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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2)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상)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0|조회수56 목록 댓글 0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2)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

죄의 양상은 크게 생각이나 마음으로 짓는 죄와 말이나 행동으로 짓는 죄로 나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으로 숨겨져 있는 죄보다 행동으로 드러난 죄에 더 초점을 맞춘다. 개인의 내적인 죄는 개인적 의미만을 지니지만, 외적인 죄는 사회와 공동체로 영향력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의 말과 행동으로 발생한 죄의 영향력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돼 구조적인 악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개인의 외적인 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로 확산되고 구조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내적인 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사회 구조적인 죄와 악에 맞서 대항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의무이다. 역대 교황님들이 반포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신앙인들이 예언자적 기능과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고, 전쟁과 폭력에 맞서 평화와 화해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따라서 교도권이 가르치는 가톨릭 사회교리 안에서 우리는 사회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죄와 악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그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마음으로 짓는 죄가 행동으로 짓는 죄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생각으로 짓는 죄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나 중요성이 오히려 간과되기 쉽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생각의 죄는 결국 죄의식을 무디게 만들어 진정한 참회와 회개를 방해할 수도 있다. 소죄가 대죄보다 더 위험한 것처럼 마음속 죄가 겉으로 드러난 죄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 근거한다. 죄의 개인 심리학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개인 심리적 차원의 죄와 악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그러나 앞서 설명한 사회 구조적 차원의 가르침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외적으로 드러난 사회적 악은 비교적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지만, 내적으로 숨어있는 심리적 악은 사실 그 본질과 영향력을 명확히 규명해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리내적인 죄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 즉 교도권의 권위 있는 지침과 기준으로 제시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개인의 정신적 혹은 심리적 차원의 죄는 전통적으로 영성신학이나 윤리신학과 같은 신학적 관점 안에서만 다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신학적 통찰에 접근하기 어려운 일반 신자 중에는 자신의 심리내적인 죄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엠마 자매는 생각으로 짓는 죄로 너무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으로 짓는 죄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죄를 짓고 있다는 죄의식을 동반한 괴로움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네가 하느님을 모른다고 하면 너는 천국에 갈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계속 섬기겠다고 하면 지옥에 갈 것이다. 너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이냐?” 이 질문에 두려움에 휩싸인 엠마 자매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그 결과 자신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하느님을 배반한 죄의식이 밀려왔다.

이와 비슷한 질문은 계속 내면에서 발생했다. “이 두 개의 동아줄 중에 네가 만일 왼쪽 동아줄을 잡으면 너는 살 수 있지만, 저 사람은 죽게 된다. 그러나 오른쪽 동아줄을 잡게 되면 비록 너는 죽게 되지만 저 사람은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동아줄을 잡겠느냐?” 그러자 엠마 자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왼쪽 동아줄을 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웃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의식이 밀려왔다.

이렇게 생각으로 짓는 죄로 말미암아 엠마 자매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과연 이 마음속 생각들은 모두 생각으로 짓는 죄인가? 아니면 죄가 될 수 없는가? 만일 죄라면 혹은 죄가 아니라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3)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

엠마 자매는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이나 이웃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구원과 생명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신경증적인 과도한 죄의식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엠마 자매에게는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엠마 자매에게 있어서는 숨은 것도 다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생각으로 짓는 죄는 그 어떤 행동적인 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드러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무섭고 중대한 죄의 원천이며 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엠마 자매는 드디어 본당 신부님을 찾아 고해성사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상상은 죄가 아니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성사를 받고 집에 돌아오는 마음은 한결 편하고 가벼웠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불안과 죄의식이 밀려왔다. 머리에 떠오르는 상상은 점점 이전보다 더 끔찍한 딜레마 상황들로 펼쳐졌으며, 자신은 죄인이라는 단죄의 목소리가 들려와 한순간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죄가 아니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믿고 안심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성경이나 교리에서는 생각으로 죄를 짓지 말라고 했는데, 신부님은 생각이 죄가 아니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엠마 자매는 해외에서 영성이나 윤리 혹은 성경을 전공하셨다는 박사 신부님들이나 성령이 충만하여 치유나 분별의 은사를 받으셨다는 피정지도 신부님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 신부님들도 모두 자신의 마음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죄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답변뿐이었다. 자기 생각은 죄가 아니라 망상이라는 말은 더더구나 이해가 안 되었다.

엠마 자매는 교회에서 권위를 가진 신부님들의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해되지도 않는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를 수도 없었다. 자기 생각이 망상이라면 사람들이 생각으로 짓는 죄도 모두 망상이란 말인가? 생각으로 짓는 죄와 망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엠마 자매는 결국 자신이 망상증 환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 위해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정신과 의사는 신부님들과는 달리 자신이 망상이 아닌 강박적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엠마 자매에게는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망상이든 강박이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이 왜 죄가 아닌지를 설명해 주지 않는 해석들은 모두 공허했다. 게다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범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누구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의사가 약을 먹으면 해결된다고 하였지만, 그 역시 말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약을 먹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손과 발을 잘라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약을 먹어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즉 생각으로 죄를 짓고는 있지만,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면-메타인지), 실제적인 죄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 역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고 보였다.

