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1)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교황은 좋지만, 교회의 사회참여는 글쎄...?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3조회수44 목록 댓글 0[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1)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교황은 좋지만, 교회의 사회참여는 글쎄...?
2014년 여름은 뜨거웠다. 그러나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 동안은 우리 가슴이 더 뜨거웠다.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 때문이다. 아직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여름날 한줄기 소낙비처럼 우리 모두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주셨다. 기회가 된다면, 큰절이라도 드리고 싶은 어른이시다.
그분이 떠난 뒤,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한동안 그분에 대한 사랑앓이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일상의 평화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큰 경험과 아름다운 추억이 우리 삶의 도화지 위에 큰 획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분이 귀국 비행기 내에서 가졌던 기자회견의 말씀 가운데 한 토막을 옮겨본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중립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의 소심함과 용기없음을 질책하는 훈계의 말씀처럼 들린다. 마치 고해소 저편에서 들려오는 근엄한 사제의 말씀처럼 들린다. 두고두고 묵상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진다.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 「복음의 기쁨」 제4장에서 계속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언급한다. 이제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사목자들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여러 학문의 기여를 받아들여, 교회의 사목자들은 인간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있습니다.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 존재의 전인적 진보를 포함하고 또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국가 사회 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말라고, 국가 사회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182-183항).
더 나은 세계 건설에 투신해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감동적인 어조로 당신의 주장을 편다.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해 주신 이 아름다운 행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슬픔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인함과 나약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류 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확실히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183항).
교구의 사제들과 함께 교황의 권고를 읽고 다음의 질문을 만들어 토론하여 보았다. 사뭇 진지한 태도로 사목자들의 자성과 새로운 다짐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독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드린다.
Q> 최근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로 사목자들 사이에 그리고 사목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불편한 일들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참여의 방법과 태도의 문제 때문인가?
- 복음적인 사회참여의 방법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무엇인가?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2)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불의한 분배로 꺼져가는 생명들
교황은 4장에서 사회 참여의 당위성을 설명한 뒤,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한다. 첫째는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문제’이고, 둘째는 ‘평화와 사회적 대화의 문제’이다.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이들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문제를 다루면서, 사회 구조적인 모순과 절대적인 자유시장경제의 해악을 지적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우리의 죄를 씻는 방법이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임을 분명히 한다. 다음과 같은 주제로 이 모든 문제를 다뤘다.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듣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허사가 되지 않도록 복음에 충실하십시오’, ‘하느님 백성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특별한 자리’, ‘경제와 소득 분배’, ‘상처받기 쉬운 이들에 대한 관심’.
교황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언제나 귀 기울이신다고 역설하면서, 그들이 사회에 통합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도구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에 통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 안에서 그들이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작금의 구조는 그들이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악순환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고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발전을 촉진하도록 일하라는 의미이다(188항). 교황은 이런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연대성’의 의미를 환기시키는데, 이는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 행위 이상의 의미로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연대는 재산의 사회적 기능과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사유재산에 앞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행동입니다. 재화의 사적 소유는 그 재화를 보호하고 증진하여 공동선에 더 잘 이바지할 수 있을 때에 정당화됩니다”(189항).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돼
교황은 계속해서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이야기하며, 오늘날 안타깝게도 인권마저도 개인의 권리나 부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음도 지적한다(190항). “모든 국가의 자율과 문화를 온전히 존중하지만, 우리는 지구가 온 인류의 것이고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원이 부족하고 발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그들이 인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실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하려면,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자국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연대성을 증진해야 합니다”(190항). 그리고 다음과 같은 브라질 주교회의 발표문을 인용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먹을 만큼 충분한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불의한 분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분노합니다. 이 문제는 낭비의 만연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191항).
교황은 마지막에 당신이 하고 싶은 말로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한 것도 바랍니다. 우리의 꿈은 드높이 날아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사람을 위한 양식이나 ‘품위 있는 생계’의 보장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복지와 번영’도 바랍니다. 이는 교육, 의료혜택, 무엇보다도 고용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바로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참여적이고 연대적인 노동을 통하여 삶의 품위를 드러내고 드높이기 때문입니다”(192항). 오늘도 이렇게 질문을 만들어 보았다.
