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구원,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1516년 자신이 지은 소설의 제목인 《유토피아》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써, 이 단어의 뜻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입니다. 즉,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 내지 ‘존재하지 않는 지상낙원’을 일컫는 말입니다. 간혹 ‘이상향’(理想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반대말로 ‘디스토피아’(Dystopia)가 있는데, 이는 ‘지옥향’이나 ‘암흑향’이라 번역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1949년 출간된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에서 묘사된 사회, 즉 유토피아를 꿈꾸었으나,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통해 결국 폐쇄적으로 변해버리는 사회, 이런 사회를 흔히 디스토피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쉘 푸코는 이 두 개념을 근거로 해서 전혀 새로운 개념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제시합니다. ‘헤테로’(hetero)라는 단어는 ‘다른’, ‘이질적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접두사인데, 결국 이 새로운 단어는 고된 현실이나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고, 동시에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휴식과 위로를 제공해 주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명 휴양지나 놀이동산처럼 유토피아를 현실에 재현해낸 경우를 말합니다. 이 개념을 통해 그 철학자가 의도하는 바는 ‘유토피아’라는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 삶에는 그저 잠시의 위로와 위안을 주는 헤테로토피아가 존재할 뿐이고, 단지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헤테로토피아를 제공해 주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피정 프로그램이라든가. 사찰에서 마련한 템플스테이 등의 프로그램은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잠시의 위로와 위안을 제공해 줍니다. 따라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도원이나 사찰은 방문자에겐 헤테로토피아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에겐 유토피아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는 세속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방시킨 사람입니다. 수도원 공동체는 세속과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곳이고,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살며, 세속의 흐름과 권력을 거슬러 싸우고 있는 영적인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 전쟁에서 이기면 수도원은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디스토피아나 헤테로토피아가 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각자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가끔 우리는 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 앞에 이토록 침묵하고 계신가를 묻곤 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실 앞에서 그저 침묵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고 자연스레 묻게 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고통과 슬픔에 지친 사람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특히 무죄한 이들이 고통받는 상황도 자주 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그런데 세상에는 왜 이리 고통이 많을까요? 가끔 어린이 병동을 방문하여 어린아이가 통증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나 그 옆에 있는 젊은 부모의 모습을 볼 때면, 때로는 제가 알고 있는 신학 지식이 그 순간에는 아무 쓸모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게다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조롱하고 의심하는 것은 참아 견딜 수 있는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고통 중에 의심하고 힘들어할 때는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지금 겪는 고통을 통해 결국 더 큰 기쁨을 얻게 되리라는 위로의 말이나, 혹은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데 도움을 준다는 희망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중에 더 큰 기쁨을 얻기 위해 지금의 고통을 그저 참고 견디라는 말을 쉽게 하기도,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게다가 고통이 지속된다면, 아직 믿음이 단단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우리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품고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고 청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 앞에 하느님의 힘과 은총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고 있는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을 어떻게 하면 잘 갈 수 있을까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 진리, 생명’
‘인간의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가 하신 말씀인데, 이는 구약성경의 지혜서 5장 14절의 말씀, 즉 “(삶은) 단 하루 머물렀던 손님에 대한 기억”이란 구절에 근거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 삶이 얼마나 순간이고, 찰나(刹那)이며, 금방 사라지는 것인지 알려줍니다. 인간 삶이 속절없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 말씀은 동시에 하느님의 영원하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습니다.(시편 90 참조)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결국에는 인간에게 주어지고 실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 진리, 생명’입니다. 이분에게 우리 삶의 길과 목적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어떻게 진리를 만나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자유, 즉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요한 8,31-32 참조).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해 예수님 말씀을 자주 듣고, 머리와 가슴에 새겨야 하고, 무엇보다 그분 몸을 내 안에 모시고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힘으로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언가 하시도록 조용히 머물고 협조하는 것입니다. 때로 인간은 위대한 능력을 가진 것 같지만, 결국 자기 머리카락 한 올 검거나 희게 할 수 없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이며, 언제나 죽음을 앞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교회상식 더하기] (14)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부활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 기억하며 ‘주일’로 대치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주일, 즉 일요일은 휴일입니다. 그 유래를 물으면 많은 분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기 때문”이라고 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렛날’을 기억하는 날, 안식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십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탈출 20,8)라고 나옵니다. 성경은 ‘안식일’을 지키라 했는데, 왜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있을까요?
안식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날이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제정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성경은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5)라고 알려줍니다. 안식일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기리는 거룩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카’를 떠올리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희생제물이 되시어 성체성사로 파스카를 완성하신 것처럼, 안식일도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사실 안식일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빌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나 제자들의 활동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마르 2,27)라고 가르치시면서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부활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이 사건이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마태 28,1)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교회는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로서 이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가리킨다”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날이 모든 날 중의 첫째 날, 모든 축일 중의 첫째 축일, 주님의 날, 주일이 됐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74항)
안식일이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를 상기시키는 주일로 대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왔습니다. 십계명의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은 이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인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옛 질서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됐으니,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며 살아간다”며 “주님과 그분의 죽음으로 이날에 우리의 생명은 솟아나게 됐다”고 전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의 날, 여러분은 어떻게 새로 나고 계신가요?
