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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1) 놀라우신 하느님 저 위가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1|조회수30 목록 댓글 0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1) 놀라우신 하느님

저 위가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신부님,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우지 못해 냉담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죄고 짐이네요.” 많은 신자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가 자녀들 신앙일 것이다. 자녀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할 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할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그들이 정말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 혹시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상 속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지?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하느님 상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신부님, 신앙 때문에 갈등이 많아요.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왜 자연재해나 대형 참사가 일어나도록 하느님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서, 혹시 우리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나 깊은 산 연못 속의 산신령님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아기적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어릴 때에는 하느님을 대체로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그리지만, 시간이 지나 하느님과 친숙해지며, 그분을 무서운 분보다는 친구처럼 가까이 계신 다정다감한 분, 인생길에 동행하는 분으로 알게 된다.

누군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거나,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각자의 삶 속에서 만난다. 교회와 삶을 오가며, 우리는 조금씩 자기만의 하느님 상을 깨뜨리고, 교회가 알려주는 하느님을 알게 되며, 우리 삶 안에 살아계신 분으로 직접 만나게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크신 구원 계획안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직접 만나 알게 된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삶의 주인이자 목적으로 고백하게 된다.

해마다 성탄이 되면 우리는 허름하고 누추한 말구유에 누워 계신 한 아기 앞에 선다.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경배드리며 하느님의 탄생을 경축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하느님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느님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듯 저 먼 하늘 위에 머물며 우리를 내려다보는분이 아니라, 역사 안에 오신 하느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교묘히 피하시거나 인간의 겉모습만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 죽을 운명까지도 당신 것으로 하신 하느님이시다.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시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잠깐 왔다 하늘로 올라가시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 오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육화곧 인간의 육을 취하시고,(요한 1,14 참조) 인간과 하나 되는 방식을 택하셨다. 화려한 성전이나 궁전이 아닌 허름하고 위험천만한 마구간을 택하셨다. 화려하고 밝은 도시가 아닌, 어둠과 쓸쓸함이 뒤덮고 있는 우리의 일상 안으로, 그늘진 삶의 영역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다. 인간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시기 위해,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간을 돌보시고 함께 운명을 나누시기 위해서다.

우리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누워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놀라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 각자가 성탄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가? 그토록 놀라운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2)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성탄, 바오로딸, 2010, 109)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한 성탄 강론에서 동방 박사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전형이다. 마태오 복음서가 기술한 그대로 그들이 실존한 인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걸은 여정이 바로 우리 각자가 걷는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별을 쫓아 길을 나섰다. 그들은 익숙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더 좋고 진실한 것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길 위에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여행길의 이정표인 별이 사라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별이 자취를 감춘 곳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고 화려한 도성, 온갖 권력가와 지식인, 종교인이 운집해 있는 곳에 계실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기준에 맞추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느님의 길은 분명 인간의 길과 다르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고을 베들레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다시 나타난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베들레헴의 연약한 아기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엎드려 경배한 후 예물을 드렸다.

우리도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을 쫓아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평범하고 때로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아름답고 기쁜 수많은 일들로 가득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 그들과 함께 쓴 역사들, 맞닥뜨린 사건들과 경험들, 그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더 좋고 나은 삶, 더 진실한 삶을 찾았고, 우리의 별이신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

박사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가 걸은 길은 고뇌와 번민, 좌절과 절망, 위기와 역경, 실패 등으로도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더 힘을 내어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가진 짐을 내려놓고 우리의 기준을 버리게 하는 계기들이었다. 우리는 조금씩 가난을 배우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배웠으며, 화려한 도시나 권력과 지식이 아닌, 가난하고 소박한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용기를 내어 길을 걷는 법을 배웠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박사들의 여정은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별을 쫓아 하느님을 찾으며, 조금씩 하느님의 방식과 기준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분의 가난과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수용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런 자신과 하나 되심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들어 높임을 받았는지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 가고 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동방의 박사들과 함께 경배하며, 무한한 거리를 뛰어넘어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 오신 하느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우리 또한 당신처럼 별이 되는 여정을 걷도록 우리를 숭고하고 고귀한 존재로 들어 높여주심을 깨닫게 된다.