Q> 가난한 이들과 산업 현장에서의 고용 문제는 우리 사회에도 첨예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 문제, 비정규 노동자 문제, 대기업의 대형마트와 영세상인 문제, 실업자 문제, 노사 간의 갈등 문제, 노인 복지 문제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대화와 타협 및 양보로 협상의 합의점을 도출하기보다는, 갈등과 투쟁, 억압과 폭력으로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 이와 같은 때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양순하게 복음적 가르침을 분쟁의 현장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그 소임을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 성찰해보자.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3)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 통해 우리 자신도 복음화돼야"
2015년 12월 8일부터 자비의 해가 시작된다. 특별 희년이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교황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소리쳤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성장하면서 잃어버린 것들
교육방송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산부인과 병동의 신생아들은 그중 한 아이가 울면, 나머지 아이들도 함께 울었다. 이것을 해석하는 전문가들은 인간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하도록 창조됐다고 말했다. 이른바 공감 능력은 창조주가 모든 인간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 문화 속에서 이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회적 분위기, 즉 문화 자체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폐쇄적으로 변해 있을 때,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공감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었다. 오늘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이 능력을 복원시켜야 한다. 그와 같은 노력을 ‘인간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 잊지 말아야
교황은 사회교리의 한 부문을 말하면서 ‘자비’와 ‘자선’을 강조했다. 자비와 자선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교황은 이 주제를 ‘허사가 되지 않도록 복음에 충실하십시오’라는 소제목으로 다룬다. 복음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무엇보다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기에 행복하다는 성경 말씀(마태 5,7)과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 2,13)고 말했다. 우리가 모두 마음을 돌이키길 촉구하신 말씀이다.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는 말씀도 인용하면서,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통성을 확인받고자 했을 때, 그들이 제시한 정통성의 핵심 기준은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갈라 2,10)임을 확인시킨다. 이 모든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아주 단순 명료하여, 교회는 이를 상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음도 분명히 하였다(194항).
이처럼 자비와 자선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특별한 자리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안에 마련하셨다고 설명한다. 가난한 이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 가난하게 사셨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 분이셨다.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고,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 하셨다. 이 모든 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선택과 자비의 첫 수혜자가 그들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교회는 그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촉구하였다. 가난한 이들이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관심의 부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가난한 이들은 특별한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고 있기에, 신앙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우정과 강복, 말씀과 성사 거행, 그리고 신앙의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200항).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198항).
Q>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거듭 강조했다. 세상 끝날까지 교회 안에서 발견될 가난한 자들이, 교회와 세상의 변두리가 아니라, 교회 중심에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목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가? 또 좀 더 적극적인 복음의 방향이 있다면, 어떤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4) 경제와 소득 분배
동정만으로는 경제 불평등 해결 못 한다
배고픈 이에게 고기를 가져다주면 잠시 허기를 달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배고픔이 또다시 찾아올 것이고 누군가에게 또 다른 양식을 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삶의 수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마치 개인의 영업비밀이나 지적 소유권인 것처럼 고기 잡는 법을 가난한 이들에게 가르쳐주려 하지 않고 있다. 이로인해 생겨나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개인과 국가에 그대로 나타나며 오늘날 세계적 문제가 되었다.
위정자들과 그리스도인의 소명
교황은 ‘경제와 소득 분배’의 주제를 다루면서,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시장과 금융 투기의 절대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과 맞서 싸움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202항).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이 모든 경제 정책에 반영돼야 하는데, 특히 기업가들과 정치인들이 그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고결하고 막중한 자신들의 소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책임을 다해야 함을 교황은 일깨우고자 했다.
교황은 그들에 대한 기도를 약속하면서, 그들 모두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 안에서 사랑의 원칙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도 창의적인 노력과 실질적 협력을 하도록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어떠한 교회 공동체든, 가난한 이들이 품위 있게 살고, 아무도 배척당하지 않도록, 창의적인 노력이나 실질적인 협력을 하지 않고 안주할 때, 아무리 사회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공동체 와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는, 종교 실천이나 무익한 모임이나 공허한 말로 위장한 영적 세속성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207항).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문제의 마지막 주제로 ‘상처받기 쉬운 이들에 대한 관심’을 다룬다. 여기에서 노숙자, 중독자, 난민, 토착민, 소외되고 버림받는 노인들, 그리고 이민의 문제를 다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특별히 가장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고 계시기에(마태 25,40), 우리는 그들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그리고 온갖 인신매매의 희생자들과 불법 공장이나 매춘 조직의 희생자들, 구걸하는 어린이들, 불법 노동 착취를 당하는 이들, 배척과 부당한 대우와 폭력의 상황에 시달리는 여성의 인권 문제, 자신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고 무죄한 태아의 제거 문제 등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교황은 이렇게 호소한다.
