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 말씀만 하소서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8) 설마 그럴까? 아니야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1|조회수31 목록 댓글 0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8) 설마 그럴까? 아니야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한 건설회사가 돈을 더 벌기 위해 자재비를 아껴 건물을 짓다가 그만 신축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를 냈다. 인사사고가 발생하자 경찰은 건설 관계자를 불러 심문을 했다.

경찰: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왜 노동자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소?

관계자: ‘설마무너질까 생각했지요.

경찰: 그럼 왜 회사 간부들은 대피시켰소?

관계자: ‘혹시무너질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는 말이 생각나는 유머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설마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안심과 “‘혹시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근심 사이에서 살아간다. ‘설마에 한 표를 던지며 사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만일에 대비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즐겁게 살아가지만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반면 혹시에 한 표를 던지는 사람들은 언제나 만일을 대비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으로 찌들어 있지만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모면할 것이라는 안정감으로 살아간다.

설마혹시사이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타고난 기질적 차이일까? 아니면 상황에 대한 인식 차이일까? 성격심리학자들은 세상에는 타고난 낙관주의자와 회의주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유전자는 신체뿐 아니라 심리나 정신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중요한 생물학적 변인이다. 긍정심리학을 창시한 마틴 셀리그만도 매사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타고난 낙관주의자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들은 아무리 환경이 어렵고 힘들어도 웬만하면 우울하거나 불안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한다. 반면에 유전적 요인으로 타고난 비관주의자나 회의주의자들은 환경에 변화와 상관없이 대체로 우울하고 불안하며 무기력하다.

이와는 달리 사회심리학자 혹은 인지심리학들은 원래 타고난 기질은 없다고 말한다. 아니,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질의 유형과 상관없이 모든 행동은 그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 자주 늦는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르거나 꾸물거리는 성향의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출근 시간에 지각할 수도 있다는 인식 때문에 늦게 된다는 것이다. 약속시간에 자주 늦는 사람들이 입사면접이나 자격시험에는 결코 늦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앞의 우스갯소리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안에 대한 중요성 판단이 결국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는 사회·인지심리학자의 관점을 일깨워 준다. 건설 관계자는 무의식적으로 회사 간부의 생명이 노동자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하는 마음에 간부들은 대피를 시켰지만, ‘설마하는 마음으로 노동자들은 계속 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 생명의 가치는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닌 듯싶다. 신분에도 차이가 있듯이 생명에도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하였다.

우리는 어떤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인간의 생명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정치인과 연예인, 심지어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는 개그맨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종종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생명에 등급을 매겨 차별하는 세상도 아니지만,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어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세상은 더더구나 아닐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삶의 귀로에 서서 고민하는 영혼은 없는지 주변을 살펴보아야 할 때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 라고 넋을 놓고 있는 중에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한 영혼이 삶의 끈을 놓아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3)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49) 인생의 뒤안길에서

 

예로부터 동네에서 가장 크게 난 앞길은 한길이라 했고, 집과 집 사이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 골목길은 속길이라고 했다. 마을 뒤쪽으로 난 길로 대체로 볕이 들지 않고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눈 더미가 길섶에 남아 있는 길은 뒤안길이라고 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도 이러한 순서로 길을 걷게 되는 것 같다. 누구나 처음엔 당당하게 한길을 걸으며 청춘이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온갖 삶의 시련을 겪고 중년을 맞으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속길을 외롭게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삶의 뒤안길에서 자신의 삶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다.

대자연 안에서 가을은 한 해의 결실을 봄으로써 다음 해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이 가을을 인생에 비유할 때 노년을 떠올리게 된다. 노년은 인생의 가을로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시기일 것이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 어떤 느낌일까? 남들이 모르는 속길을 걸으며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세월이 느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만일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후회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연구자들은 임종을 앞둔 연로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만일 다시 자신에게 삶이 주어진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조사했다. 나름 소싯적에는 남들 앞에서 돈과 권력으로 힘 좀 쓰신 분도 계셨을 것이고, 한때 영예와 인기를 누리며 사신 분도 계셨을 것이며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한 분도 계셨을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든지 상관없이 모두 새로운 인생이 주어지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확인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에 대한 통찰을 전해 줄 것이다.

