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 영성, 신앙의 색깔 영성, 신앙 살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내면적 의지이며 힘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06조회수54 목록 댓글 0[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 영성, 신앙의 색깔
영성, 신앙 살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내면적 의지이며 힘
‘영성’이란 말에 관한 오해와 편견
솔직히 고백하면, 신학생 시절 ‘영적 독서’라는 용어에 조금 비판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것은 거룩하고 초월적인 것과 관련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신학생의 어떤 행위들에 세속과 구별되는 특권의식을 심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영적 독서란 읽는 대상의 거룩함과 읽는 방식의 거룩함 그 어디에 무게중심이 있는 걸까? 성경을 제외한 다른 책들은 그저 읽는 방식의 거룩함에서 영적 특성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감히 하곤 했다. 그래서 영적 독서 시간에 몰래 본 회퍼의 「옥중서간」을 읽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영성의 수덕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관습과 행위에 충실하고 외형적으로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성체 앞에서 오랜 묵상과 관상을 통해 특별한 내면적 체험을 하는 수도자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영성적이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영성이라는 말이 외적 경건함과 내적 특수함에만 좁혀서 적용되는 경향이 많다.
영성에 관한 종교사회학적 이해
영성적이라는 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 친밀하고 내면적인 것, 경험적인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종교적이라는 말을 주로 공식적인 것, 외형적인 것, 제도적인 것과 관련시키는 것과는 대조된다.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자주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된다. “종교의 시대에서 영성의 시대로.” 요즘 쉽게 듣는 말이다. 종교의 몇몇 부정적 현상들이 종교적이라는 것과 영성적이라는 것을 구별하게 한다. 하지만 종교(성)와 영성은 언제나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영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신앙생활, 종교생활, 영성생활. 통상적으로 서로 다른 뉘앙스로 우리는 이 말들을 사용한다. 종교생활은 성당에 가서 성사와 전례와 본당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 영성생활은 일상 안에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외형적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고, 내면의 신앙생활은 영성생활이라고 너무 쉽게 구별해버린다. 더욱이 많은 경우, 신앙생활을 종교생활로 좁혀서 이해한다. 이것은 신앙이 외적이고 규범적인 것, 즉 종교 관습과 규범을 지키는 것이고, 영성은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것이어서 개인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종교생활과 영성생활을 포함하는 것이다. 신앙, 종교, 영성. 구별은 해 볼 수 있지만, 진정한 맥락에서 그 셋은 하나일 것이다.
영성(spirituality)은 몸(body), 마음(정신, mind, spirit), 영혼(soul) 모두와 관련이 있다. 오랫동안 영성은 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오해했다. 현대적 이해 안에서 몸과 마음과 영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영성수련은 몸의 수련, 마음의 수련, 영의 수련 모두를 포함한다.
영성에 관한 신학적 이해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영성은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며(1코린 2,14), 육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로마 8,13),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콜로 1,28)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이라는 말처럼, 그리스도교에서 영성이란 세례 받은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진 신앙의 속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신학이 이성적인 이해를 추구한다면, 영성은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하느님을 이해하기보다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초월적 경험과 신비 체험과 같은, 특별한 체험을 자꾸만 영성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다. 영성과 신비주의를 혼동한다. 환시와 환청을 통한 내면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신비가들이 영성가의 대명사로 흔히 지칭되고 있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영성의 한 형식일 뿐이다. 하느님 체험은 특별하고 특수한 형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 속에서 발생한다. “‘옆집’의 성인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항)이라는 표현은 영성적 체험, 즉 거룩한 체험은 꼭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어쩌면 일상의 영성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영성은 관계성을 의미한다. 영성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토대로 자기 자신과 이웃과 세상과 관계 맺는 일이다. 영성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을 포함한다.
영성은 하느님과 일치를 뜻한다. 일치해서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전통 신학에선 이것을 성화(santification), 신성화(deification), 신화(神化, divinization)라고 불렀다. 일치한다는 것은 단순히 관상적 체험을 통한 내면의 일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삶 안에서 생각과 행동과 태도의 일치를 통한 전인적 합일이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과 태도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닮아 일치하는 것이 진정한 성화의 길이다.
