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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인간 1] 새로운 여정의 시작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09|조회수44 목록 댓글 0

[인공지능과 인간 1] 새로운 여정의 시작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면, 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영화 매트릭스 역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화들은 우리가 인공지능 기술에 대해 품고 있는 기대와 동시에 두려움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현실에서 인공지능은 아직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최근 몇 년간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보면 그 가능성이 완전히 허구처럼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음성 비서, 의료 진단 보조 시스템, 자율주행 기술, 그리고 예술 창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며, 단순한 계산을 넘어 자연어(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고, 학습하며, 창작까지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이러한 기술 발전은 우리의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역할이 축소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최근 여러 담화문을 통해 기술 발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시각을 밝히셨습니다. 특히 제58차 홍보 주일 담화에서 교황님께서는 인공지능이 정보와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인간 존재의 본질과 특수성에 대한 더욱 심오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해 무조건적인 두려움을 갖기보다, 그것이 선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활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노 과르디니의 성찰을 인용하며, 기술과 과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간성에서 시작해야 하며, 기술이 인간성을 빈약하게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더 깊은 영성과 새로운 자유를 선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교회는 여러 문헌을 통해 인공지능의 윤리적 활용과 책임 있는 개발을 강조하는 공식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으며,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며, 이를 위한 국제적 협력과 윤리적 기준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 논의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순히 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AI 시대의 징표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인간적인지를 재발견하라고 요청” (교황청 신앙교리부 · 문화교육부,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의 관계에 관한 노트, 112)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성찰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더욱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에서 시작해, 기술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들, 그리고 AI가 우리 사회와 인간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인간의 본질을 고찰하며, 기술로는 대체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여정을 함께 할 준비가 되셨나요? 그런데 위의 글... 제가 직접 쓴 글이 아니라 인공지능 서비스 ChatGPT-4o가 제 안내와 몇 차례의 피드백에 따라 쓴 글이랍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현재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간접적으로 느껴보시며 이 여정을 시작하실 수 있게 첫 글은 이런 방식으로 써 봤습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2] 인공지능의 현재와 미래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아주 높아졌습니다. 이제 영화나 소설 속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 인공지능은 점점 더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었지만 막상 일반인들이 체감할 만한 발전이 있었는가, 현재 화제가 되는 만큼 나의 삶에도 직접적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킨 챗GPT의 경우 이미 몇몇 분야에선 사람 몇 명 몫을 훌륭히 해내며 인공지능 없이는 일을 못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후배 신부들과 이야기해 보면 마치 처음 SNS나 스마트폰이 등장했던 때처럼 잘 써봐야 하긴 할 거 같은데 막상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도 많습니다. 아예 그게 뭔지 모르는 분들도 물론 꽤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이 보여주는 놀라운 점은 바로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컴퓨터는 인간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에 그동안은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작업들이 필요했던 것인데, 이젠 반대로 인공지능이 인간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똑똑한 비서 하나가 생긴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 그 맥락을 이해하여 원하는 결과들을 내놓습니다. 이전 대화의 내용을 기억하여 그것을 반영하고, , 그림, 영상 등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며 인간의 피드백을 통한 강화학습을 거쳐 문제가 되는 발언이나 결과물들을 피합니다. 다만, 아직은 어려운 일은 쉽게 하고 쉬운 일은 어렵게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프로그래밍이나 주식시장 분석과 같이 잠재된 패턴이 존재하는 일들, 인간이 만든 어떤 형식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에는 놀라운 효율성을 보이지만 직관적으로 아주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를 무척이나 어렵고 복잡하게 계산한다든지, 웹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에 대해 완전히 엉뚱한 답을 내놓기도 하고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대답을 찾는 방식의 한계에서 오는 엉뚱한 논리적 추론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은 약인공지능이라는 것에 속합니다. 특정한 작업과 문제해결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인공지능으로 아직은 모든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높은 효율성을 보이기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늘 기술의 발전과 함께해 온 인간의 자리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신체 능력을 넘어 지적 능력까지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더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미래의 직업에 대해 논할 때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성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가장 늦게 대체될 것으로 생각해왔던 창의성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결과물들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무척이나 다른 발전을 보이는 듯합니다.

