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신약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마태오 복음 5장의 산상 설교로 넘어가기 전에, 1장에서 4장까지 여러 번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이 구약 성경을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인용한다는 점입니다.
따옴표로 분명하게 구약을 인용한 첫 예는 마태오 복음 1장 23절입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이사야서 7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1,22)라고 합니다. 2장에서는 헤로데가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곳을 묻자, 그들은 미카서 5장을 인용하여 “유다 땅 베들레헴아 …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2,6)라는 구절로 응답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신하신 것도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2,15)라는 호세아서의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렇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했을 때도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2,17)라고 합니다. 나자렛에 가서 사신 것도, 구약 성경의 어느 부분을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2,23)라는 말씀의 성취로 설명합니다. 3장에서 세례자 요한의 등장 역시 이사야가 예고한 것이고(3,3),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라는 말씀도 구약의 인용입니다. 4장에 나오는 광야의 유혹에서 예수님의 대답은(4,4.7.10) 모두 신명기의 인용이며, 그 후 예수님이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4,14)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러다가 한 페이지를 다 채울 것 같지만, 1장에서 4장까지 나온 명백한 인용문만 모아도 이 정도입니다. 사실, 1장의 족보도 뿌리는 구약에 있지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마태 1,1)이시라는 첫 구절에서부터,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의 기다림을 성취하는 분이시라고 선포합니다. 5장으로 가면, 산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서 새 법을 펼치십니다.
그런데 4장에서 특이한 점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을 유혹하는 악마도 구약 성경을 인용했다는 점입니다. 시편에 천사들이 손으로 받쳐 주리라고 했으니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도 사람들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하지요(마태 27,42-43). 이것을 보면, 성경을 인용한다고 늘 옳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동방 박사들은 미카서의 말씀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예수님을 경배하러 오지만, 헤로데는 같은 말씀을 듣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입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4,7) 그리고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4,10) 하고 대답하십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하느님으로 경배하는 마음이 없다면, 헤로데처럼 성경을 들여다보고는 내가 세상 임금이 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날뛰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49·끝) 신앙의 증언(묵시 19,11-21)
하느님 말씀은 끝내 현실을 심판하고 바로잡는다
요한 묵시록 19장 그리스어 원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Καὶ εἶδον(그리고 나는 보았다).” 이 문장은 단순한 시각적 보고가 아니다. 성경에서 ‘본다’는 것은 사태의 겉모습을 목격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 안으로 들어가는 사건에 가깝다. 원문에서 이어지는 말,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 역시 이야기의 웅장함이나 신비감을 덧붙이기 위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해석해 오던 관점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게 되었음을 알리는 신학적 신호다. 요컨대, ‘열린 하늘’은 우리의 눈을 하늘의 눈, 곧 하느님의 뜻을 비추는 자리로 옮겨 놓는다.
에제키엘이 유배의 절망 한가운데서 “하늘이 열리면서 나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를 보았다”(에제 1,1)라고 증언했듯, 요한도 로마 제국의 화려함과 사치, 그 압도적인 질서의 한복판에서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본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더 이상 제국의 계산과 힘의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으로 역사를 새롭게 읽겠다는 신앙의 결기이자 조용한 외침이다.
그 열린 하늘 아래, 백마를 탄 이가 나타난다. 백마는 고대 세계에서 전장의 승리를 상징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의 승리는 누군가를 꺾고 나서 차지하는 전리품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백마는 비교우위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백마는, 하느님 앞에서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기 위해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에서 반복되는 ‘흰색’은 단순한 순결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구원과 인정의 색이다. 흰 말과 흰 옷은 상처를 딛고 견뎌 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선언하는 하느님의 위로다. 그러므로 백마는, 우리 삶이 어떤 모양으로 흔들리든, 하느님께서 끝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그분의 성실함 자체를 상징한다.
그래서 백마를 탄 이는 “성실하시고 참되신 분”(묵시 19,11)이라 불린다. 성실함은 감정의 온기가 아니라 약속의 무게다. 하느님은 역사를 시작하신 분일 뿐 아니라, 그 끝을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정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묵시 19,11)이시다. 여기서 싸움은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전투가 아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싸움은 언제나 억눌린 이들을 위한 심판의 자리였다. 시편은 이를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께서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성실하게 다스리시리라.”(시편 96,13) 이사야 예언자 역시 메시아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이사 11,4)라고 그린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의 심판은 파괴나 단죄의 잔혹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구원의 외침이 마침내 역사 위로 터져 나오는 사건이며, 진실이 더 이상 밀려나지 않는 순간이다.