이 물음에 가장 많이 나온 답변부터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누구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고 싶다. 둘째, 사람들과 다시 잘 지내고 싶다. 셋째,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 우리보다 먼저 삶을 살다 가신 선배들의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진정한 행복은 남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가장 쉽고 간단한 진리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고 살아간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는 잘 지내지 못하며 애증의 관계로 살아간다. 지나보면 후회할 상처와 고통을 주고받으며 중요한 것도 아닌 일로 서로 갈등하고 헤어진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갈라진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은 죽음을 앞둔 영혼이 경험하게 되는 가장 큰 축복이다. 인간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진실해진다는 말이 있다. 하루하루를 마지막 순간처럼 산다면 우리의 관계는 좀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경험을 전해주지 않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기본이 될 것이다.

나눔을 통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통찰로 다가온다. 이 세 번째 답변은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답변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최근 모 대기업 회장님이 선친의 좌우명을 영빈관에 걸어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성찰했다는 지혜의 경구이다. 어차피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닌 재물에 눈이 어두워 나눔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도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말씀을 들으며 지금 여기서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스스로 묻게 되었고, 스스로 그 답을 얻게 되었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51) 부모와 어른이 ()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흔히 어른이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이런 미성숙한 성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충분히 성숙한 성인으로 살아가도 어른이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사랑이 넘치는(?) 부모의 눈에는 다 큰 자식도 항상 걱정되고 불안한 어른이일 뿐이다.

부모는 어른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사랑과 관심의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얘야, 운전 조심하고 다녀라” “손주 손녀들 인스턴트 음식 먹이지 마라!” “이번 대림절에는 꼭 판공성사를 보고 영성체해라!” 등의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자녀들은 없을 것이다.

이런 관심은 자녀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전반에 쏟아진다. 다 큰 자녀들은 부모의 노파심을 사랑의 표현으로 알아들으면서도 은근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분에 잔소리로 들리기 시작할 때 쌓아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이때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몰라주는 자식에게 마음의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자식 역시 부모의 과도한 사랑을 정서적 폭력으로 느끼며 저항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힘들어한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코헬 3).” 성인이 된 자녀에게는 청소년기와 다른 형태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도 때와 시기에 맞추어 그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지혜의 말씀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신었던 꼬까신이 아무리 예뻐도 다 큰 성인에게 신길 수는 없는 법이다. 성인이 된 자녀들은 꼬까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고무신을 요청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포유류에 속한 동물들은 새끼가 젖을 뗄 때까지 대략 3년을 함께 지낸다. 아주 일부의 포유류만 새끼가 출산할 수 있는 때까지 기다린 후에 독립을 시킨다. 하지만 영장류인 인간만이 부모가 독립해야 할 자녀와 함께 살아간다. 설사 결혼을 통해 원가족과 물리적으로 독립했어도 새로운 가족관계 안에서 부모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사회의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세대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성인기에 접어든 자녀의 뇌 안에서는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부모에게서 독립해도 좋다는 신호 혹은 메시지를 기다리는 것이다. ‘독립해도 좋다는 신호(sign)’, 이것이 성인기에 접어든 자녀들이 부모에게 유일하게 요청하는 새로운 고무신이다. 자연에서는 새끼가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어미가 새끼를 밖으로 내몰아 독립시킨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부모가 독립시켜주기를 무의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부모가 그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자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모에게 독립의 신호를 요구한다. 청소년기 부모에 대한 반항심은 바로 독립이 가까워져 왔다는 생물학적 반응의 일부다. 자녀가 부모에게 독립을 청하는 메시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며 대개 부모와 자식 간의 다양한 갈등을 통해 드러난다.