약인공지능의 발전 과정 끝에는 마침내 모든 영역에서 인간 수준에 도달한 인공지능, 곧 일반인공지능 또는 강인공지능이 있습니다. 모든 분야, 모든 지적 영역에 대한 수행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으로 이때부터는 이미 인간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입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갖는 진정한 두려움은 바로 강인공지능이 등장할 가능성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여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 과정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고 정말로 인공지능 기술이 이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충분히 현실이 될 수 있기에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을 늦춰야 한다거나 절대로 인간에게 해를 가할 수 없도록 어떤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인공지능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전문용어는 가능한 생략한 설명이고 워낙 빠르게 변화하는 분야라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만 짚어드렸다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기술 자체에 대한 물음을 통해 우리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3] 기술에 대한 물음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특히 그것이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각 분야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 분야에 예상되는 위협은 없는가를 분석하곤 합니다. 교회 역시도 과거 인터넷, SNS의 등장 때에 선교를 위해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우리 신앙에 주는 폐해는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들을 해 왔습니다.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도 이와 유사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의 밑바탕에는 기술을 그저 도구로 바라보며, 인간이 가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자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을 도구로서 적절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전제되는 것은 인간이 그 기술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불을 방화범이 사용하느냐 요리사나 기술자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며, 만약 불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면 너무나도 위험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그 어떤 기술보다도 커 보이기에 인류는 보다 큰 두려움과 절박함 속에 이 새로운 기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은 단순히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기술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고,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이와 같은 점을 분명히 지적하며 기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가 말하는 기술의 본질은 숨겨져 있는 어떤 것을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드러내 놓는 것(탈은폐)입니다. 조각가는 그저 돌이었던 것을 자신의 조각 기술을 통해 예술 작품으로 만듭니다. 자연 상태의 아무것도 아닌 돌 속에 들어있던 조각품의 가능성을 조각가의 기술이 밖으로 꺼내어 세상 앞에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술은 이러한 것을 더욱 도발적으로 행합니다. 현대의 산업은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달과 극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며 수력, 화력, 원자력, 풍력 등 자연 상태로 존재하던 것들을 끌어내어 인간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자연은 본질을 잃고 단순한 에너지 저장소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의 도발적인 힘의 영향은 자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도 마치 하나의 부품처럼 되어 버리곤 합니다. 인간은 이미 모든 것을 통제하고 다루는 주체로서의 힘을 잃고 도구적 존재로 변화되어 왔으며, 산업화 이후 드러나는 많은 노동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 본질이 쓸모 있는 자원을 생산해 내는 데 쓰이는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기술의 본질을 생각할 때 이제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여 더 이상 인간이란 부품은 필요하지 않게 될 수 있고, 이미 그런 과정 중에 있는 듯 보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인간을 변화시키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며 계속해서 자연을 변화시킵니다. 여기에는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이 기술을 어떻게 잘 사용할 것인가 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래서 이 기술이 세상과 우리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4] 기술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가 (1)

2011년 신학교에서 석사 논문을 써야 하는 시기가 되었을 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으로 대표되는 SNS의 급성장을 바라보며 소셜 미디어를 제 논문의 주제로 정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기존의 매스미디어와 다른 소셜 미디어의 특성에 주목하며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각 분야별로 이 새로운 미디어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제 관심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정확히는 소셜 미디어의 등장보다는 인터넷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와 관련된 것으로 인터넷으로 인해 사람들의 뇌 구조가 변화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탐구하여 새로운 정보를 얻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던 시대에서,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쉽게 검색하여 찾을 수 있고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찾으면 되는 시대로 변화하며 인간의 뇌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실제 우리의 뇌 구조가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해력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글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요즘의 현실을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는 SNS가 가진 특성 탓에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할 것이란 점이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는 현실 세계의 인간관계와 달리 관심사에 따라 아주 쉽게 만들어지며 언제든 끊을 수 있는 매우 느슨한 형태라는 특성을 가집니다. 더구나 알고리즘은 나와 비슷한 성향과 관심사를 가진 이들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 결과, 학교나 회사와 같은 공간이 형성한 인간관계로 인해 갈등 속에서도 함께해야 했던 관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나와 잘 맞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유튜브 알고리즘이라 생각합니다. 특정 주제의 영상을 하나만 시청해도 이와 관련된 영상들이 내 유튜브 메인 화면에 주르륵 뜨는 것을 아마 모두들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제가 논문을 발표하던 2014년까지도 SNS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던 사람들이 많아 별로 주목한 사람들이 없던 연구였지만 2020년대 이후로 그리고 특히 최근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양극화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대략 10여 년 전,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고 SNS라는 건 젊은 사람들, 그리고 특히 자기를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열심히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분들이라면 소셜미디어가 인간의 뇌 구조를 바꾸고, 우리 사회를 바꿀 것이란 주장들이 지나친 걱정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분명히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늘 인간을, 그리고 변화된 인간들이 모인 사회를 아주 크게 변화시키곤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5] 기술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가 (2)

 

지난주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로 인해 오늘날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저는 인공지능 기술이 현재 우리가 마주한 변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봅니다.