동방의 박사들이 걸은 여정의 마지막은 다른 길이다. “그들은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마태 12,12) 하느님을 발견한 후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더는 이전처럼 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박사들과 구유 경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더는 과거처럼 대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3) 새로운 시작

죄를 없애시는 주님 앞에 매일 새롭게

 

어떤 자매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한다. “주여, 사흘마다 오소서!” 결심이 늘 작심삼일로 끝나기에, 사흘마다 오셔서 마음을 잡아달라는 간청이었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새해를 시작하며 가졌던 새로운 마음과 다짐들,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점검해 보면 어떨까.

중국 은나라 시조인 탕왕은 대야에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진실로 하루가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매일 새로워질 것인가? 새로워지는 것은 연말연시의 기분이나 분위기 혹은 한순간의 마음이나 의지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내가 새로워지지 않는데,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작이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새해를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주님께서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며, 오늘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은총 덕분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을 한순간이라도 늘일 수 있겠는가. 올 한해를, 나날을, 매 순간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매 순간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새로 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새로운 시작도 불가능할 것이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위로부터 태어남은 과거의 나, 죄로 물든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죄를 뉘우치는 회개요 죄를 씻는 용서다.

요한 세례자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행한 것이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였다. 요한은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외쳤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우리는 종종 잊는다. 성탄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죄로 물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죄로 물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로 가득한 이 세상에 몸소 오셨다는 놀랍고도 기쁜 소식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1요한 3,5)

죄 많은 인간이 죄의 참모습, 죄의 심각성을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 앞에서다. 영광 속에 계셔야 할 분께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추한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서다. 죄 없으신 분께서 고통과 죽음을 마다치 않으신 것도 같은 사랑으로 인해서다. 아기 예수님의 순수하고 가난한 미소에서, 십자가 위 주님의 상처 입은 얼굴에서 우리의 죄를 발견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스럽게 대해주고 우리와 하나 되고자 하신 분께서 겪으신 모욕과 상처에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의 가난에서, 우리의 죄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죄는 그 사랑에 대한 외면이고, 신뢰를 저버림이며, 선을 악으로 갚음이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죄인인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가 얼마나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지, 그 안에서 얼마나 서로를 옭아매고 상처를 주는지 의식하자.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깊은 사랑에 마음의 문을 열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그 사랑만이 구원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리자.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4)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고 하느님을 알아가는 길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숨은 다른 질문이 있으니, 바로 너희는곧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질문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신학자인 조셉 도레 대주교는 모든 이를 위한 예수(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에서 예수님께서 앞서 하신 질문의 초점을 너희에 맞추며,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자문하도록 질문을 던지고 계심을 일깨운다.(225~226) 예수님을 따르는 나, 그분 앞에 선 나는 누구인가? 신앙의 길에서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을 찾아 나선 우리 자신을 알아가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신학교 교직원 연수 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한 번도 던져보지 못했던 질문이라고 하시며 많은 분이 당혹해 하셨다. 그동안 신학교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아빠,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는 늘 숨기고 살아왔던 삶이었기에 그랬다고 하셨다. “자신을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누구라고 말씀하시겠어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답을 준비해 보셔요.” 필자의 설명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낀 직원들은 이내 그룹별 나눔에서 자신 있게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고, 필자는 그들의 얼굴에서 왠지 모를 환한 미소와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인생에는 많은 질문이 있지만, 그중 나의 영혼을 깨우고 삶을 새롭게 살게 하는 질문이 있다. 직원들 전부는 아니겠지만, 몇 분은 그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고 자기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를 갖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그 질문이 가슴에 남아 있다면, 삶을 이전과는 달리 살게 할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자문해보자. ‘나는 누구인가?’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 혹은 회사나 직장의 일원으로서의 나 뒤로 감추어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그동안 나는 나를 어떻게 하였나? 나 자신을 대면하기를 거부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나? 단 한 번도 던져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이 질문들 앞에서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혹자는 물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신앙과 반대되지 않느냐고, 신앙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신앙이 순종이란 말은 맞지만, 우리는 순종이란 단어 앞에 붙는 자발적이라는 말을 종종 잊는다. 신앙은 자발적인 것이기에 나의 몸과 정신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 곧 나의 온 존재를 기꺼운 마음으로 봉헌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삶을 찾기를 바라신다. 가치 있고 보람되며 의미 있는,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사실 그 길은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길과 다르지 않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란 우리가 당신과 함께 길을 걸으며 변화하고 성장하며,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이다. 아버지의 그 뜻과 마음은 우리가 당신과 관계 맺으며 걸어가는 길 위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무엇이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루카 15장 참조) 많은 시련을 거치며 변화를 겪는 길이다. 그러나 기쁨과 희망의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상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분께서 던지실 내가 너에게 준 생명, 너의 삶을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라는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5) 나를 돌보는 시간, 피정