[교회의 언어] Divine Fingerprint (하느님의 지문, 영어)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풍경 중에 제주도 주상절리가 있습니다. 뜨거운 용암이 급하게 식으면서 육각형 모양의 기둥이 생긴 해안 절벽입니다. 풍경을 바라 보고 있자니 뒤에서 한 젊은 부부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저걸 어떻게 만들었지? 자연이 만든 거다. 거짓말하지 마라. 저런 모양이 어떻게 저절로 생기니? 순간 고등학교 지구과학을 설명해 주고 싶은 유혹이 들었지만, 피정 중이라 침묵하다 돌아왔습니다.
‘육각형 기둥이 형성되었다.’ 영어로 해보면 “Hexagonal pillars were formed.” 이렇게 수동태를 쓰면 주어가 생략됩니다. 이게 하느님 창조와 섭리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됩니다. ‘그래서 누가 했지?’는 믿음으로 깨닫는 겁니다. 수동태를 쓰면 하느님이 주어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신비롭게도 하느님의 업적이 드러납니다. 마치 하느님의 지문이 비밀리에 남은 듯합니다.
또한 이것이 복음에서 부활을 이해하는 키워드입니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removed),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rolled up), 이런 표현을 신적 수동태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어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신비롭게도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그걸 보고 믿었다 합니다. 부활 성야에 세례 서약을 갱신하신 여러분의 영혼에도 하느님의 지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걸 인호라고 합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13) 사제직은 일 년에 한 번씩 갱신한다?
자격 유지 아닌 ‘사제의 첫 마음’ 기억하기 위한 예식
성주간 중 목요일,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아무래도 주님 만찬 미사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해마다 이날 신부님들이 사제 서약 갱신을 한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사제 서약 갱신식은 해마다 성주간 목요일 오전 각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되는 성유 축성 미사 때 이뤄집니다. 사제 서약을 해마다 갱신하다니…. 사제직도 면허처럼 갱신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는 걸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덜컥 신부님의 고용 안정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리 때 ‘성사’에 관해 잘 배운 분들이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례·견진성사와 마찬가지로 “성품성사도 지워지지 않는 영적 인호를 새겨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한 번 받은 성품성사를 다시 받는 것도, 한시적으로만 받는 것도 불가능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582항)
그렇다면 왜 성유 축성 미사 때마다 사제 서약 갱신식을 하는 걸까요? 바로 이날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제직을 우리에게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로마 미사 경본」 성주간 목요일 9항) 이날 사제들은 “성품성사 때에 했고 해마다 성유 축성 미사에서 갱신하는 엄숙한 서약”에 따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충실하고 열심히 거행”할 것을 다짐합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구원의 성사」 31항)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제사란 단 한 번에 완결된 유일한 제사 하나뿐입니다. 그 제사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제사를 통해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히브 10,14)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그분의 몸과 피를 바치도록 명하셨습니다.(트리엔트 공의회 「미사성제에 관한 교리와 법규들」 서론)
이렇듯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성찬례, 즉 미사는 십자가상에서 단 한 번 바쳐진 제사를 재현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이 유일한 예수님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지요.
사실 신부님뿐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보편 사제직’으로 예수님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편 사제직은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직무 사제직과는 다릅니다. 평신도들은 “성찬의 봉헌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0항)
신부님들이 사제 서약 갱신을 하는 성주간 목요일, 우리도 유일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우리가 수행하는 사제직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 보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교회의 언어] 아나빔 (히브리어)
아나빔은 ‘가난한 이들’, 혹은 ‘가련한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9장은 하느님께서 항상 아나빔들의 울부짖음을 잊지 않으시리라고 노래합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을 넘어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 곧 하느님께 영적으로 철저히 의탁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속한 이들이기에 하느님은 언제나 아나빔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시며, 그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시편 10,17) 그런데 칠십인 역 그리스말 구약성경은 아나빔을 프라에이스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온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두고 “온유하다.”(마태 11,29)라고 말씀하면서,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5) 여기서 온유한 것은 단순히 착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약속된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69,33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가난한 이(아나빔)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하느님을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 기운 차려라.”
[교회상식 더하기] (12) ‘예수님’ 이름만 불러도 기도가 된다?
‘예수님’ 이름 자체에 새겨진 ‘구원의 약속’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 기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이름(JESUS)을 부각시킨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가정성당의 문.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명소를 찾기도 하고, 신자들은 모범이 될 성인의 이름을 본명(本名)으로 삼습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이름이 중요하고, 또 이름이 그 사람에게 미치는 힘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교회도 “모든 사람의 이름은 거룩하다”며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58항 참조) 그런데 이 중요한 이름 중에서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리 2,9)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우리 주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에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우리의 신앙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에 관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고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에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거듭해 강조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쳤고, 병자를 고쳤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는다”(필리 2,10)고 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됐다”(1코린 6,11)고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한 14,26)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 기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 안에서 대부분의 기도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통하여’가 라틴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긴 합니다만, 1997년 주요기도문 개정 전까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기도’라는 기도도 있습니다. 동방교회에서 많이 바치는 기도인데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의 능력에 힘입어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짧은 문구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바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만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기 때문이지요.(요한 10,1-21 참조)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일단 “예수님”하고 불러보면 어떨까요? 예수님도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