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8)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평신도, 「교회헌장」 제34항
「교회헌장」 제4장의 제34항~36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제2회기까지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1964년 제3회기에 「교회헌장」의 최종안 작성 단계에서 추가된 부분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공의회는 제1회기에 제출된 「교회헌장」의 초안에 담기지 않은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가르침을 새로이 마련하여, 교회 구성원의 각 신분에 대한 장(章)들에 우선해서 제2장으로 넣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백성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대한 제2장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공의회는 제4장에서 하느님 백성인 평신도들이 그 세 가지 직분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의 사제직은 제2장의 10항과 11항에서 다룬 ‘하느님 백성의 보편 사제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곧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히브 5,5 참조) 단 한 번 당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고(히브 10,10 참조), 그 백성이 한 나라를 이루어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습니다(묵시 1,6 참조). 이에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도유로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어, 그들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께 신령한 제사를 바칩니다(1베드 2,5.9 참조). 공의회는 이러한 신약성경의 인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대사제시며 성령의 도유를 받은 하느님 백성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축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근거하여 공의회는 제4장에서 대사제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백성인 평신도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증거와 봉사를 계속하기를 바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그분의 성령으로 생명을 얻어 그분이 원하시는 좋은 일과 완전한 일을 하도록 재촉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사명에 평신도들을 결합하여, 그들에게 사제직의 일부를 맡기셨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평신도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영신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께 봉헌되고 성령으로 도유되어, 자신들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평신도들의 모든 일, 기도, 사도직 활동, 부부 생활, 가정 생활, 일상 노동, 심신의 휴식이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물”(1베드 2,5 참조)이 됩니다. 일상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모든 행위 안에 있는 이 영적 제물은 성찬례 거행 때 주님의 몸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됩니다. 동시에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은 어디서나 거룩한 경배자로서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렇게 봉헌되고 봉헌함으로써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교회의 언어] Cursillo (꾸르시요, 단기 교육과정, 스페인어)
꾸르실료(꾸르시요, Cursillo)는 ‘과정, 코스’를 의미하는 Curso에 축소형 접미사 ‘-illo’가 결합된 말로, 단기 과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꾸르실료는 대표적인 평신도 신심 운동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스페인 가톨릭 청년연합회는 대규모 산티아고 순례를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순례자들을 이끌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단기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꾸르실료 운동의 시작입니다. 1949년 성지순례를 잘 마무리한 이후, 스페인 마요르카 교구에서는 성지순례 지도자 양성과정이었던 꾸르실료를 복음화의 사도를 양성하는 교회 운동으로 발전시켰고, 이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40일이라는 단기 과정(꾸르실료)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더욱 복음화되고 더욱 뜨거운 마음으로 사순 시기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인사말을 외치며 모두 힘내십시오.
울뜨레야!(더 멀리 가자, Ultreia) ,
엣 수세야!(그리고 더 높이, Et suseia)
[가톨릭 교리] 이름을 부르지 않는 교회
얼마 전, 왜 교황님과 가톨릭은 독재자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비판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교회가 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때 효과가 클 것이며 호소력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황님들은 특정 정치 지도자들의 이름을 직접 지목하는 방식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교회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며 비판적인 의견을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유는 독재자에 대한 호의 때문이 아니라, 그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들과 교회 공동체가 즉각적인 보복과 박해에 노출될 위험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교회가 독재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옹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각 체제와 정책, 이념, 구조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고 직접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회칙 〈100주년〉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전체주의, 공산주의 체제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셨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벽을 세우고 다리를 놓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서구권의 이민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 밖의 환경문제, 핵문제, 현대의 전체주의 등에 대해서도 교황님들이 강하게 목소리를 내왔음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교황님들의 발언은 당시의 맥락과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어느 나라의 누구를 암시 혹은 겨냥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보다 직접적인 경우는 해당 나라의 국민들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구조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식이 과연 소극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황 비오 11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례적으로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쓰인 회칙 〈깊은 근심으로, Mit brennender Sorge〉를 발표합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여전히 히틀러의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나치 정권, 인종주의, 국가 우상화 등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이 회칙은 독일 전역 교회에 비밀리에 배포되었고 같은 날 독일의 모든 미사에서 낭독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나치 정권이 크게 분노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즉 교회는 특정 정치인을 공격하기보다는 정치의 도덕성을 평가함으로써 목소리를 냅니다. 그 목소리는 결코 침묵이 아니며 작은 목소리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서는 교회의 목소리에 그리스도인들조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교황님의 회칙과 가르침을 읽기에 오히려 좋은 환경이 되었음에도 교회의 말들을 당연한 것 혹은 이상적인 것이라고 여겨 가볍게 넘기기도 합니다. “신은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신의 계시를 마주할 인간이다.”라는 시몬 베유의 말이 더 의미심장한 요즘입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11)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를 받는다?
