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1) 인생을 뒤바꾸는 만남
내 삶에서 그분이 차지하는 위치는
우리 삶에는 다양한 만남이 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깊은 우정이나 사랑으로 발전하는 만남도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이나 운명을 뒤바꿀 중요하고 결정적인 만남도 있다. 우리의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만남이 있었나? 그 안에 나의 삶에 깊이 각인된 만남,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만남은 어떤 것이었나?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이가 등장한다. 어떤 이는 우연히 길을 걷다, 어떤 이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다, 어떤 이는 악령의 괴롭힘으로 고생하다, 어떤 이는 중병에 걸린 자식을 구할 방법을 찾아 헤매다 그분을 만났다. 군중들 틈에서 그분을 멀리 바라만 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분의 부름을 받고 그분을 직접 대면하여 구원을 경험한 사람도 있다.
예수님과의 그토록 다양한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삶에서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공통적이지 않았을까. 적어도 사도들의 삶에서 그러했다. 그들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다. 고기 잡는 일을 하는 사람, 세금을 걷는 사람, 빼앗긴 나라의 해방을 꿈꾸며 혁명을 준비하던 사람 등. 기질이나 성격도 달랐고, 능력이나 인품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런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삼으셨고, 공동체 삶을 통해 양성하셨으며, 사도로 파견하셨다. 그들의 삶에서 스승 예수님과의 만남은 결정적이었다. 그 만남은 그들의 삶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였고, 삶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그분을 따르는 길에 제자들이 온전히 투신하도록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며, 그분을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이다. 우리도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삶을 살아왔고, 다양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 알게 되었다. 그런 우리가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교회의 삶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들(성직자와 수도자를 포함한!)과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과 거행되는 성사를 통해 우리는 각자에게 건네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지극한 사랑으로 나에게 전해지는 그분의 인격을 만나며,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깊이 경험한다. 또한 그분의 삶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각자의 삶 안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애덕의 실천을 통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는다. 관건은 우리 삶 안에서 얼마나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느냐일 것이다.
요한 복음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날의 정황과 그 시간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그분과의 만남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기에 그 시간까지 기억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그 날의 정황과 그 시간을 기억하는가? 그분을 만난 첫인상은 어땠나? 그분께서 지금도 나의 삶 안에 함께 계심을 의식하고 있나? 누군가 나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을 때 자랑스럽게 답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내 삶의 중요한 순간들, 가장 일상적인 일까지도 나눌 만큼 그분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며 살고 있나? 나는 나의 삶 안에 그분을 중요한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분께 중요한 자리를 내어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성당에 올 때만 자리를 내어드리는 분일 뿐인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2)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1)
의심을 넘어 더 단단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의심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느님의 존재, 내세의 삶, 육신의 부활 혹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부활, 승천 등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는가 하면, 신앙 자체에 대한 의심이나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데, 내가 계속 믿는 것이 맞는가? 의심은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먼저 의심은 신앙에 늘 뒤따라오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신앙에서 의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의심과의 공존이며, 의심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그러하다.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완벽한 믿음이 아닌, 종종 의심에 싸이며 길을 잃고 헤매는, 그렇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믿음을 보여준다. 일례로 베드로 사도가 그러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뵈러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지게 되자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이 말씀은 믿음이 약한 베드로 사도에 대한 꾸중이지만, 믿음이란 늘 의심과의 싸움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말해주기도 한다. 믿음에 종종 찾아오는 의심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는 이후에도 수많은 의심의 순간을 맞았지만, 의심을 딛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었으며, 결국 예수님과 일치하는 순교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나약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믿음도 나약함과 한계로 각인된 믿음이며,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의심을 딛고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삶으로 마감할 수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정반대의 경우로 바오로 사도를 들 수 있다. 그는 믿음이 너무 과해서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일까지 동조하였다. 이는 과도한 확신이 믿음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러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그 만남은 그의 과도한 확신에 철퇴를 가했다. 그의 그릇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갖게 된 믿음은 자신의 나약함을 충분히 인식하는 겸손한 믿음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나약함을 자랑할 수 있었고, 나약함 안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확신을 전해줄 수 있었다.(2코린 12,5-10 참조)
