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의 재발견 (1) 공소는 살아있다
신앙의 뿌리, 여전히 믿음의 보화로
교우촌의 전통이 신앙의 뿌리로 남아 있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공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서 농어촌 시골 공소들은 폐허가 되고 단지 본당 사목구의 일부로서의 의미만 지니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소는 첫째, 여전히 많은 교구의 사목 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둘째, 초대교회 신앙 공동체의 모범적인 신앙 실천의 전통을 담고 있는 보화다. 따라서 시대와 사목 환경의 변화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공소와 공소사목의 활성화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가톨릭신문 창간 92주년을 맞아 사라져 가는 공소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공소가 품고 있는 신앙 전통을 이어받아 구현하기 위한 사목적 방안들을 3회에 걸쳐 모색해 본다.지난 3월 2일과 3일 이틀 동안 춘천교구 성산본당(주임 고봉연 신부)은 잔칫집이었다. 5개에 달하는 공소 건물을 한꺼번에 새로 짓고 축복식을 가졌다. 1923년에 설립된 송정공소를 비롯해 두촌 · 내촌 · 철정 · 역내공소는 모두 지어진 지 반세기가 넘었다. 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당연히 넉넉지 않을 살림살이의 시골 본당임에도 불구하고 5개나 되는 공소 건물을 신축하느라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은 신자들의 정성에 감격해, 이틀 동안 5개 공소를 모두 돌면서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날의 축복식은 사실 수 년간에 걸친 노고의 열매였다. 본당 신자들이 팔 걷고 공소 살리기에 나선 것은 2015년부터였다. 전국의 수십 개 본당을 찾아다니며 직접 기른 옥수수와 배추를 판매했다. 여기에는 “공소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꼭 다시 살리겠다”고 약속한 사목자의 의지, 본당 주임 고봉연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성산본당은 춘천교구에서 두 번째로 고령화한 본당으로 본당 신자 절반 이상이 70대 이상이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가고 어르신들만 남았지만, 그래도 공소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청주교구 음성본당(주임 최문석 신부) 관할 보천공소도 살아 있는 공소의 또 한 가지 사례다. 지난해 후반부터 보천공소의 미사 참례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1년 전인 2018년 2월 11일 47명에 불과하던 참례자 수가 하반기 들어서며 50명, 60명으로 늘더니 올해 2월 들어서는 70명을 넘어섰다.
전국적으로 계속 줄어만 가던 공소 신자 수가 이처럼 크게 늘어나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적극적인 선교에 나선 본당의 사목 프로그램과 이에 응답한 공소 신자들의 협업이 있었다. 음성본당은 지난 2014년 설립 60주년을 지내면서 관할구역 내 덕생, 보천, 소이 등 3곳 공소 살리기에 나선 바 있다.
음성본당은 지난 1년 동안 새 신자와 냉담교우, 일반 신자들을 두루 대상으로 다각적인 복음화 노력을 기울이는 ‘한마음 복음화 운동’을 전개했다. 보천공소는 고령층이 많은 여느 공소와 마찬가지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냉담교우들에 대한 가정 방문 등 꾸준한 활동을 펼쳤다. 도시에서 이주해 온 귀촌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도 힘을 기울였다.
청주교구의 경우 ‘공소사도회’가 교구 내 공소 활성화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06년 공소 실태 조사 과정에서 공소의 어려움을 깨닫게 된 신자들이 ‘공소 살리기’를 다짐하며 조직했다. 이후 10년이 넘게 고령화되고 피폐해진 공소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교육과 피정 지도를 포함한 다양한 지원을 해 오고 있다.
이처럼 공소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하고 공소사목의 활성화를 위한 노력들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상 오늘날 공소들은 존폐의 위기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공소 자체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1969년 전국의 공소 수는 1906개였다. 2017년 현재 공소 수는 모두 737개다. 무려 1169개의 공소가 사라졌다. 10년 전인 2008년에는 1037개였으니 최근 10년 동안에만 300개 공소가 폐쇄됐다. 가장 급격한 감소를 보인 것이 2010년으로 2009년 1017개에서 무려 204개 공소가 사라져 813개에 머물렀다.