원시 부족사회에서는 자녀가 온전한 성인이 되었다는 독립의 신호를 개인적인 방식이 아닌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확인해 주었다. 바로 성인식이다. 불구덩이를 걷고, 신체 일부를 훼손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서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공포를 이겨낸 아이들은 자신이 성인이 되었다는 자의식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온전한 성인이 되었다는 자의식을 지닌 아이들의 뇌는 더 이상 독립의 신호를 요청하지 않는다. 성인식은 성인기 아이들의 생물학적 독립의 욕구를 충족시켜 부모와의 갈등을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는 중요한 갈등 해소 예식이었다.

현대 문명사회의 자녀들 역시 자신들을 온전히 성인으로 인정해 주는 그 어떤 것을 요청하고 있다. 부족국가의 성인식처럼 공동체 예식은 아닐지라도 부모가 자녀에게 새로운 고무신을 신겨줄 수 있다면 부모와 자녀의 갈등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독립해야 할 어른이지만 독립할 수 없어 어른이로 상처받고 있는 자녀들에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사랑의 표현인 새로운 고무신은 과연 무엇일까?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52) 부모와 어른이 ()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첫 1년 동안 조건 없이 부모(특히 엄마)로부터 들어야 할 말이 있다. “우리 아기 너무 예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빠와 엄마는 너를 지켜줄 거야!”라는 메시지다. 아기가 생후 12개월 안에(적어도 3년 안에) 부모의 조건없는 축복을 체험하면 정서와 지성, 영성 발달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아이가 사랑과 안정의 욕구가 해결된 건강한 양육환경에서 자라나면 5세 이후부터는 건강한 자기개념을 갖게 된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이며 버려지지 않는다고 확신하면 부모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어떤 환경에서도 손상 받지 않는다. , 부모가 아무리 듣기 싫은 잔소리나 충고를 해도, 혹은 심하게 야단치고 처벌을 해도 자신과 부모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쉽게 잃어버리지 않는다. 건강한 자기개념을 기반으로 한 아이들은 성인기에 접어들어도 부모의 잔소리나 과도한 개입도 긍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다. 부모에게 실망한다 해도 그것을 승화시킬 수 있는 내적인 성숙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부모가 심리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황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름 아이를 사랑으로 돌본다고는 하지만 부모의 심리내적인 불안정성은 자칫 아이에겐 부정적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키울 때는 아이의 기질에 따라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많다. 아이는 부모와 떨어진 환경이나, 부모의 불안정한 감정상태에 의해 스스로 사랑받지 못한 존재로 인식하고 앞으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아이가 세 살까지, 아니 길게 잡아 다섯 살에 이르렀는데도 사랑과 안정에 기반을 둔 건강한 양육환경을 체험하지 못하면 결국 부정적인 자기 개념을 형성한다. 자존감의 핵심을 이루는 자기 개념이 부정적으로 형성되면 평생을 거쳐 성격장애의 후유증과 존재의 근본적인 불안을 체험한다.

어린 시절 사랑과 안전에 대한 결핍을 겪은 아이들은 성인기에 가까울수록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생물학적인 에너지가 강렬해진다.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와 세상에 버려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확신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 부모로부터 어른이로 대접받고 있다고 느끼면 강력한 반발심이 생긴다. 성인기 자녀들이 부모와 결별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떨어져 있으면 만나고 싶지만, 만나면 갈등하게 되는 심리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모로부터 온전히 다 큰 성인이 되었다는 메시지, 즉 이제 독립해도 좋다는 신호는 아이들의 결핍을 오히려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에게 독립의 메시지를 주는 그 자체는 오히려 과거의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정말 중요한 치료제가 된다.