엠마 자매는 결론적으로 자기 생각이 죄가 아니라는 명확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차라리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자신이 치유될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으러 엠마 자매는 상담실을 찾았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4) 생각과 마음으로 짓는 죄 ()

엠마 자매는 상담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어렵게 털어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실로 그 인생이 얼마나 험난한 고난의 연속이었는지를 가늠케 해준 고백이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지 하느님 존재와 동일시될 수 없다. 원죄의 결과로 생겨난 인간의 죄에 대한 경향성은 인간의 본성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이 경향성을 세례의 은총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은 죄를 짓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라, 죄 혹은 죄의 경향성이라는 인간적 한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아간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은 자신의 삶의 목표가 영적 완벽주의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완벽주의는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실현되어야만 하는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 엠마 자매는 영적으로 자신이 완벽하다는 스스로의 평가에 위안을 받으며 현실의 그 어려운 고통을 버티어 낼 수 있었다. 남편의 냉대와 무관심,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배신감은 모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한 삶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그때마다 자신을 이해해 줄 친구나 이웃에 대한 인간적 희망을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은 알아주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텨냈다.갑자기 하느님이냐 나 자신이냐, 혹은 이웃이냐 나 자신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 충만감을 누린지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처럼, 이제 자기 생각 안에서도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렇게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속 질문에서 자신보다는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신념은 자신의 인간적 약점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의 양심 안에서는 하느님과 이웃보다는 자신을 먼저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이 사실은 거짓말로 합리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았을 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상상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진실하게 대답하니 하느님과 이웃을 배반하게 되거나 이웃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한 영적인 불완전성이 발생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 영적으로 완벽하게 되고 싶은 엠마 자매는 오히려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영적으로 불완전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엠마 자매는 영적 지도를 받기 전에 심리치료가 우선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신의 성격적이며 대인 관계적 문제를 영적 완벽주의 안에서 해결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했다. 하느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영성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영성을 더 즐겨하신다는 생각의 전환도 필요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진실한 삶과 항상 같은 의미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이해해야 했다. 심리치료를 통해 엠마 자매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거스르는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성당의 한 자매에게 얼굴이 저팔계 같다고 직설적인 말을 했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그 자매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생각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망상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무의식이 뭔가 해결해야 할 내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를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과의 건강한 심리영성적 관계를 회복하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체험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도록 나를 초대하고 있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8) 마리아가 되고 싶은 마르타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에게는 모든 자녀가 소중하고 똑같이 사랑스럽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깨물어도 덜 아픈 손가락이 있고, 안 깨물어도 무조건 아픈 손가락이 있음을 체험한다.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들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자식이 아닐 것이다.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고 덜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다. “부모는 자녀를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많은 자녀가 이러한 사랑을 부모로부터 기대하기 때문에 큰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년의 체칠리아 자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며 도움을 호소했다.

저는 성경에 돌아온 탕자이야기에서 나온 형의 역할을 하고 살았습니다. 동생은 10년 전 가출을 하였기에 집안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오로지 저의 몫이었습니다. 게다가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 우울해 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최선을 다해 봉양해 드렸습니다. 하지만 몇 달 전 동생이 돌아온 이후 저의 마음은 큰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쓸 돈이 없어서 큰 빚을 지고 돌아온 동생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칭찬 한 번 해주지 않으시면서 밥이고 빨래며 모든 집안일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항상 모든 일에서 열외였고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할 수 있을 정도로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자랐습니다. 부모님의 돈을 가지고 나가 10년을 자기 맘대로 살다가 돌아온 동생은 결국 카드빚을 갚지 못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동생의 카드빚을 당신들의 퇴직금을 모두 털어 다 갚아주시고 지금도 물질적으로 생활비를 책임져 주십니다. 부모님께 생활비로 드린 돈이 모두 동생에게 전해지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분노가 올라옵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이지만 동생은 늘 부모에게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저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며 부모를 돌보아 드렸는데도 늘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자식이었을 뿐입니다. 단물이 다 빠져서 버림받는 껍데기가 된 것 같은 저의 이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체칠리아 자매는 스스로 착한 아이 증후군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부부싸움을 하시는 부모님이 늘 무섭고 두려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동생은 항상 자기주장이 강했으며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부모님에게 반항하기를 일삼았다. 이런 가정환경에서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바로 부모님의 태도였다. 말 잘 듣고 항상 순종적이었던 자신에게는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당연히 받아가셨다. 하지만 언제나 말썽을 부리고 투정을 부리는 동생에게는 무엇인가 해주지 못해 늘 전전긍긍하시며 동생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셨다.