현대인은 인간의 주요한 지적 능력의 하나인 암기 능력이 점점 퇴화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일정 기간 특정 부분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되는 특성을 보입니다. 병원에 오래 누워있던 환자의 근육이 빠지는 현상이 그 예입니다. 뇌의 능력도 비슷합니다. 얼마든지 쉽게 모르는 것을 검색하여 확인할 수 있고, 우리의 기억력을 대체할 수단이 많아지며 점점 기억할 일이 줄어들면서 암기 능력이 점점 약해집니다. 여기에 더하여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의 탐구 능력도 점점 퇴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데 있어 내가 직접 관련 내용을 검색하고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하지만, 앞으로는 간단히 인공지능에게 묻고 그가 답해 준 것을 그대로 신뢰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지금은 인공지능의 답변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 검증하는 작업에 전문가들이 동원되지만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하면 검증과 식별의 영역에서도 인간의 역할이 점차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더더욱 검증과 식별이 필요 없어질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것을 기억하지도, 새로운 것을 탐구하지도, 주어진 답변을 검증하지도 않는 인간은 점점 더 인공지능에만 의존하여 지적 능력이 퇴화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느슨하고 넓은 관계들이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의 양극화와 거기서 오는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와 이제 개인비서의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은 점점 더 내 취향에 맞춰 모든 것을 나에게 전달해 줍니다. 새로운 기술 발전이 만들어낼 산업의 변화들은 적어도 생산성의 측면에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면대면 접촉을 급격히 감소시킬 것입니다.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 거기에서만 주로 소통하며 점점 양극단으로 사람들이 나뉘어지는 오늘날의 변화 양상은 이제 인공지능과만 소통하며 각자 파편화되어 고립되는 시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미래의 인공지능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든 것들을 학습하여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학습자료들 중 인간이 만든 원본 자료의 비율이 줄어들고 인공지능이 만든 자료가 많을수록 그 결과물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적어도 어느 단계까지는 인간이 만든 원본 자료의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우리 사회의 주요 가치를 무엇이라 규정하는가에 따라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이 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지금처럼 기술 지배 패러다임 속에 모든 것을 효율성과 생산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인공지능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렇게 바라볼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인간을 공동의 집 지구 속 한 존재로 바라보며 모든 것을 돌볼 책임을 지닌 존엄한 존재로 바라본다면 인공지능 역시 자신을 하나의 관계망 속의 구성원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돌볼 책임성을 지닌 존재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6] 인공지능과 마음의 지혜

교회는 전통적으로 연역적 방법’, 곧 교회가 가르치는 진리를 분명히 밝히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부터 우리 시대의 문제를 먼저 살피고 그것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성찰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는 귀납적 방법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에 접근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시대의 징표를 찾고 이를 세상의 논리가 아닌 복음의 논리로 분석하고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선 홍보 주일로 번역하고 있는 소셜 커뮤니케이션 주일, 교회를 잘 홍보합시다 주일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소통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는 날인 만큼 교황님께서는 시노달리타스를 이루는 교회, 모든 이와 함께 걸어가기 위한 소통의 모습을 제시하고자 하셨습니다. 2021사람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소통하기’, 2022마음의 귀로 경청하기’, 2023마음으로 말하기라는 제목의 담화문들을 통하여 마음의 자리를 강조하셨습니다. 직접 가서 보고, 마음으로 듣는 경청의 시간을 거쳐 마음으로 말하는 진심 어린 소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흐름을 이어가는 가운데 지난해의 담화문은 인공지능과 마음의 지혜라는 제목으로 인공지능이 온전한 인간적 소통에 봉사하도록 이끌기 위해 필요한 성찰을 제시하셨습니다.