특이한 것은 2005년, 한 해 동안 144개의 공소가 증가한 것이다. 전년인 2004년 971개에 비해 144개가 많은 1115개를 기록했다. 그 외에 2012년과 2013년 각각 3개, 1개씩 공소 수가 증가했다. 하지만 산업화와 도시화, 인구 고령화 등으로 인해 공소 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사목의 효율성과 공소 공동체의 유지 및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전국의 공소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전주교구 완주 되재공소 송인환(루카) 회장은 “여기는 묘를 파면 십자고상이 나올 정도로 신앙의 뿌리가 깊은 곳”이라며 “한 달에 한 번 있는 미사에 나오는 신자가 30명이고 그나마 모두 고령이라 공소가 없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정읍 신성공소 임춘남(베드로) 회장도 “이제는 공소의 종을 칠 수 있는 젊은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공소의 위기에 대한 인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목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공소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촌 지역에 위치한다는 점은, 농민과 농촌의 소외라는 한국의 사회경제적인 부조리와 연계된 성찰을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한국교회는 1984년 5월, 3년여에 가까운 조사연구를 거쳐 ‘한국 천주교 농촌공소 실태 조사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미 30년이 넘은 연구 조사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보고서는 “한국교회의 모태이기도 한 한국 농촌공소의 실상은… 침체 상태에 있다”면서도 “온갖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한국 농촌 공소는 신앙공동체로서의 희망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했다. 보고서는 더 구체적으로, “‘공소시대는 지났다’, ‘공소는 희망이 없다’, ‘도시인 사목에 치중해야 한다’ 등의 견해는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며 물량화, 대형화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어 “농촌교회, 도시교회가 하나로 살기 위해서는 초대교회의 모습, 한국교회의 모태인 공소 공동체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며 “나눔과 섬김이 구체적으로 이뤄져 가는 작은 생활공동체의 모습”을 제안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소의 가치와 중요성은 더욱 명확하게 확인된다. 즉, 한국 천주교회의 모태로서 공소 공동체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생활과 사목활동에 있어서 그 이상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보화라는 것이다.
전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정환 신부는 2018년 11월 10일 ‘교우촌의 믿음살이와 그 지도자들’ 심포지엄에서 “교우촌과 공소들은 사회구조가 바뀌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옛날과 같은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면서도 “역사 속에 남겨진 흔적들은 그것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힘을 불어 넣어주는 소중한 유산”이라고 말했다
여산 성채골 교우촌 공소 출신으로 교우촌 신앙 전통을 몸소 체험한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사라져 가는 공소 공동체와 공소의 신앙 유산을 보존할 수 있는 사목적 선택이 필요하다”며 “공소의 전통과 정신을 현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사목적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소의 재발견 (2) 신앙의 뿌리, 그리고 열매
신앙과 삶 하나된 ‘생활 공동체’, 사도시대 초대교회 모습 드러내
“한국 초대교회의 모습은 공소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인의 정서와 심성에 맞는 나름대로의 신앙 갖추기 노력을 피로써 증거한 교우촌 공동체는 공소교회의 모태(母胎)가 된다.”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교구 사목국장 시절인 1993년 4월, 경향잡지에 기고한 ‘신앙과 생활 공동체의 모델–공소교회’라는 글에서 교우촌 공소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토착화된, 이상적 신앙 공동체를 구현했다고 확신했다.
교우촌 공소, 이상적 신앙 공동체의 구현
“신앙으로 모인 교우촌 신앙 공동체는 함께 믿고 함께 살아가는 부락 공동체, 마을 공동체의 틀을 갖추기까지 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신앙 공동체의 모습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 나가는 ‘생활 공동체’였다.”
