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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미운 짓 하는 사람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1|조회수37 목록 댓글 0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미운 짓 하는 사람들

 

사람을 대하다보면 누구나 똑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날수록 기분 좋고 보고 싶은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분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갖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기분이 자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의 대인관계 내용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은 사랑받을만한 짓을 하는데 미움받는 사람들은 미움받을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미움받는 짓을 하는 것일까? 성장 과정의 학습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부모와의 감정적 관계가 건강치 않을 경우 사랑받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운 짓을 합니다. 야단을 맞더라도 부모의 관심, 부정적인 관심이라도 갖고 싶어하는 것인데 이것이 습관이 되는 경우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미운 짓을 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소위 왕따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주위사람들이 자기를 집단 따돌림 한다고 남의 탓을 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마저 떠나게 만듭니다.

요즈음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서 사방으로 진정서를 내고 자기만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 중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정말 억울한 사람까지 욕을 먹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미운 짓을 골라하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선택해야 하는 삶은 오로지 한 가지입니다. 다른 사람 문제를 보기 전에 자기 문제를 보는 것 그것뿐입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 문제를 인정하면 문제를 고치지는 못해도 미움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아재유머 하나 소개합니다. 주일미사는 나오는데 영성체는 죽어라고 하지 않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본당신부가 이유를 물으니 죄짓는 직업이라 못한다고 했답니다. 본당신부가 세상에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미사는 만찬의 자리이고 형제님은 식사비도 내셨으니 영성체를 하세요라고 하자 그 형제님은 심각한 얼굴로 신부님~ 저는 밥 먹을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고민한 신부가 다시 형제님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누구를 위해서 일까요? 건강한 사람일까요? 병든 사람일까요? 병든 사람입니다. 맞습니다. 성체는 병자들을 위한 약입니다. 형제님은 마음이 병든 분이시니 약을 드시듯 영성체 하세요.”

그러자 그 형제님이 조그맣게 그럼 신부님께서 제게 영성체 해주실 때에는 그리스도의 몸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약이라고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더랍니다.

 

 

 

 

 

 

 

[기도 맛들이기] 기도의 첫걸음, 진지한 성찰(省察)

 

요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사회 안팎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성찰’(省察)입니다. 대형사고를 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잘 나가다 미끄러진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스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애용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평생을 두고 깊이 성찰하고 자숙하겠습니다.” 저 역시 성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데, 진정한 의미도 잘 모르면서 있어 보이는용어라 여겨져 애용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습니다.

성찰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언행과 지난 삶을 천천히 돌아보고 깊이 살핌입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그 의미가 한결 풍요로워집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앞에 선 한 나약한 인간 존재로서, 자기 생각과 말, 영혼과 육체의 상태,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깊이 반성하며, 가슴을 치고, 그래서 다시금 주님 안에 새롭게 시작하려는 일련의 노력을 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성찰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전개되지 않으면 무조건 남의 탓, 나라 탓, 세상의 탓으로 돌립니다.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옵니다. 성찰하지 않는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인 증세입니다.기도하는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성찰은 진정한 기도로 나아가기 위한 첫 관문입니다. 기도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진지한 성찰을 습관화하면 좋겠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는 다양한 측면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나에 대한 진지한 성찰, 내가 소속된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의 실상에 대한 뼈를 깎는 성찰, 교회 공동체,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한 고뇌에 찬 성찰,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

기도 생활 안에서 성찰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합니다. “성찰은 기도 중에 경험하는 깨어있는 마음 상태이며, 이러한 마음 챙김은 기도로 충만한 상태와 동일한 것입니다. 온전히 성찰할 때 나의 기도는 온전한 기도가 됩니다. 분심이 많이 들수록 기도는 고갈됩니다. 끝내는 기도가 공허하고 형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분심 때문에 성찰이 깨지면 기도는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다비드 슈타인들라스트, 감사, 분도출판사)

진지한 성찰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집중력과 경이로움과 단순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더욱 수월하게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보다 편안하게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영성] 오늘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

내가 끝장나는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다

 

대림 시기에 깨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깨어 있음과 깨어남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며 대림 시기를 보내야 할까요?”

