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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6) 내 신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나만의 고유한 신앙 여정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05|조회수37 목록 댓글 0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6) 내 신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나만의 고유한 신앙 여정

 

나에게 신앙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 친구의 손에 이끌린 신앙, 천주교 신자인 배우자를 만나 갖게 된 신앙 등 그에 대한 답은 매우 다양할 것이다. 우리의 얼굴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인생살이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걷는 신앙 여정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 신앙이 수많은 신자의 손을 거쳐 나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혹자는 자기 스스로 성당을 찾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살면서 천주교 신자와 접촉이 한 번도 없었다면 어떻게 스스로 성당에 갈 마음이 들었겠는가.

어떤 지인께서 말씀하셨다. “신부님, 저는 원래 종교가 없었는데요, 면사무소에서 신부님 아버님과 함께 근무하면서, 언젠가 종교를 갖게 되면 꼭 천주교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가족은 천주교 집안이 아니었다. 당시 신자가 아니시던 모친께서 초등학교 막 진학한 필자를 성당에 보내신 것이 계기가 되어 온 가족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언젠가 모친께 물었던 적이 있다. “엄니는 어떻게 처음에 저를 성당에 보내신 건가요?” 그때 모친의 답변은 이러했다. “글쎄, 같이 몰려다니던 천주교 신자들이 그렇게 부럽더라.”

그런데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시작된 신앙이 어느덧 자기의 고유한 신앙이 될 때가 찾아온다. ‘부모님이나 가족의 신앙이 어느 순간 의 신앙,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때 신앙은 자기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두 번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시작에서 신앙은 우리 인생의 하늘과 같은 존재가 되며, 삶을 온통 새롭게 변화시킨다.

프랑스 유학 시절 한 은사 신부님의 본당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미사에 앞서 행해진 공동체 모임에서 한 자매님이 신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걸 들은 기억이 난다. “본당 신부님께서 저에게 10분 동안, 내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하셨는데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60년이나 되는 길었던 준비의 시간을 어떻게 단 10분 동안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자매님은 이미 이 한 문장으로, 신앙으로 변화된 60년 인생을 너무나 감동적으로 표현하셨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60년의 무의미했을 인생 전체가,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변한 것이다.

사람이 성장해가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만의 삶을 계획하고 건설해 나가듯, 신앙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신앙이 있다. 그리고 자기만의 고유한 신앙 여정을 찾아가는 사람은 신앙과 삶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삶도 신앙도 모두 같은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작가가 하느님을 인생의 내비게이터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신앙이 자기 삶의 나침반임을 깨닫는다.

나에게 신앙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먼저 내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 나오게 되었는지 떠올려보면 어떨까. 나를 신앙의 길로 이끌어 준 수많은 손길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신앙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남의 손에 끌려다니는 수동적이고 피상적인 신앙이 아닌, 나 스스로 의식하는 나만의 주도적 신앙의 여정에서 나는 어디쯤 와있는가? 어쩌면 나만의 진정한 신앙 여정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그 여정을 시작할 채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7) 신앙은 어려워

힘들고 어려운 신앙의 길 가다 보면

 

신앙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신앙이 짐이나 속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같이 놀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다양한 세상에, 주일 미사 때문에 일정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판공성사나 특강 등으로 본당을 방문할 때,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진 분들을 많이 만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변화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신앙을 그만 내려놓아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어떤 분은 고해성사를 보긴 하지만 매번 같은 죄를 고백하고, 나아지는 것도 없어 회의감이 든다고 한다. 농담 삼아 매번 같은 죄를 짓는 것이 매번 새로운 죄를 짓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라고 해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신앙으로 인해 자녀나 배우자나 부모님과 갈등을 겪는 분도 많다. 성당에 나가지 않는 자녀를 보며, 혹시 내가 잘못 키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어떤 분에게는 평생의 짐이 되기도 한다. 자녀 신앙 교육 말고도 신앙으로 인해 가정에 불화나 마찰이 생기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보편화된 현상이라고 해도, 성당에 나가지 않는 자녀나 배우자 혹은 부모님을 생각할 때 찾아오는 불안감은 떨치기 어렵다.

신앙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신앙 자체로 인해서다. 신앙이 요구하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프랑스 유학 시절 한 교수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매우 어렵고 긴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여러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세상 사람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가르치는 윤리 생활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과 거리가 있거나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동성결혼, 사형제도, 낙태, 안락사 등, 우리 사회에는 신앙과 마찰을 빚는 사회적 문제들이 많다.