영성은 신앙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영성이란 삶 속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방식이다. 신앙을 살아내고 실천할 수 있는 내면적 의지이며 힘이다. 신앙은 결국 예수를 생각하는 것, 따르는 것, 닮는 것, 재현하는 것, 예수와 일치하는 것, 예수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예수의 생각, 시선, 행동, 태도, 삶의 방식, 그 모두를 닮는 것이다. 영성이란 예수처럼 사는 것이며, 예수처럼 살게 하는 내면적 의지와 힘이다.
영성은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된다
영성은 신앙이 수행(고백, 표현, 실천)되는 색깔과 모습이다. 당연히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습이 있다. 학문적 관점에서 역사 속의 영성의 스타일을 금욕적이고 수도자적 영성, 신비주의 영성,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영성, 예언자적이며 비판적 영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신앙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처럼, 신앙의 특성인 영성 역시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생태 영성, 사제 영성, 수도자 영성, 평신도 영성 등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영성의 색깔은 다양하고 다채롭다. 신앙을 살아내는 저마다의 모습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다양할 것이다.
자신의 신앙이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신앙을 살아내고 있는지,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자기 내면의 의지와 힘이 어떤지에 대해 성찰하며 신앙을 실천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일이 영성수련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 일상의 신학 - 늙어감과 소멸에 대한 신학적 단상
신앙 안에서 걸어가는 노년의 길은 곧 완성을 향한 길
늙어가는 몸을 바라보며
언제부터인지 부쩍 나이를 의식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것들에서 소멸과 죽음의 흔적을 발견한다. 새해를 시작한다는 설렘은 사라졌고 달력의 날들이 가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지 못한다. 의식 속의 나는 늘 그대로의 나인데, 몸은 세월의 풍화를 고스란히 견뎌내고 있다. 공부할 수 있는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몸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내 생을 지탱하며 나를 끌고 온 내 몸이 고맙고 대견하다. 타인과 세상의 시선 속에서 불편해지는 노년의 몸이라 할지라도, 내 자신만이라도 그 늙은 내 몸을 사랑하고 고마워해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늙는다는 것은 몸이 노화된다는 뜻이다. 더 읽지 못하게 하는 노안, 감각들의 전반적인 약화, 몸의 균형과 조절 능력의 쇠퇴가 괜히 서럽다. 늙은 몸은 타인의 시선에서 배제된다. 때때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노년의 시기가 길어진 오늘의 세상은 늙음과 늙은 몸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지고 있다. 그래도 슬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산다는 건 감각의 향연
늙어가면서 뜻밖에도 몸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흔히 정신과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철학과 신학은 몸보다는 정신과 영혼을 더 강조해왔다. 하지만 적어도 이승의 삶 안에서는 정신과 영혼은 몸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정신과 영혼이 깃드는 자리이며 토대다.
몸은 감각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보고(시각), 듣고(청각), 맛보고(미각), 만지고(촉각), 냄새를 맡는다(후각). 우리의 생은 어쩌면 이 감각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욕망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생동함의 감각이다. 죽음은 이 감각의 상실을 뜻한다.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고 만질 수 없고 그리운 향기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소멸은 슬프다.
황동규 시인의 최근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에는 소멸이 가까워지는 시간 앞에서 감각의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시인이 사랑했던 감각은 무엇보다 청각과 시각의 즐거움이었다. 시집 안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음악을 듣는 일, 차를 타고 가서 조우하는 다양한 장소의 풍경들을 응시하는 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들의 우연한 정경을 바라보는 일에 관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오디오에선/ 청각을 뿌리까지 잃은 베토벤이/ 소리의 어둠 속에서/ 소리로 노래하고 소리로 몸부림치고/ 소리로 깊어진다.”(‘이 겨울 한밤’)
“세상이 느닷없이 모습 바꾸는 곳과 만나는 일은/ 삶이 어쩌다 던져주는 짜릿한 선물.”(‘홍천 구룡령九龍嶺길’
“산책길 언덕, 흰 눈 막 비집고 나온 노란 복수초 보고/ 이런 게 바로 사는 맛 어쩌고 하며 자리 뜨지 못하다니.”(‘대낮에 밤길 가듯’)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다.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늙어가는 몸이 서러운 이유는 감각은 시들어가고 몸의 아픔만 선연하기 때문이다. 늙은 몸의 감각은 생동하는 감각이 아니라 고통의 감각이다.
