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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1)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상)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08|조회수27 목록 댓글 0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1)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

어제 함께 사는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신부님이 자기 동창이 신학교 면접 볼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한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 동창이 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른 후 면접을 볼 때의 일이다. 면접관 신부님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자네는 어떻게 신학교를 오게 됐나?” 그러자 그 동창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양에서 전철 타고 수원역으로 와서 수원역에서 ○○번 버스 타고 왔습니다.”

함께 식사하던 신부님들이 배꼽을 잡으며 박장대소를 하던 차에, 그 옆에 계신 신부님도 이에 질세라 한마디 거들었다. 자신도 신학교에서 어떤 교수 신부님의 질문에 잘못 대답을 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신부님이 어느 날 강의를 하시는 신부님의 말씀이 너무 자장가처럼 들려서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교수 신부님이 졸고 있는 자신 앞으로 다가와서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언성을 높이면서) 자네 어젯밤에 도대체 뭐했나?” 그랬더니 깜짝 놀라 잠이 깬 신학생은 엉겁결에 눈을 껌뻑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잠잤는데요!!!”

이 대답이 어찌나 웃기던지 교실은 그야말로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이 상황이 웃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질문을 던진 교수 신부님이었다. 자신의 말에 농을 섞어 말한 신학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하셨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이 신학생은 말 그대로 교수 신부님에게 찍혀서 신학교 생활이 고달팠다고 한다.

거의 이런 실수는 대화의 내용이 어떤 배경에서 생겨났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어투나 음색이 비꼬는 듯하거나 잘못이나 실수를 한 상황에서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오히려 반대의 의미가 된다. 면접 상황에서 어떻게 신학교를 왔느냐는 질문은 신학교에 뭐 타고 왔느냐란 질문이 아니라 어떤 동기로 신학교에 지원했느냐는 말이었다. 수업시간에 졸고 있었던 상황에서 어젯밤 뭐했느냐는 질문은 밤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졸지 말라는 훈육의 말이었다.

우리는 종종 멀쩡한 상황에서 동문서답을 한다든지, 혹은 상황에 맞지 않은 의사소통으로 주변을 당황하게 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상대의 말에 대한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말은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비로소 온전히 이해되는 속성이 있다. 즉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 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배경과 상황의 상호작용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면교류는 말 자체보다는 그 말이 어떤 배경과 상황에서 발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진정한 소통은 대화가 발생한 배경과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굳이 의사소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행동도 결국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즉 진정으로 한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발생한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정언적 말씀이 아니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2)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남을 판단할 자격이나 권한이 없음을 의미하기 이전에 우리가 남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떤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일어난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상황과 배경이란 인간의 기질, 성격, 동기, 욕구, 의지, 그리고 가치관 등과 같은 심리 내적 요인들과 어디서 태어나 어떤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삶의 경험을 공유해 왔는지에 대한 사회문화적 요인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상황과 배경을 모두 이해한 후에 어떤 사람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통찰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만의 관점(터널비전)으로 타인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온전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최소한의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판단을 통한 죄를 최소화할 수 있다. 게다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며 내리는 인간의 겸손한 판단은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를 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삶을 사는 분들이 있다. 바로 남을 판단하는 일이 소명인 판사들이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가장 존경하는 판사로 고() 김홍섭(바오로, 1915~1965) 판사를 꼽았다. 평생 사랑과 청빈의 삶을 살았고 특히 사형수와 수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사도법관(師徒法官)’으로 불리는 분이다.

김 판사는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끔찍한 사건의 피고인을 앞에 놓고 자식에게 타이르듯 온갖 정성을 다해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선고하는 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어느 편이 죄인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 사람의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하고 형을 선고하였다.

김 판사는 선고를 내린 후 며칠 지난 다음 교도소로 이들을 찾아가 직책상 달리할 수 없어 판결을 내렸지만, 심히 미안한 일이라며 양해를 빌고 나서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권했다.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김홍섭 판사는 판사로서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공식적인 직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법리와 증거를 통해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도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누가 죄인인지를 알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고 있었다. 게다가 직책상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면서 오히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피고인들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만 판단하지 않고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김 판사의 마음을 통해 회심을 결심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상황과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인간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할 수 있다. 인간의 겸손한 판단이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사법권 남용의 오명을 쓰고 사법부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요즘에도 김홍섭 판사와 같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는 법관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3) 판단할 수 있는가 없는가 ()