권 주교는 이어 전국 곳곳에 산재한 수많은 공소들 중에서 여전히 이러한 ‘신앙-생활 공동체’의 맥을 이어나가는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26년 전인 1993년에 쓰인 글이지만 교우촌 공소의 아름다운 신앙 전통이 한국교회가 참으로 복음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구현해 나가는 데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견해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산하 순교영성연구소가 2016년 11월 19일 마련한 ‘병인박해 이후 평신도 신앙운동’ 심포지엄은 순교자 중심 교회사 연구에서 방향을 틀어 신앙 선조들의 투철한 삶에 눈길을 돌렸다.
이 자리에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조광(이냐시오) 교수는 병인박해 이후 개항기까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아남았던 신자들’에 주목해 “한국교회사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병인년 박해 이후 평신도의 삶과 신앙’에 대해 발표하면서, 1791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교우촌이 박해의 칼날을 피한 신자들에게 중요한 삶의 못자리가 됐고, 이 공동체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으면서 공소와 본당으로 발전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소 공동체의 신앙과 삶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김혜경(세레나) 박사는 경기북부지역 공소 공동체 신자들에 대한 구술 연구를 바탕으로 한 ‘한국교회 소공동체의 뿌리로서 공소 공동체 연구’(2012년)를 통해 교우촌과 공소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봤다.
김혜경 박사는 한국교회 공소 공동체의 모습이 ‘사도시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교회 공동체의 원형에 가장 걸맞은 조건을 갖춘 교회’라고 규정했다. 즉, 교우촌은 “신앙생활과 생존을 위한 경제적 삶이 통합돼 하나의 운명 공동체 성격을 띠게 됐다”며 “전 신자가 나눔과 섬김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빛과 누룩의 역할을 하며 성사적으로 살아 온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우촌 공소의 복음적 모습은 이미 19세기 선교사들의 편지를 통해서도 뚜렷하게 엿볼 수 있다. 전주 전동본당 초대 주임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프랑수아 보두네 신부는 1889년 4월 22일 공소 방문 중 뮈텔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신입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愛餐)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곳의 예비 신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
소공동체 원형으로서의 공소
공소의 신앙 전통과 영성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한국교회가 미래 사목의 대안으로 추진해 온 소공동체와 맞물린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 교회운영 68항은 이렇게 말했다.
“본당 안에 작은 공동체 즉, 기초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서로 전례, 신앙,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본당은 신자수가 너무 많고 더구나 사제의 부족으로 본당 신부가 신자 개개인을 신앙인으로 성장시킬 수 없기 때문에 기초공동체가 필요하다.”
이후 한국교회는 본격적으로 작은 교회, 소공동체 교회를 지향하는 사목적인 과제를 추진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모태로서 공소 공동체가 소공동체 교회의 모델로 제시됐다.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는 2000년 ‘한국 천주교회의 소공동체 전통’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1990년부터 소공동체를 추진하면서 한국적 소공동체의 모델이 없어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고 하는 목소리가 있다”면서 “만약 한국교회가 온고지신의 정신을 가지고 신앙 유산에 관심을 두고 살아 왔다면 교우촌, 공소의 역사를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교우촌과 공소를 한국적 소공동체의 모델로 확신했다.
권혁주 주교는 앞서의 글에서 “인적 자원이 부족하고 생활 여건이 어려운 공소교회를 살리기란 생각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며 ‘공소 살리기’가 애당초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소공동체 교회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주체적인 동시에 보편성을 띠면서 신앙과 생활, 교회와 지역사회 사이에 틈이 없는 ‘신앙-생활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 둘째 “‘신앙-생활 공동체’의 못자리인 공소교회는 생활 조건으로나 지역 조건으로나 ‘소공동체 교회’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되기 때문”에 공소는 소공동체 교회의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권 주교는 그렇게 “소공동체 교회의 모델이 하나 둘 생겨날 때, 한국적 소공동체 교회의 실현은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확산돼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소의 재발견] (3) 공소의 재발견
공소만의 신앙유산 살려내는 큰그림 필요
공소사목과 관련해 오늘날 어느 정도는 회의적인 시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공소 살리기’가 과연 사목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공소의 사목 환경과 존재 의미 자체가 과거와는 천양지차로 변화된 지금, 공소사목의 의미가 있을까? 공소 공동체를 한국교회의 모태로 보면서 그 신앙 전통에서 소공동체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가? 등 공소사목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공소, 살려야 할까?
