 동참한 유다 지도자들의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믿었지만 그 자비가 남들에게 확장되는 것은 싫었습니다.

모든 이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원수들에게 펼쳐질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싫어 도망친 요나는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삼 일을 지낸 다음에야 니네베로 향했고, 요나의 선포를 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단숨에 회개하여 자루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은 내리기로 했던 재앙을 거두셨고, 이를 알게 된 요나는 화가 나서 하느님께 따집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3) 그러자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4,4)

이어 그늘을 만들어 주던 아주까리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는 요나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4,10-11) 이 마지막 하느님의 질문이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로써 저자는 편협한 배타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며, 이방인뿐 아니라 원수와 적들까지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우리만 구원되기를 바라는 나?

우리는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라시는 분이기를 바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자비와 자애와 너그러움이 내가 아닌 타인, 특히 내가 미워하는 원수, 나에게 상처를 준 적에게 향할 때는 어떻습니까? 만약 화가 나고 기분이 언짢다면, 이런 우리에게 요나 예언서의 저자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라는 말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강한 결속력과 공동체의 연대성입니다. 이 결속력과 연대감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나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반면 또 다른 특성은 우리 밖을 향한 배타성과 우리만을 위한 폐쇄성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성당” “우리 꾸리아” “우리 쁘레시디움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면, 자칫 우리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힘만 발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 자애에 의지하는 우리는 세상과 모든 이에게 예외 없이 펼쳐질 하느님 자비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필로그

2025년 한 해 동안 열두 소예언서의 지혜에 원고를 쓰며 예언서의 심도 있는 메시지와 예언자의 묵직한 삶을 짧은 지면에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과 레지오 마리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부족한 글로 만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말씀의 우물]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주님의 기도(마태 6,9-13)에는 일곱 청원 기도가 나옵니다. (참조: 루카 복음서 112-4에는 다섯 청원만 나옵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를 각 나라말로 옮겨서 봉헌합니다. 그중 첫 번째 청원 아버지(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빚나시며는 무슨 뜻일까요?

그 뿌리를 우리는 에제키엘서 36장에서 찾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의 거룩함이 선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와 같은 표현이 에제키엘서 안에서만 25번이나 나옵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스라엘)을 민족들 사이로 쫓아버리고 여러 나라로 흩어버렸다. 그들의 길과 행실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였다.”(에제 36,19) 주님 말씀과 뜻대로 살지 않은 대가로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제국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뭇 민족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합니다. “이자들은 주님의 백성인데 그분 땅에서 나와야만 했지.”(에제 36,20) 이는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 남의 나라 땅에서 헤매는 이스라엘의 운명, 그들이 받고 있는 징벌적 상황을 타민족들이 고발할 뿐 아니라, 나아가 그들을 선택하신 주 하느님의 무능을 폭로하며 빈정거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 이제는 이스라엘을 뽑으신 주님께서도 지치셔서 손수 뽑아 세우신 백성을 더 이상 지켜줄 힘이 없으시구나하면서 뭇 민족이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할 뿐 아니라 그들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조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내가 뽑아 세운 백성은) 가는 곳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에제 36,20)

이제 주님께서 당신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 집안이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이름을 걱정하게 되었다.”(에제 36,21)

주님께서 다짐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민족들 사이로 흩어져 가 거기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에제 36,22)

주 하느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그분의 인격과 속성과 그분의 존재를 보다 품위 있게 드러내는 전통적 표현 양식입니다.

아울러 하느님을, 그분 이름을 거룩하게 하다는 말은 유다교 전통과 구약 안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 표현 양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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