신앙의 어려움은 평신도 신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한 선배 사제와 본당에 판공성사를 도와주러 갔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매번 판공 때 고해성사를 도와주긴 하는데, 열심히들 오셔서 성사를 보시기는 하는데, 다 한계가 있는 것 같아.” 당시 사제직에 갈등을 겪으셨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얼마 후 사제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큰 충격이었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었는데, 한 번은 신학교에 부임한 다음, 필자가 갖고 있던 이상과 신학교에서 직접 마주한 현실이 너무 동떨어져 있고, 신학교 신부님들에게 변화나 쇄신의 의지가 없어 보여서 회의감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당시 필자를 찾아온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뱅상 신부님을 만나 여러 날을 함께 지내며, 마지막에 필자의 고민을 꺼냈다. 신부님은 필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바오로), 그 마음 이해해. 나도 그럴 때가 있어. 그런데 너에게 맡겨진 학생들이 매일매일 변화하는 걸 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뱅상 신부님의 이 말씀이 나의 눈을 크게 뜨게 해주었다. 그렇다. 나에게 맡겨진 학생들은 나와 함께 살면서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는데, 나는 너무 멀리 높은 곳만 보며 회의감을 갖고 있었구나.

여러모로 신앙은 어렵다. 그런데 한 번도 신앙에서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신앙이 어렵지만, 그만큼 값지고 고귀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먼 훗날, 부족하나마 신앙을 잘 지켜낸 다음, 신앙이 주는 금은보화와 같은 열매들을 발견하며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8) 성장하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

 

신앙은 인생이라는 밭에서 자라나는 나무와도 같다.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 여정을 가진 것처럼, 신앙도 다양한 인생에 뿌리내리고 싹을 틔우고 자라나 성장하며 어느새 열매를 맺고 누군가를 위한 그늘이 되어준다. 신앙은 생명체와 같아서 관심을 두고 돌볼 때 많은 성장을 이루지만, 돌보지 않고 외면할 때 성장하지 못하고, 있던 신앙마저 약해진다.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신앙은 전수되고 성장한다. 특히 교회에서 하는 봉사는 신앙의 성장에 큰 자양분이 된다. 필자도 일반대학교 재학 시절 중고등부 교사를 하며, 신앙에 대해 더 찾고 묻고 하다가 보니 이렇게 사제로 살게 되었다.

나의 신앙은 얼마나 성숙했을까?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러 신앙 이야기를 듣다 보면, 크게 두 단계의 신앙이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첫 단계는 유아기적신앙이다. 부모나 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상태에 있는, 그러나 아직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신앙으로, 대체로 의무를 준수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에 머문다. 그런데 이처럼 수동적이고 피동적이며, 의무감에서 비롯된 신앙은 오래 가지 못하고 쉽게 활력을 잃기 마련이다. 신앙은 살아있는 것이며, 관계 안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신앙에서 관계를 맺는 신앙으로,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는 신앙으로 전환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것이 된다. 이 단계의 신앙은 능동적, 의식적이며 관계를 맺는 신앙이다. 이 단계에서는 신앙이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가 된다.

신앙이 성숙했다는 것은 그 신앙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삶을 살아가고 계획하는 데에 신앙이 기준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앞의 두 단계는 무를 자르듯 가를 수는 없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에 따라 두 단계를 서로 오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공동체 안에 머물 때 성장한다는 것이며, 거기서 겪는 어려움은 신앙과 인생의 성장에 자양분이 된다.

신학생 양성에 종사하면서, 글을 읽는 것보다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때가 있다. 학부 2학년 신학 입문 강의 때 학생들에게 종종 나에게 신앙이란?’이라는 과제를 내준다. 모태신앙을 갖고 학생 시절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다 신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들도 신앙에 대해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갖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때 필자는 그들을 격려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신앙에 대해 고민하거나 어려움을 가진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대해, 성소에 대해 갈등을 가져보지 않고 사제가 되는 것이 더 위험할 것입니다. 모든 신학자와 사목자가 그 길을 거쳤습니다. 여러분도 용기를 내어 신앙에 대해 계속 묻고 찾으며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에서 겪는 어려움은 다양하겠지만, 대체로 자신의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어려움이 신앙의 성장에 큰 자양분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분들의 이야기가 많은 도움을 준다. 성경도 신앙의 완벽한 영웅들이 아닌, 그러한 길을 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찾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신앙의 어려움을 딛고 성장한 옆집의 성인이 매우 많다. 우리도 그러한 옆집의 성인이 될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며 우리가 받은 신앙을 잘 돌볼 수 있다면 말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9) 신앙인이 된다는 것

