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23) 왜 성혈은 모시지 않을까?
“성체 한 조각에도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계신다”
- 성체와 성혈 안에는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 레오 14세 교황이 미사 중 성체를 거양하는 모습.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우리가 성찬의 전례 때마다 듣는 말씀입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두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정작 미사 때 우리는 성체만 모시는지 궁금해집니다. 성혈은 왜 모시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성체와 성혈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4항)
비록 우리의 눈에는 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살이고, 또 모든 지식과 감각을 동원해도 포도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아주 작은 성체의 한 조각이나 성혈 한 방울일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일부분이 아니라 완전하고 온전하게 계신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체나 성혈 중 어느 한 가지 형상만을 모시더라도 “그리스도를 참된 성사로, 온전하게, 그리고 모두 다 모시는 것”이고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얻는 데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282항)
트리엔트공의회 교부들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들어 이 내용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주시려고 내어주시는 당신의 몸과 피에 관해 설명하시는데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빵”(6,48)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교부들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고 말씀하신 분께서 또한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6,51)이라고 하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단형 영성체로도 구원에 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트리엔트공의회 제21회기 「영성체에 관한 교리와 법규들」 제1장)
물론 단형 영성체로도 충분하지만, 역시 양형 영성체가 성찬 잔치의 표지를 한층 더 완전하게 드러냅니다. 양형 영성체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주님의 피로 맺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이 표현되며, 성찬 잔치와 아버지 나라에서 이루어질 종말 잔치의 관계가 더욱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281항)
그래서 세례 후 첫영성체 등 전례서에 규정된 경우나 피정·영성 모임·사목 모임 등의 경우 양형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모독할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당부합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구원의 성사」 101항) 아무래도 성체와 달리 성혈은 분배할 때 엎지르거나 흘릴 염려가 크니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미사 때 성체의 수가 부족할 때 신부님께서 성체를 작게 쪼개서 나눠주시기도 하지요. 우리 눈에는 너무도 작은 조각이지만, 온전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를 기억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중)
[가톨릭 교리] 나이 듦에 대하여
막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는 하루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습니다. 보다 성숙한 사제로서 신자분들의 고충에 더 깊이 귀 기울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직 많은 나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이제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반짝이는 젊음을 지닌 새 사제들을 바라보면, 그 시절에만 지닐 수 있는 풋풋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또한 연로해지시는 어르신들을 뵐 때면,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쇠약해짐의 현실을 절실히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수많은 추억과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삶 속에서 얻은 작고 사소한 지혜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저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깊이와 온기가 있으니까요. 작은 친절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예전에는 당연하거나 지루하게 여겼던 하루의 평범함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중요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천천히 걷는 여유와 누군가를 기다려 줄 수 있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젊음을 갈망하며, 마치 그것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합니다. 나이 듦을 단순한 쇠퇴나 소멸의 과정으로 여기며 가능한 한 늦추려 합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이를 인간이 시간 속에서 성숙해 가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영적 여정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은 젊음과 건강만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나이와 상태 안에서도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의 모든 시기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늙음과 죽음마저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 역시 노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 의로운 길에서 얻어진다.”(잠언 16,31) 또한 시편은 하느님 안에서 열매를 맺는 노년의 역할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돋아나리라. 늙어서도 열매 맺으며 수액이 많고 싱싱하리니 주님께서 올곧으심을 알리기 위함이라네.”(시편 92,14–16) 이에 교회는 세대 간 단절을 경계하며, 노년의 경험과 증언을 소중히 여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여러 차례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곳에는 젊은이의 미래도 없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2015년 3월 4일 일반 알현)
다시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의 저와 지금의 저를 비교해 봅니다. 새 사제 때는 많은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인간의 유한성과 연약함을 더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끝을 향해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노년의 빛깔은 쇠퇴의 어둠이 아니라, 회개와 용서, 화해와 희망 안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노을빛을 띠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 부활을 알아보는 눈-사랑
부활의 참된 의미와 내용
부활 시기를 잘 지내고 계신가요?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자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4,14) 그런데 부활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과정으로 부활하셨는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떤 상태인지 등등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능력에 따른 것이기에 인간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부활’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활의 의미는 ‘다시 살아남’이지만, ‘소생’과는 다릅니다. 즉 심폐소생술을 통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남’ +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라자로나 과부의 아들 등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다시 살아났지만 결국 다시 죽었기에, 그들을 부활한 사람이라 하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이 부활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몸으로,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육신의 부활’, 새로운 몸으로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의 증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부활의 첫 증인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12사도,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루카 23장), 겐네사렛 호숫가(요한 21장) 등등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던 중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게 체험했던 사도 바오로(사도 9장) 역시 중요한 증인입니다.