우선 공소 자체와 공소 신자들의 수가 급감했다. 그나마 남은 신자들은 평균 연령 70대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령화됐다. 이처럼 적은 수의 고령화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화된 사목 정책과 사목적 배려는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본당 수가 많아졌고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함에 따라서 공소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고, 공소들이 대부분 교통수단을 보유하고 있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공소가 속한 본당에서 마련되는 사목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공소는 다소 특별한 구역반일 뿐, 별도의 사목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공소사목부가 설치돼 있는 광주대교구 공소사목부 정규현 신부는 “공소에 단 한 사람의 신자라도 남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사목적 지원과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현실적으로 모든 공소가 교우촌의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기능과 역할이 퇴색된 공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본당과 교구의 지원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느님 백성으로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소사목 정책과 방법론 모색 필요
공소 활성화의 원론적 당위성은 있지만, 사실상 각 교구에서 공소사목에 고유한 정책과 방법론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대개의 교구들이 공소사목을 별도로 실시하지는 않고 있다. 이는 즉, 현재 전국 각 교구 대부분의 공소는 각 본당에서 전적으로 관할하며, 대체로 본당 구역반 체제 하에서 접근성과 지역성의 예외성을 고려한 ‘특별한 구역반’의 의미 이상을 크게 넘어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공소들이 관할 본당에 속해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공소가 갖고 있는 기능과 역할은 더 이상 비중 있게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다만 일부 교구에서는 별도의 공소 지원 체제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37곳의 공소가 있는 원주교구는 ‘공소사목협의회’를 구성해 공소에 대한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복음화사목국에서 담당하고 있다.
청주교구는 선교사목국에서 공소사목을 관장하며 매년 공소회장 연수를 실시한다. 교구의 공소사목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 촉발돼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공소사도회’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광주대교구에는 유일하게 공소사목부가 설치돼 있다. 무려 81개 공소가 있는 광주대교구는 공소사목에 대한 지원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 물론 공소들에 대한 사목은 공소가 속한 본당 사목자의 권한에 속하지만 전통적인 공소의 기능과 역할을 염두에 둔 다양한 지원을 한다. 여기에는 평신도 선교사의 양성과 파견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생활 공동체의 전망
교구의 사목활동 전체가 공소사목의 특성을 담고 있는 안동교구는 ‘농촌교구’로서의 정체성을 십분 고려해 교구의 농민사목과 연계된 공소사목의 전망을 일찍부터 피력해 왔다.
