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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신약 외경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사람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5|조회수37 목록 댓글 0

[신약 외경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사람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으며 주님의 부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네 복음서 저자도 같은 마음인지 부활 순간의 상황보다는 발현 이야기 곧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이야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교부 문헌과 외경 문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요?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신약성경

부활하신 주님의 첫 목격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네 복음서가 제공합니다. 마르코(16,9)와 요한 복음(20,14-18)은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신 것으로 전하는데(28,1-9), 다른 마리아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천사가 여인들에게 나타나 부활 소식을 전해줄 따름이고, 주님이 직접 여인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첫 목격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24,15) 혹은 시몬(24,34)이었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만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마르코, 요한),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마태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혹은 시몬’(루카)이었다는 것입니다. 의아하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어머니를 만나셨다고 명시한 경우는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 문헌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이 어머니에게도, 심지어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부류는, 마태 28,1-9에 언급된 다른 마리아가 어머니 마리아라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어머니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류는 주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생긴 데는 마르 16장이 한몫했습니다. 마르 16,6에서 주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천사가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하고 일러주는 장면입니다(참조: 루카 20,6). 이 말에서,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찾아가신 뒤라는 전승이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어머니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다는 믿음이 시작된 것은 적어도 2세기경부터였습니다. 네 복음서를 통일시켜 하나의 책으로 만든 2세기의 한 외경 복음서(=디아테싸론, ‘네 복음서를 관통하여라는 뜻)에는 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마리아가 어머니 마리아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마리아도 어머니 마리아였다는 논리가 됩니다.

4세기의 암브로시우스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어머니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고 명시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당시 밀라노 주교였던 그는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보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보았고, 믿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동정성3.14). 두 마리아가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어머니는 확신으로, 막달레나는 흔들림으로 반응(참조: 요한 20,14)했다는 것입니다.

5세기의 라틴어 서사시 파스카 찬송은 부활하신 주님이 어머니에게 처음 발현하셨다는 전승들을 취합하여 아름다운 시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주로 활동한 세둘리우스는 파스카 찬송5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어머니에게 처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마리아, 어머니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간직한 채 평생 동정으로 남으신 분! 주님께서는 빛 가운데 환히 그녀의 눈앞에 다가서시어, 당신 자신을 처음으로 드러내셨네. 그리하여 예전에 오시는 분의 통로였던 선하신 어머니가 이제는 위대한 기적들을 널리 알리며, ‘돌아오시는 분의 증인도 되셨네”(5.361-364). 주님 강생의 통로이셨던 어머니가 부활하신 주님의 첫 증인, 부활 소식의 첫 선포자도 되셨다는 것입니다.

5세기 외경 가말리엘 복음서도 주님이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발현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빈 무덤을 보고 슬퍼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분을 보고 정말로 일어나셨군요! 내 아들, 내 주님! 정말로 일어나셨군요!”하고 외칩니다. 이에 주님은 빨리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나의 부활을 선포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9-11). 가말리엘 복음에서도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이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릴 사명을 맡게 됩니다.

성화와 이콘들

부활하신 주님이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는 믿음은 다양한 성화나 이콘을 통해서도 표현됩니다. ‘카이레테 이콘이라고 불리는 이콘은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들에게 처음 나타나신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리스어 카이레테는 천사들에게서 주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도중에 만난 주님이 건네신 인사말입니다. ‘기뻐하여라라는 뜻으로 평안하냐!’, ‘안녕하냐!’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카이레테 이콘에 등장하는 여인들 가운데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그리스어 어머니의 약자 ΜΡ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서양 미술에서는 주님이 어머니 마리아와 단독으로 만나시는 장면들을 표현한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는 줄곧 다양한 글과 그림을 통해 어머니 마리아가, 혼자서든 다른 여인들과 함께든,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으며 그리하여 어머니도 부활의 증인이 되셨음을 선포해왔습니다. 이 이야기와 그림들은, 주님이 이 세상에 처음 오실 때 가장 먼저 만나신 사람도 어머니, 십자가상에서 마지막까지 보신 사람도 어머니였으니, 죽음에서 되살아나셨을 때도 어머니를 가장 먼저 만나셨으리라는 신학적 추론과 아들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잘 아셨을 주님이 당연히 어머니부터 찾아가셨으리라는 인간적 상상이 합해진 결과물입니다.

