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복음말씀과 묵상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믿음과 행동이 다른 종교인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2|조회수28 목록 댓글 0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믿음과 행동이 다른 종교인

질문

말과 행동이 다른 종교인들의 모습을 하루이틀 본 건 아닌데요. 그런 모습을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저 자신의 신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주위의 신자들 중에서도 미사 참례 열심히 하고 기도 생활도 잘하고 봉사도 자주 하지만 정작 일상 생활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분들을 봅니다. 이런 모습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요.

 

답변

우리는 살이 찐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고칼로리의 치킨과 족발을 먹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담배나 술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피거나, 폭음을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과 생각이나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일치시켜 보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 “한 번 먹었는데 그렇게 살이 찌겠어!” 또는 이번 딱 한 번만 술을 마시는 건데 문제가 있을라고?” 하면서 스스로 합리화합니다.

심리학에서 이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합니다. , 두 가지 이상의 반대되는 믿음이나 생각, 가치를 동시에 지닐 때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불편한 경험 등을 말합니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이러한 불일치를 겪고 있는 개인은 불일치를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하고, 그러다보니 공격적이 되거나 자기합리화, 퇴행, 고착과 같은 방어기제를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일상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하다 보니, 오히려 미사 참례를 열심히 하고, 기도 생활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좀 더 열심히 하면서 이렇게 열심한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하느님도 내가 한 잘못을 용서하실 거야!”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부조화를 일치시키려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과 불일치가 되는 열심한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도 인지부조화가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같은 신자를 비난하면 안 되는데. 그러나 하느님도 저들을 미워하실 꺼야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분심과 미움을 스스로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비록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과 타인을 수용하라는 것 아닌가 합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 그 죄에 대해서 묻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잘 못한다는 것이 더 문제인 듯합니다. 그건 아마도 죄를 지은 사람이 성찰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 너무 쉽게 단죄해 버리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가 쓴 평온을 부르는 기도에서는 주여, 우리에게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을 위한 평온의 기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깨우치고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어린 기도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나쁜 사람들도 착한 일을 하듯이, 선하지만 죄를 짓기도 합니다. 어느 한 면을 보고 한 사람의 전부를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어느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 모두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이 품어 준 사람인데,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깊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잘 알 때까지 기도하고 성찰함으로써, 우리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죄지은 자가 회개하기를 기다려주고, 죄를 짓는 분들에게는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주어지길 바라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유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질문

저는 너무 진지하고 심각합니다. 재미있고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TV 코미디를 봐도, 친구들과 술을 마셔도, 가족들과 놀러 가도 지루하고 심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 자신이 지칩니다. 저 스스로도 웃을 줄 알고, 상대방에게도 웃음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억지로 될까요?

 

답변

독일 속담에 웃음은 울음보다 더 멀리 들린다고 했습니다. 유머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문제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능력에 깊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치료적 목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유머의 본질은 정신적인 자극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의사소통의 한 형태로서, 유머를 통해 우리는 우월감과 해방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 우월감은 자신보다 못한 남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이고, 해방감은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금기, 억압이 해소될 때 터지는 통쾌함을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구나 맹구 시리즈 같은 바보 유머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고, 성적 유머나 정치인에 대한 풍자를 한 유머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게 도움을 주기도 한 것 같습니다.