2004년 사목교서 ‘농촌의 복음화–공소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농촌의 복음화를’은 이 같은 관심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즉, 공소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농촌과 농민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해 11월 발표한 농민사목 특별교서 ‘농민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는 “농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농민들의 아픔에 동참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현장 중심의 사목을 목표로 삼아 농민들 스스로 기쁨과 희망을 살고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돕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교서는 특히 생활 공동체로서의 공소 공동체에 주목하고 공소사목이 미사 중심에서 벗어나 농민들의 삶과 연결돼야 함을 피력했다. 이러한 전망은 공소 공동체의 본래의 모습, 즉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된 생활공동체로서의 모습과 맥락을 같이 한다. 광주대교구 공소사목부 정규현 신부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앙 공동체가 지역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지역민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어떤 빛을 비춰 주었는지, 농촌과 농민들의 현실에 신앙 공동체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지역 사회와 주민들 안에서 신앙 공동체로서 어떤 전망을 제시해 주었는지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공소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전망
가장 시급하고 기본적인 과제는 변화된 사회와 사목 환경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공소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공소사목에 대한 전망을 확립하는 일로 보인다. 현대의 공소들에서 과거 교우촌 시대 공소의 기능과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신앙과 삶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지역 사회에 모범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드러냈던 공소 공동체의 복음적인 모습을 되살리는 것은 공소사목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광주대교구 사목국장 김정용 신부는 이와 관련해 “공소와 공소사목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며 “물론 이는 교구 전체의 사목 영역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과 동시에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소사목부 정규현 신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모든 공소들이 동일한 사목 환경과 활성도를 보이지는 않는다”며 “사목적인 필요에 따라서 기존의 공소를 본당 구역반으로 편제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고 공소 자체로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활성화를 지원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정 신부는 또 “어떤 경우든 공소가 복음적 공동체의 모습을 확고하게 정립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지역, 즉 교구에 따라 공소의 수와 특징, 환경이 상이하기 때문에 공소사목의 정책과 전망의 수립은 획일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 따라서, 과거와는 다른 공소사목의 전망을 수립하고 구체적인 사목방안들은 지역, 교구 및 본당들의 특성에 따라 수립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공소사목 현황을 볼 때, 사실상 공소사목은 전적으로 공소가 속한 관할 본당 사목자의 관심과 적극성 여부가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교구의 경우, 공소에 파견된 평신도 선교사의 역량과 투신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 본당 사목자의 관심, 왕성한 평신도 선교사의 활동으로 눈에 띄게 활성화된 공소들의 사례가 전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사 안에서 공소 공동체가 전해 준 신앙의 귀한 유산을 간직하고 구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그리고 귀농 인구 등 새롭게 유입되는 공소 신자들에 대한 사목 활성화를 위해서는 교구,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 차원의 공소사목에 대한 사목적 전망과 정책, 매뉴얼의 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공소 이야기] 열 번째(끝) - 전주교구 동막공소를 가다
병인박해… 한국전쟁… 고난은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었다
지금도 군데군데 산자락에 숯가마가 눈길을 끄는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의 한 산기슭. 산 깊고 먹고 살기 험했던 이곳에 동막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전주교구 칠보본당 관할인 동막공소는 병인박해 때 인근 산으로 박해를 피해 숨어 들었던 교우들과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했던 교우들이 박해 후에 산에서 내려와 정착했던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이야 넉넉한 살림에 따뜻한 정이 오가는 산골마을이 됐지만, 박해와 전쟁의 와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수없이 죽어나갔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오늘은 잔치날
폭염을 뚫고 찾아간 동막마을, 약간 비스듬한 언덕을 거슬러 오르니 한눈에 보기에도 단박 공소임을 알 수 있는 소박하지만 정갈한 공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자리잡은 동막경로당 앞에는 공소 교우분들이 벌써 십여 명이 넘게 모여 있었다. 게다가 그 불볕 더위에 장작을 때며 무언가를 삶고 있었다. 마침 멧돼지 한 마리가 올무에 잡혀 마을 잔치를 하고 있었다. 이웃 마을의 친구와 친지도 여럿 불러둔 상태였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공소회장 이중호(요한 크리소스토모·78) 어르신이 “아, 기자 양반 오시니 돼지 한 마리 잡았지!” 하시며 농을 했다. 허언이라 해도 고마운 말이지만, 낯선 이를 그리 진심으로 한껏 반기는 모습을 보니 농담만도 아닌 듯했다. 어쨌든 여유와 시간이 허락되면 흥겨운 마을 잔치가 종종 마련되기는 하는 듯했다. 부엌에서 능숙한 칼질로 돼지 수육을 나누던 최귀임(골롬바·73)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한 가족이니, 먹을 것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나누는 자리가 많다”며 취재는 뒷전으로 배 채우기를 채근한다. 넉넉한 시골 인심을 감사하며 공소의 역사를 억지로 캐물었다.
