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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1) 요제프와 미하엘 하이든 형제 「가톨릭 성가」는 미하엘을 더 기억한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0|조회수43 목록 댓글 0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1) 요제프와 미하엘 하이든 형제

가톨릭 성가는 미하엘을 더 기억한다미사에 스며들어 고요히 빛나는 미하엘의 곡

- 요제프 하이든(왼쪽)과 요한 미하엘 하이든. 출처 위키미디어

가톨릭 성가를 펼치면 하이든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반가움에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교향곡의 아버지요제프 하이든이 아니라, 동생 요한 미하엘이다. 실제로 27·32·78·167번 성가는 미하엘 하이든의 작품이며, 337~345번대 미사곡은 요제프로 표기되었지만, 미하엘의 독일어 미사(Deutsche Messe, MH 560).

결론적으로 한국 가톨릭 성가집의 하이든대부분이 동생 미하엘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뜻밖이다. 음악사에서는 형 요제프가 압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형제의 출발점은 비슷했다. 그들은 빈의 작곡가 로이터(Johann Georg Reutter) 지도 아래 성 슈테판 대성당 소년합창단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둘이 그려나간 궤적은 상당히 달랐다.

요제프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 악장으로 일하며, 교향곡과 실내악을 포함한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그는 소규모 종교음악도 작곡했지만, 후기 미사들은 화려한 편성과 성악이 어우러진 음악적 대서사시에 가깝다. 이런 미사는 당시 교회 관행과는 거리가 있을 만큼 콘서트에 가까운 광휘와 장대함을 지녔다.

반면 미하엘은 잘츠부르크대교구장 직속의 궁정 성당에서 44년간 봉직하며 전례음악에 전념했다. 무엇보다 미하엘은 전례와 미사 자체에 주목했다. 그는 미사 통상문을 음악으로 표현할 때 가사 전달이 뚜렷하게 이루어지도록 세심하게 작곡했다. 이를 음악학자 제인 헤트릭은 미하엘이 수사적(oratorical) 접근을 취했다고 말한다. 그의 전기는 그 노고를 생생히 증언한다. “미하엘 하이든은 작곡을 위해 펜을 들기 전 오랫동안 주제를 숙고했다. 모든 가사의 음절 아래 해당 음이 명확하게 배치되었고, 그 위치는 발음이 정확히 들어맞는 곳에 자리했다.”

- 요한 미하엘 하이든의 <레퀴엠> 악보, MH 155(1771) 필사본. 출처 위키미디어

이런 시도는 교회 공간과 반복되는 전례력 속에서 빛을 발했다. 당대 빈이나 잘츠부르크는 지나치게 화려한 음악으로 미사를 뒤덮거나, 불필요한 기교 과시를 절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요컨대 요제프의 후기 종교 곡이 다소 세속적 성향을 지닌다면, 미하엘은 신자들이 미사에 집중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미하엘 하이든의 음악은 생존 당시뿐만 아니라 사후 교회 내에서 애창되었다. 그의 이름은 지역 음악계에서 친숙하여, 오스트리아 각지의 성당에 악보들이 전파되어 연주될 정도였다. 1820~1890년대 문헌에 따르면, 그의 성음악은 형 요제프나 모차르트 미사곡보다 교회에서 더 자주 봉헌되었다. 이는 그의 음악이 단순히 형에게 가려진 재능이 아니라, 전례 안에서 꾸준히 선택되고 사랑받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형 요제프는 동생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미하엘의 종교음악이 자신의 작품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성가에 실린 미하엘의 곡들은 이런 맥락을 반영한다. 우리는 미하엘 하이든과 같이 언제나 주님과 함께를 부르며 영광의 왕께 찬미를드린다. 성체를 모시며 생명이신 천상 양식을 노래한다. 그의 음악은 호화로움이나 장엄함으로 위압하지 않는다. 신자들이 미사와 기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돕는, 마치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고요한 빛과 같다.