스티븐 주이트 의학박사는 인터뷰를 통해 100세 이상 노인의 심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공통적으로 낙천적인 성격, 남다른 유머감각, 삶을 즐기는 자세, 작은 즐거움에 감사하는 능력, 일상생활에 대한 만족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유머감각은 장수하는 것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또한 행복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긍정심리학의 핵심 개념인 회복탄력성(resilience)에도 유머는 중요한 요인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유머는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긍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답니다. 그렇다고 유머가 있는 사람들이 단점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유머를 자주 쓰다 보니, 개인에 대한 신뢰도와 믿음이 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진심을 보여주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각한 순간에도 가볍게 행동해 의도치 않은 실수나 실례를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 쉽게 눈에 띄다보니 본의 아니게 부정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관계에서나 유머가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해학(유머)과 풍자(익살)가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들 대화 속에 이러한 해학과 풍자가 녹아 있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대원군이 책을 읽는데 선비가 찾아와 절을 했습니다. 대원군은 일부러 못 본 척하고 계속 책을 읽었답니다. 이 같은 대원군의 행동에 대해 선비는 자기를 아직 못 알아봤다고 생각하고, 다시 절을 했답니다. 그러자 대원군이 버럭 화를 내며 왜 산 사람에게 두 번 절을 하느냐? 내가 죽었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선비는 먼저 한 절은 문안 인사이고 나중 것은 물러나기 위해 한 것입니다라고 답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선비가 긴장된 순간에도 유머로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유머가 허락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유머는 상대방과의 맺고 있는 신뢰 관계 안에서 단순한 웃음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따뜻함으로 감동시키려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마음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유명한 찰리 채플린도 원래 웃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노력으로 웃음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시대는 서로에게 따뜻함을 전해주기 위한 말 한마디가 그 어느 때보다 아주 절실합니다. 유머를 대화의 기술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내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하시고, 그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아주 사소한 잘못도 모두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질문

누구나 쉽게 범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잘못들도 모두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지요? 물론 누가 보아도 죄라고 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해서는 고해성사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지각을 했을 때 핑계를 대는 사소한 거짓말, 친구들끼리 모여서 다른 친구나 교수님의 험담을 하거나 하는 것들도 모두 고해성사를 봐야 하는지요?

 

답변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시겠지만,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느낌이 약해서 많은 영적인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이 대리자를 통해 들려오면서 죄에 대한 용서와 더불어 감사의 마음을 지닐 수 있기에 큰 이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1857항에 의하면, 고해성사 때에 우리는 대죄를 통회하고 고백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합니다. 대죄란 중대한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완전히 의식하면서, 고의로 저지른 죄는 대죄이다로 규정됩니다.

이러한 대죄는 하느님의 법을 크게 어겨서, 그 죄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사랑을 파괴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한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소위 소죄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어기고 해치기는 하지만, 사랑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소죄가 사랑을 약화시키고, 세상 재물에 대해 지나친 애착을 보이게 하며, 윤리적 선의 실천과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며, 잠벌을 받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의 영혼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죄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세심증이라는 말을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범하게 되는 다양한 죄의 상황과 관련된 것입니다. ‘세심증이라고 할 때, 이것은 비교적 가벼운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중죄라고 상상하거나, 전혀 죄가 되지 않는 행위를 무거운 죄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일상 생활에서 매사가 죄가 되지나 않을지 지나치게 근심해 걱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지각했을 경우에 핑계를 대는 행동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가벼운 험담을 하는 경우 등에 대해서 자신의 이러한 태도를 지나치게 무겁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심증을 지닌 사람은 불필요한 근심 걱정을 과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런 걱정이 항상 마음속에 있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때도 망설이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심증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이런 경향이 있다고 생각이 될 때에는 혹시 자신만의 윤리적인 기준이나 건강상의 문제 등이 있나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주변의 성직자나 수도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세심증에 쉽게 걸리는 분들은 주관적 죄책감이나 자기 비난이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세심증이 심해지면 우울과 불안에 휩싸일 가능성도 높아지기에 미리미리 주의를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히브 10,22)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신앙에 열심한 것이 나약한 것일까요?

질문

어려서부터 조금 심약하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마음이 약하기 때문인지 이런저런 힘든 일이 있으면 신앙에 많이 의지를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자꾸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다 보니 나 스스로가 너무 나약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답변