동막공소의 역사
동막의 역사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몸을 피했던 교우들이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한 뒤,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형성하면서 시작됐다. 처음 신자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이 1886년경이다. 이후 꾸준하게 교우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원래 당시 사람들이 자리잡았던 곳은 지금 공소 위치에서 약 1.5㎞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던 중 1897년 동막공소가 설립됐고, 이후 매년 봄, 가을에 본당 신부가 공소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현 위치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였고 마을 전체가 교우들로 구성된 신앙촌을 크게 이루게 됐다. 현재 공소에는 25가구가 살고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만 해도 45가구에 달할 정도로 마을 규모가 지금보다도 더 컸다. 이미 그 전부터 교우들은 별로 먹을 것도 없던 산 속에서 칡뿌리를 찧어 쑥과 풀잎 등을 섞어 개떡을 만들어 먹었다. 서숙이나 수수, 옥수수, 담배 농사를 주로 했고, 산전을 개간해 다락논을 만들어 짜투리 땅도 알뜰하게 썼다.
지금이야 웃으며 하는 옛날 이야기들이지만 박해, 그 모진 서슬을 피해 달아난 뒤 만난 굶주림, 간신히 먹고 살만하니 당해야 했던 전란…. 그 난리통에 친지와 가족들이 엄청 상했다.한 형제 한 가족
수육 한 점을 입에 넣던 이중호 공소회장이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낀다. “참 애 많이 쓰셨겠어요!”라며 교우촌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 질문에 답하던 순간이었다. 이 회장은 “많이 죽었지요. 굶어 죽었고, 더워서 죽고 추워서 죽고….”라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 회장은 나이 어린 9살. 어린 마음에도 마을 사람들의 고생과 고통이 생생했다. “여기가 노령산맥 자락이고 산세가 깊고 험해요. 전쟁 후에도 빨치산들이 들고 나면서 먹을 것을 약탈해 가곤 했어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그 고난 속에서 교우들 간의 형제애는 한없이 깊어졌다. 원래 일가친척들이 대부분이기도 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 생과 사의 갈림길을 함께했기에 동막공소 신앙 공동체는 말 그대로 한 형제요 한 가족이다. 출애굽의 이스라엘처럼, 고난과 고통은 오히려 이들을 주님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만을 따르도록 이끌었다.
1897년 공소 설립은 됐지만 공소 건물이 없어 신자들 집을 교대로 돌며 공소예절을 했다. 그러던 중 1957년 당시 부회장이었던 김재열(안토니오)씨가 백미 1가마를 주고 대지 50평을 매입, 공소 건물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 목수였던 교우들이 발벗고 나서 수 개월 후인 6월에 누추하나마 공소 건물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1986년 흙집이었던 건물을 헐고 모든 교우들이 합심해 기금을 모아 벽돌집을 다시 세웠다.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기도, 뜨겁고 뿌리깊은 신앙
새 집을 지은 다음해,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2개팀이 창단됐다. 동막공소는 마을 전체가 빠짐없이 교우들이었기에 전교 활동은 애당초 별 의미가 없었다. 레지오 활동은 전교보다는 기도를 통해서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친교와 봉사, 희생 정신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막공소에는 성체가 모셔져 있다. 다른 한 분과 함께 매일 교대로 한 시간씩 2시간 성체조배를 한다는 최귀임 할머니는 “나이 먹어서 기도밖에 더 하겠어요?”라며 웃는다. 할머니를 따라 공소 안으로 들어가니 성체가 모셔진 감실 앞에 꽃무늬 방석이 있고, 성경과 초가 얌전히 놓여져 있다.
꽤 젊은 축에 끼는 김용(베드로·64)씨는 “어르신들 기도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라며 혀를 내두른다. 매일 성체조배를 하는 두 분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공소 신자들이 틈나고 짬나면 공소를 찾아와 기도를 한다. 특별히 맘 먹고 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그게 그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거의 연중으로 9일기도가 이어지는데,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도록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도 9일 기도를 바치고 또 바친다.