악보를 넘기며 ‘Haydn’이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두 형제를 떠올린다. 형이 화려한 미사와 극적인 오라토리오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면, 동생은 전례음악에서 조용히 빛났다. 둘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부질없으리라. 형제는 각자 방식대로 신앙과 음악을 직조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가톨릭 성가는 미하엘 하이든을 더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2) 오페라 성 알렉시오’ - 계단 아래 성인, 눈먼 우리들

극적으로 표현된 완전한 자기 비움과 영적 투쟁

- 17세기 오페라 <성 알렉시오> 무대 장면 삽화 중 알렉시오 성인의 시신이 자기 집 계단 아래에서 발견되는 무대 모습. 출처 위키피디아

레오 14세 교황님의 첫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를 읽었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준비하시던 내용을, 레오 14세 교황님이 이어받아 발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사랑의 계승이라 부를 만한 문헌이다.

인상적인 것은 제목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마지막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 두 문장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전자가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예수 성심을 논한다면, 후자는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가를 되묻는다.

새해를 맞아 이 질문은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1632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연된 종교 오페라가 떠올랐다. 스테파노 란디(Stefano Landi)가 작곡한 <성 알렉시오(Il Sant'Alessio)>.

알렉시오는 원로회 의원의 아들로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시리아로 건너가 수행했다. 이후 그는 로마로 돌아와 가족에게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집 계단 아래에서 걸식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완전한 자기 비움’(kénōsis)과 겸허를 표상하며, 동방과 로마를 잇는 상징적 가교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바르베르니 가문의 후원으로 탄생했다. 교황을 배출했던 그들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과 같은 예술 후원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교황 가문답게 바르베리니는 신앙과 성인 이야기에 주목했다. 우르바노 8세 교황의 조카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음악의 열정적 후원자였고, 이 오페라는 그의 주도하에 제작되었다.

당시는 종교개혁에 맞선 가톨릭 개혁의 시대였다. 작품이 선보인 1630년대, 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성인이었다. 1610년 가롤로 보로메오, 1622년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필립보 네리, 아빌라의 예수의 데레사가 시성됐다. 성인들의 깊은 신심과 덕행, 영웅적 선교 활동은 신자의 모범으로 강조되고 선전됐다.

- 이탈리아 로마 나보나 광장 성녀 아녜스 성당의 성 알렉시오 제대. 박찬이 칼럼니스트 제공

대본은 훗날 클레멘스 9세 교황이 되는 줄리오 로스피글리오시가 맡았다. 이는 단순한 극작이 아니라, 신학과 교회론적 메시지를 품은 오페라였음을 의미한다. 예수회 드라마의 자취가 드러난다는 점도 흥미롭다. 예수회 학교는 선생이나 교수가 직접 각본을 쓰고, 제자들이 배우가 되어 영적 투쟁이나 성모·성인에 대한 연극을 선보이곤 했다.

이는 학생에게 수사학과 교리를 동시에 학습시키고,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생생히 드러내는 역할도 수행했다. 작곡가 란디가 예수회가 운영하던 콜레키움 게르마니쿰(Collegium Germanicum) 대학에서 보이 소프라노로 활동했던 이력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오페라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전통에 따라 여성 가수를 기용하지 않았다. 알렉시오는 소프라노 카스트라토, 악마는 베이스가 불렀는데, 둘의 음역 대비는 마치 천상과 지옥 같은 선연한 대조를 보여준다.

알렉시오가 악마의 유혹을 받는 부분 역시 당대 극음악이 묘사했던 영적 드라마같이 형상화된다. 사막 수도승이나 은수자의 악한 영과의 싸움, 심리적 고투가 로마라는 공간에 새롭게 이식된 셈이다. 1634년 판본에서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영신수련두 개의 깃발 묵상을 연상시키는, 악마가 지옥 군대를 소집하는 대목도 구현된다.

시각 효과도 화제가 되었다. 천사가 무대 위로 날아올라 악마를 물리치는 장면, 건물 외관이 사라지며 계단 아래 드러나는 알렉시오의 시신, 천사들 가운데 있는 마지막 모습은 극적이고 화려하게 연출되었다. 이는 바로크 회화들이 거대한 극장에 재현된 듯한 장려(壯麗)한 시각적 환영을 자아냈다.