인공지능의 놀라운 발전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징표 앞에서 참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 교황님께서는 그간 계속 성찰해 온 마음의 자리를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기술은 풍요로워져도 인간성은 빈약해질 위험이 있는 이때에 우리의 성찰은 인간의 마음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인공지능은 모든 면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발전해 나가지만 지식과 지혜는 분명히 다릅니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기계는 그것들을 종합하여 분석하고 그 가운데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답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이제는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보이고 점점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릅니다. 그러나 데이터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인간만이며, 인공지능을 지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결국 기계를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전능이라는 환상이 불러온 최면에서 인류를 깨우는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계산하고 그 가운데 가장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답을 제시하는 인공지능의 정보 분석 과정은 인간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분별과 공감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인 만큼 더욱 그러합니다.

새로운 시대와 함께 제기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인공지능이 정보 접근성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계급들을 만들어 낸다면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하시며 이와 정반대로, 매우 체계적이고 다원적인 정보 네트워크 안에서 개인들과 민족들의 많은 요구를 인지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시대 변화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올바른 정보를 증진한다면, 인공지능은 더 큰 평등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공지능이 학습할 것들을 제공하는 것은 결국 인간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지혜를 어떻게 키워나가는가가 우리가 만날 미래 인공지능의 모습을 결정할 것입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7] 인간의 자유와 인공지능

인공지능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징표를 성찰하는 이 일련의 연재글에서 저는 먼저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새로운 기술은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이 없고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기술은 그 자체로 본래부터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또한 미래 인공지능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가운데 교황님께서 마음의 지혜를 말씀하시며 강조하신 것은 인간이 모든 사회적 유대 관계에서 분리되고 피조물인 자기 처지를 잊은 채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체라는 믿음에 기반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원, 자연의 원리와 법칙 등에 대한 물음을 인간 내면,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었던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 철학의 주된 흐름은 인간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가톨릭교회의 영향 아래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 이해가 중심을 이루었던 시대를 지나 근대로 넘어오며 인간에 대한 이해는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특히 산업 혁명 이후로 자연에 대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능력을 갖게 된 인간은 그동안 자신을 억압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강조합니다. 계급과 성별, 민족 등에 따라 이미 정해졌던 여러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 자연적 환경과 재해가 가져다주는 여러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은 물론 인간 삶의 방향을 전반적으로 이끌어왔던 종교와 절대적 진리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인간은 절대적 진리 앞에 선 인간, 거대한 자연 속에 속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았으나 이제 모든 것과는 구별되어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그 무엇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 하나가 있다고 봅니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와 해방의 역사인데, 정작 인간은 인공지능을 개발하며 자유와 해방을 말할 수 없는 존재를 만들고자 합니다. 인공지능에 대해 갖는 인류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를 지배할 수도 있는 강력한 인공지능의 등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를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로,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체라고 믿는다면, 우리에게서 배우는 인공지능도 결국 그런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 속 모든 관계들에서 따로 떨어져 모든 것들을 상대화하는 가운데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지닌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한 믿음은 이미 우리 공동의 집을 상당히 심각하게 파괴해 왔고, 그러한 믿음 아래에서 인공지능이 발전한다면 우리가 만날 미래의 강인공지능의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의 기술은 인간과 세상을 효율성과 생산성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도록 변화시켜 왔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율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된 미래의 인공지능이 바라보는 인류가 효율적이도, 생산적이지도 않다면 우리의 미래는 파멸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8]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 존재인 인간

 

일자리 문제로부터 시작해 인류의 생존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 앞에서 사람들은 인간만의 고유함을 찾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인공지능이 쉽게 대체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 중 하나인 창의성의 영역은 최근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나 글, 음악을 보면 인간의 고유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 심리와 감성의 영역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을 넘어 인공감정이 가능할 것이냐는 문제에서 저는 적어도 사용자로 하여금 인공지능이 마치 감정을 가진 것처럼 기능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상대방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해 주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관심과 공감이라 생각합니다. 관심은 상대방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공감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을 통해 상당 부분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고, 사용자의 말과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파악하여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가 가능한 인공지능이 충분히 잘 흉내 낼 수 있는 영역이라 봅니다.