대림 시기의 신비의 비밀은 내가 끝장나는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끝장나는 곳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현대 영성가, 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대림 시기, 희망인가, 망상인가?”라는 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대림 시기를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해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내가 끝장나는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내가 끝장난다는 것의 영적인 의미는 내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 나의 뜻, 나의 집착, 나의 틀”, 다시 말해 나의 거짓 자아에 대해 마지막을 고하고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기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더욱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 내 안 도래(Advent) 하신 그리스도께서 깨어나 자라고 성장하기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익숙하고 안전하다고 여기는 자신만의 삶의 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이러한 고착된 자아에서 벗어나 홀로 광야로 나아가 새로운 참된 자아를 만나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이 첫 발을 내딛음으로써 과거에 내가 알고 체험한 그 하느님을 넘어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홀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거짓 자아와 이별을 고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없을 때 새로운 시작도 없습니다.

그래서 머튼 신부님은 대림의 신비를 비움의 신비, 가난의 신비, 한계의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영적 가난,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셔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나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성탄입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는 새로운 시작을 고대하는 희망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마치 동방의 세 박사들이 지금까지 알던 자신들의 하느님을 넘어 새로운 메시아를 만나기 위한 희망으로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을 떠나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였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가 끝장날 수 있을까요? 먼저 떠나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돈에 대한 집착, 사람에 대한 집착, 자리에 대한 집착, 건강에 대한 집착,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떠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물론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터널을 통과해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이 어둠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어둠을 또 다른 시작을 위한 희망으로 여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가령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닥쳐온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까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팬데믹은 인간 중심의 사회가 가져온 어둠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중심으로 건너가라는 시대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한계 앞에서 인간의 것이 끝장나고 하느님의 것을 시작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이기도 합니다.

대림 시기를 보내며 우리는 나의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는 과감한 결단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하느님 방식의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고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인간을 화해하고 용서해 주셨듯이 그렇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자신 안에 마지막을 고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자신의 삶 속에 하느님 이외의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끝장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롭게 시작하도록 합시다.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18) 하느님에 대한 아이의 물음, 어떻게 대답해야 하죠?

 

여섯 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요, 아이가 가끔 제가 대답하기 곤란하고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묻기도 하고, 자기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하느님은 하늘에 살아?’, ‘(엄마 아빠 연애 때 사진을 보며) 나는 왜 여기 없어?’와 같은 질문들이요. 마음 같아선 제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잘 대답해주고 싶은데, 저는 교리도 잘 모르고 알려준다고 해도 아이에게 부정확한 내용을 전해주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망설여집니다.”

체험하고 인지하는 세계가 점점 확장되면서 유아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왜 구름이 떠 있는지, 깜깜한 것이 싫은데 밤은 왜 있는지 등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도 쉴 새 없이 묻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현상이 ’, ‘어떻게일어나는지 궁금해하는 유아들의 질문은 사실 그 현상이 일어나는 인과관계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어린 자녀가 질문을 할 때, 때로는 과학적 원리나 정확한 답을 설명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그 목적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모든 현상의 목적과 의미를 마련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 노을이 예뻐. 노을은 어떻게 생기는 거야?” 아이가 이렇게 질문해왔을 때 신앙이 없는 부모는 보통 , 노을이 참 아름답다. 해 질 무렵 여러 색의 빛 중 유독 붉은 빛이 우리 눈에 오래 머무르면서 생겨나는 거야하고 원리를 알려주는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부모는 하느님과의 연결성 안에서 이렇게 응답할 것입니다. “그래, 정말 아름답지? 이 아름다운 노을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거야. 하느님께서 지구 반대편 나라에 사는 사람들도 비춰주시려고 해를 만드셨어. 해가 지면 아쉬워할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이렇게 예쁜 노을을 선물로 주셨지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시선에 초점을 둔 응답을 통해 부모의 아이와의 일상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에 대한 대화로 전환됩니다. 이처럼 영유아기 때부터 자녀와 신앙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나누는 것은 영유아기 자녀의 내면에 반드시 확립되어야 하는 기본 신뢰감(Basic trust)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자녀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지에 대한 물음에 어린이 종교교육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다음의 3가지를 강조하며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녀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모를 때는 엄마, 아빠도 잘 모르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치를 잘 설명해주기 어려울 때는 부모가 만난 하느님에 대한 느낌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자녀들은 지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 신앙의 신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녀가 던진 말이나 질문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수용적인 자세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질문을 과소평가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말투나 태도 안에서 크게 상처를 받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궁금한 것이 생겨도 부모에게 질문하기를 꺼리게 됩니다. 따라서 자녀가 질문을 할 때는 당장 최선의 답을 줄 수 없더라도 우선 수용해주고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부모의 표현 안에서 자녀들은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 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엉뚱하고 가벼운 질문에 친절하게 응답해주는 부모와의 대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것을 바로 체험된 신앙’(experienced faith)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잘못을 뉘우칠 때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분이야와 같은 표현을 자주 듣는다면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의 모습을 자주 이야기해주어 사랑의 하느님 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신앙에 대한 대화는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명한 종교교육학자 소피아 카발레티는 3세에서 7세 사이의 어린아이들은 영적으로 민감하여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이끌림을 인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아이들은 그런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어른이 보기에 놀라운 아이의 말이나 질문은 바로 아이들의 이런 영적인 면에 기인합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시고 일상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녀에게 자연스럽게 건네보십시오. 자녀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응답해오는 이야기 안에서 부모들에게 건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친절하고 호의적인 부모와의 대화, 그리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청의 태도, 그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부모의 노력만 있다면, 자녀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이야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미움 그 괴로운 감정