“감각은 시들어도/ 아픔은 방금 뱀 입에 물린 개구리같이 생생하다.”(‘일곱 개의 단편斷片’)
늙은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늘 하루만이라도” 감각의 향연을 만끽하는 일이다. “그래, 다시 하루다/ … /언젠가 몸이 망설이다 마음 덜컥 내려놓으면/ 그 방향에서 생판 모를 형상으로 죽음이 동틀 거다.”(‘삶의 앞쪽’)
신앙 안에서 잘 늙어간다는 것은
늙음은 몸과 마음을 위축시킨다.
“삶의 폭 점점 졸아들다/ 조그만 포구 되었다.”(‘조그만 포구’)
“노인들은 자신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체성과 자아가 작아진 느낌을 받는다.”(마사 누스바움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중) 이 비대칭적 의존이 주는 두려움과 위축감이 역설적으로 공격성과 폐쇄성을 낳는다. 지혜롭고 관대한 노인에 대한 이상(理想)은 오늘의 시대에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허울들을 벗어버리고, 때론 탈속한 포즈를 취해보기도 하지만, 잠깐의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노년을 담담하게 수용하고 잘 늙어가는 사람이 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신앙인은 매일의 삶을 예수의 이야기에 관계시키고 준거점을 두는 사람이다. 그런데 젊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노년에 관한 함의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신앙의 전통 속에서 지혜롭게 노년과 소멸을 맞이한 신앙의 선인들에게서 배울 수밖에 없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내면적이고 신앙적인 수용을 강조한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모든 세대는 그 자체로 고유한 양식과 가치를 지닌다. 생을 계획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세대는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기 어렵다. 삶의 끝자리에서 우리는 자기 생의 전체 맥락을 생각하게 된다. 노년의 시기는 용기와 정직성을 갖고 삶의 전 문맥을 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직시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죽음은 이승에서의 소멸을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앙적 완성을 의미한다.(로마노 과르디니 「삶과 나이」) 신앙 안에서 노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완성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희망하며, 노년의 시간 역시 기쁨으로 살아야겠다고 의지를 다잡는다.
살아온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도 늙는다는 것은 쓸쓸하고 서러운 일이다. 여전히 소멸이 무섭고 두렵다. 이성과 의지는 노년과 소멸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만, 감정과 정서는 이성적 성찰과 의지적 신념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지난 시절 감각의 기억들이 향수처럼 떠오른다.
하지만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가긴 싫다. 청춘의 시기가 탈렌트 다섯의 시간이라면, 노년의 시기는 탈렌트 하나의 시간일 것이다. 다섯 탈렌트를 부러워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탈렌트를 땅에 숨겨두는 어리석은 종의 모습으로 살고 싶진 않다.(마태 25,14-30) 늙음의 시기 역시 그 나름의 역할과 의미가 있으리라 희망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공부하고 성찰하고 일상적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삶이 아름답지 않으면 죽음도 아름답지 않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오늘을 신앙으로 살아낸다면, 내일도 신앙으로 맞이할 것이다. 그 언젠가의 내일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8) 누군가에게 교회가 되어준다는 것은
건강한 연대에서 오는 친밀감으로 슬픔과 기쁨 함께하는 일
교회라는 말에 관한 슬픈 기억
솔직하게 고백하면, 교회라는 말은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고 권위적인 느낌으로 자주 기억된다. 신학생 시절, 성소는 자발적 응답이라기보다 최종적으로 교회의 선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편했고 살짝 저항하는 마음도 생겼었다. 성소의 여정에서 교회의 식별이라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말이다. 신학교 생활에서, 교회라는 말은 판단하고 규율하는 행위와 관계되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래서인지, 슬프게도 교회란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쉽게 다가왔다.