 

 

 

 

[가톨릭 교리]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바오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

예전에 튀르키예와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 코스는 당연히 사도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르는 순례였고, 사도 바오로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순례하는 내내 사도 바오로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그분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묵상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분입니다. 신약성경 전체 27권 가운데서 흔히 바오로 서간이라 부르는 서간은 13권으로, 신약성경 거의 절반이 바오로 사도의 서간입니다. 신약성경 중 복음서 4권과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묵시록을 제외하면 21권이 서간인데, 그중 바오로 서간은 거의 3분의 2입니다. 물론 13권 모두 바오로 사도가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닙니다. 대략 13권 중 7권이 직접 저술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어떤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한다면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외엔 어떤 것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분이었습니다. 본래 유다인 박해자이자 바리사이파였는데, 회심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바오로의 삶은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리사이로서 정통 유다교에 충실했으며,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까지 한 바오로가, 유다교 신념에 그토록 깊이 빠져있던 인물이 그렇게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이방인을 멸시하는 유다인 전통을 철저하게 지키던 바리사이가 어떻게 이방 민족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21 공동번역)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삶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살았던 분이 사도 바오로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모든 것을 거저받았음을 강조합니다.(2코린 3,1-4,6 참조) 그리고 복음이라는 엄청난 보물에 비해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2코린 4,7-5,10 참조)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밝히는 모습은 구약성경에서도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탈출 4,10) 예언자로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자신의 말솜씨가 서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는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시는 소명은 타고난 자질보다 무능력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판관으로 부르심을 받은 기드온은 자신이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한 가문 출신임을 고백했고(판관 6,15 참조), 아모스는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었으며(아모 7,14 참조), 예레미야는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변명했고(예레 1,6 참조), 이사야는 자기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저항했으며(이사 6,5 참조),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의문을 제기했으며(루카 1,34 참조), 주님께 떠나달라고 간청했던 베드로는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라고(루카 5,8 참조) 고백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은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했기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몸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 사흘 동안 보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극적인 체험 후 사울은 사도들과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을 선포합니다. 이후 1차 선교여행 때부터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사도 13,9). 사도 바오로라는 이름은 후대에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 이방인들의 사도, 열정적인 선교자, 불굴의 증거자로 기억됩니다.

보잘것없는 한 인간이 하느님의 훌륭한 도구로 바뀌는 결정적인 요인은 당연히 은총입니다. 그 은총은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넘치도록 주어졌습니다. 바오로는 사도직에 부르심을 받은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1코린 15,10)라고 선언했습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Non mea, sed Tua!)

열정적인 주님의 사도인 바오로를 비롯해 우리가 성인으로 기리는 분들에게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보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대로 믿었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은 결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이 언제나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 겟세마니에서도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non mea, sed Tua)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기리는 분들이 위대한 이유는 그들에게만 어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언제나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마태 6,33)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12명의 사도들은 물론이고 사도 바오로 역시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했고, 예수님처럼 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란 만일 어딘가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그곳에 가고, 한 사람도 없으면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그곳에 가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살면 가능합니다. 그런 사람은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것도 그 밖에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교회상식 더하기] (18) 영혼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영과 육의 단일체따로 떼어 볼 수 없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영혼이 등장하곤 하는데요. 보통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종종 영혼을 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곤 합니다. 교회에서도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가르치는데요. 그렇다면 이 영혼, 영화에서처럼 보는 것도 가능할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영혼은 영화에 나오는 영혼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먼저 비슷한 점을 보자면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고 인간 창조의 장면을 전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하느님이 불어넣어 주신 영혼을 통해 생명력을 얻게 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각 사람의 영혼이 부모들이 만든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366, 이하 교리서)

이렇듯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교리서 363)을 가리킵니다. 영혼이 육체에 생명을 깃들게 하고, 육체는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면, 인간이란 사실 영혼만 중요하고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조건을 통해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자기 자신 안에 모으고 있다고 육체의 중요성을 말합니다.(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14)

