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88)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선택할 수 있는 감정 (상)
얼마 전 함께 사는 신부님들과 직원들에게 축복을 받은 새 차를 몰고 생태마을을 나섰다. 내가 사는 성필립보 생태마을은 중앙고속도로 신림 IC에서 나와 산길로 40㎞를 더 들어가야 한다. 이 길은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기슭을 깎아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굴곡이 심할 뿐 아니라 낙석 위험이 있다. 한밤중이면 야생동물들의 출현이 빈번하고, 한겨울이면 블랙 아이스로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잦은 길이기에 항상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길의 위험성을 잘 알고 아직 적응도 하지 못한 새 차라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다. 출발한 지 30여 분이 흘렀을 때, 갑자기 내 눈을 의심할 광경이 벌어졌다. 전방 1시 방향에서 축구공만 한 돌이 산 위에서 떨어져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돌은 다행히 보닛 바로 앞에 떨어져 두세 조각으로 부서진 후 차 밑을 통과했다. 그러나 오른편 뒷타이어 안쪽이 찢어지고 스티어링 휠에 손상이 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보험회사에 연락해 견인 서비스를 기다리면서 이 사건을 되짚어 봤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왜 하필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라는 것이었다. 평상시 잘 일어나지도 않는 일 같았고, 누구나 경험하는 일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나는 이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도 처음으로 새 차를 끌고 나온 이 순간에 그 일이 발생했는지 의구심이 든 것이다.
하지만 훈련받은 뇌는 곧바로 이 사건을 “불행 중 다행”으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큰 인명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하지만 작은 차량 손상으로 마무리되어 참으로 감사한 사건이다. 만일 차를 조금만 더 빨리 몰았거나, 아니면 돌이 조금만 더 늦게 떨어졌다면 더 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축구공만 한 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질량과 낙하속도를 계산해 볼 때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만한 사고로 마무리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의 머릿속에는 ‘일상 중 불행’인 사건과 ‘불행 중 다행’인 사건,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불평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번갈아 가면서 발생하는 양가감정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불행’과 ‘다행’ 사이를 평행하게 오가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는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은 결국 어디에서 결말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 결과에 따라 이 사건을 체험한 나의 감정 역시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내 마음 안에 감사한 마음 보다는 불쾌한 감정이 먼저 일어났던 이유는 명확하다. 분명히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판단이 무의식적으로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난 후 찾아온다. 마치 번개가 친 후 몇 초 뒤에 천둥이 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이때 상황에 대한 해석과 판단, 즉 생각이 긍정적이면 감정도 긍정적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일 경우, 그 감정도 역시 부정적으로 흐르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건을 무의식적으로 부정적 사건으로 해석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에 이런 비슷한 유형의 사건사고를 겪을 때마다 일반적으로는 긍정해석과 긍정감정이 먼저 체험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와 반대로 부정해석과 부정감정이 먼저 발생했다. 분명 평소에 체험하는 사건사고와 다른 그 어떤 해석이 첨부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 단순히 죽을 뻔한 사고였다는 생각 그 이상의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5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89)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선택할 수 있는 감정 (중)
어느 정도 삶의 연륜이 쌓이다 보면 세상의 어떤 일도 자체로 불행하거나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격언은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늘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금 겪은 불행한 일이 오히려 다행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의 개인적인 사고체험은 사실 ‘불행 중 다행’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자동차가 생각보다 크게 손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무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는 ‘불행 중 다행’, 즉 은총을 체험한 것이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일상 중 불행’의 사건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불쾌한 감정이 먼저 떠오르고, 감사의 마음이 따라왔으며, 그 이후 부정적 감정과 긍정적 감정이 모두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사건에 대한 두 가지 감정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이 사건을 자연적 사건으로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었다. 자연적 사건이란 물리적 인과관계로 발생하는 현상으로서 인간은 말 그대로 운에 따라 특정 사건을 겪게 된다. 하지만 인격적 사건은 의식과 인격을 지닌 어떤 존재가 자유의지로 발생시킨 사건을 말한다. 즉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어떤 의지로 인해 발생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적 사건으로 불행한 사건을 겪게 되면, 처음 기분은 부정적이나 그 이후 점차로 회복의 과정을 밟는다. 왜냐하면 그 사건으로 부정적 감정이 올라왔다 하더라도 원한을 품거나 화를 낼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 맑은 하늘을 본 후 마음 놓고 출근을 했다. 그런데 오후에 갑자기 폭우가 내려 비를 흠뻑 맞았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재수가 없었다면서 처음엔 짜증을 낼 수도 있지만, 이내 그냥 지나가는 일로 잊어버릴 것이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하늘을 향해 화를 내고 자연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비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인격적 사건으로 불행한 사건을 해석하게 되면 아무리 긍정적인 해석을 하려 해도 부정적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인격을 가진 존재가 의지를 가지고 개입한 사건은 분명 그 책임과 보상을 물을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적 사건을 일으킨 대상을 향한 분노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더 이상한 것은 분명 그 대상을 향해 책임을 묻고 단죄를 하였으며 보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부정적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체험한 부정적 사건은 자연적 사건으로 해석될 경우 장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부정적 감정이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일이 인격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경우 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체험한 자동차 사고는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분명 자연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에서는 분명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깊은 감성계, 즉 변연계에서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은 것 같다. 분명 자연적 사건이라면 처음에 올라온 부정적 감정은 곧 사라져야 했다. 게다가 큰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감사의 마음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 감정들은 복잡했다. 무의식적으로는 이 사건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감사와 불만의 두 감정이 서로 병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이 사건을 자연적 사건으로 인식하면서도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어떻게 인격적 사건으로 둔갑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 사건에 누가 개입되었다는 것인가? 게다가 이렇게 쉽게 합리적 판단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12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0)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선택할 수 있는 감정 (하)
신을 믿지 않거나 영적인 교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우연으로 치부한다. 이들에게 행운과 불행은 그야말로 확률적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신앙인이나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매사를 다른 관점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신의 섭리를 찾거나 삶의 의미 혹은 지혜를 추구한다.