부활의 두 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이 충분한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부활하셨다면 무덤은 비었어야만 합니다. 빈 무덤 자체가 부활의 증거는 아니지만, 무덤이 비었어야 부활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일어난 사건인가요?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 즉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까요? 역사적 사건이란 시공간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로 지상에 태어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인가? 한편으로 그렇습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의 시공간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역사 안에서 일어난 역사를 뛰어넘는 사건’이라 규정합니다.
부활 사건은 첫째,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 즉 감각적인 경험과 추론을 통해 인식하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둘째,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계시사건입니다. ‘종말’이라는 단어의 뜻은 ‘끝, 마지막’인데, 신학적 의미는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는 때’를 의미합니다. 심판이란 믿지 않았고 막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단죄를 의미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 사람에게는 구원 내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종말, 종말론 등의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해 해석하면 구원, 구원론이라는 뜻이 됩니다. 부활 사건이 종말론적 계시사건이란 의미는 믿는 이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 믿는 이들에 대한 구원 약속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성모님의 승천 등은 신앙인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셋째, 부활 사건은 하느님의 능력과 주도권 그리고 구원 의지를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구원하시겠다는 의지, 즉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구약과 신약 전체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해집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이 부활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부활을 이해하는 방법 - 사랑
부활 사건과 관련해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을 신학적으로 혹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 당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후 그분이 부활하실 거라는 기대나 예측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후 모두가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아직 어두울 때에”(요한 20,1)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시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고,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확인한 후 다시 돌아갔는데, 마리아는 계속 무덤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던 마리아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육신은 다른 몸, 다른 음성,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잠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때까지도 못 알아보다가 어느 순간, 즉 예수님께서 평소 그녀를 부르셨던 것처럼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심을 알아봅니다.
마리아는 왜 어두운 새벽에 예수님 무덤에 갔었고, 왜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왜 ‘마리아야!’라고 불렀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기에, 죽음 이후에도 예수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외모와 음성은 달라졌지만 평소 그녀를 부르시던 모습을 기억하였고 그래서 부활하신 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하느님 사랑의 힘이고, 사랑은 부활을 알아보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은 믿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항상 함께하는데, 그 중의 제일이 사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장 깊은 신비라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믿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성서와함께’ 가꾸는 기도의 정원] (3) 부겐빌레아
‘삼위일체의 꽃’이 건네는 신비
- 부겐빌레아(Trinitarian flower). 성서와함께 제공
삼위일체. 하느님은 한 분이지만 동시에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구분된다는 그리스도교 교리로, 인간의 지력으로는 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신비’라고 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비록 완벽한 설명은 불가능해도, 다양한 해석과 관점으로 하느님의 본질인 삼위일체를 탐구해왔다. 일반 평민이나 이교도인들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는 어려운 이론 대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에 비유해 이해를 도왔다. 사과·복숭아 같은 과일(씨앗·과육·껍질로 구성된 하나의 과일)과 세잎 클로버가 대표적인 비유의 도구였다. 또 이름은 다소 낯설지만, 오늘 소개하는 꽃 부겐빌레아(Bougainvillea)도 그 중 하나다.