문득 로마 나보나광장에서 보았던 성녀 아녜스 성당(Sant'Agnese in Agone)의 성 알렉시오 부조가 스쳐 간다. 그는 말 그대로 빈사의 상태로 누워있다. 자기 집 계단 아래 17년간 살았던 성인과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가족. 이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보지 못하는 눈먼 우리네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3) 기욤 뒤파이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거룩한 어머니의 애가>

콘스탄티노플 쓰러질 동안 서방은 무엇을 했나"

- 테오필로스 하치미하일 (1870-1934)콘스탄티노플 함락’. 이 작품은 한 세계가 마지막으로 자기 정체성을 붙잡는 순간을 보여준다. 기마 위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의 최후와 성직자들의 행렬과 십자가-이콘들은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교회가 교회로 남으려는 모습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1453, 충격적인 소식이 그리스도교 세계를 뒤흔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 군대에 의해 함락된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천년고도이자 동방 교회의 중심지가 무너졌다는 현실 앞에서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서방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며, 유럽의 영적·문화적 정체성에도 깊은 균열을 남겼다.

참담한 상실의 분위기 속에서 한 작곡가가 교회음악으로 응답했다. 부르고뉴의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397-1474). 그의 샹송 모테트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거룩한 어머니의 애가(Lamentatio sanctae matris ecclesiae Constantinopolitanae)>는 잃어버린 도시를 위한 애도이자, 비탄을 담은 추모비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곡은 노골적으로 정치적이다. 뒤파이는 음악으로 군주와 지도자들에게 묻는다. “콘스탄티노플이 쓰러질 동안 서방 세계는 무엇을 했는가?”

당시 테노르(Tenor) 성부의 라틴어 가사를 보면 뜻은 분명해진다. 이는 얼핏 성목요일에 부르는 예레미야 애가와 유사하다. 노랫말은 예루살렘의 패망 위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겹쳐 놓는다. “그 모든 애인들 가운데 위로해 줄 자 하나 없고 벗들은 모두 그를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다.”(애가 1,2).

흥미로운 점은 뒤파이가 이 구절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뒤집는다는 점이다. “그녀의 모든 친구들이 그녀를 배신했다. 사랑하던 모든 이들 가운데 그녀를 위로할 이 하나 없다(Omnes amici eius spreverunt eam. Non est qui consoletur eam ex omnibus caris eius).” 도치된 가사는 배반을 먼저 내세우고 위로의 부재를 못 박는 방식으로 듣는 이의 양심을 찌른다. 이 어순의 전도는 저버림의 의미를 강조하며, 콘스탄티노플을 끝내 외면했던 서유럽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음악적 질타를 선명하게 만든다.

의문은 남는다. 이는 실제로 정치 무대에서 울린 음악이었을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듬해인 1454,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선량공은 꿩의 연회(Feast of the Pheasant)’를 열고, 튀르크에 맞선 십자군 원정을 맹세했다. 기록에 의하면 여성으로 의인화된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구슬피 울며 도움을 간구하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비탄을 가시화해 기사들의 의지를 끌어올리는, 군사적 명분을 고양하는 장치였다.

이 연회에서 뒤파이의 애가가 연주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다. 부르고뉴 연대기들이 전하는 애가 텍스트가 뒤파이 작품과 다르고, 노래로 불렸다는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곡은 뒤파이가 1456년경 메디치가에 보낸 서한에서 언급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위한 네 개의 애가중 하나로 보는 해석이 유력하다. 1455년 전후, 그러니까 도시 함락에서 조금 더 시차를 갖고 작곡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곡에 깃든 짙은 죄책감과 비통함의 정조는 바래지 않는다.

뒤파이의 반문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고전적 저서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쓴 런치만(Steven Runciman)의 문장과도 통한다. 그는 동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절박했던 지원 요청과, 서방 세계의 침묵과 소극적 태도에 대해 이렇게 쓴다. “황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응답은 빈약했다.” 그렇기에 뒤파이의 가사는 비수처럼 꽂힌다. “친우들이 저버렸다. 위로할 이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20251129일은 특별한 의미를 발한다. 이날 이스탄불에서 레오 14세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 1세와 함께 기도하며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일치를 향한 노력을 새롭게 하자고 선언했다. 1차 니케아공의회 1700주년이라는 공통 기억 속에서, 외면과 분열로 가득한 역사 앞에서 일치로 응답하는 형국이다. 뒤파이의 “1453년 서방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오늘날 교회가 여기, 함께로 답하는 셈이다.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4)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그린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파울루스>

