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부활(復活)'이란 단어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17세기 기적 의미하는 ‘부생’(復生)에서 ‘부활’(復活)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부활(復活)’이라는 한자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 ‘부활’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됐으며, 이전엔 어떻게 묘사했을까?
‘부활’은 본래 그리스도교와 무관하게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 고대 문헌에서 이미 ‘다시 살아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던 말이었다. 16세기 말부터 중국 선교에 나선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교리 용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현재 ‘부활(復活)’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용례 중 하나는 1616~1618년경 예수회 판토하(방적아) 신부와 디아스(양마낙) 신부가 공동저술한 「천주야소수난시말(天主耶穌受難始末)」이다.
「천주야소수난시말」은 1610년경 판토하 신부가 쓴 「방자유전(龐子遺詮)」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그런데 「방자유전」에서는 ‘부활’ 대신 ‘부생(復生)’이라는 표현이 일관되게 등장한다. ‘부생’에서 ‘부활’로의 전환은 디아스 신부의 개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생’은 마태오 리치(이마두) 신부가 1603년 간행한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도 확인되는 용어다. 하지만 이때는 주님 부활을 가리키기보다는 죽은 이를 되살리시는 기적 등을 지칭하는 데 사용됐다. 당초 「천주실의」는 주님 부활을 직접 서술하지 않고, ‘33년 동안 널리 교화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간략히 언급한다. 당시 유교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 전략 속에서 의도적으로 절제한 결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1584년 발간된 ‘최초의 한역 서학서’ 「신편서축국천주실록(新編西竺國天主實錄)」에는 주님 부활이 직접 묘사된다. 루지에리(나명견) 신부는 이 책에서 부활을 일정한 단어로 옮기지 않고, ‘혼이 육신과 결합하여(以魂湊合其身) 되살아나는 것(回生)’이라고 풀어썼다. 이 설명은 1637년 이후 발간된 개정판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에서 ‘부활(復活)’로 대체된다.
중국보다 이른 16세기 중반, 예수회 선교사들이 진출한 일본에서는 부활을 ‘레스레이산(レスレイサン)’이라 불렀다. 이는 라틴어 Resurrectio(부활)에서 파생된 포르투갈어 Ressurreição의 음차다. ‘되살아나다’라는 뜻의 일본어 ‘蘇る(황천에서 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유래)’가 지닌 토속 신앙적 개념과 혼동을 피하고자, 당시 아시아 선교를 주도하던 포르투갈어 단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한편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기 약 1000년 전 동아시아에 처음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이들은 대진경교(大秦景敎, 이하 경교) 선교사들이었다. 과거 ‘네스토리우스파’라고도 불린 이들은 아람어의 방언인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동시리아 교회다.
동시리아 교회(경교)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단죄된 이후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안티오키아 학파’ 신학자 일부가 동로마 제국에서 쫓겨나 페르시아로 이동해 현지 신자들과 결합하면서 독자적인 교회로 발전했다.
635년 아라본(阿羅本, 알로펜) 주교를 비롯한 경교 선교사들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했으며, 이후 781년 「대진경교유행중국비」가 세워질 정도로 경교는 큰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 비문에는 주님 부활을 두고 ‘생명을 열어 주시고 죽음을 없애주셨다(開生滅死)’고 표현하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 감숙성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경교 문헌 「일신론(一神論)」은 부활을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다(從死起)’고 기록했다. 함께 발견된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은 훼손 때문에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에서 끊긴다. 이때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되살아나는 장면(마태 27,52)을 ‘득활(得活)’이라고 번역했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부활’이라는 단어에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오랜 고뇌가 녹아 있다.
[교회상식 더하기] (17) 우리도 ‘예언’할 수 있다?
삶으로 증거하는 하느님 말씀이 곧 우리의 예언
‘예언’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종말을 예언했다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생각날 수도 있겠고, 이스라엘에 닥칠 재앙이나 메시아의 탄생 등을 알린 예언자들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예언은 어쩐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바로 이 예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우선 예언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예언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豫) 말하는(言) 것’을 뜻하는데요. 성경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현재의 일을 과거와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등 예언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다뤘고,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을 동시에 하기도 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정치, 사회, 신학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처지나 상황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세대에 하느님을 대신해 말한 이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두고 “주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내렸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예언자들은 그저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위해 살고, 또 죽기까지 하면서 온 삶으로 하느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면서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그 신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때, 평신도이건 성직자이건 간에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을 통해 이뤄진다”고 설명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85항)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예언자로 부르심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예언자가 되기를 꺼렸거나 예언자적 자질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고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성경 속 예언자처럼 하느님 말씀을 환시로 듣거나 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위대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힘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며 영광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당신의 예언자직을 수행하신다”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권력으로 가르치는 교계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예언자직을 수행하신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35항) 일상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며 말로써, 또 행동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예언입니다.