이 사고가 자연적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사건 안에 어떤 영적인 메시지나 의미가 담겨있는 인격적인 사건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사건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하느님께서 개입한 인격적 사건으로 느껴지면서 감사의 마음을 기도로 바칠 수 있었다. “우리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 가엾은 나를 구해주셨네. 정녕 당신께서는 제 목숨을 죽음에서, 제 눈을 눈물에서, 제 발을 넘어짐에서 구하셨네.”(시편 116, 5. 8)
하지만 의식보다 더 깊은 무의식 안에서는 “일상 중 불행”이라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감사한 마음은 다시 불만과 불평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의식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개입한 인격적 사건이라는 생각에 감사의 마음이 올라왔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개입된 인격적 사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평소 악령이나 마귀의 세력이 나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악령이나 사탄의 존재를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개인적 체험도 있을 뿐 아니라 선배 신부님들의 체험담과 수많은 역사적 기록들은 정확히 악령의 실체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제로 살아가면서 악령의 세력이 나를 해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느님께서 불러 세우신 사제라는 신원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스갯소리지만, 신부(神父)는 말 그대로 “귀신의 아버지”인데 누가 누굴 두려워한단 말인가?
이쯤 생각을 하게 되니, 결국 나의 부정적 감정은 근래에 나의 영혼과 심리상태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졌고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종종 “내가 잘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내 안에서 문득 튀어나올 때면, “아! 잠시 멈추고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 잘못 살고 있다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브레이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이 사건이 터졌다. 게다가 돌이 날아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그 누군가가 나를 향해 돌을 던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돌이 2시 방향에서 사선으로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그 누군가는 나에게 이제 그만 좀 일하고 영원히 쉬라는 말을 던지는 것 같았다.
낙석사건은 자연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이 사건을 하느님의 도움이 개입된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감사의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은 낙석사건 자체를 악한 세력이 개입된 인격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 결과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우리는 상황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감정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사도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 5,16-18)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1) 이대로 살 것인가, 다르게 살 것인가 (상)
60대 초반의 마태오 형제는 대인관계가 힘들다며 상담을 요청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꾸 피하는 것 같아 고통스럽다는 것이었다. 중년 시절까지만 해도 자신을 싫다고 떠나는 사람은 잡지 않겠다면서 자존심을 세우며 살아왔다. 하지만 환갑을 넘어 노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에 이르자 삶에 대한 회한과 후회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마태오 형제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면서 성격을 고치라는 충고를 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마태오 형제는 “나 자신이 이런 사람인데 뭘 고치라는 말이냐? 성격 탓하지 말고 내가 싫으면 떠나면 될 것 아니냐?”는 식으로 사람들을 밀어내곤 하였다. 그 결과 친구나 동료들은 하나둘 자신을 멀리하며 떠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남은 가족들조차 연락이 닿지 않아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격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사람들이 다 자신의 성격을 고치고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도 고치려고 노력은 많이 해보았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그냥 좀 나를 인정해 주면 안 되는가? 꼭 남에게 맞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말인가?”라고 하소연했다.
그렇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우리 모두는 외모는 물론이요 내면의 모습에서 늘 부족함을 느낀다. 열등감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처음엔 누구나 마태오 형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해 보기 위해 최선으로 노력해 본다. 하지만 쉽게 열등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점차로 좌절감에 빠져 스스로 노력을 그만두게 된다.
그러고 나면 마태오 형제처럼 “인생 뭐 있는가? 내 식대로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중년이 넘어가면서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달랬던 마음도 이내 시들어간다. 마태오 형제는 결국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실망과 후회를 통해 우울함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이즈음에 생겨난 특징이었다. 그러자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겸손하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태오 형제가 노년을 준비하면서 사제에게 자신의 속 깊은 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생애주기와 관련이 깊다. 젊은 시절엔 하느님과 이웃의 도움 없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혹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점차 자기 죽음을 예상하면서 삶을 조금씩 정리해 나가야 할 노년기에 접어들면 누구나 삶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변한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한다.