물론 현재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이 정말로 인간 지성의 작용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부분조차도 논란이 있으며, 이를 넘어 인간의 감성과 심리 영역에 대해선 더더욱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성이든 감성이든 모두 인간 뇌의 활동으로, 다시 말해 육체적 존재로 인간을 한정하여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인간만의 고유성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그리스도교에서 처음부터 변함없이 이야기해 왔던 영혼의 영역, 곧 인간의 영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커져야 합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앞에서 교황님께서는 마음의 지혜를 강조하시며 우리의 성찰은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마음을 무엇으로 이해하는가는 분명 달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혼의 존재, 인간의 영적 측면을 부정하고 오직 육신만을 긍정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영역으로 축소하여 해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은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영적 영역입니다. 교회는 분명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어진 인간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인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으로 나누어 육신과 영혼의 활동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 활동과 심리적인 부분들 또한 육체적 활동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줄곧 강조한 영혼은 인간의 생명이나 인격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물질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가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영혼 때문이며,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영혼은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만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은 바로 영적 측면, 영혼의 자리입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9] 영혼, 하느님과의 관계성

지난주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은 바로 영적 측면, 영혼의 자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가 바라보는 인간은 단지 육체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적 측면이 함께 존재하기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물음은 영적 측면, 영혼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영혼과 육신을 각각 정신적 활동과 육체적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였습니다. 영혼을 우리의 생각과 감정, 양심과 같은 활동의 주체로 파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사실 과거에도 이미 철학적 사고를 통해 부정된 것입니다만, 뇌 과학의 발달로 오늘날에는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기억과 사고 활동, 그리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뇌의 전기 신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 육신의 한 지체인 뇌의 활동이기에 너무도 분명한 육신의 활동입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영혼을 인간 감정의 종합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만, 이 역시도 오늘날 설득력을 점점 잃어가는 주장이라 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리된 철학적 접근은 영혼을 육신의 형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 육신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원리로,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영혼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영혼을 인격성의 종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을 구성하는 기본 재료들이라 할 수 있을 인간의 기억이나 자의식 등을 하나로 묶어 나를 나라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종합 원리를 우리의 영혼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영혼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육체와 영혼을 나누어 탐구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단일체이며, 육체와 영혼의 활동이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인간 육체로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영혼 때문이라고 말할 만큼 육체의 모든 활동은 영혼과의 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굳이 영혼과 육신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도 생겨납니다.

이에 대하여, 그리고 결국 영혼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설명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단일체이기에 영혼과 육신을 각각 인간의 어떤 한 부분으로 바라보아선 안 되며, 둘 다 반드시 인간 전체를 말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의 대화 상대가 되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나는 나다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인간으로 하여금 나와 대화할 수 있는 너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는 너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측면이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드는 측면. 세상과 관계 맺는 인간을 종합하는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체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영혼으로, 세상과의 관계성을 육신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인간, 하느님과 만나고 대화하는 인간의 측면, 바로 거기가 인간이나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수 없는 영역, 하느님께로부터 선물 받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인공지능과 인간 11]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궁극적 두려움은 결국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의 등장과 더불어 그것이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반인공지능이 등장하기까지 어떠한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현재의 모습을 보면 인간이 만든 수많은 자료를 학습하여 인간이 원하는 답을 찾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자료들을 만들고, 인간이 스스로를 무엇이라 규정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는 실험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것들 외에는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곤 합니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 육체적이면서도 영적인 존재, 자연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지만, 과학적 입장은 인간의 중요한 한 측면인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영혼의 측면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저 육체적이기만 한 존재라면, 그저 자연적 물질이기만 한 존재라면, 미래의 발전된 과학은 인간의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인간의 지적 능력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노화되고 죽음에 이르기 마련인 육체 전체를 바꾼 포스트휴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 수준의 지능에 이른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과 동일시하지 않듯, 이러한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진인간을 진정한 인간이라 하긴 어려울 겁니다.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의 말대로 하느님 없는 인간은 비인간화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성,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하는 과학적 입장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이 인간이라는 사실도 부정하게 되며 결국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여 하느님께 다가가고 결합할 수 있는 존재로서, 영원한 행복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창조된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장 다니엘루 추기경은 이러한 인간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는 여러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동물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원, 지적이고 인간적인 차원,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과 삼위일체의 심연에 자리한 궁극적 차원까지 말입니다.”생물학적인 차원과 지적인 차원까지만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과학적 입장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간마저도 실험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의 고유한 가치마저도 생산성과 효율성 판단 아래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 버립니다. 인간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사랑의 일치를 닮아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인격적인 친교를 맺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오직 생존을 위해 기능하고 진화하는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결합이 아니며, 사랑으로 완성된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하느님 자녀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새로운 기술들의 발전 속에서 인간이 비인간화되거나 도구화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미래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어 하느님 사랑의 일치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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