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6) 모자람의 영성 (상)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요한이 부모와 함께 상담실을 찾게 되었다. 사실 요한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상담실에 끌려 온 경우였다. 요한은 하는 수 없이 신부 앞에 와서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책을 얻어가야 할 판이었다. 아버지는 있는 대로 신부님께 다 말씀드리라면서 채근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마지못해 자신의 문제를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신부님, 집에 있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 빨리 졸업해서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요.”
아들이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갑자기 큰 소리로 끼어들기 시작하였다. 아들에게 딴말하지 말고 자신의 문제를 사실대로 말하라는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아들이 입을 굳게 다물자 이윽고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는 아이의 문제를 하나하나 직접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아들이 게임만 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게다가 매사에 게으르고, 부모와의 약속이나 가정의 규칙을 안 지키며, 성당에 나가지 않는 등 아버지 눈에는 하나도 예뻐 보이는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이러다 사회의 낙오자라도 될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러다 너 뭐가 될래?”라는 말을 종종 내뱉곤 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한은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될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성격적으로 중대한 결함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관점에서 공부하면 잘할 수 있는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아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밀려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았다. 이러다 보니 아들의 모든 면에서 불만족스러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요한은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하며 의기소침한 상태였지만 확실히 우울증은 아니었다. 임상적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무기력 증상과는 달리 그 안에는 아버지를 향한 강한 분노의 에너지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우울한 감정과 무기력한 행동을 통해 아버지에게 항의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를 수동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요한이 아버지에게 가지는 불만, 아니 아버지로부터 얻게 된 고통은 아버지가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것이었다. 사실 자기를 위한 훈육임을 잘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아버지의 잔소리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를 받는 느낌을 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아버지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러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체험한 요한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하느니 차라리 버림을 받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는 자식을 쏘아 올리는 활’이라는 옛말이 생각난다. 시위를 힘차게 당기는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더 멀리 그리고 더 높이 날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어떤 부모에게는 자식이라는 활을 통해 자신이 쏘아 올려지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이 욕망은 무의식에 교묘히 숨어 있어서 인식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자식을 위한 잔소리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을 위한 잔소리가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한다. 분명 잔소리와 훈육은 구별해야 한다.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나무를 한꺼번에 넣지 않고 검불이나 잔가지처럼 불쏘시개를 먼저 이용한다. 나무를 한 번에 다 넣으면 오히려 산소가 부족해 불이 꺼진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정도에 넘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아직도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자람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감 때문일까? 아니면 차고 넘치는 것에 대한 강박적 열망 때문일까?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31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7) 모자람의 영성 (중)
요한의 아버지는 스스로 잔소리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 잔소리도 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부모인가? 아들에게 하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자식을 위한 교육이며 그 안에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자식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방임하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요한의 아버지처럼 70대 후반의 마리아 자매도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키워왔다. 슬하에 두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 마리아 자매는 자녀들이 모두 자신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마리아 자매는 최선을 다해 세 자녀를 교육했고 극진한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 결과 아들딸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를 얻으며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세 자녀가 자신을 대하는 말투나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통화를 하는 중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어머니인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물건을 부수는 등 폭력을 마다치 않는 자녀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녀들이라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요한의 아버지와 마리아 자매는 세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두 사람 모두 자녀에게 최선으로 교육하고 온전하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점이다. 자녀 교육에서는 더 이상의 노력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한 분들이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자녀들과의 관계에서는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두 가정의 자녀들은 모두 부모에게 공격적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요한은 아버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응대했다. 