체칠리아 자매처럼 형제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홀로 부모를 잘 모시면서도 정작 부모로부터는 상대적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자녀들이 뜻밖에 많다. 이들은 모두 부모에게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으로 고통을 받는다. 부모에게는 실망과 원망, 자신에게는 절망과 좌절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도 견디기 힘든데 여기에 부모에 대한 죄의식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겹치게 되면 그야말로 삶은 완전히 피폐해진다. 부모를 향한 마음을 접으면 그만이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또 부모에게 물심양면으로 챙겨드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부정적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이 땅의 천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가톨릭평화신문, 2020830,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39) 마리아가 되고 싶은 마르타 ()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작은아들이 돌아와 아버지는 즐거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으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25). 큰아들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얼룩진 가슴을 부여잡고 자신의 집에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큰아들은 자신의 집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 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29­­-30)

이 대목에서 저 아들이란 단어는 큰아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표현이다. ‘내 동생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당신의 아들이란 표현을 쓴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동생의 아버지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구약의 장자권, 즉 맏아들의 권리는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창세 2527)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아내로 맞아 쌍둥이를 낳게 된다. 고기를 좋아하는 이사악은 사냥 솜씨가 좋은 형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어머니 레베카는 성품이 온순한 동생 야곱을 사랑하였다. 성경에서도 부모의 편애를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눈이 어두워 볼 수 없게 된 이사악은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에사우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야곱을 더 사랑한 레베카는 이사악의 축복을 야곱이 받도록 계략을 꾸민다. 에사우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야곱을 에사우로 속여 이사악의 축복을 대신 가로채도록 한 것이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우는 자신에게 약속된 축복을 동생 야곱이 가로챈 사실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사악도 자신의 축복이 실수로 야곱에게 내려간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아버지로서 이사악은 자신의 실수를 되돌리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에사우는 아버지, 아버지께는 축복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목놓아 울부짖는다. 이사악은 에사우에게 그 어떤 축복도 해줄 수 없다며 그 간청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마침내 동생에게 배신당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에사우는 야곱을 죽이려는 앙심을 품게 된다.

창세기의 야곱과 에사우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장자권, 즉 구약의 야훼 하느님의 축복은 권한을 가진 장자 그리고 그 축복을 받은 한 사람에게만 전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마치 경제학의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처럼 한 형제에게 사랑과 축복을 내려주면 다른 형제에게는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말라키 예언서를 보면 이렇게 편애를 기반으로 한 야훼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에사우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나는 그의 산들을 폐허로, 그의 상속지를 승냥이들이나 사는 광야로 만들었다.”(말라 1,2-3) 하느님은 야곱의 자손이 세운 이스라엘을 축복하시지만, 에사우의 자손이 세운 에돔은 헐어버릴 것이며 죄악의 땅으로 불릴 것이라고 저주하신다.

하지만 신약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더 이상 사랑하는 야곱, 미워하는 에사우라는 개념이 없다. 분노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일러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여기서 얘야라고 번역되었지만 원래 용어는 내 아들아이다. 이제 예수님은 편애하지 않는 진정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을 알려주신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아들이며 딸인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96,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0) 마리아가 되고 싶은 마르타 ()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알려주신다.

첫째,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더 이상 에사우를 미워하고 야곱을 편애하는 구약의 야훼가 아니라, 자녀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는 신약의 아빠 아버지라는 것이다.

둘째, 공평한 사랑이란 각자 처한 상황과 처지를 개별적으로 고려하여 가장 그에게 맞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는 행동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는 성실하게 살아온 큰아들과 문제아로 살아온 작은아들이 결코 동등한 자식으로 느껴질 수 없었다. 같은 자식이라도 부모에게 느껴지는 자녀의 상황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식에게 더 마음을 주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편애가 아니라 오히려 평등한 사랑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녀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 부모나 형제에 대해 감정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주신다. 큰아들처럼 자신을 사랑받지 못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다른 형제를 향한 시기와 질투심을 갖게 되지만, 정작 자신은 불공평한 부모의 처사에 대한 억울한 감정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같은 상황에서 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지는 않는다.

체칠리아 자매도 빚을 지고 돌아온 동생을 더 챙겨주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여유가 있어서 드린 생활비도 아닌데 그 돈으로 동생의 빚을 갚아 준 부모의 행동은 더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은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부모를 계속 돌보고 있는데, 부모의 돈을 훔쳐 달아난 동생은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현실이 좌절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체칠리아 자매는 내적인 치유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체칠리아 자매에게는 자신을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태도, 즉 자기 연민과 자기 위로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부모님이 편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지금 느끼는 이 분노와 좌절의 감정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또한, 자신 안에서 발생하는 동생과 부모에 대한 부정적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생각과 감정에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 생각과 감정은 의지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생각과 감정은 죄의 범주에 해당하기보다는 성찰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위로와 수용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부모의 관점에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날 수 있다. 부모의 관점을 수용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더 마음이 쓰이는 자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동생에게 더 마음을 쓰는 부모의 마음이 편애일 수도 있고 앞서 복음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평한 사랑의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체험되는 중요한 변화는 더 이상 그러한 구별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마지막으로 자기 연민과 자기 위로를 기반으로 한 자기 돌봄이 시작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부모의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존재로 느껴지는 심리적 상태에서 발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통찰은 부모에 대한 원망과 기대를 넘어서서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이 어떻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인 방법을 찾는 영적 여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이웃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리고 하느님과의 초월적 만남을 통해 결핍된 사랑을 조금씩 채워나가게 된다. 결국, 사랑의 결핍은 사랑의 충만을 향한 영적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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