대부분 공소들이 고령화돼 향후 10년 사이에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지만, 동막공소는 그런 걱정에서 꽤 비켜나 있는 듯하다. 현재 살고 있는 25가구 중 10여 가구의 연령대가 40대와 50대에 속한다. 물론 경제적으로 다소간 안정돼 있는 점이 외지로 나간 후손들을 다시 끌어들이는 이유도 된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뿌리깊은 신앙, 그리고 그 신앙에 바탕을 둔 삶의 방식, 서로를 뜨겁게 이어주는 형제애와 공동체 정신이 가장 큰 이유인 듯했다.
먹을거리와 옷차림, 하루의 일상들이 옛날과는 달라 보이지만 형제애와 깊은 신앙심으로 형성된 공소 공동체의 원형이 동막공소에는 옛날처럼 지금도 한치도 다름없이 살아 있는 듯했다.
[공소 이야기] 일곱 번째 - 청주교구 보천공소를 가다
1년새 주일미사 참례자 두배로… 그 까닭은
지난 6월 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청주교구 음성본당(주임 최문석 신부) 보천공소(회장 구정모)에서는 그야말로 잔치가 벌어졌다. 그것도 주임 최문석 신부가 ‘한턱내는’ 자리였다. “주일미사 참례자 수가 70명 이상 다섯 번을 넘기면 음식 대접하겠다”는 공약이 이뤄진 것이다. 이날 미사 참례자 수는 어린아이까지 포함해서 78명이었다. 9시 미사를 참례한 신자들은 본당에서 준비한 영화를 본 후, 최 신부와 함께 돼지 불고기, 잡채에 갖은 반찬으로 점심을 즐겼다. 1년여 전만 해도 40여 명에 불과했던 주일미사 참례자 수는 지난해 후반부터 점차 50명, 60명 선을 넘어서다 올해 들어 70명 단위로 바뀌었다. 한 달에 한두 차례는 70명을 넘어 80명 가까운 신자가 미사에 모습을 보인다. 1963년 공소 경당을 마련한 지 반세기를 넘은 시점에서 새로운 복음화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해보자
최 신부가 공소 신자들에게 밥을 산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지난 5월 22~26일 열렸던 음성 ‘품바 축제’에 공소 신자들이 먹거리 장터를 운영한 수고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공소는 요즘 신자 수가 늘면서 하나뿐인 화장실을 증축하고 미사 후 차와 담소를 나누는 쉼터 조성에 여력을 쏟고 있다. 지붕 위 십자가를 교체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품바 축제에 나선 것도 여기에 필요한 기금을 자체적으로 모으기 위해서였다. 평균 연령 70대 초반의 신자들은 공소를 더 잘 가꾸기 위해 육개장을 끓이고 도토리 빈대떡 등을 만들어 판매했다. 최근 들어 신자 수가 늘어나 가능한 시도였다. 심오주(제노베파·70)씨는 “몸은 고단할지라도 공소 공동체가 더욱 일치된 시간이었다”며 “서로 격려하고 돕는 모습 속에서 고생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뭔가 한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공소 신자의 증가는 공동체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기는 동인(動因)이 되고 있다. 해체됐던 레지오마리애 활동이 다시 시작되고, ‘모임’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처지에서 남성 신자 모임 ‘성심회’까지 만들어졌다. 그 자신감은 무엇보다 발로 뛰어 한 명 한 명씩 신자들을 하느님 앞으로 찾아온 데서 비롯된다.