십자고상 앞에 촛불 켜고 앉아보자

 

여행 갑시다 나의 여자여 하나뿐인 나의 여자여 상처투성이 병이 들어버린 당신 여행 가서 낫게 하리다.”

이 노랫말 가사처럼 누구나 상처투성이 병든 몸과 마음을 추스를 힐링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톨릭교회의 피정이야말로 이런 시간이 아닐까. 피정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거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자가 계실지 모르겠다.

한국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피정이란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의 영신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어느 기간 동안 일상적인 생활의 모든 업무에서 벗어나 묵상과 자기 성찰 기도 등 종교적 수련을 할 수 있는 고요한 곳으로 물러남을 말한다.

피정하면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유학 시절이 떠오른다. 고국을 떠나 외국말로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며, 논문까지 외국말로 써야 했던 그 시기는 필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 시절, 고단하고 지친 삶에 활력을 주고 용기와 힘을 주었던 시간이 바로 피정이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2) 파견지에서 돌아온 사도들에게 쉼의 시간을 배려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 신자들은 바쁜 일상과 교회 활동을 뒤로하고 한적한 곳에 가서 쉼의 시간을 가지며, 주님과 함께 머물며 그동안 돌보지 못한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새로운 힘을 얻고자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자신을 돌보고 영적으로 새로운 힘을 얻는 시간이 더욱 필요한 시대다. 아무리 시대가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은 늘 내면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과거와 같이 자신을 지켜주던 안정된 공동체의 도움이 많이 사라진 오늘이기에, 현대인은 더욱 많은 아픔과 상처, 두려움을 안고 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정은 신자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나누어 줄 수 있는 소중한 전통이며 보화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종교나 종파와 무관하게 가톨릭교회의 피정을 배우기 위해, 혹은 피정을 통해 영적 힘을 회복하기 위해 가톨릭 피정 센터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내면을 돌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상을 떠나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이란 나를 길들여온 익숙하고 안락한 장소인 동시에, 나를 타성에 젖게 하는 환경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떠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분명 떠나지 못하도록, 안주하도록 하는 환경이 있다. 그러나 막상 떠날 때, 떠남이 진정으로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떠나려는 의지만이 아니라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떠난다는 것은 잠시 나에게 맡겨진 일에서 벗어나, 일상의 자신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의식적이고 자율적으로 새롭게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정리가 필요하다. 마치 여행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반 여행과는 다르다. 피정은 무엇보다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휴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따로 만들면 어떨까. 성당이면 좋겠지만, 집이어도 좋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을 끄고, 십자고상 앞에 촛불을 켜고 앉아보자. 하느님 말씀을 펴고 한 구절을 읽으며, 그 말씀 안에 머물러보자. 그리고 그동안 외면해 온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리고 주님께서 하시는 다음 말씀을 되새겨보자.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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