이제 요한은 백마 탄 이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묘사한다. 그의 옷은 피에 젖어 있고, 그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온다. 이 장면은 자칫 모순처럼 보인다. 날카로운 칼이 심판의 도구이고 백마 탄 이가 승리를 상징한다면, 왜 그의 옷은 피에 젖어 있는가. 피에 젖은 옷은 승리와는 무관한 패배의 흔적이 아닌가.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이 모순된 두 이미지를 구약 예언 전통 안에서 일관되게 연결한다. 먼저, 입에서 나오는 칼은 물리적 무기가 아니다. 이는 이사야가 말한 “입에서 나오는 막대 …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이사 11,4 참조), 곧 하느님의 말씀에 의한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들과 상응한다. 악은 무력 충돌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 앞에서 제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피에 젖은 옷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이미지는 이사야서 63장의 심판자 환시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다.(이사 63,1–3 참조) 그곳에서 피는 무차별적 학살의 흔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제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말하자면, 말씀의 심판은 공허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고, 억압과 폭력을 낳은 악의 체계를 반드시 무너뜨리는 사건이라는 선언이다.
피는 폭력의 흔적이 아니라, 정의가 지연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래서 백마 탄 이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이다. 지혜서 18장 15절에 ‘말씀’이 ‘전사’처럼 단호한 심판의 형상으로 등장하듯, 하느님은 말씀으로 심판하시고, 말씀으로 현실을 바꾸신다. 말씀은 승리의 선언이 아니라 승리 그 자체다.
백마 탄 이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 또한 흰 말과 흰 아마포를 입고 있다. 이는 그들이 전투에 가담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지켜 온 증언의 삶, 침묵 속에서 견뎌 온 신앙의 시간이 하느님 앞에서 옳았음이 선포되는 순간을 뜻한다.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끝까지 진리를 놓지 않는 인내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어떤 순간에도 지지 않는다는 믿음과 그 진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자가 흰 말과 흰 아마포를 입고 ‘하느님의 말씀’이신 백마 탄 이와 함께할 자격을 얻는다.
이제 천사는 새들에게 “하느님의 큰 잔치”(묵시 19,17)로 오라고 외친다. 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묵시 19,9)와 분명히 대비된다. 하나는 구원의 식탁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식탁이다. 에제키엘이 곡과 마곡의 패배를 새들의 잔치로 예언했듯(에제 39,17–20 참조), 요한 묵시록은 악의 종말이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되돌릴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붙잡히고, 그 추종자들은 말씀의 심판 앞에서 무너진다.
요한 묵시록 19장의 환시는 심판의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말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가. 힘의 언어인가, 아니면 진실의 언어인가. 백마를 탄 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성실한 약속을 되새기게 한다. 요컨대, 진리가 사라지고 혐오와 비난의 언어가 광기의 춤을 추는 시대에도, 하느님의 말씀은 끝내 현실을 심판하고 바로잡는다는 것.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논리 속 처세의 기술이나 변호가 아니라, 신앙 증언의 성실함이다. 진리를 위해 조용히 견디는 우리의 하루 속에서, 백마 탄 이의 승리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01·끝) 바오로 사도의 영적 아들, 티모테오
지난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하느님 나라로 가신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은 성모님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성소를 결심했던 계기가 중학교 3학년 때 명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며 개인적으로 특별한 체험을 했고, 그때부터 사제의 길을 꿈꿨다 했습니다. 티모테오 주교님은 신학생 때부터 제 동생 신부와 같은 반이라 자연히 친동생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예전 독일 유학 시절, 차를 타거나 산책할 때 주교님은 늘 제게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산길을 함께 걸을 때도 주교님은 특히 묵주기도를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고속도로에서 매서운 바람과 폭우를 만나 차가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였는데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습니다.