사제가 되어서도 교회라는 말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교회라는 말 자체보다는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 말이 사용되는 문맥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복음과 신앙이라는 말보다 교회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교회 안에서 권력이 있거나 권위적인 사람들이었다. 교회라는 말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문맥에서 사용되기보다는 규정하고 심판하고 배제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된다. ‘교회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사람들보다 ‘복음적’, ‘신앙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희망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과 태도가 교회적인지 또는 교리적인지 묻기보다는, 우리의 말과 행동과 태도가 복음적인지 또는 신앙적인지 묻기를 바랐다. 물론 복음적, 신앙적, 교회적, 교리적이라는 형용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같은 의미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교회로 살아간다
교회에 대한 현대 신학적 설명의 핵심 개념은 ‘하느님 백성’과 ‘친교’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며, 교회의 목적과 작동 원리는 친교라는 의미다. 하느님과의 친교, 사람들 사이의 친교를 지향하는 교회는 당연히 하느님 앞에서 평등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물론 가시적 제도로서 교회의 핵심은 교계제도다. 교회법적 관점에서 보면, 가시적 교회의 핵심은 주교직과 성체성사다. 적어도 이승의 하늘 아래서 우리는 제도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간다. 제도와 법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제도와 법은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 교계제도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친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는 언제나 사랑과 평등의 관계다. 교회의 친교는 삼위일체적 친교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서열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의 다양성이다. 인간을 향한 주님 사랑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다양성의 신비다.
교회는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다. 교회에 대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가르침이다. 주님을 향한 여정 속에 교회는 존재한다. 교회는 언제나 ‘되어가는 교회’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긴 여정 속에 있다. 그 여정 속에서 우리 자신이 교회가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늘 묻고 성찰해야 한다. “감사와 참회가 낡아빠진 문화”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리하여 내가 사는 곳에 감사와 참회 따위가/ 입에 오르는 일이 사라지고 있”는 세상에서,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해야 하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백무산의 시 ‘히말라야에서’)
따뜻하고 친밀한 교회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오늘의 세상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 사유와 이성을 강조하는 근대주의 세상에서 감정과 욕망, 공동체적 소속감을 강조하는 탈근대주의 세상으로 변했다. 주체에 대한 관심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간다. “내가 사유한다고 믿는 곳에서 타인이 나를 사유하며, 내가 자율적이라고 믿는 곳에서 나는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미셸 마페졸리 「부족의 시대」) 생각과 이념의 연대보다 감정과 정서의 연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소속감과 친밀성이 중요한 가치가 된 세상을 살고 있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종교 공동체에 소속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실존적 위로와 위안, 사회적 안전보장, 자기확인과 인정욕망 때문이다. 모든 가치와 이념들이 흔들리는 불안한 세상에서 종교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준다. 치열한 경쟁과 불평등이 강화되는 세상에서 종교 공동체는 사회적 연결망을 제공할 수 있고 종교가 가진 사회적 힘과 영향력은 일종의 사회적 안전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신분과 지위와 재산으로 평가되고 차별받는 세상에서 종교 공동체의 건강한 인정체계는 그래도 숨을 쉴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오늘의 교회는 건강한 소속감과 따뜻한 친밀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올바른 신앙적 지향을 공유하고 신앙적 실천을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건강한 소속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서열과 차등의 질서가 아니라 정직하고 평등한 연대에서 오는 진정한 친밀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공동합의성의 교회란 아마도 이것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교회
우리는 이미 교회이지만 교회가 되어가야 한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삶의 여정을 주님과 함께 또 사람들과 함께 걸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개체적이고 이기적인 시대에 누군가의 곁에서, 누군가와 함께 이승의 삶을 걸어간다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일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일은 언뜻 보면 쉬워 보인다. 우리의 감정은 타인의 슬픔에는 그래도 쉽게 공감한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냉소하고 조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이념과 감정의 극한 대립 속에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타자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도 냉소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슬픔의 공감과 연대가 어디까지 또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함께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다. 사실, 더 어려운 것은 기쁨을 함께하는 일이다. 타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공유하기가 무척 어렵다. 삶이라는 인정투쟁의 장에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는 일은 늘 힘들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마저도 함께하는 일이다.