부겐빌레아는 영어로 ‘삼위일체의 꽃(trinitarian flower)’이라 불리는데, 이는 식물의 구조가 각각 3개씩 반복되는 독특한 모습 덕분이다. 하나의 꽃줄기에서 3개의 꽃대가 올라오고, 이 꽃대에서 포엽 3개가 한 묶음으로 형성된다. 이 포엽은 얇은 종이처럼 질감이 섬세하고, 자주색·분홍색·주황색 등 화려한 색을 띠고 있어 이를 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 포엽은 꽃이나 꽃대를 둘러싸고 있는 ‘잎’이다. 실제 꽃은 각 포엽의 중심부에 올라오는 원통 모양의 꽃부리 끝에 피며, 대개 흰색이다.
부겐빌레아는 남미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열대지방이 원산지로 온난한 기후에서는 연중 내내 꽃을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노지 월동이 불가능해 따뜻한 온실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교배가 쉬워 품종이 다양하고, 재배 난이도는 높지 않은 편이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가지치기만 가볍게 해주면 풍성하게 키울 수 있어 더운 지방에서는 정원 울타리나 벽을 타고 자라도록 가꾼다. 화분에서는 물을 적게 필요로 하고, 정원에서는 가뭄에도 잘 견딘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부겐빌레아는 모든 기도의 정원에 잘 어울리지만, 국내에서는 절화로 소비되지 않아 전례꽃으로 사용되는 일은 드물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삼위일체에 대해 질문하고 그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애쓴다. 사랑하니 그런 것이다. 사랑하면 계속 궁금한 게 생기고, 더 알고 싶어지고,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그리고 부겐빌레아의 꽃대·포엽·꽃이 어떤 원리로 3개씩 반복되느냐고 묻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 삼위일체의 신비도 있는 그대로 믿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랑의 일치를 바라보려 노력한다.
[교회상식 더하기] (21) 교회도 ‘생일’이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상에 드러난 교회의 탄생
- 교회가 공적으로 드러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오순절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탄생일로 여겨진다. 엘 그레코의 <성령 강림>. 위키미디어
사람들은 태어난 날, 생일을 특별하게 여기고 기념합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학교의 생일은 개교 기념일, 기관이나 단체의 생일은 설립 기념일로 부르며 해마다 챙기곤 하지요. 교회도 생일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인 ‘성령 강림 감사송: 성령 강림의 신비’를 통해 “오늘 성령을 가득히 내려 주셨으며 성령께서는 새로 세워진 교회와 모든 민족들에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세워진 교회’는 라틴어 ‘nascentis Ecclesiae’를 옮긴 말로, 직역하면 ‘태어난 교회’입니다. 오늘, 즉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회가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순 시기가 ‘40’을 의미하듯 오순절도 ‘50’을 뜻합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50일 후에 열리는 이 오순절은 보리와 밀을 수확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확 감사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파스카 축제 뒤 오순절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전례력에서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50일째가 되는 주일을 성령 강림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성령 강림 이전에는 교회가 없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그때는 교회가 아니었다는 건가요?
물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교회를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3항)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제자들을 뽑아 사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등 모든 활동을 통해 교회를 준비하고 세우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구원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써 교회가 태어났다고 설명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63~766항 참조)
하지만 교회의 탄생은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성령 강림이 이뤄진 오순절에 “교회는 많은 사람 앞에 공공연히 나타나, 설교를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면서 “실제로 성령 강림 날부터 사도행전이 시작됐다”고 강조합니다.(「선교교령」 4항) 교회가 성령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 가까이 나아”갑니다.(「교회헌장」 4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성상 선교적”이라며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교회를 파견하시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삼도록 하셨다”고 강조합니다.(767항) 교회의 생일인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교회가 과연 ‘선교적’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55) 모든 신자의 성덕 실천, 「교회헌장」 제41항
「교회헌장」 제41항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덕 실천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먼저 모든 신자가 세상과 교회 안에서 생활하고 직무를 수행하면서 “하나의 성덕”을 닦는다고 말합니다. 신자 모두는 각자가 받은 고유한 은총과 임무에 따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을 흠숭하며,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여 희망과 사랑 속에서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교들은 영원한 대사제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봉사 직무를 거룩하고 기쁘게 겸손하고 용기 있게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성화를 이룹니다. 그들은 성사의 은총으로 기도하고 설교하며 성찬례를 봉헌하고, 주교로서의 배려와 봉사를 통하여 완전한 사랑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모범으로 교회는 성덕으로 인도됩니다.