우리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성모님이 도와주셨네” 하며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티모테오 주교님을 기억하면, 어느 아름다운 봄 주일 아침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고 새들이 지저귀고 시냇물이 흐르는 숲속 산책길에서 함께 묵주기도를 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전도여행 때 그의 할머니 로이스, 어머니 에우니케를 통해 그리스도교에 입교했을 것입니다. 티모테오의 성실한 믿음도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받은 것입니다. 티모테오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성실한 믿음은 사도 바오로에게도 강한 인상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훌륭한 사목자 뒤에는 훌륭한 부모님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분들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뒤에서 기도와 희생으로 사목자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어 줍니다.
바오로는 당시 소년 티모테오가 심성이 착실하다며 칭찬했습니다. 그 후에 바오로의 가장 믿을만하고 중요한 협조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바오로는 아들처럼 아끼던 티모테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자주 믿음과 바른 양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라고 당부합니다. 티모테오에게 책임감을 강조하고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제시하기도 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흠이 없고 가정에서는 충실한 남편, 절제와 신중한 성격을 지니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지도자는 가르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당시에 교회의 큰 문제로 야기되었던 사람을 속이는 영들과 마귀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는 거짓 신앙인들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며, 성경 읽기와 가르침, 권고에 열중해야 하며, 하느님이 주신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도 말 것을 당부합니다. 이런 사목적 행동에 전념하여 매일 성장하는 모습을 주문합니다.
바오로의 서신은 티모테오에게는 물론 교회를 책임질 지도자를 선정하는데도 유념하라고 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교회 지도자의 자질과 자세에 관해서 설명했다고 봅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요셉, 동방 박사, 헤로데, 요한, 악마
마태오 복음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1,1)에 대해 말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벌써 문제가 시작됩니다. 사실 이 문제는 복음서 전체에서 거듭 되풀이될 주제입니다. ‘이분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는 천사가 마리아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 없습니다. 소식을 들은 건 요셉입니다. 그는 처음에 거부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말하자면 족보를 통해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기 뜻을 접음으로써 응답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그 대상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깨어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 희망을 품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별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느님은 별을 통해 그들에게 표지를 주셨습니다. 별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어쩌면 자기들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유다인들의 임금”(2,2)을 경배하러 나섭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이 태어나셨다는 말에 당황한 건 헤로데입니다. 전혀 기다리고 있지 않던 소식이 갑자기 전해집니다. 그는 당연히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들려온 말씀을 거부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씁니다. 베들레헴 일대의 아기들을 다 죽인 겁니다. 하지만 오시는 그리스도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큰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실상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막지는 못합니다.
3장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합니다. 요한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었고, 때가 되어 오신 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은총이었겠지요. 그런데 그의 역할이 양면적입니다.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종말을 준비하게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이 다가오는 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4장에 등장하는 악마입니다. 사람들은 요셉, 동방 박사, 헤로데, 요한처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분을 맞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악마는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엇을 합니까? 그분의 뜻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유혹하여 뜻을 바꾸시게 하려 합니다. 아예 하느님의 말씀 자체를 변질시키려 합니다. 예수님이 빵의 유혹에 넘어가고 하느님을 시험하고 세상 권세를 찾으셨다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달라지고 말았겠지요.