교회 신앙을 내 것으로 만드는 여정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세례성사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되살아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혹자는 묻는다. 어떻게 세례성사만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하겠는가? 마술이나 신화와 같은 일이 아니라면? 실제로 세례성사를 받은 직후 성당에 나오지 않는 새 신자가 겪는 어려움이 그런 것이 아닐까? 교리를 듣고 세례를 받긴 했는데, 달라진 것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종말론적이다. 세례성사로 새로 태어났지만,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갈 새로운 삶은 나의 삶 안에서 완성해가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물려받은 교회의 신앙은 아직 나의 것이 아니다. 교회의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많은 분이 자신을 무늬만 신자라고 고백한다.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할 때는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신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성당 문을 벗어나는 순간 세속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앙이 남의 것으로 머물러 아직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 되기까지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신앙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한 인격적 주체로 서는 것이며, 이는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는,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교회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믿거나 미사 참례와 기도의 의무 등을 준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 가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삶의 비전과 가치관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고, 공동체가 제시하는 윤리적 삶을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신앙이란 바로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자신만의 온전히 자유로운 응답을 드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별도의 교육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과정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이다. 교회의 삶과 일상의 삶을 오고 가며, 신앙은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든다.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듯, 신앙은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활력을 주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때로는 내적 싸움과 갈등을 겪기도 하는데, 이는 신앙이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신앙이 과거의 삶과의 결별을, 과거에 좇았던 이념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떠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랜 냉담을 하던 사람이 다시 성당에 나온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주일미사 참례를 위해 한두 시간 할애하는 것만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냉담의 삶을 접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종교적, 윤리적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새로운 삶이며, 과거와 결별하는 고통을 동반하는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수록 신앙은 성장하며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선물로 준다.

이 대목에서 한 번 자문하면 어떨까. 나의 신앙은 진정 나의 신앙인가? 나는 신앙이 제시하는 삶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세속이 주는 즐거움을 더 좋아하는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0) 신앙은 그리스도와 만남

그분을 만나 달라진 나의 삶

 

우리 사회는 수많은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 박람회와 같은 곳이다.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와 같은 기성종교에서 신흥종교, 그리고 사회에 큰 물의를 빚는 유사종교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또한 뉴에이지 등 신영성 운동도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다. 이러한 다종교 사회에 살아가는 가톨릭 신자는 자신의 신앙이 다른 종교와 어떻게 다른지, 자신은 왜 가톨릭 신자로 살고 있는지 공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의무가 아닌, 우리가 합리적으로 책임감 있게 믿으며 살기 위해서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박해받는 신자에게 보낸 베드로 서간의 이 당부 말씀은, 다양하게 신앙을 방해하고 탄압하는 새로운 박해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울림 있게 다가온다. 우리가 신앙으로 부여받은 희망에 관해 세상 사람들이 물을 때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 나의 신앙에 대해 물을 때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당신의 첫 회칙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자리함을 명확히 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로 자기 삶의 근본적인 결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

여기서 말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그분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며, 그 신앙이 오늘까지 전달되는 것도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분과의 만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황님은 단순히 예수님과의 만남만이 아닌, 그 만남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결과까지 말씀하신다. 그 결과란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이란 단순히 교리를 믿거나 윤리적 계명을 지키는 것만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입으로 고백하는 것만도 아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실제로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을 통해 이전 삶과는 달리 그분께서 열어주시는 삶의 새로운 비전과 삶의 결정적인 방향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를 비롯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병이나 악령, 고통과 죽음 등으로 점철된 암울하고 절망적인 삶에 새로운 하늘이 열림을 경험했다. 자신들이 그저 왔다 사라지는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받는 소중한 자녀임을 경험했다. 이렇게 새로운 삶을 알게 해주신 그분은 그들에게 삶의 의미 자체였고, 그분을 따르는 삶은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회칙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아는가? 다만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닌, 실제로 그분을 만나 아는 앎에서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누가 물었을 때 나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분이시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나?

이 질문들에 곧바로 답을 할 수 없다고 해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답이란 정해져 있지 않으며, 각자 자신의 삶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시며, 나의 삶에 어떤 의미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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