“그대라는 자연 앞에서/ 내 사랑은 단순해요/ … /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신미나의 시 ‘복숭아가 있는 정물’)
누군가에게 교회가 되어주는 사람은 아마도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교회가 되어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9) 신앙의 가족 – 혈연의 유대를 넘어 신앙의 연대로
정직한 대화와 돌봄에서 참된 친밀성의 공동체 형성된다
우리는 몸과 말의 인연으로 살아간다
교구 사제로 살고 있다. 신학교 시절을 교구 동료 사제들과 함께 지냈고, 사제로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교구 사제들과 시간적 공간적 접촉이 가장 많다. 늙어가는 요즘 돌아보면, 긴 시간을 함께 지내온 교구 동료 사제들이 애틋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교구 사제들이 나에겐 가족이며 동료다. 교구라는 지역 안에서 우리는 사목적 지향을 공유하며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같은 교구라는 속지주의적 인연이 우리를 동료로 묶고 있다.
사제로 살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는 교구 밖의 동료들이 있다. 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던 사제들이다. 해외에서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제, 수도원에서 조용히 자신을 수련하는 사제, 이 둘의 인연을 통해 알게 된 어느 주교님, 이 셋과 말이 잘 통한다. 그리고 신학교 선생 시절 알게 된 동료들이 있다. 말이 통하는 제자 신부들이다. 물론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 신학교에서 그저 선생과 학생으로 만났을 뿐이다. 이젠 같은 길을 가는 동료다. 이들과 가장 편하게 수다를 떨 수 있다. 나만의 일방적 느낌과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젊은 신부들이 무척 좋다. 그들이 펼칠 새로운 교회를 상상하고 기대한다.
혈연 가족주의를 넘어
우리는 혈연적 친밀성을 통해 인간관계의 친밀성을 느끼고 배운다. 혈연적 가족은 인간이 친밀성을 느끼고 배우는 최초의 자리다.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 속에서, 혈연적 형제자매라는 관계 속에서 인간관계 안에 존재하는 사랑과 우애와 친밀성을 경험한다. 가정에서 체험한 형제적 우애와 친밀함이 사회 전체로 연장되고 확장될 때 세상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종교가 사랑과 친교의 공간으로서 가정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사실, 모든 사회는 가족 제도의 안정성 토대 위에 사회적 가치와 이념 체계를 세운다. “가족은 사회적 가치와 이념들이 투입되는 장소이며, 종교는 이를 검정하고 확인하는 양식이다.”(테오도르 제닝스) 하지만 오늘의 가정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한 자녀로 구성된 가정, 다양한 이유로 점점 해체되어 가는 오늘의 가정 속에서 우애와 친밀성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지. 자본주의적 삶의 환경 속에서, 즉 경쟁과 생존의 전장에서 마지막 부족주의적 토대인 가족에 대한 집착은 이기적 ‘가족주의’라는 괴물만 양산한다. 사실, “한국만큼 ‘모든 사회 문제는 가족 문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김희경) 가족주의와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너무 지나치게 작동되고 있다.
복음서의 예수는 가족에 대해 비판적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는 혈연적 유대에 대해 단호하고 매몰찬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 마리아가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으로 표상될 때뿐이다. 마리아의 자리는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믿는 자로서의 자리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약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
복음서 해석에 있어서 여러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혈연의 유대를 통한 전통적 가족보다 신앙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를 강조한 것은 틀림이 없다. 예수는 항상 “가족 사랑이 아니라 이웃 사랑, 즉 가족 아닌 것(the unfamiliar)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김영민)를 말한다.