마태오 복음은 하늘나라가 선포될 때 나타나는 여러 반응들을 보여줍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저런 모습들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복음을 들으며 귀를 막고 도망가는 것보다, 복음을 입맛대로 바꾸어 놓고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라 예수님을 ‘쉬운 그리스도’로 바꾸어 놓는 게 더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48) 어린양의 혼인잔치(묵시 19,1-10)
세상이 줄 수 없는 보편적 은총과 행복의 자리
‘할렐루야’라는 외침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히브리어 ‘할랄(הלל, 찬양하다)’과 하느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야(יה)’가 결합된 말, 곧 하느님을 향한 가장 큰 찬미의 호응이다. 이 외침이 터져 나오는 까닭은 분명하다. 대탕녀 바빌론이 마침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면서 바빌론을 경제적 사치와 부의 폭력으로 이해해 왔다. 바빌론으로 은유 되는 로마의 번쩍이는 문명 뒤편에서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제국의 욕망을 가차 없이 고발했다.(17–18장)
이제 그 고발은 한 시대의 끝맺음으로 응답받는다.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묵시 19,2)는 표현은 열왕기 하권 9장 7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제벨의 손에 죽은 나의 종 예언자들뿐 아니라 주님의 모든 종의 피를 갚게 해야 한다.” 구약 전통에서 피의 복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이들에게 내리는 최종적 심판의 은유였다. 그리고 그 심판은 되돌릴 수 없는 멸망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 여자가 타는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묵시 19,3)는 표현이 바로 그 비극적 결말을 연기로 형상화한다.(이사 34,14; 묵시 14,11 참조)
스물네 원로와 네 생물이 다시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 4~5장에서 천상과 지상의 만남을 상징하던 이들이, 바빌론의 몰락 앞에서 또다시 하나의 찬미로 모인다. 그 하나 됨의 중심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이 찬란히 서 계신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은 자연스레 “아멘, 할렐루야!”(묵시 19,4)가 된다. 시편 106편 47절의 외침처럼, 이야기의 모든 흐름은 하느님을 향해 수렴되어 간다.
5절은 그 장엄한 찬미 안으로 더 많은 존재가 초대됨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모든 종, 낮은 이든 높은 이든,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은 모두 그 찬미 안으로 부름을 받는다. 마지막 시대에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향해 노래하게 된다는 이 장면은 종말 묘사의 오랜 전통을 잇는다. 그 찬미의 소리는 거대한 물살 같고, 굉음의 천둥 같고, 무수한 무리의 목소리 같다.(시편 113,1; 134,1; 135,2 참조) 하느님은 온 우주의 주권자로,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의 찬가로 빚어내신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곧 하느님에서 어린양으로 이동한다. 어린양의 혼인날이 도래했고, 신부는 이미 단장을 마쳤다.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아내로 그리던 예언자들의 오래된 이미지(호세 2,16; 이사 54,6; 에제 16,7–8 참조)는 이제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공동체의 관계로 확장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고(마르 2,19–20; 마태 22,1), 바오로는 이 이미지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2코린 11,2)
어린양의 신부는 특정 집단의 특권적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낸 모든 이들의 이름이다.(묵시 5,9; 7,14; 14,3–4 참조) 신부가 몸단장을 마쳤다는 표현은 세례의 은총으로 깨끗해진 교회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지만(에페 5,26–27), 그 은총은 특정 제도나 사람들의 이름으로 독점되지 않는다. 이미 앞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모든 이들’을 향해 열려 있었고, 바빌론의 몰락과 함께 하느님을 거스르는 모든 권세가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는 약하고 상처투성이지만, 어린양의 승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충분히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이다. 우리는 어린양의 피로 모든 민족이 속량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묵시 5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입은 “고운 아마포 옷”(묵시 19,8)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입히신 의로움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이들은 행복하다. 묵시록을 시작하며 우리는 이 책이 ‘행복’을 위해 쓰였음을 기억한다. 그 행복은 세상이 약속하는 부·명예·권력의 언어에서 찾을 수 없다. 하느님과 어린양과의 일치, 상호 개방과 존중, 그리고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요한 묵시록이 가리키는 행복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읽으며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어야 한다. 하느님의 편과 어린양의 자리에서 흐르는 것은 언제나 ‘보편’의 은총이며, 용과 짐승과 대탕녀 바빌론의 편에 흐르는 것은 오직 ‘배타성’과 그로 인한 폐쇄적 집착뿐이라는 것을.