믿음은 처음부터 의심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의심의 순간을 거치며 조금씩 확신에 다다른다. 따라서 의심이 없는 믿음보다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의심이 어떤 것인지 솔직하게 대면하고 이를 딛고 일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청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의심은 나의 신앙에 더욱 확신하게 하는 디딤돌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 곧 신앙의 길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의심은, 믿음을 마비시키고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회의 섞인 의심과는 다르다. 이 믿음의 의심은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나약함에 연결되어 있다. 나약함에서 오는 의심은 관계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관통해야 하는 순간들이다. 이 길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의심의 순간들을 관통하며 더욱 밝고 환희에 찬 믿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3)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2)
끊임없이 의심을 극복해 나가는 여정
우리는 지금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찾는다. 점이나 사주를 보는 사람이 느는 현상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종교나 신앙보다는 과학을 선호한다. 과학은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만, 종교나 신앙은 추상적인 것을 비현실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신앙에 관해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젊은 세대는 당차게 묻는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증명해달라고, 그럼 믿겠다고. 혹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째서 천재지변이나 전쟁과 같은 불의한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느냐고. 그런 물음 앞에서 신앙인은 대체로 당혹감을 느끼며, 또한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신앙에 대해 던지는 다양한 질문에 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은 신앙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들이다. 따라서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찾기보다, 신앙의 본질적 특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신앙은 의심을 완벽히 배제한 것도 아니며, 수학 공식처럼 갖게 되는 확신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먼저 신앙은 끊임없는 의심의 극복이기에, 의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하는 의심으로, 믿음은 의심의 순간들을 관통하며 성장하기 마련이다.
다른 한편, 신앙은 수학 공식처럼 신 존재 증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확신이 아니다. 따라서 과도한 확신은 광신주의(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빠질 수 있어 늘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갖는 신앙의 확신은 완성된 것이 아니며, 새로운 문제 앞에서 늘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께서 걸었던 신앙의 여정처럼 말이다.
이러한 신앙의 역설은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믿음의 어려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우리에게 던지는 자녀나 배우자의 질문이나 의심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가령 자녀들이 커가면서 신앙에 대해 의심을 갖고 질문을 하거나, 신앙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때, 그것을 반항이나 방황으로 보다는, 신앙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성장의 순간들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신앙의 확신은 한순간에 가질 수 없는, 의심을 동반하기도 하는, 삶의 긴 여정을 거치며 획득되는 것이기에, 자녀에게 즉각적인 답을 주려고 애쓰기보다, 자녀의 생각과 감정을 공감해주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믿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계속 가다 보면 어느새 신앙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신뢰 관계다. 신앙은 그러한 물음에 늘 열려 있다는 것, 그리고 의심과 갈등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기회를 주고 대화하며 공감해준다면, 자녀는 그 자체로 부모와 교회, 그리고 신앙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신앙에는 그런 솔직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자녀나 배우자뿐 아니라 사람들이 갖는 믿음의 어려움, 의심 등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하고 그들이 걷는 신앙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중요하다. 당장 확신을 갖지 못할지라도 인내심을 갖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도록 동반해주며 함께 걸을 때, 우리의 신앙도 함께 성장할 것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4) 신앙의 매력
신앙인으로서 매력 발산하고 있나
코로나 감염증 위기 이후 신앙생활이 재개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예전과 같은 수준을 회복하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먼 느낌이다. 코로나로 인해 성당에 나가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굳이 성당에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수도, 혹은 성당에 다시 나갈 계기나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와는 별도로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아진 것도 사실인 듯하다. 이 회의감은 코로나 위기도 일조하였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라 불리는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서 사람들에게 종교나 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결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건, 교회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신앙이 재미가 없어서’라고 말하지만, 결국 신앙에서 기쁨이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성당은 ‘세련되지 못한 곳’이다. 이 시대의 가치인 자유와 평등, 대화와 소통 등과는 거리가 먼, 의무로 종교를 강요하는 고구마같이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종교 집단으로 종종 비친다.