돌봄과 연대의 공동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가족 관계 안에서의 역할과 책임에 관한 이야기와 정상 가족을 넘어 새로 형성되는 가족 형태들에 대해 따뜻한 눈길을 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는 다른 여자를 사랑해서 떠난 아버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세 자매를 버린 엄마로 인해 상처의 기억을 가진, 서로 개성이 다른 세 자매가 이복 자매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영화는 그들의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을 담지 않는다. 서로 말을 나누고, 함께 밥을 먹는, 일상의 시간이 쌓여가면서 네 자매는 그렇게 가족이 된다.
‘어느 가족’(2018)은 한집에 모여 사는, 하지만 모두 핏줄이 다른 여섯 명의 가족 이야기다. 이들이 어떻게 한 집에 모여 살게 된 건지, 이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한집에 모여 각각 아버지, 어머니, 이모, 아들, 딸 그리고 할머니로서 ‘가족’을 구성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세상의 행복 기준과는 별도로 그들은 그들만의 리듬으로 행복한 일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 비정상적(?) 가족은 법과 제도에 의해 잔인하게 파괴되고 해체된다.
영상을 글로 옮기면 무언가 허해진다. 두 영화를 한 번 보시라. 환한 따뜻함과 저릿한 슬픔이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전해질 것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필연적 운명의 가족보다, 우연한 선택과 서로에 대한 인간적 돌봄과 정서적 연대를 통해 결속된 가족이 때때로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의 역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친밀성과 신앙의 연대
현대사회는 “친밀성의 구조변동”(앤서니 기든스)을 겪고 있다. 혈연의 가족이든 숱한 인연들을 통한 사회적 결합이든, 즉 그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했든 간에 공동체적 결속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의 민주화, 정직한 대화, 돌봄과 정서적 연대, 신앙의 환대일 것이다. 모든 공동체의 기본 원리는 환대여야 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김현경) 사람은 하느님 모상이기에 그 자체로 존엄과 신성함을 지닌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신원과 정체성을 묻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의 환대다.
친밀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친밀성은 혈연의 친밀성이 아니라 신앙의 친밀성이다. 규범적으로 주입되고 강요된 친밀성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파생하는 친밀성이다. 일상 안에서 정직한 말의 나눔이 이루어지고, 관계에 대한 책임과 서로에 대한 돌봄의 정서에서 친밀성은 형성된다. 이러한 친밀성은 일상생활의 민주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참된 친밀성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지, 부족주의적 유대가 아니라 신앙의 연대를 지향하고 있는지, 늘 성찰할 일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0) 젊은 세대에 대한 하나의 생각
다른 세대 위한 희생이 아닌, 함께 살아갈 소통과 협력 필요
사람은 자신의 세대를 산다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희망과 계획과 준비의 시간을 살기보다는 체념과 견딤과 수용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잘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삶의 종착지를 향해 어떤 태도와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이 신앙적으로 아름다운지, 자주 생각하고 고민한다. 잘 늙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몸이 노화되면서 젊은 육체에서 오는 건강함과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새로운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생의 시간 길이가 한정되어 있어서,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속 좁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사제로 살아간다. 부모로서의 책임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생래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물론 사제는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 신앙의 가족을 위해 책임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 안의 미래 세대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실, 주변에 책임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온 사제가 많다.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면, 참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도 없이 살아왔구나 하는 미안함이 요즘 나를 사로잡고 있다. 물론 신형철의 지적처럼, 희생과 헌신의 서사를 말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다. 한 세대가 다른 한 세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서사는 무의식적 강박과 죄의식의 악순환만 낳는다. 모든 세대는 다른 세대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세대별 시기에 따른 역할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청년 담론의 허구성과 청년 세대의 우울한 현실
요즘 20대 남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보궐선거 이후 ‘공정에 예민한 청년 세대’, ‘보수화된 청년 세대’에 관한 담론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계급 갈등과 젠더 갈등이 세대 갈등으로 수렴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세대 논쟁이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점점 심화 되는 가난과 불평등의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세대 갈등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통해 세대 문제가 등장했다기보다는 중장년 세대의 시선으로 젊은 세대의 문제가 이야기되고 있다.(사회적 권력과 문화적 자본을 가진 세대는 중장년 세대다. 청년들은 그저 투표나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청년을 대상화하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한계가 있다. 요즘 언급되는 ‘20대 남성 현상’의 이야기 안에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내재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미나의 지적처럼, “자신이 경험하는 가난과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맥락 없는 공정에 집착”하는 현상과, “청년의 문제가 실력주의의 얼굴을 하며 탈정치화되고 또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은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더디게 할 뿐이다.