10절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로 소개된다. 그들은 천사와 같은 위상을 부여받지만, 천사의 권위는 더 이상 인간을 압도하는 초월적 위치가 아니다. 천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동료 종’으로 자리매김한다. 하느님을 따라 사는 이들, 하느님의 구원 안에 초대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다. 바빌론의 멸망은 인간 사이를 가르던 모든 폭력과 차별, 그리고 혐오와 배제와 증오가 사라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의지를 다시 선포하는 일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승리해야 할 것은 세상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가 말한 한 문장이 이 지점에서 더욱 깊게 와닿는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인생의 역사」 168쪽)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100) 무한한 유혹, 재물을 선택한 젊은 부자 청년
동창 신부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이다. 오래전 부인을 보내고 혼자된 한 부자 노인이 자녀들의 끈질긴 청을 이기지 못했다. 일생의 피와 땀이 얼룩진 그의 재산을 미리 나누어 달라는 요구였다. 자식들에게 당장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그는 고민 끝에 유산을 미리 상속해 주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 모든 형제가 지극정성이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려 병원에서 여러 번 수술을 받게 되었고 오랜 시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부자 아버지는 병원 입원비도 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점차 발걸음을 끊더니 병든 아버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자식들의 배신에 관해 들은 담당 의사도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조언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연락하여 사실은 아직도 친구의 명의로 토지가 아주 많이 남아있으니 처분할 수 있도록 돈을 보내라고 했다. 연락을 받은 자식들은 바로 아버지 계좌로 많은 돈을 보냈다. 그래야 더 많은 토지를 받을 수 있다고 자식들은 생각했다. 돈을 받은 아버지는 돌아가실 게 뻔한데 뭐 하러 생돈을 쓰냐는 똑똑한(?) 자식들과 연을 끊었다.
돈과 재물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때론 가족, 부부관계 등 애틋한 인간관계도 파괴해 버리니 말이다. 물론 돈과 재물, 그 자체는 좋은 것이며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재물 역시 세상의 모든 만물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며 영원하지 않다. 재물 욕심이 너무 과할 때 자제력을 잃고 몸과 마음은 파멸에 이른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최고의 자리를 돈과 재물이 차지한다면 재물의 노예와 다름없다.
어느 날 한 금수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주님, 제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그 청년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켰던 열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 능력도 출중하고 인생에서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조차 자신이 가진 엄청난 돈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청년은 예수님께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언을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 등은 어릴 때부터 잘 지켜 왔다”며 의기양양했다. 그 청년에게 예수님은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꼭 하나 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나를 따라라.” 부자 청년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던 재산을 모두 포기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청년은 몹시 슬펐다. 부자 청년은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고 슬퍼졌다.
처음 느끼는 좌절감이었을 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말씀은 돈과 재물 자체를 최고인 양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이나 돈이 인생의 최종 목적, 영원한 생명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생에서 올바른 최고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순간포착! 성경에 이런 일이] 토빗의 아내 안나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토빗 2,14)
유배지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동포들에게 언제나 자선과 선행을 베풀던 토빗은 하찮은 일로 눈이 멀어버립니다. 그의 아내 안나는 가세가 기울자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어느 날은 주인에게서 품삯에 더해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얹어 받아왔습니다. 아마도 고관대작의 아내로 살던 지난날은 잊고 열심하고 싹싹하게 일한 것을 인정받은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토빗은 아내가 염소를 훔쳤다고 생각해 그녀를 추궁합니다. 가난한 처지에 행여 하느님께 죄를 지을까 봐 염려한 것인지 아니면 오랜 병고에 아내를 들볶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고만 것인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멋대로 상황을 넘겨짚어 성급한 해결을 종용하는 것만큼이나 남자가 여자를 화나게 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안나는 날 선 말들로 참아왔던 설움을 토해냅니다. 부부가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아도 고달픈 삶인데 남편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지도 않은 일을 의심하니 얼마나 기가 차고 서러웠을까. 한편으로 안나의 이 말은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항변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이 살아있다면 왜 선한 이들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묻는 그녀의 절규를 단지 어리석은 아내의 불평으로 치부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당신이나 조용히 하고 나를 속이지 말아요. 내 아이는 죽었어요.”(토빗 10,7)
마음이 꺾인 토빗이 신변정리를 결심하고 아들 토비야를 먼 곳으로 심부름을 보냅니다. 길을 떠난 아들이 소식이 없자 처음부터 이 일을 결사반대했던 그녀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가지만 토빗은 그럴 때마다 아내를 어르고 다독입니다.