혹시 이번 주 복권 1등 당첨번호나 주가 상승 종목을 미리 알 수 있는 예언이 아니라 실망스러우신가요? 하지만 우리의 예언은 복권이나 주식보다 더 중요하고, 더 필요한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사랑을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알려줍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52) 평신도는 세상의 혼이다, 「교회헌장」 제38항
「교회헌장」 제4장 ‘평신도’는 제38항에서 ‘평신도가 세상의 혼’이라는 언명으로 마무리됩니다. 공의회는 먼저 평신도가 “세속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평신도의 사명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이 그리스도론적 차원에서 주어지듯이 교회의 구성원인 평신도의 사명 역시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됩니다.
평신도는 공동체적으로 함께 또 개인적으로 저마다 맺는 “영신적 열매”를 통해서 세상을 기릅니다. 이 영신적 열매는 갈라 5,22-23에 나오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가리킵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덕목들을 세상에 전하고 실천하여 세상 전체가 이 열매를 누린다면, 어느 개인이나 개인이 속한 사회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욕망은 사라지고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크고 작은 전쟁도 그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성령을 거스르는 일들이 참으로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기 전에 갈라 5,19-21에서 육의 행실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등은 성령의 열매를 거부하는 행위들입니다. 세상을 파괴로 몰고 가는 것, 특히 경제 논리를 최우선적 가치로 삼는 물질의 우상 숭배, 이웃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이기심과 적개심, 그것으로 인한 분쟁과 분열과 분파가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 일상생활 속의 시기와 질투와 방탕 등은 세상에 대한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거꾸로 알려줍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마태 5,3-9의 ‘참행복’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생명력을 얻는 그 정신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정신의 원천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입니다. 평신도들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알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공의회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간」의 유명한 말씀을 인용하며,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라틴어 원문을 직역하면 ‘몸 안에서 영혼이 그러하듯,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해야 한다’입니다. ‘몸과 영혼’의 비유는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표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징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제4장 ‘평신도’에 대한 가르침을 맺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서 세상의 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언어] 시나이와 셔네(떨기나무, 히브리어)
모세는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갑니다.(탈출 3,1) 호렙은 ‘버려진 것’, ‘폐허’, ‘광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산에서 모세는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로 떨기나무는 셔네라고 하는데, 광야의 떨기나무는 바짝 말라 조그만 불씨에도 타 없어져 버리는 그런 나무입니다. 바로 이 단어에서 시나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호렙 산과 시나이 산은 같은 산입니다. 모세는 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엘리야도 이 산으로 가서 하느님을 만나는데(1열왕 19,9), 하느님은 왜 버려진 땅, 타 없어져 버리는 그런 산에 머무시는 것일까요? 사실, 광야의 떨기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조그만 불에도 타서 없어질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탈출 3,2에서 주님께서는 불꽃 모양으로 그들 안에 머무시지만, 그들을 태워 없애지 않으십니다. 이 모습은 주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떨기나무와 불꽃의 관계임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후 성경 이야기는 모두 불꽃이신 하느님께서 떨기나무를 태워 없애지 않으시고 그들 안에 머물고자 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떨기나무임을 받아들일 때 거기서 비로소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 전쟁과 평화
4월 초, 이란 공격이 임박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SNS 계정을 통해 “이란이라는 문명 전체가 오늘 밤 사라질 수도 있다.”는 초강경 발언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는 “한 민족 전체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은 진정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면 비판하셨습니다. 이후 트럼프 정부는 “교황이 외교 정책에 대해 처참할 정도로 무능하고 범죄(핵 문제)에 너그럽다.”라고 비난했으며, “급진 좌파에 영합하는 정치인이 되지 말고 본업에나 충실하라.”고 공격했습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교황청 대사에게 아비뇽 유수를 거론하며 교황청이 미국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과거 프랑스 왕정이 교황권을 굴복시켰던 것처럼 물리적 ·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협박성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한편 미국의 국방장관은 펜타곤의 예배에 참석해 시편 58편의 구절을 인용해 다음의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악한 자들의 이빨을 부러뜨리시고, 그들을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날려 버리소서.”