201912월 초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된 30대 청년 2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따듯한 위로와 배려를 했던 박○○ 부장판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재판장인 울산지방법원 박 판사는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고 했던 깊은 고뇌와 참담한 심정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지금보다 더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니 살아달라고 호소했다. 박 판사는 우주가 도서관이라면 우리는 모두 한 권의 책이라고 비유하면서 한번 시작된 이야기가 도중에 허망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이 써 나갈 다음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동반 자살을 시도한 두 청년은 자살방조죄로 각각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려 했던 박 판사의 배려가 두 청년으로 하여금 다시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선사했을 것이다. 재판부는 자살방조에 대한 죄 자체를 판단할 뿐이지 그 상황까지 이르게 된 두 청년의 삶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는 깊은 고뇌와 참담한 심정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는 판결문을 통해 이들 삶의 배경과 상황을 깊이 공감하려는 박 판사의 노력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두 청년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판단을 받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분명 체험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상황과 배경을 모두 고려한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치 못한 상황에서 누구를 판단해야 할 상황이라면,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한다. 최대한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면서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판단을 내리려는 우리의 노력은 비록 판단의 잘못을 저지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판단을 한다. 우리의 판단은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고통을 안겨준다. 하지만 타인의 행동이나 어떤 현상 이면에 숨어 있는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우리는 판단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적어도 그 배경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상황과 배경을 고려하는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無知)은 판단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죄악과 해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방식으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이 내린 판단을 스스로 너무나 쉽게 믿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확증적 편향). 따라서 판단하는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판단에 앞서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혹은 적어도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라는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 이 덕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4) 비가 온 후 땅은 더 단단해진다 ()

상담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상담은 의지가 약한 사람이나 받는 것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스스로 힘을 내고 노력해 나가면 극복해 나가지 못할 어려움은 없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만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그것은 상담을 통해서도 해결할 수 없다는 믿음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심리상담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제를 타인의 도움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의지박약한 사람들 혹은 의존적인 사람들이나 받는 수치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하기 쉽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지방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한 지인이 새벽 1시경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다급하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만 안정을 찾고 천천히 상황을 설명해 보라는 내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운 절규에 묻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무릎을 꿇고 빌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곧바로 응급실로 가시라는 말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혼이 나가 있는 목소리에서 저항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 온몸이 얼어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곧바로 응급실로 가도록 조치를 취한 후 며칠 뒤 정신과 병상을 찾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우울증이란 의지가 약하고 소심하며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나 걸리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우울증으로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들을 사회의 낙오자로 간주하면서 정신력을 키우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왔다. 가정에서는 정신을 강하게 훈련시킨다는 명목하에 아이들에게 엄격하고 매정한 모습의 아버지로 살아왔다. 안 좋은 일을 겪어 마음이 속상한 아내의 모습을 보면 감정을 알아주기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할지를 가르쳤다. 인생은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감정적으로 약해지면 결국 사회에 패배자로 남게 된다는 강한 신념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정신과 병동에서 만난 그는 과거에 기억되는 용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자신감 넘치는 외모는 온데간데없고, 풀이 죽어 축 늘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물의 도움으로 일단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지만 지난 며칠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급성으로 찾아온 공황증상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평소 정신적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쌓이다 한 번에 터진 것이라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가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자신에게 이런 정신적 증상이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갔던 자신이 이런 질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교수님은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하였다. “신부님, 처음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병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병이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모든 정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만으로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 병을 통해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정신적 고통과 질환 역시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5) 비가 온 후 땅은 더 단단해진다 ()

 

교수님은 정신과 병원에 입원해 안정을 취한 후 퇴원해 지속적인 약물과 상담 치료를 받았다. 약물은 신체적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상담은 그 증상의 심리적 원인과 발달 과정을 차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병을 이겨낼 수 있는 원천이 단순히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율신경계가 인간의 의지에 상관없이 기능하는 것처럼, 우리의 심리정서적 상태도 자신의 노력만으로 온전히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은 스스로의 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을 공감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의 도움과 그 과정에서 성령의 함께하심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는 이웃과 성령의 도움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생각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나는 내 정신과 육체의 온전한 주인인가? 내가 내 삶에 책임을 지겠다는 주체 의식과 달리,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한 나의 삶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교만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영성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성령의 도우심에 의탁할 수 있는 겸손은 영성적 삶의 전제조건이 된다.

자신에게 어떤 시련과 고통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건강한 삶으로 초대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일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공황장애를 통해 자신의 정신적 무능과 무기력을 체험한 교수님은 공황발작에 대한 예기불안을 평생 다루어 나가야 할 과제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안타깝고 불행한 듯이 보이는 고통을 체험하고 있지만, 영성적으로는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교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기 삶은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살아왔다. 자신감의 도가 지나쳐 자만심으로 이어지게 되면 점차로 이웃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교수님은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안 증상은 정신적으로는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영성적으로는 주변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탁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모든 삶의 체험, 특히 고통과 시련 안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안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고통을 긍정적으로 다루어나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된다. 즉 삶의 모든 시련과 고통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삶의 고통과 마주하고 있는가?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이웃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항상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영성적 경험을 하는 인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하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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