토빗이 육신의 눈이 멀었을 때 안나가 그의 곁을 지켰다면 이제는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 안나의 곁을 토빗이 지키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토빗은 아내에게서 그 모진 말을 듣고도 심부름을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를 공경하고 무슨 일로든 어머니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당부를 가장 먼저 남길 만큼 여전히 아내를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토빗 11,6)
다행히 하느님의 섭리로 토비야가 무사히 돌아옵니다. 안나는 돌아온 아들을 발견한 환희의 순간에도 눈먼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모진 세월의 풍파에 때때로 가시 돋친 말들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도 신의를 지키며 살아온 노부부가 마침내 좋은 날을 함께 맞이하는 감격스런 장면입니다. 토비야의 서사가 내용의 주를 이루고 토빗의 믿음이 두드러지는 이 책에서, 안나의 존재는 의인뿐만 아니라 의인의 곁을 지킨 이들 역시 “의인이 받을 상”(마태 10,42)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족보
참석한 미사의 복음이 마태오 복음 1장인 날에는 처음에 몇 구절 듣다가 그다음에는 흘려듣기 쉽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 뒤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요. 하지만 이것이 마태오 복음 1장, 신약 성경의 첫 장이라면 분명 중요한 본문일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족보들이 여럿 나옵니다. 긴 족보들로 말하자면, 먼저 창세기 여러 곳에 족보들이 등장합니다. 여러 조상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 족보들을 따라 엮여 있지요. 민수기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여러 집안의 족보를 전해 주어, 후대의 사람들이 거기에서 자기 집안을 찾아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다시 긴 족보 하나를 찾는다면, 역대기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 덧붙이면,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경우 흔히 역대기가 구약의 마지막에 자리합니다. 그다음에 마태오 복음 1장에서 다시 족보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장에서 이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됩니다. 역사의 한 시점에 그리스도(메시아)께서 등장하시는데,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가 아니라 인간의 긴 역사를 당신 것으로 취하면서 나타나십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신약 성경의 첫 구절, 이것이 마태오 복음을 왜 썼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왜 썼을까?”라는, 우리에게 핵심이 되는 질문입니다. 이 긴 족보는 왜 썼을까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대개 그 첫머리에서 자기가 쓴 복음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을 실현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그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마태오는 복음서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약속이 실현되는 건 이스라엘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라합은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땅을 정복하기 전 그 땅에 살던 사람이었고, 룻은 모압 여자로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날개 아래로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신 예수님을 경배하러 동방에서부터 박사들이 왔다는 것도(이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분의 탄생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스라엘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족보를 들여다보며 그리스도를 기다린 게 아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살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다인의 임금이 태어나셨음을 알았고,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분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은 장차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인과 이방인, 양편 모두가 그리스도를 받았습니다. 눈앞에 계신 그리스도께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양편 모두에게 질문이 던져질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것인가? 이제 마태오 복음이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 속 희망의 순례자들] 우리의 희망이 향하는 곳
희망의 순례자로 희년의 여정을 잘 걷기 위하여 그동안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희망의 순례자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우리가 만난 인물들은 한결같이 숱한 어려움과 두려움, 의심과 불안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과 사랑의 여정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일상의 순례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분명하게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희망의 순례자로서 우리의 희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험난한 광야의 여정을 걸어갔던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희망하며 그 길을 걸어갔을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그들의 최종 종착지였을까요? 탈출기 32장에서 보도하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부재 기간 동안 시나이 산 자락에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제1 계명을 거스른 심각한 계약 위반 행위로 하느님과의 계약은 무효로 돌아갈 뻔 하였습니다. 모세의 간절한 중재로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시긴 하셨지만 그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여정에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탈출 33,1-3 참조) 만약 그들이 희망하던 목표가 약속의 땅이라면, 이 말씀에 슬퍼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께서 몸소 함께 가시지 않으려거든, 저희도 이곳을 떠나 올라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탈출 33,15) 하고 말씀드릴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얻었다가 잃고 유배를 간 경험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지속하게 해 주는 것은 땅이 아니라 그 땅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희망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충만한 친교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어떤 사람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하고 묻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품고 기다려야 하는 대상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며, 우리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루카 12,36)으로 매일을 살아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우리를 당신의 식탁에 앉게 하시고, 우리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곧, 주인과 온전한 친교를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행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희망하며, 이 희망의 전망으로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바라봅니다.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인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말하는 대로, 이 “희망은 주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목표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는 한결같은 길동무입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을 때까지 우리는 주인을 맞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희년은 2026년 1월 6일로 끝나겠지만 우리의 희망의 순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 순례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한 사랑의 순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