“주님 수난과 죽음 기억할 때” 매일 전대사 은총 열려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분이 본당 공동체와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전대사라고 하면, 희년에 지정된 순례지를 순례하거나 11월 위령성월 첫 주간에 묘지 등을 방문해 얻는 것을 떠올립니다. 올해도 프란치스코 성인 선종 800주년을 맞아 특별 희년인 ‘성 프란치스코의 해’가 선포되면서 성인과 관련된 성당을 방문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지요. 이렇게 전대사라고 하면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장소를 방문하는,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해야만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평소 다니는 성당은 물론, 어느 성당·성지에서도 가능하고, 심지어 사순 시기뿐 아니라 1년 중 모든 날에, 하루에 한 번 받을 수 있습니다.
교황청 내사원이 발행한 「대사 편람(Enchiridion Indulgentiarum)」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할 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고, 또 하나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로 전대사를 받으려면 우선 성당이나 성지 등에 합법적으로 설치된 14개의 십자가, 즉 14처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처에서 처로 이동하면서 바쳐야 합니다. 공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하는 경우라면 인도자만 이동해도 괜찮습니다.
또 교황님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실 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로 경건하게 참여해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 등으로 여건이 되지 않아 이마저도 어렵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경건한 독서와 묵상으로도 십자가의 길 기도와 같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십자가의 길 기도만 바친다고 저절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반 조건이 전제돼야 합니다. 일단 전대사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을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이 없는 상태여야 하지요.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부분 대사를 얻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판공이 있으니 이 일반 조건을 채우기도 좋지요. 그래서 ‘전대사 받기가 이렇게 쉬워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대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성인의 공로, 무엇보다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거저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고, 그분의 상처로 우리가 낫게 됐습니다. 성인들도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의 수난을 따르려 노력해 공로를 쌓았습니다.
전대사가 쉽게 남용돼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일은 전대사를 위한 다른 어떤 활동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꼭 전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사순 시기를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7) 평신도 사도직, 「교회헌장」 제33항
평신도들은 교회 전체를 표상하는 개념인 ‘하느님의 백성’ 안에 속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교회헌장」 제33항은 이러한 평신도들이 하느님 백성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교회 전통은 ‘부르심’ 곧 ‘성소’라는 말을 봉사 직무에 임명된 목자들이나 봉헌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 나아가 선교나 사목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공의회는 모든 평신도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렇게 창조주의 은혜와 구세주의 은총에서 받은 모든 힘을 기울여 교회의 발전과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신도 사도직’이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 곧 교회의 구원 사명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명은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평신도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그 사도직에 임명됩니다. 특히 성체성사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전해지고 자라나는데, 그 사랑이 모든 사도직의 혼입니다. 또한 평신도들을 통해서만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장소와 환경에서, 그들은 교회가 현존하고 활동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평신도들이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에 맞게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이며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교계 사도직에 참여하는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것입니다. 공의회는 「교회헌장」을 설명하는 보고서에서 평신도들의 ‘일반적 사도직’과 ‘위임을 통한(ex mandato) 사도직’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이 「교회헌장」 본문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33항 세 번째 단락은 교계의 봉사 직무에 대한 협력자로서의 엄격한 의미의 사도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필리 4,3과 로마 16,3이하의 예를 참조하며 사도 바오로와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던 협력자들처럼, 평신도들은 교계 사도직과 직접적인 협력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는 성직자의 부르심처럼 공적이며 법률적인 교회의 권한을 받은 사명에 대한 협력에 해당합니다. 또한 평신도는 교계와 함께 협력하는 것을 넘어서 교계로부터 “영성적인 목적”을 지닌 교회의 임무(munera)를 받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공의회는 언급합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빛나는 짐”(의무)을 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평신도들은 각자의 능력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교회의 구원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공의회가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의무와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교회의 언어] Potus non frangit ieiunium.(포투스 논 프란짓 이에이우니움, 라틴어) : 음료는 단식을 깨지 않는다.
12세기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사순 시기에 맥주를 마셔도 되는가?’라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사순 시기에 수도자들은 하루 한 끼 식사만 하면서 육체 노동을 했고, 영양 보충을 위해 맥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수도원의 맥주는 알코올 함량이 적어 술이라기보다 고칼로리의 영양음료에 가까웠고, 실제로 ‘액체 빵’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시 교회법 학자들의 결론은 “단식은 음식(cibus, 치부스)에 관한 것으로 음료는 단식을 깨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포투스는 ‘음료, 마실 것’, 논 프란짓은 ‘어기는 것이 아니다.’, 이에이우니움은 ‘단식을’이라는 뜻입니다.
16~17세기에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는데 ‘액체 상태의 초콜릿을 마시는 것이 금식을 깨는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위의 원칙을 근거로 ‘마시는 초콜릿은 금식을 깨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덕분에 일부 신자들은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초콜릿을 즐기면서도 법적으로는 금식을 지켰다고 만족해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전보다 느슨해진 단식 규정 덕분에 배불리 먹고 마시면서도 법적인 형식은 어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기보다 ‘나의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절제하여 ‘나를 비워 남을 채우는’ 자선을 실천해 봅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하느님께 참된 희생을 바치는 사순 시기의 단식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