오늘의 청년 세대는 희망을 갖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시대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정치와 경제와 사회 문화적 흐름이 건강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형식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봉건적 질서가 더 강화된다는 느낌이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점점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신분 질서가 세습화되고 고착화되어 간다. 예전에는 다 함께 가난했고, 노력하면 많은 것들이 가능한 시대였다. 당연히 미래를 위해 오늘의 불편함을 견딜 수도 있었고, 현재를 노력하고 준비하는 시간으로 살아낼 수 있었다.
오늘의 시대는 이성과 사유보다는 감정과 정서, 의지와 욕망을 더 중시한다. 최첨단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은 쾌락의 문화와 감각주의를 추동한다. 이성적 사유와 성찰보다 편파적 감정과 분노와 혐오가 더 쉽게 정치적 매개와 수단이 되는 사회다. 개체화되고 파편화된 개인들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넘사벽의 사회 체제에는 순응하면서, 주변의 약자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통해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모색한다. 사람들은 점점 더 파편화되고 이기적이 되어 간다. 당연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아 변화의 힘으로 작동시키지 못한다. 변화를 위한 투쟁은 사라지고, 각자의 생존을 위한 경쟁만 치열해지고 있다.
어제의 청년 세대와 오늘의 청년 세대가 마주친 현실은 다르다. 청년 시절에 공통된 목표를 두고 공동체적 열망 속에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변화된 세상을 경험했던 옛 세대는 오늘의 청년 세대들의 사정과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언제나 문제는 개인의 입장과 관점과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과 태도의 문제로 돌려버리기에는 오늘의 청년들이 처한 현실은 어제의 청년들이 마주했던 현실보다 더 엄혹하고 복잡하다.
청년 세대에게 교회는 희망을 선포할 수 있을까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로서 노년의 시기를 살고 있기에 젊은 세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의 교회 역시 청년 세대의 생각과 주장과 정서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청년 세대에 관한 교회의 선포는 실재에 가 닿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선포된 내용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현실에서 젊은이들이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을 스스로 살아내고 있는지 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교회는 ‘청년 예수’를 선포하고 있다.(「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22~33항) 복음적 의미의 청년이란 육체적 나이를 말하기보다는 자기 삶을 독창적이고 활력 넘치게 사는 일이며 자기 사명을 수행한다는 뜻일 것이다. 삶에 대한 자세와 태도,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지향과 방향성이 신앙적 청년성을 규정할 것이다.
교회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통찰력과 독창성과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들만의 언어로 자신들의 문제와 관심사를 다루도록 도와야 한다.(「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203항) 성직자와 기성세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주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젊은 세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을 말하기보다는 그저 중심의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이 기성세대에게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모든 세대는 자신의 세대를 살아갈 뿐이다. 다른 세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아니라 다른 세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소통과 협력이 필요할 뿐이다. 소통과 협력의 부재가 세대 갈등을 낳는다. 오늘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가르침보다 경청과 배움의 태도다. 급변하는 사회 현실은 세대 간에 다른 경험과 지혜를 갖게 한다. 각 세대의 경험과 지혜를 서로 나누고 배우는 태도가 절실히 요청된다. 오늘의 기성세대는 먼저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