신부들도 영원하고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교의 임무를 나누어 받아 직무를 수행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사제적 친교의 유대와 온갖 영적인 보화로 풍요로워져 모든 이에게 하느님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 전체와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성찬례를 봉헌하며, 이를 통하여 더 높은 성덕에 올라 교회에 위안을 줍니다. 특별히 교구 사제는 자기 주교와 결합하고 협력하여 자기 성화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봉사하는 부제들은 온갖 허물에서 자신을 깨끗이 지켜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신자들을 위해 좋은 것을 마련해야 합니다. 주님께 뽑혀 주교의 감독 아래 봉사 직무를 준비하는 부제들은 그들의 고귀한 선택에 맞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불타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닦습니다. 성직자들과 함께 하느님께 선택된 평신도들은 사도직 활동에 헌신하여 주님의 성화 소명에 응답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부부와 부모는 충실한 사랑으로 평생 은총 안에서 서로 돕고, 자녀들을 교회의 교리와 복음적 덕행으로 교육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웃에게 사랑의 모범으로 서로 형제 관계를 이루고, 교회의 증인이요 협력자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배우자를 잃었거나 미혼인 사람들도 각자의 고유한 방법으로 교회의 성덕과 활동에 이바지합니다.
노동하는 이들은 인간다운 노동으로 자신을 완성하고 온 세상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노동 그 이상의 높은 성덕에 이르게 됩니다. 고통 중에 있거나 박해를 받는 사람들도 세상 구원을 위하여 수난하신 그리스도와 특별하게 결합하여 있음을 알고,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신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한다면 자신의 생활과 직무 수행을 통해서 훌륭한 성덕에 이를 것입니다.
[교회의 언어] 다바르와 λόγοϛ(로고스, 히브리어&그리스어)
히브리어로 다바르는 ‘말’이라는 뜻이고, 그리스어로는 이를 로고스라고 합니다. ‘말’은 본래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에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두 단어는 모두 ‘일’, ‘사건’이라는 뜻도 함께 지닙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바, 곧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는 분이십니다. 또한, 세상의 역사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역사를 살펴보면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그분이 말씀하시는 바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역사를 글로 엮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과 일을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전해 준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구약의 모든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과 같은 모든 사건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므로, 예수님 자체가 역사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왜 견진성사는 주교님께서 집전하시나요?
많은 신자들이 한 번쯤 품어 보는 질문입니다. 고해성사도, 병자성사도, 심지어 세례성사조차 사제가 집전하는데, 왜 유독 견진성사만은 주교님께서 직접 오시는 것이 원칙일까요. 그러나 이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견진성사의 깊은 의미와 함께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더 넓은 성찰 앞에 서게 됩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와 견진은 본래 하나의 흐름 안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가 새 신자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사도적 전통 안에서 견진성사의 기원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신자 수가 늘어나자 현실적 필요에 따라 세례와 견진은 분리되었고, 세례는 각 지역의 사제가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끝내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 있었습니다. 새 신자가 단순히 ‘이 본당의 일원’이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보편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견진성사만큼은 가능한 한 주교님께서 직접 집전하시는 전통을 오늘까지 이어 왔습니다.
주교님의 집전으로 ‘보편 교회 안에서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주교님의 자리가 단지 교구를 운영하는 관리자나 높은 직위의 성직자를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교님은 사도들의 후계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사명과 권한이 안수와 계승을 통해 오늘날까지 살아서 이어져 내려왔고, 그 계승의 가시적인 표지가 바로 주교직입니다.