즉 수동적 공격을 통해 아버지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한편 마리아 자매의 자녀들은 매사에 짜증과 분노로 일관하면서 심지어 물리적 폭력과 같은 능동적 공격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세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가정 교육에 최선을 다했을 뿐, 가정 교육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한 사랑에 모든 것을 헌신한 부모가 자신의 사랑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담을 진행해 감에 따라 자녀와의 관계 문제에서 요한의 아버지와 마리아 자매는 점차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요한의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반면 마리아 자매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자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 같은 문제를 지닌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의 결과로 이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요한의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가 결국 자신의 문제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을 통찰하면서 아들과의 관계에 변화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바라는 성공은 표면적으로 아들을 위한 욕구였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의 욕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사실 아들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거나 함께 대화해 본 적도 없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회적 경제적 성공에 대한 욕구를 아들의 성공을 통해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아버지와 달리 남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학생이었다. 아들의 삶을 아버지의 삶에서 분리해 나가는 심리적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잔소리가 아닌 격려와 배려의 언어 패턴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요한은 서서히 아버지의 눈치를 벗어나 자기 주도적인 학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공부나 성공이 아닌 행복과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반면 마리아 자매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괴로워했다. 실로 억울하고 답답하며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이 감정을 일으킨 대상이 남도 아니고 바로 자기 아들딸이란 사실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따라서 자신의 감정이 치유되도록 도움을 청할 것으로 예상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7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8) 모자람의 영성 (하)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마리아 자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치유가 아니라 아이들의 심리 정서적 안정이었다. 자신은 문제가 없으니 아이들이 빨리 성격을 고쳐 안정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마리아 자매는 자신은 문제가 없고 괜찮으니 아이들이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모든 관심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 자녀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살아온 세월을 가늠케 해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희생의 결과는 차디찬 자녀들의 냉소와 비난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너무도 큰 사랑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리아 자매에게는 지나친 사랑, 혹은 과도한 사랑이란 개념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 넘치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 마리아 자매에게 있어서 부모가 너무 간섭하고 잔소리한다는 아이들의 항변은 모두 사랑에 겨워서 호들갑 떠는 것에 불과했다.
마리아 자매는 자녀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해 왔던 것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아이들이 원하지 않아도 남들이 봐서 부러워할 옷이면 억지로라도 입혀 학교에 보냈다. 몸에 좋다는 약은 아이들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라도 먹였으며, 누가 좋다고 하는 것이면 무조건 아이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때 아이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11-12)는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모든 것은 다 아이들을 위한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랑도 넘치면 분명 문제가 된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넘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가 주고 싶다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받고 싶은 것을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기적 사랑 혹은 폭력적 사랑이란 말이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 의미를 지닌 이기심이나 폭력이 긍정적 의미를 지닌 사랑이란 단어와 합쳐지면 어떤 뜻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마리아 자매도 그랬다. 마리아 자매에게 사랑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기적 사랑’이란 말은 ‘나쁜 좋은 것’과 같은 표현처럼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인 영성’, ‘인간적인 신성함’, 혹은 ‘불완전함의 영성’ 같은 용어 역시 이해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심리영성적 건강과 성숙을 위해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모자람의 영성’이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거나 넘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 영성은 완전함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한계와 유한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다. 이때 모자라는 부분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 혹은 이웃의 도움으로 채워질 수 있다.
마리아 자매는 심리적으로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연결되어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강박을 낳게 되었다. 물론 이 완전함에 대한 의미도 요한 아버지의 경우에서처럼 이기심과 혼재되어 구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바로 그 완전한(?) 사랑 때문에 오히려 자식들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리아 자매가 만일 자식들을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아마 그 여지만큼 자녀들이 그 사랑을 완벽하게 채워놓았을 것이다. 비록 자신은 충분한 사랑을 하지 못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자식은 어머니가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면서 온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한 분으로 기억할 것이다.