회심을 공동체적 부르심으로 확장하며 선포

- () 브뤼헐 작 <바오로의 회심>. 푸른 옷을 입은 바오로 사도는 화면 중앙에 있으면서도 놀랄 만큼 작게 그려진다. 축소된 인물은 회심이 한 사람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한복판에서 공동체 전체의 시선을 재정렬하며 교회를 보편으로 열어젖히는 사건임을 암시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교회는 118일부터 25일까지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간구하는 일치 주간으로 지내며, 마지막 날인 25일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기념한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더욱 선명히 만드는 사실이 있다. 사도의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그는 타르수스 출신 유다인이자, 로마 시민권자였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8~2009년을 바오로 해로 선포하며 바오로 사도는 로마, 그리스, 유다라는 서로 다른 세 문화의 교차점에 있던 이로 정의한 바 있다. 그를 통해 초대 교회가 풍요로운 개방성, 문화 간 매개, 참된 보편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 다면적인 경계성은 그를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었다.

이런 바오로 사도를,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이 오라토리오 <파울루스(Paulus)>의 주인공으로 세웠다.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유다계이자 그리스도교인 멘델스존에게 바오로 성인은 자신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었고, 독일 사회에서 유다인으로 살아가던 그의 다층적인 입지를 투영하는 거울이기도 했다.

- 에카르트 클레스만이 그린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의 초상. 출처 위키피디아

멘델스존 가문은 부와 명예를 지닌 상류층이었지만, 그들조차 유다교 신앙을 고수하며 유다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소외와 차별 가능성에 놓인다는 것을 뜻했다. 이런 상황에서 멘델스존의 부친 아브라함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고, 자신의 성 멘델스존에 바르톨디를 덧붙였다. 이는 유다적 뿌리를 감추거나 최소 희석해야 했던 시대상을 암시한다. 개종은 동화에 대한 의지였지만, 완전한 편견의 종식을 뜻하지 않았다.

멘델스존의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자기 이해와 신앙은 확고했다. 그는 <파울루스>에서 자신이 존경하던 바흐의 어법, 합창과 코랄(회중이 함께 부르는 프로테스탄트-루터교 찬송 선율)로 신앙 공동체의 언어를 되살렸다. 바흐 수난곡처럼 사건은 레치타티보와 독창이 서술하고, 의미는 합창과 코랄이 노래한다. 이 지점에서, 경계인 바오로와 경계인 멘델스존은 서로를 비춘다. 한 사람의 회심이 교회의 보편성을 열었다면, 한 작곡가의 작품은 그 보편성을 음악으로 들려준다.

합창은 하나의 얼굴만 갖지 않는다. 합창과 코랄은 신앙을 말하지만, 때론 투르바(turba)’, 곧 군중의 목소리가 되어 폭력과 맹목의 집단성을 토해낸다. 성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에서 무리의 돌팔매질과 무자비함은 격렬한 외침으로 표현되고, 이에 협력했던 사울(회심 전 바오로)의 과거는 회심 이후 변화가 얼마나 극명한지 보여준다. 멘델스존은 개인 영웅담을 만들지 않는다. 성 바오로가 평생 온몸으로 겪어냈던 공동체의 양면성을 합창으로 드러낸다.

절정은 1부 다마스쿠스 회심 장면이다. 중요한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묘사한 방식이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는 남성 독창이 아닌 여성 합창으로 제시된다. 이는 회심을 예수님-사도의 대화로 연극 인물처럼 묘사하기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듣고 기억하는 장면으로 만든다. 이어서 합창이 일어나라, 빛이 되어라로 의미를 강화하고, 코랄 깨어나라! 한 목소리가 우리를 부른다가 놓인다.