“아무 일도 없는 척하지 맙시다. 생각보다 더 많은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는 모든 이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도시에는 이 악명 높은 범죄망이 단단히 구축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편의로 침묵의 공모를 하여, 이에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211항). 끝으로 교황은 경제적 이윤추구 때문에 무분별한 착취에 희생당하고 있는 피조물 전체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 인간은 다른 피조물의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그 관리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긴밀하게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마치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의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우리가 잠시 머물고 지나가는 자리에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삶에 영향을 끼칠 파괴와 죽음의 자국들을 남기지 맙시다”(215항).
Q> 교황은 상처받기 쉬운 이들을 설명하면서,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도 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두고 지금껏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노력이 더욱 집중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느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우리의 관심을 받고 있지 못하거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곳이 있다면 어디라고 판단하는가?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5)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
눈앞 결과만 좇다 보면 추수철 가라지 된다
교황은 이어서 ‘공동선과 사회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가난한 이들, 모두를 위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날마다 노력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시방편의 거짓 평화
“모든 이의 온전한 발전이 담보되지 않은 평화는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고, 늘 새로운 분쟁과 온갖 폭력을 낳을 것이다”(219항).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임시방편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슬리고 침묵하게 만드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부의 재분배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그리고 인권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의 추구라는 대전제 하에 모든 이를 위해 실현될 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은 이를 위해 위정자들을 비롯해 관계자들 모두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적용하도록 촉구한다.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
즉각적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의 의미는 눈앞의 즉각적인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천천히 확실하게 일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공간’의 의미는 시간적인 제한성 속에 놓인 고정된 세상을 의미한다. ‘시간’의 의미는 우리의 최종 목적인 낙원에까지 열려있는 지평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의미는 순간의 득실에 연연하지 말고, 최종 목적지까지 펼쳐진 지평을 염두에 두라는 뜻이다. 즉 옳다고 여기는 대전제를 실현하기 위해 확고한 신념과 끈기를 가지고 계속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순간순간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불편함 때문에 당황하여 공간 속에서 현재 눈앞의 안위만을 추구한다면, 진전의 과정을 고착시킬 수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시간이 공간들을 지배하고, 밝혀 주며, 쉬지 않고 확장하여 결코 퇴행할 수 없는 사슬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안에서 새로운 진전의 과정들을 만들어 내고, 그 과정들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열매 맺도록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과 함께하는 활동들을 우선시하는 것이다(223항).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기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듭거듭 읽다 보면 그 의미가 추려진다. 다른 곳에서 이를 설명하신 교황님의 말씀을 옮겨보겠다.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치빌타 카톨릭카」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가라지는 마지막 날 뽑힌다
“하느님은 시간 속에서 역사적인 계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시간은 역사의 과정들을 진행시키고(역자 주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게 하고), 역사의 무대는 그것들을 투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시간 속에 자리하시며, 진행 중인 시대의 과정 속에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그것이 긴 시대이건 혹은 과정 속에 있는 시간이건 간에, 시간보다는 힘(권력)이 행사되는 영역(분야)에 특권을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힘의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힘쓰기보다는 이 역사의 과정들을 진행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시간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역사의 과정들 속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됩니다”(「두 분 교황님과 함께」 63쪽).
교황은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몰이해가 보일 때,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요한 16,12-13).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복음화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해 준다. 가라지는 결국 마지막 날에 뽑히기 마련이다.
Q>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라는 규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교회 안에서 현재의 어려움 때문에 보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포기한 계획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확고한 신념과 끈기 그리고 인내로 우리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키 위해 지금 많은 사람의 몰이해를 극복하고 추진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