 

어떤 분이 고민을 털어놓으시길, 처음에 사람을 만나면 무엇이든 잘해주고 싶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싫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한다고 했습니다.

초지일관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둥근 돌이 아니라 모난 돌이라서 그렇습니다. 모난 돌이란 마음 안에 콤플렉스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모난 돌이라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모난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모난 돌이 둥근 돌이 되는 것은 다른 모난 돌들과 부딪치면서 동그랗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갈등을 겪어야 모난 돌이 둥근 돌로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합니다. 철학자 헤겔은 세상만물은 정반합의 과정, 즉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고 했습니다. 서로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갈등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신자분들이 봉쇄수도원을 다녀오시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수녀님들이 아기들처럼 너무나 얼굴이 밝다고요. 그럴 수밖에요! 같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야하는 것이 봉쇄수도원이니, 매일 서로에게 적응하느라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원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수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기도보다 사람과 사는 것이 더 힘들다고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어줘서 좋다고 합니다. 미운 마음은 죄가 아니라 성장과정의 갈등일 뿐입니다. 미운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고 사람을 피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아재 유머입니다. 어떤 본당에 본당 신부에게 쓴 소리를 퍼붓는 자매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들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혔는데, 유독 한 신부만이 그 자매편을 들었습니다.

다른 신부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성격이 까다롭다고 소문난 분인데 그 자매가 하는 말이 거슬리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그 신부가 씨익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 자매가 그렇게 쓴소리 하고나면 반드시 내게 감사헌금을 하고 간다네. 5분만 참으면 10만 원이 생기는데 그까짓 것 못 참겠는가?”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의 이 말씀은 많은 신앙인들을 곤욕스럽게 합니다. 도대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어떤 신자들은 실제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고 가는 행위를 연출하기도 하고 어떤 신자들은 힘든 일이 생기면 아이고~ 내 팔자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다 내 십자가야 십자가~”하며 한탄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건 십자가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란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생긴 콤플렉스가 십자가 콤플렉스입니다. 뭐든지 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콤플렉스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가진 십자가 중에 가장 문제되는 십자가는 바로 자신이란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금 내가 불행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어서라고 생각들 합니다. 타인이 나의 십자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편도 자식도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지면 평생 남 탓이나 하고 사는 성격장애자가 되고 맙니다. 아무리 충고를 해줘도 귀 닫고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건강한 생각은 십자가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내가 나 자신은 바꿀 수 있기에 내 인생의 십자가는 바로 나로구나하는 생각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주님이 주신 고통이란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는 거대한 나무를 의미하며 인간이 추구해야할 삶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은 위로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고 아래로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봄이며, 좌우는 세상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사방으로 자신을 열어놓을 때 그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제공해주는 것이 된다는 것이 새로운 십자가 신학입니다.

십자가는 의미 없는 고통이라는 부정적인 것이나, 나의 죄에 대한 형벌이란 개념이 아니라 내가 더 인간답게 복음적인 삶을 사는 길을 보여주는 상징이란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십자가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

아재 유머 하나 하겠습니다. 이스라엘로 순례를 간 남편이 예루살렘에서 급사했습니다. 예루살렘 쪽에서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현지에서 장례를 하면 저렴하지만 한국으로 시신을 보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요. 그런데 부인은 아무리 비용이 들어도 남편장례를 한국에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현대판 열녀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절친한 친구가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에서 저렴하게 장례하지 왜 그 많은 돈을 들여서 한국에서 장례한거야?”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그 인간 장례를 예루살렘에서 했다가 부활하면 어떻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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