과거에 제가 보았던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인디아나 존스입니다. 개인적으로 스타워즈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같이 주기적으로 나오는 영화를 나올 때마다 잊지 않고 보는 게 한동안 취미였습니다. 그중 인디아나 존스의 3편인 최후의 성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영화를 보신 분들은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성배를 찾아가는 이야기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인디아나 존스 일행은 성배를 찾기 위해 반드시 3가지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존스에게는 성배를 찾기 위한 세 가지 비결이 담긴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말씀은 회개하는 자만이 통과하리라였고, 존스는 순종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다라는 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래서 벽에서 갑자기 날아드는 창칼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우선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관문은 하느님의 말씀, 그 뒤를 따르는 자만이 나아가리라라는 말씀을 묵상하고, 동굴 바닥에 표시되어 있던 야훼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알파벳만을 발로 짚으며 걸어 나갔습니다. 그 알파벳들이 적힌 벽돌 이외의 바닥을 거치게 되면 그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였습니다. 존스는 오직 야훼 하느님의 이름에만 의지하며 그 난관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오직 야훼이신 하느님만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세 번째 마지막 관문은 성배가 있는 건너편 계곡으로 건너가는 것인데, 마지막 말씀인 하느님의 길, 사자의 머리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리라였습니다. 그는 이 내용이 무슨 의미인지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천 길 낭떠러지로 발을 내디디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낭떠러지에는 연결된 다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그는 몹시 주저합니다. “불가능해! 어떻게 뛰어넘어!”라고 혼잣말을 합니다. 여기서 존스는 신에 대한 믿음, 아버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천 길 낭떠러지로 발을 한 발짝 내디디며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그 천 길 낭떠러지에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다리가 있었고, 존스는 무사히 이 다리를 통해서 성배가 안치된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도약’(The Leap of Faith)이었습니다.

인디아나 존스는 오로지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여 3개의 관문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의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부족하고 나약함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위의 다리를 보고 계신 하느님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스스로 자책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약함을 인정해야 온전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영화 속의 그 성배는 결국 인간의 탐욕으로 낭떠러지 밑으로 사라졌지만, 어렵고 힘든 순간에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성배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하느님 은총에 더 감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오늘 하루도 큰일 없이 지나고 있음에 새삼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 되찾기] 내가 원하는 걸 왜 남들은 알아주지 않나요?

질문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주는 편입니다. 내가 조금 번거롭고 수고스러울 때에도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먼저 챙겨줍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걸 알아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 모두 내가 자기들에게 하는 만큼 저한테 관심도 없고 배려도 하지 않는 것 같아 항상 불만입니다. 제가 과민한 걸까요?

 

답변

좋은 인간관계일수록 상호 간의 주고받음이 조화롭고 균형이 있습니다. 보통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것도 상호 간의 주고받음이 일방적이지 않아야 그 관계가 오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상대에게 많이 주고 덜 받았다고 생각될 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없듯이, 어느 누구도 내어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수는 없습니다. 어찌 보면 불공평한 듯도 합니다.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주는 것과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퍼주고 싶어도 상대가 받을 수 있는 만큼 가져갈 것이고, 상대방으로부터 충분히 되돌려 받고 싶어도 상대가 얼마나 돌려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부부간의 갈등 때문에 상담을 하다 보면 실제로는 부부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부부가 서로에게 너무 많이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유명한 책 어린왕자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여러 별을 지나 지구에 도착한 어린왕자는 여우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우는 아직 길들이지 않아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길들인다는 것이 뭐냐고 묻는 말에 여우가 대답합니다. “관계를 맺는 거야. 넌 아직 나에게는 수많은 꼬마들과 똑같은 꼬마에 불과해.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하지도 않고 너 또한 내가 필요하지 않아. 나는 네게 있어 그 많은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게 되는 거야. 나에게는 네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네게는 내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여우는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으니까 네가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자기를 길들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는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돼. 우선 넌 나와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는 거야. 난 곁눈질로 널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씨앗이거든. 그러면서 날마다 너는 조금씩 더 가까이 앉으면 돼.”

어린왕자가 여우와 작별 인사를 할 때, 여우는 선물로 길들이는 것에 대한 비밀을 하나 가르쳐줍니다.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네 장미가 너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장미를 위해 네가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잊고 있어. 그러나 너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언제나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해. 그러니까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거야.”

어린왕자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받고 있는데 그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인간관계에서 눈에 보인 것만으로 공평함을 나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의 행운은 보통 타인으로부터 오게 마련입니다. 내가 베푼 게 더 많아야 언젠가 돌아올 행운도 더 많아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매일 조금씩 가까이 다가와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하느님을 생각해 보면, 내가 베푼 만큼 돌려받지 못하는 것들은 언젠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지 않을까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