이 모든 사건과 관련해서 레오 14세 교황님께서는 단호하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트럼프 행정부가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어둠(전쟁)에 징집되지 않으십니다.”, “저는 정치인이 아닌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복음은, 평화를 이루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교황님의 이러한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핵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을 교황이 비판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재의 국제 분쟁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한 전쟁의 조건은 다음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정당한 이유, 합법적 권위, 올바른 의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이를 고려했을 때 다른 외교적 수단이 아직 존재했었다는 것, 국제 질서 및 경제와 중동의 이웃나라와 민간인의 피해가 이익을 압도한다는 것, 성공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라는 판단을 교회는 내린 것입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정의로운 질서의 회복이 아니라, 강대국의 ‘통제 욕망’에서 비롯된 분쟁이라는 것이 교회의 결론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특정 국가의 핵 보유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다만 핵 확산을 막는 유일한 길은 ‘압도적인 폭력’이 아니라, ‘국제법에 근거한 성실한 외교와 대화’라는 것이 확고한 입장입니다. 이에 교황님께서는 2026년 3월, 각국 지도자들에게 “죽음의 프로젝트(핵 개발 및 전쟁 계획)를 포기할 용기를 가질 것”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지속됩니다. 피해자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누군가 복수의 칼을 갈고 그렇게 또 전쟁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피해자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울부짖습니다. “평화란 전쟁 무기의 균형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신뢰로써 확립된다.”, “정의와 반대의 길을 가면서 진리 위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런 평화는 다만 공허한 언어에 불과할 것이다.”(지상의평화 113항, 167항)
[교회상식 더하기] (16) ‘혼배’는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다?
혼배,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둘이 아닌 한 몸’의 신비
성당에서 ‘혼배(婚配)’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하고 한자이다 보니 일반적인 용어처럼 느껴지는데요. 사실 이 말이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시나요?
아시는 것처럼 혼배는 ‘혼인’을 뜻합니다. 물론 조선시대나 옛 중국 문헌 등에 ‘혼배’가 등장하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혼배’라는 단어는 주로 신자들이 사용합니다. 여러 국어사전을 살펴봐도 ‘혼배’는 가톨릭 용어로 분류됩니다. 현재 전례나 교회 문헌에서는 혼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만, 신자들의 일상에서는 여전히 혼배미사, 혼배성사, 혼배공시 등으로 자주 쓰입니다.
혼배는 신앙 선조들이 사용한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에서 온 표현입니다. 혼인, 결혼이라는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 있는데, 왜 혼배를 썼을까요. ‘혼(婚)’은 혼인을 뜻할 테니, ‘배(配)’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교요리문답」은 혼배의 특성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배합(配合)인 것과 또한 부부가 서로 갈리지 못함”이라고 말합니다. 배합, 즉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혼인의 단일성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혼배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혼인성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흔히 신자와 비신자의 혼인, 관면혼을 ‘관면혼배’라고도 부르는데요. 관면혼은 성사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신자들의 혼인은 성사로 이뤄져야 하지만, 교회법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면해 비신자와 혼인하도록 해주는 것이 관면혼입니다.
관면혼은 성사가 아니니 의미가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혼인의 제정자’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사목헌장」 48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혼인성사는 ‘한 처음에’ 창조주가 제정하신 부부 계약 자체의 성사”라고 강조하십니다.(「가정공동체」 68항 참조) 그러니 비록 성사는 아니지만 혼인이 지닌 의미는 같습니다.
그리고 혼인성사는 이를 완성해 줍니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교회의 신랑께서 혼인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 부부를 만나러 오신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그렇게 부부도 서로 자신을 내어주며 영원한 신의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지요.(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48항 참조) “성사의 은총은 부부의 인간적 사랑을 완성하고 해소할 수 없는 그들의 결합을 굳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의 길에서 그들을 성화”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61항)
혼인의 사랑은 배우자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모든 것을 온전히 다 내어주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이미 배우자에게 다 내어줬기에 ‘한 몸’이 되고,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그 모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