어릴 때 신었던 꼬까신을 벗어버리고 이제 새로운 고무신을 선사 받게 되는 이 독립의 메시지는 바로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말이다. 과거의 자녀가 어떤 아이였건 상관없이 이제 아이는 온전한 성인이며 스스로 자기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가 바로 믿는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랑과 안정의 욕구에서 결핍을 체험한 자녀들이 치유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하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치료제이다.

어떤 부모는 자기 자식을 믿지 못해, 어떤 부모는 자녀가 다 컸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걱정과 염려가 되어서 믿는다는 말을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말은 자식이 성공할 것이다혹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어떤 능력이나 그 결과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온전히 믿는다는 신뢰의 메시지는 자식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더 근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53) 부모와 어른이 ()

 

서울에 사는 요한은 추석 명절을 맞아 가족과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외아들과 손주들을 만나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요한은 농부인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사이의 외아들로 한 번도 부모님 명을 거스르지 않은 착한 아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서울의 명문대학에 들어가 남들이 선망하는 공직에 오르는 등 마을에서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이런 아들이 귀성길에 오르니 마리아는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었다. 아들을 위해 경작한 각종 곡식과 채소, 남은 명절 음식들을 챙겨 차에 실어주면서 아쉬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아들~ 떡과 과일을 챙겨 놓았으니 올라가는 길에 출출하면 애들하고 꺼내먹으렴. 혹시 체할 수도 있으니 너무 급하게 먹지 말고 보온병에 넣은 따뜻한 홍삼차를 같이 마시면서 먹어야 해. 그리고 아침 뉴스에 보니 교통이 많이 막힌다는데 걱정이네. 좀 더 집에서 쉬고 막히지 않을 때 올라가면 좋으련만. 바쁘니까 더 붙잡고 싶어도 할 수 없지 뭐. 차가 막히면 졸릴 수 있으니 절대 졸음운전 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졸리면 꼭 갓길에 차 세우고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해. 무리하면 안 된다. 차에서 가족들과 함께 묵주기도 하는 거 잊지 말고!”

그런데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아는 아들의 불만과 짜증이 섞인 고함을 듣게 되었다.

어머니 이제 고만 좀 하세요. 저도 다 큰 어른인데 어련히 알아서 하겠습니까? 좀 마음 편하게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항상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셔야 하나요?”

아들이 걱정되어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했을 뿐인데 아들이 이런 충격적인 폭언을 하다니. 마리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들의 막말을 듣고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마리아는 병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아들을 다시 보게 되었으나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이 왜 자신에게 화를 냈는지, 그 착한 아들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요한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할 기회라 생각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모가 들려주는 말이 자신을 사랑해서 해 주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고마운 마음보다는 짜증과 분노가 생기는 것이었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에 화가 올라온다는 말에 마리아는 황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요한이 부모에게 이렇듯 화가 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메시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아들을 신뢰하는 부모의 말을 의미한다. 물론 마리아가 요한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염려와 걱정, 즉 노파심은 모든 부모의 보편적인 마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자녀가 성인으로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듣지 못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부모의 모든 관심과 사랑은 한낱 잔소리에 그치게 되며, 자녀는 부모의 노파심을 아직 자신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요한아~ 엄마는 항상 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며 신앙생활 잘하리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부모 걱정 시키지 않고 잘 살아왔으니 어련히 잘하고 살지 않겠니? 엄마가 항상 기도하고 있으니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낼 거라고 믿는다. 안전운전해서 잘 들어가고 도착하면 전화 한 통 해주렴!”

이처럼 걱정과 염려를 담고 있지만, 아들을 인정해 주는 말을 듣게 됐다면 요한의 마음은 달라졌을 것이다. 믿음과 희망을 담아 당부하는 부모의 말 속에는 자녀를 온전한 성인으로 인정해 주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이쯤 되면 어른이들과 소통하기 어려운 부모들이 이렇게 한탄할 만하다. “, 부모 노릇을 하기 어렵구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