그러므로 주교님께서 견진성사를 집전하시는 것은 단순히 행사의 격을 높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견진을 받는 이가 사도들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와 온전히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표지입니다. 견진성사는 개인이 신앙 결심을 하는 자리에 그치지 않으며, 성령 안에서 교회 전체와 더욱 깊이 결합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흔히 견진성사를 ‘가톨릭판 성인식’ 정도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은 훨씬 더 깊은 곳을 가리킵니다. 견진성사는 성령께서 우리를 더욱 굳세게 하시어, 세상 한가운데서 신앙을 증언할 힘을 주시는 성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언제나 주기 위한 것”이며, 성령께서는 처음부터 우리가 “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게 하려고” 오신다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주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답 중 하나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여러분께 그대로 전해 드립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심을 기억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며, 성령 안에 머물 수 있게 되길 희망해 봅니다.
우리는 견진성사 안에서 성령과 평화를 받습니다. (견진성사가 진행되는) 미사 안에서 우리는 서로 평화를 나누죠. 이것은 조화를 뜻하고, 사랑을 뜻하며, 평화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는 밖으로 나가 서로 험담하기 시작합니다. 남을 흉보기 시작합니다. 뒷말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험담은 전쟁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힘 안에서 평화의 표징을 받았다면, 우리는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혀로써 성령께서 이루신 평화를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불쌍한 성령께서 우리가 하는 험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을 다시 하셔야 하는지 모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험담은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을 파괴합니다. 제발, 험담을 멈춥시다! 여러분이 성당을 나설 때, 받은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험담으로 그 평화를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2018년 6월 6일 일반 알현 중)
[가톨릭 교리] 희망의 또 다른 이름, 인내
인터넷과 핸드폰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불편하고 따분한 삶일 것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직 인터넷이 완전히 보급되지 않았고 핸드폰도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지루하지도 따분하지도 않았습니다. 예고 없이 친구 집에 찾아가 벨을 눌렀고 많은 시간을 밖에서 뛰놀았습니다. 복사단 형들과 축구를 하다가 조금 다치기도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집 열쇠가 없어 서성이다가 이웃집에 머물렀고, 어머니가 주신 음식을 나누고자 옆집의 벨을 서슴없이 누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를 의심하지 않았고 차단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같은 시간 동일한 TV 프로그램을 보고 유행어를 따라 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한껏 상상력을 펼쳤습니다. 알고리즘 추천이 없었지만 즐거운 일이 끊이지 않았고, 셀카를 찍을 수 없었지만 그 시간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스마트폰을 켜면 끝없이 영상이 흘러나오고, 짧은 숏폼 영상은 몇 초마다 새로운 장면과 자극을 제공합니다. 음악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게임은 즉각적인 보상을 줍니다.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이미지와 정보, 감각적 자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대인들을 바라보면 오히려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오래 마음 아파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오래 사랑하거나 기다리는 일에도 점점 서툴어지는 듯합니다.
사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느리고 조용한 가운데 찾아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기다림 속에서 자라고, 우정은 긴 시간의 신뢰 안에서 깊어집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소음과 흥분이 아닌 침묵 가운데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자극에 익숙해진 우리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조용한 시간을 무료함으로 여기며, 혼자 있는 시간을 불안해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과도, 타인과도, 하느님과도 멀어집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어려움도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씨앗이 어두운 흙 속의 시간을 견뎌야 싹을 틔우듯, 인간 역시 견디고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더 성숙해집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참아낸 시간, 실패와 상실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흘린 눈물, 묵묵히 하루를 살아낸 인내는 결국 인간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역시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고통 그 자체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견디어 낸 고통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마침내 희망으로 이끕니다. 그렇기에 인내는 단순히 괴로움을 버티는 일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기쁨을 끝까지 믿으며 걸어가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