김치를 담가주고 싶어도 자식이 원하지 않으면 그 사랑의 행위를 거두어들이는 용기가 바로 모자람의 영성이다. 손주에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이는 며느리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아내의 양육 방식에 충고하지 말아 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기꺼이 수용하는 마음이 모자람의 영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갑자기 유행가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29) 내 안의 다른 나 (상)
고3인 라파엘(가명)은 갑자기 누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고 언제든지 공격할 것만 같다며 불안과 공포를 호소했다. 당장 입시를 앞둔 상황이기에 이러다 시험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더더욱 불안했다. 보통 이런 경우 상담을 청하는 내담자는 불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방법을 묻는다. 하지만 라파엘은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신부님, 제가 느끼는 이 불안과 공포는 제가 만들어 낸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인 병에 걸려서 생겨나는 것인지가 궁금해요.” 불안의 원인이나 그 발생 과정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통해 라파엘이 망상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피해망상이나 관계망상 환자는 스스로 병에 걸렸다는 의식, 즉 병식(病識)을 얻기가 어려운데, 라파엘은 자신의 증상을 객관화하거나 대상화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 증상을 자신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병에 걸려 생겨난 것인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물어보았다. 라파엘은 자신이 병에 걸려 불안하다면 안심이지만, 만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좀 더 대화를 나눠보면서 나는 라파엘이 머지않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성적일 뿐 아니라 친구가 전혀 없는 라파엘에게 군대는 무척이나 두렵고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군대에 가서 발생할 일에 대한 불안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지금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 죽을 판이었다.
라파엘은 군대에 가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입대를 앞둔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공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연히도 자신을 누가 감시하고 공격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겨난 시기가 바로 군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맞닿아 있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연관성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마음이 여리고 선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심리적 여성성이 높고 사회적 내향성이 높으며 자아 강도가 약했다. 라파엘에게 군대는 한껏 남성호르몬에 물이 오른 수컷들이 치열하게 몸을 부딪치며 생존해 나가는 전쟁터였다. 선천적으로 남과 경쟁하고 갈등하는 것을 싫어하는 라파엘은 군대에 가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마치 투견 판에 끌려나가는 겁에 질린 애완견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군대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어느새 군대에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굳어졌다. 이런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되자, 라파엘의 뇌는 참으로 충성스럽게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무의식적 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를 받고 있으며 최종으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실제로 엄습하였던 것이다. 울고 싶을 때 누가 뺨을 때려주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심장이 빨리 뛰고 가슴이 답답하며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뭔지 모를 안정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런 공황증상이 계속될 경우 정신적 문제로 군대를 면제받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감에서 오는 묘한 안정감이었다.
라파엘은 그러나 자신의 양심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학생이었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이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을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만일 스스로 병을 만들어 군대에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함을 넘어 죄를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정신적으로 병이 생긴 것이라면 군대를 면제받을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죄의식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다소 불순한 의도(군대 가고 싶지 않은 생각)로 만들어낸 불안처럼 보여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정신증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사실도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라파엘은 자신의 정신 상태가 궁금했다. 정신 감정을 통해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21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0) 내 안의 다른 나 (중)
사실 불안 증상이 있다고 해서 모두 군대를 면제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에게는 다른 대안이 특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정신과적 문제가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처럼 느껴졌다. 이미 깊은 우울 증상으로 정신과적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피해망상 증상이 덧붙여진다 해도 그리 의심받을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 좋게도 사회공포와 관계망상에 가까운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이러한 정신적 신체적 불안 증상으로 무척 괴로웠지만, 그 고통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군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한편, 이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느님은 자신을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니 전혀 결이 다른 새로운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이 만들었다면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고 보니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다 더 큰 문제를 안게 된 꼴이었다. 바로 여기에 라파엘의 고민이 있었다.
불안 증상은 두 가지 방식, 즉 생물학적이며 정서적인 원인 모두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유전적으로 불안에 취약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통사람보다 불안을 더 심하게 느낄 수 있다. 라파엘은 바로 이 상태를 기대하고 있었다. 혹시나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될지 모른다는 희망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불안한 생각을 반복하게 되면 어느새 불안은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신체적 증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라파엘이 혹시나 이런 상태가 아닐까 염려하면서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는 상황이 아닐까 걱정하는 바로 그 경우다.
한 시간에 걸친 상담을 통해 라파엘은 자신의 불안이 두 가지 방식 모두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알았다. 즉, 자신이 상상으로 희망하고 있던 정신적 불안 상태가 실제로 자신의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동시에 생각이 곧바로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자율신경계는 타인보다 더 민감하고 스트레스와 불안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결론적으로 라파엘은 자신의 상상력과 의지로 실제적인 불안과 망상을 생산함으로써 군입대에 대한 현실적 불안을 줄이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로 하느님께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신앙적 불안을 초래했다.