그런데 정말 신앙이 고구마같이 답답하고 고리타분하며 구태의연한 것일까? 예수님의 삶을 떠올려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무거운 짐처럼 계명을 부과하고 신앙을 강요했던 것은 예수님이 아닌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오히려 세세한 율법 조항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기쁨의 삶으로 초대하셨다. 그분을 만난 사람은 삶을 축제로 경험하였고,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기쁨을 느꼈다. 어쩌면 신앙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삶과는 무관한 우리들만의 신앙생활을 고집하며 신앙을 기쁨과 환희가 아닌 고역과 짐으로 살고 또 자녀나 타인에게 그렇게 가르쳐 온 것은 아닌지.
프랑스의 조셉 도레 대주교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부과된 의무라거나 수락된 포기라는 관념과 이제는 결별해야 합니다. 예수가 계시하고 육화한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신앙은 삶에 추가한 지각없는 행위나 근심거리가 아니라 빛이요 힘이며 행복이요 은총입니다.”(「모든 이를 위한 예수」 중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신앙의 ‘매력’을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4항)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 신앙이란 무겁고 고리타분하고 시대와 동떨어진 미신 행위나 헛된 가르침에 대한 신봉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신앙은 매력이며 기쁨이며 삶을 새롭게 사는 원천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만,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산다. 하느님 자녀로,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나라를 꿈꾸며 사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가진 것이 없어도 부유하게 살 수 있고, 나보다 힘든 이를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지니며 살 수 있다.
예수님은 매력 있는 분이셨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께서도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박해의 위협에도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신앙을 지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분들이 그토록 소중히 지키고 물려주신 이 신앙을 우리 역시 값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 매력을 발산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5) 하느님 자녀로 사는 삶의 매력
매력적인 예수님을 닮는 것이 우리 몫
우리는 종교와 신앙에 무관심한 혹은 적대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신앙에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속화된 사회는 그리스도인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특히 우리가 사는 믿음의 삶이 세상 사람의 눈에 어떤 매력으로 드러나는지 묻는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여기서 ‘희망’을 ‘매력’으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이 지닌 매력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매력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한다. 그분은 당시 많은 군중을 몰고 다니실 정도로 매력적인 분이셨다.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료된 것은 다만 희한한 이적이나 치유, 구마때문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바다와 같은 인품에서, 그리고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방식에서 매료되었던 것이다.그분에게는 일반 종교 지도자에게서 볼 수 없었던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그 자유분방함은 당시 종교적 관념이나 계명을 거스르고,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닌, 계명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니신 분,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사람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분은 교리나 계명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 뜻을 헤아리도록, 그리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직접 만나 뵙고 가르치셨다. 그것은 하느님 자녀로 사는 삶으로의 초대였다.
복음서 곳곳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외딴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고 전한다(마르 1,35 참조).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활동의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그 시간은 기도 중에 아버지 하느님과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을 그 친교의 체험으로, 곧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삶으로 초대하셨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밤새 산에서 기도하시고 열두 사도를 뽑으신 다음 평지에서 많은 군중에게 가르치셨다고 전한다.(루카 6,12 이하 참조) ‘산상설교’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마태 5-7장; 루카 6,20-49)은 다만 가르침에 머무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법,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뭇 사람이 가졌던 사회적 편견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닌, 세리와 창녀, 죄인과 병자, 소위 사회 변두리의 소외된 이들과 만나기를 선호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순수성을 믿으셨고, 그 순수성 안에 담긴 고귀한 인격에 주목하셨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며, 그 사람이 일어설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그 사람 안에 믿음을 회복시켜주셨다.
이 밖에도 예수님의 매력적인 모습은 복음서에 넘쳐난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지 그렇지 않을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닮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 성령으로 다시 난 사람은(요한 3,8 참조) 바람과 같아서 세상에 신선하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은 굳건히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버팀목이, 휴식처가,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 성숙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