노년기에 이르면서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성격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다시금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하소연은 과거 자신의 성격적 문제를 인식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배경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의 의미와 관련된 소망이었다. 우리의 삶은 홀로 행복하고 홀로 만족하는 삶에서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와인을 혼자 먹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마태오 형제는 이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단순한 존재의 외로움을 넘어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태오 형제의 마음이 절절히 다가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3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2) 이대로 살 것인가, 다르게 살 것인가 (중)
마태오 형제처럼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성격(personality)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각자 자신만의 성격 개념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성격을 타고난 ‘기질(temperament/disposition)’이나 ‘성품(nature)’으로 이해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고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성품, 즉 천성이 어디 가겠냐는 것이다.
반면 현대 심리학이나 교육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성격이 환경이나 교육 혹은 특별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 ‘성향(propensity)’이나 ‘특성(character)’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들에게 성격이란 기본적으로 고칠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는 하나의 ‘습관(habit)’일 뿐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은 모두 잘못된 말이다. 성격이 고쳐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천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히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격에 대한 이 두 가지 개념 중 어느 것이 더 맞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사실 우리는 이 두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비율은 각기 다를 것이다. 성격의 타고난 기질과 학습된 성향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사람들은 각기 7:3 혹은 4:6처럼 나름대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하지만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성격을 온전히 선천적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대인관계에서 오는 성격적 어려움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무의식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은 화가 많고 울분을 삭이기 어려운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성향 때문에 가족은 물론 지인들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노력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냥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회갑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자 과연 이런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바뀔 수 없는 성격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이것은 분명 자신의 탓이 아니라 하느님 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감히 하느님을 탓하지는 못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탓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과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태오 형제는 결국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해왔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자신의 성격적 문제를 다시 한 번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는 원의를 표현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칼 융(Karl Jung)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개성화란 진정한 자신의 인격과 삶을 실현하는 것, 즉 진정한 자신(The Self)이 되는 자기실현을 말한다. 이제 마태오 형제는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은 욕구로 자신의 성격과 삶을 타인의 삶과 연계해서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마태오 형제가 자신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의미와 기쁨을 얻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자신의 문제가 타고난 성격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갈등은 사실 자신이 믿는 것처럼 타고난 ‘성격’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언뜻 보면 성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격이 아닌 자신의 ‘신념(belief)’ 때문이다. 신념, 즉 자기 생각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며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누구를 위해 자신이 바뀔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 생각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격을 바꿀 필요도 없고 그래서 억울할 일도 없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10일, 박현민 신부(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93) 이대로 살 것인가, 다르게 살 것인가 (하)
마태오 형제는 지금까지 자신의 성격적 단점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성격의 변화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자신은 물론 자신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일어났다. 마태오 형제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적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에게 변화만 요구했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마태오 형제는 내면의 깊은 외로움과 상처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점차로 자신의 문제가 성격(타고난 기질이라고 생각하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신념)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세상이 갑자기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가치와 신념도 그리 쉽게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성을 바꾸려 했던 지난 시절의 노력보다는 훨씬 더 쉬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은 마태오 형제가 사람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신념체계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된 질문이다. 이 형제처럼 대인관계가 불편할 뿐 아니라 스스로 분노와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을 해 볼 필요가 있다.
①타인이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화나 분노를 참기가 어렵습니까?
②매사에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야 마음이 편합니까?
③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고,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매사에 엄격한 편입니까?
④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등 주변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주는 편입니까?
⑤타인의 장점보다 결점이 눈에 잘 들어와 매사에 비판적입니까?
⑥자신의 생각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편입니까?
⑦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까?
⑧시간관념이나 돈 계산이 느슨한 사람을 싫어합니까?
⑨“당연히 ~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하면 못쓴다” 식의 말투를 잘 씁니까? ⑩부모로서(부모가 되면) 아이들을 엄하고 책임감 있게 키운다고(키우겠다고) 생각합니까?
마태오 형제는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엄격한 삶의 기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에게 비친 세상은 선(善)하기보다는 악(惡)하며,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보다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세상과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타인을 가르치거나 충고하게 된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사에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라며 오히려 자신을 비난한다. 자신은 옳은 말을 할 뿐인데 사람들이 꼰대라 하고 혹은 융통성이 없다고 비판하면 솔직히 화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자 어느덧 가족들도 떠나가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태오 형제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이 어린 시절 주입된 가치관임을 깨닫고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한 인지치료를 받게 되었다. 자신의 여러 생각들 안에 존재하는 “~하면 안 된다” “반드시 ~ 해야 한다”는 신념체계가 “그럴 수도 있다” “꼭 ~ 해야 할 필요는 없다”로 변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비판보다는 수용, 비난보다는 관용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미워했던 주변 사람들이 이해되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제야 마태오 형제는 자신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변화하는 그를 보면서 이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