라파엘은 엄격한 아버지와 우울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왔다. 아버지는 군 장교 출신으로 매사에 철두철미한 강인한 정신력을 아이들에게 강조했다. 아주 작은 일도 예사로 넘어가지 않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로 매사에 잘잘못을 가리고 그때마다 엄격한 벌을 내리는 분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세심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아버지와의 갈등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우울과 불안이 심각했고 그것을 신앙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죄의식으로 항상 위축된 삶을 살고 있었다. 라파엘의 세심한 양심과 심약한 성품은 어머니를 닮았고, 하느님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아버지의 영향인 듯 보였다.
라파엘에게 불안증이 의식적인 원인에 의해 생겨났든(죄의식을 가져야 함), 아니면 생물학적 원인에 의해 생겨났든(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라파엘은 우선적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이 하느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과 따라서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으로 나아가야 할 심리영성적 과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인간관계가 두렵고 불안하다면 그 문제는 본질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치유되고 해결돼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 안으로 계속 피해 들어가면 결국 자기 안에 또 다른 자기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시험이 불안한 소피아의 경우도 그랬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28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1) 내 안의 다른 나 (하)
소피아는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때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수학 시험 중 갑자기 공황증상이 찾아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여 결국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되었다. 시험을 정상적으로 치르지 못한 소피아는 그러나 운이 좋게도 성적 구제 대상으로 선정되어 기본 점수를 받게 되었다. 소피아에게는 이 사건이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행운이었다. 매번 낙제 점수를 면치 못한 소피아에게 있어서는 이때 받은 기본 점수가 지금까지 치렀던 수학 시험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였기 때문이다.
수학 시험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공황증상을 체험한 후 생각지도 못한 이익을 얻게 된 소피아는 점점 공황증상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불안하거나 벗어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공황증상을 겪을 수만 있다면 그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상을 반복하면서 원의를 갖게 되자 실제로 공황증상들이 체험되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불안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상황이 생겨도, 마치 자신의 마음을 신체가 알아주는 것처럼 호흡이 빨라지면서 공황증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어려운 시험을 회피하고 싶을 때, 참여하고 싶지 않은 과외 활동에서 열외를 받고 싶을 때, 혹은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부모님에게 복수하고 싶을 때, 여지없이 자신의 몸은 공황증상을 만들어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공황증상은 자신이 원할 때만 발생해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 증상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서 몇 계단만 올라가도 숨이 가빠지면서 과호흡증후군이 발생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조금만 놀라도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서 공황증상이 발생했다. 성당도 갈 수가 없었다. 성가만 불러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의자 옆에 누가 앉아만 있어도 가슴이 답답하여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했을 때 반갑게 찾아왔던 공황이라는 친구가, 이제는 원치 않는 상황에서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흔히 ‘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의식적 자아’는 수의근(隨意筋)을 통해 몸을 움직인다. 하지만 의식적인 자아가 아닌 무의식적인 자아, 즉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자율신경계를 통해 불수의근(不隨意筋)을 움직인다. 의식적 자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무의식적 자아에 기대할 경우 근시안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에는 자신의 심리적이며 신체적인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라파엘의 경우는 무의식적 자아가 나타나 망상증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실 도피를 도와주었고, 소피아의 경우는 무의식적 자아의 명령을 받은 자율신경계가 공황증상이 생존에 필요하다고 오판하여 수시로 증상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라파엘은 군대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소피아는 시험에 대해서 각기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망상이라는 병이 아니라 친밀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통해 자신의 불안을 해결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소피아 역시 신체적 증상을 통한 도피가 아니라 좀 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불안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처럼 자신의 현실적 삶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자신 안에 또 다른 나, 즉 무의식적 자아가 나타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지금 나는 어떤 불안을 느끼고 있는가?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 안에 또 다른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현존의식이야말로 나의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아마도 우리는 이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해 아직도 불안의 강을 건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