육체가 살아있는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육체가 없는 영혼도 온전하게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 곧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개별 심판으로 연옥이나 천국이나 지옥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교리서 1022항 참조) 그리고 죽음으로 사람의 육신은 썩게 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느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된 그 육신과 다시 결합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교리서 997) 죽은 이의 영혼은 다시 육체와 결합해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곧바로 연옥·천국·지옥에 이른다고 하니, 영화와는 달리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없습니다. 또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라면 육체와 단일체를 이루고 있을 테니 영혼만 따로 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은 육화된 영, 즉 육체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영혼이요, 불멸의 영을 부여받은 육체이기에 통일된 전체로서 사랑할 소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교황 권고 가정 공동체11) 영혼과 육체가 아주 긴밀할 뿐 아니라 영혼은 육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겉모습, 일부분만이 아니라 그 겉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영혼 전체를 바라보려 노력한다면,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을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 성령] 말씀과 숨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나는 아버지께 청할 것이며, 그분은 너희에게 다른 보호자를 주실 것이다”(요한 14,1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은 성부께 성령청원기도를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드님의 이 간청에 따라 오순절에 보호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어지십니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육체를 지닌 분이 되신 것은, 인간이 성령을 지닌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시어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선물,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지닌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령이 보내지신다면, 그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유일한 목적은 바로 우리를 외아들인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지신 사랑이시라면, 그 사랑의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이 숨결이자 공기와 같으시다면, 그 숨과 공기가 전달하는 대상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입에서 나가는 , 언제나 생명의 숨결과 함께 밖으로 나오고, ‘공기의 진동이 없이는 다른 이에게 전달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주어지는 것에는 단 한가지의 목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있는 것입니다. 말이 생명력을 지니고 힘을 지니기 위해서는 생명의 숨이 말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숨은 말을 전달한 후 사라집니다. 전달자가 자기 자신을 과시하면, 그가 전달하는 내용이 전달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전달됩니다.

이것이 성자는 성부를 드러내고, 성령은 성자를 드러내지만, 성령은 그분을 드러내는 분이 없이 신비로운 분으로 영원히 남는 이유입니다.

성찬례에서도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라는 사제의 성령청원기도는 성령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도록 봉헌물 위에 내려오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 위에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체를 받아 모신 우리 위에도 내려오시어 우리가 성찬례에서 받아 모신 바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동방교회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는 이를 잘 표현합니다. “저희와 이 예물들 위에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시어당신의 성령으로 그것들을 변화시키소서.” 성 니콜라오스 카바실라스는 이 성찬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어 진흙이 왕의 실체로 변화된다고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우리가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임금이신 분의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말입니다.

용광로에서 쇠를 불로 녹이는 것은 단순히 쇠를 녹이는 것에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쇠를 녹이는 것은 새로운 형상으로 그것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용광로 안의 사랑의 불로 우리를 불사르시어 우리를 새로운 형상, ‘하느님의 외아들의 모습으로 변모시키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숨이자 사랑이신 성령께서는 이처럼 언제나 아드님만을 위하여 계십니다. 이 거룩한 불로 타올라, 하느님의 외아드님의 모습으로 변모되도록 성령 안에서 살아갑시다.

 

 

 

[교회의 언어] Deacon (부제, 영어)

 

오늘 제1독서는 부제직의 기원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날로 늘어가자 새로운 봉사자가 필요해졌습니다.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을 찾아냈고, 모든 공동체가 동의하자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초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오늘날 부제들은(Deacons) 성품을 받은 성직자로서 여러 가지 봉사 직책에 참여합니다. 성찬례 때 주교와 사제를 보좌하고 성체를 분배하고, 혼인을 주례하며, 복음을 선포하고 강론하며, 장례식을 거행하고, 여러 자선 사업에 헌신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570)

부제직의 기원을 묵상하면서 교포 사목지 성당에서 청년 캠프를 준비하던 생각이 납니다. 한국어가 편한 유학생 그룹과 영어가 편한 2세 그룹이 갈라져 있었는데, 2세 그룹이 소외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1.5세 신학생이 공지 사항을 한글과 영어로 게시하자 서로 소통의 문이 열렸습니다. 아마도 비슷한 상황이 초대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그리스계 그룹과 히브리계 그룹이 있었고 문화적 차이와 언어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제들의 봉사 덕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봉사 직분은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문, 마음의 문을 여는 일입니다. 일곱 부제들의 봉사로 교회가 더 활기차게 성장했듯이 여러분의 봉사로 본당이 더 활기차게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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