순서는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다. 회심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깨어나라는 공동체적 부르심이며, 한 사람의 깨달음이 교회적 사건으로 확장되는 순간이 된다. 코랄 각 구절 사이에는 호른과 트럼펫, 트롬본 같은 금관악기들의 팡파르를 끼워 넣으며, ‘회심을 교회의 공적 고백이자 선포로 전환시킨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바오로 성인에게서 믿음을 배우고, 그리스도를 배우며, 마지막으로 올바른 삶의 길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유다계 그리스도교인 멘델스존에게 사도는 어떤 존재였는가. 교회는 왜 공동체인가. 오라토리오 <파울루스>는 이 질문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다.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5)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 <천주 성자 예수 흠숭합니다>

성체 성혈에 깃든 신비를 성인과 함께 맛보다

- 14세기 중반 작자 미상의 제단화. 소장자였던 리하르트 폰 카우프만(1849-1908)의 이름을 따서 카우프만 십자가형으로도 불린다. 중세학자 캐롤라인 워커 바이넘은 이를 그리스도 성혈에 대한 신심을 보여주는 대표 예시로 지목한다. 위키미디어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움베르토 에코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말할 때 가장 먼저 호명되는 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학위논문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미학의 문제를 썼고, 평생 성인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1974년 성인 선종 700주년을 맞아 에코는 이렇게 적는다.

그는 기반이 너무 튼실한 건물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이제까지 어떠한 혁명가도 그의 체계를 내부로부터허물어뜨릴 수 없었다. 사람들이 기껏 할 수 있던 일이라곤 외부로부터그의 신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는 것뿐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에코의 비유다. 그는 성인의 신학을 견고한 난공불락의 성()처럼 그린다. 그래서 의외다. 견실하고 정연한 성채 같은 이가 이토록 간절하고 아름다운 찬미가를 남겼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로 알려진, <천주 성자 예수 흠숭합니다(Adoro te devote)>. 우리나라에서는 가톨릭 성가195번에 수록된 성체성가다.

종교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하우즈는 이 곡이 일반적 찬미가보다는, 개인적 신심이 깃든 기도문에 가깝다고 정의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매일 두 번, 첫 미사를 집전하고 두 번째 미사에는 신자처럼 조용히 참례하거나 제대에서 봉사했다. 7절로 된 찬미가를 빵과 포도주 축성 이후부터 주님의 기도 직전까지 기도하듯 읊으면 전례 흐름과도 놀랍도록 맞물린다는 것이다. 정교한 각운과 운율은 말로 되뇌어도 부드럽게 흐른다. 기도와 노래가 일치하는 순간이다.

찬미가는 성경 인물들과 함께 신앙 고백을 이어 간다. 3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는 회개한 죄수 디스마스처럼 주님께 자비를 구하는 겸허를 드러낸다. 4절에서는 성인의 정체성이 성 토마스 사도와 이어진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고서야 믿었던 사도를 통해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라는 고백을 담았다. 본인 이름이자 자신을 투영한 성 토마스 사도에 기대어,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의 복됨(요한 20,29 참조)을 부각한 대목이다.

6절도 인상적이다.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를 주님의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성체 성혈에 대한 신심을 뚜렷하게 반영하는 부분이다. 성체성가 198성체 안에 계신 주님은 이 6·7절 라틴어 가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중세 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강조는 가혹한 수난, 십자가, 상처, 피 흘리심으로 형상화되었고, 성혈 관련 성유물 공경과 함께 더 강화되었다.

이는 성미술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새끼에게 가슴을 쪼아 먹이는 펠리칸 도상은 중세 동물 백과인 동물지를 넘어 여러 필사본에서 등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을 상징했다. 많은 십자가 그림에서 천사가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 즉 오상에서 흐르는 피를 성작에 받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성체성사의 성혈을 의미하는 시각 언어다. 요컨대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는 주님의 피 한 방울을 나타낸 것이다.

128일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이다. 축일을 맞아 그의 성체 찬미가를 불러보면 어떨까. 이를 기도처럼 되뇌는 것은 성체 성혈에 깃든 신비를 성인과 함께 맛보는 일이다. 전기는 성인이 성체 앞에서 종종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천주 성자 예수 흠숭합니다>는 성인의 내밀한 기도이자 고백에 가깝다. 때론 가장 이성적인 이가 가장 간절한 노래를 부른다고 했던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찬미가는 분명 그런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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