찾아가는 선교
보천공소의 신자 수가 늘어나게 된 것은 공동체가 음성본당의 복음화 운동 노력을 기반으로 ‘찾아가는’ 선교에 지속적으로 맛 들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음성본당은 2016년 전수조사를 해서 실제 거주가 확인된 신자들의 신앙생활 현황을 분석하고 사목 지표를 제작했다. 또 이를 토대로 ‘한마음 복음화 운동’을 벌였다. 새 신자와 예비신자를 동반하는 ‘새벗팀’, 냉담교우와 병자들을 돌보는 ‘한빛팀’, 일반 신자들을 동반하는 ‘일더하기팀’, ‘홍보팀’을 만들어 공동체 회복 운동에 나섰다.
보천공소 역시 이 과정 안에서 냉담교우와 관할 지역으로 귀촌하는 이들에게 더욱 시선을 돌리게 됐다. 이 지역은 귀농보다 귀촌 인구가 많은 편이다. 구정모(베드로·72) 회장은 “이사를 왔다고 해서 먼저 전입 인사를 하고 교회를 찾는 경우는 드물다”며 “4개 반모임이 활성화되면서 이사 오는 이들이 생기면 반에서 먼저 방문해 전입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지 살피고 관계 맺기부터 힘썼다”고 말했다.
특히 전수조사를 통한 냉담교우 파악은 신앙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커지게 했다는 분석이다. 이들을 교회로 이끄는 데는 본당에서 마련한 ‘신호등 접근법’이 활용됐다. 마음 상태와 준비 정도에 따라 ‘빨간불’(건너가면 안 됨), ‘노란불’(주의 살피고), ‘파란불’(건너감) 등으로 접근 단계를 만들고 회두 활동을 벌였다.
신자들이 신앙과 교회에 대한 관심의 불을 지핀 후에는 수도자와 사제가 순차적으로 찾아가 힘을 보탰다. 예비신자가 생기면 한 명이 될지라도 본당 수녀가 공소에 나와 교리를 가르쳤다. 교리 시간에는 항상 공소 회장과 레지오마리애 단원 등 6~7명이 함께 자리를 지켰다.
2017년 6월 경기도 이천에서 전입한 박정화(노엘·64)·천순화(노엘라·54)씨 부부는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으나 지역에 아무 연고가 없던 상황에서 앞집 뒷집 공소 신자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됐다. 남편 박씨는 2017년, 천씨는 2018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세례를 받았다.
천씨는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아서인지 이제 공소 분들이 정말 남 같지 않고 모두 집안의 ‘큰 형님’, ‘작은 형님’처럼 느껴진다”며 “낯선 지역에 와서 많이 힘들고 외로울 수 있었는데, 하느님 안에서 또 하나의 가족을 만나 큰 힘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선교 열정은 청년
보천공소는 신자가 늘어나면서 ‘젊어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60~70대 귀촌자들이 유입되며 생긴 모습이다. 공소 측은 “70~80대가 주류를 이뤘던 과거에 비하면 평균 연령이 10년 정도는 낮아진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교적상 신자 175명 중 55세 이상이 120명이고 그중 65세 이상은 93명이다. ‘공소’를 얘기할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고령화’ 단어가 떠올려진다.
이런 면에서 현재의 보천공소 활성화는 한편 ‘선교 현장에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고령화된 작은 공동체라 할지라도 선교의 기쁨을 느끼고 삶 안에서 실천하는 ‘마음’이 있을 때 공동체는 살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들은 그에 대해 “냉담교우를 찾아가고 새로 온 이들을 만나며 한 명 두 명 공소 좌석이 채워지니까 너무 재미있고, ‘하면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표현한다.
최문석 신부는 “도시보다 이웃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스스로 본인들이 할 수 있는 바를 찾아 선교에 나서고 기쁨을 느꼈다는 점은 공소나 고령화 현상이 심한 본당에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보천공소는 외면적으로 어르신 공소로 보일지라도 복음화 요청에 능동적으로 응답한 젊은 공동체”라고 밝혔다.
“연말에 전 공동체가 참여하는 신앙교육을 계획하고 있다”는 구 회장은 “앞으로 신자가 더 늘어날 수 있도록 선교 활동에 계속 힘쓰면서 영적으로도 성숙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