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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우리 시대의 선교와 복음화] ‘특별 전교의 달’ 제정 이유와 배경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1|조회수26 목록 댓글 0

[경향 돋보기 우리 시대의 선교와 복음화] ‘특별 전교의 달제정 이유와 배경

 

베네딕토 15세 교황의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이래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거의 언제나 서구의 정치적 · 군사적 비호를 받아 왔고, 그 안에서 세례받은 이들의 수를 늘려 갔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에 유럽의 정복자들이 들어갈 때, 선교사들도 정복자들과 함께, 또는 그들의 앞이나 뒤에서 이른바 신대륙에 함께 들어갔다(물론 성 앙트완 다블뤼나 성 프란체스카 카브리니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라는 명확한 자의식을 가지고 현지 문화를 존중하며 복음을 전파하고자 목숨까지 내놓았던 이와 다른 선교사도 많이 있었음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팽창적 식민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가 촉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1919가장 위대한 임무라는 교황 교서에서 유럽 중심적이고, 자민족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팽창적 식민주의와 연관되어 있던 선교관이 모든 이의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하는 교회의 선교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또한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고 파견되는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06일 아마존 지역을 위한 주교대의원회의 특별 회의 개막 미사 강론에서 선임 교황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의 불은 태우지만 태워 없애지 않습니다. 그 불은 사랑의 불로서 빛과 온기와 생명을 주지만, 세상의 불은 사람들과 문화를 태워 삼킵니다.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선물이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요되었는지, 또 얼마나 자주 복음화보다는 식민지화가 자행되었는지! 하느님, 새로운 식민주의 형태들이 불러일으키는 탐욕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가장 위대한 임무반포 백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교의 달

201710월 전교 주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류복음화성 장관인 페르난도 필로니 추기경에게 서한을 보내 가장 위대한 임무반포 100주년을 맞이하여 201910월을 특별 전교의 달로 거행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 서한에서 교황은 친히 세례받고 파견된 이들: 세상 안에서 선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특별 전교의 달 주제를 제시하고, 특별 전교의 달 지정에 대해서 만민 선교 의식을 함양하고 다시금 새로운 열정으로 교회 생활과 사목 활동을 선교적으로 변모시키고 모든 신자가 복음 선포에 참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신자 공동체 안에 선교와 복음화의 열정이 자라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미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은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27)라고 가르친 바 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생명을 얻는 교회의 모든 것은 선교를 위해 존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별 전교의 달을 통해 모든 세례받은 교우가 이 가장 위대한 임무를 다시금 자각하고, 교회의 본성 자체인 선교를 어떻게 하면 오늘날 저마다의 사회 현실 안에서 효과적으로 살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기회이자 선교적 회심의 계기가 되길 바랐다.

밖으로 향하는 교회증거로 수행되는 복음 전파

그렇다면 세속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본성인 선교 사명을 완수할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직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밖으로 향하는 교회가 될 것증거로 복음화를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밖으로 향하는 교회 :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01일 특별 전교의 달을 시작하는 기도에서 밖으로 향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편안히 지내려고 안전한 오아시스를 찾는 교회는 밖으로 향하는 교회가 아닙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교황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벗어나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역설한다(복음의 기쁨, 8항 참조). 자족하는 교회는 생명을 잃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기원이신 성부, 영원히 성부로부터 파견되시는 성자,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견되시는 성령의 모습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신 안에 매몰되려는 유혹을 이기고, 복음적 새로움에 자기 자신을 개방할 때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

증거로 수행되는 복음 전파 : 오늘날 무차별적 상대주의가 절대 진리의 위치를 탐하는 현실에서 선교라는 말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이가 주님의 명령(마르 16,15 참조)이자 교회의 본성(선교 교령, 2항 참조)선교 사명을 일종의 교세 확장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릇된 편견 앞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교 활동은 신자 수를 늘리려는 숙련된 마케팅이나 선전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한없는 기쁨을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다른 이들에게 그 기쁨의 길, 참 인간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을 삶의 증거로 제안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복음의 기쁨, 14항 참조).

같은 맥락에서 특별 전교의 달 홈페이지에서는 여러 신앙의 증인들과 더불어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선교의 위대한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 교회와 특별 전교의 달

이번 특별 전교의 달 행사 담당 부서인 인류복음화성과 교황청 전교회는 특별 전교의 달에 교구 또는 전국 차원으로 특별 전교의 달 개막식과 폐막식 마련, 전교의 달의 주제에 초점을 맞춘 철야 기도 주최, 전교주일에 교구 차원의 미사 거행, 성지 순례 장려, 선교사 양성과 선교 사도직 활동 지원 기금 마련 등을 각 지역 교회들과 수도원들이 수행할 수 있는 활동 계획으로 제안했다. 보편 교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 교회에서도 각 교구와 수도회 차원에서 이에 따른 다양한 활동을 준비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특별 전교의 달이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단순히 한 달 동안 거행되는 행사로 끝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필자의 한 가지 구체적인 소망을 남기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앞으로 더 많은 선교 사제들을 사제가 부족한 세계의 각 지역 교회에 파견하는 것이다. 정확히 100년 전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가장 위대한 임무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본인은 존경하는 열심한 형제 주교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구 사제와 신학생 안에서 해외 선교를 자원하는 이들의 성소를 열심히 기른다면, 여러분은 가톨릭 종교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에 걸맞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선교사를 선교지로 보내 주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교구에 유능한 사제들을 더 많이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특별 전교의 달이 거행되는 때에 열리는 아마존 지역을 위한 주교대의원회의 특별 회의준비 문헌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계 각지의 신자들, 특히 남미의 신자들은 심각한 사제 부족으로 성체성사에 충분히 참여하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지난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성사를 집전해 줄 목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의 은혜로 풍요로운 사제 성소를 누리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이 형제자매들에 대한 형제적 책임감을 느끼고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더 많은 선교 사제를 파견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사제를 파견하는 교구에도 큰 영적 사목적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한국의 여러 교구의 시노드 문헌을 보면, 많은 교우가 교회 쇄신을 위한 최우선 과제들 가운데 하나로 사제들의 쇄신을 꼽고 있다. 이에 필자는 만일 지금보다 더 많은 사제들이 사제가 부족한 교구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돌아온다면, 사제들의 쇄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출신 교구를 떠나 사목하는 선후배나 동기 선교 사제들을 통해 한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은 각 지역 교회의 다양한 현실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이며, 익숙하지 않은 사목 현장에서 외국어를 더듬거리며 웃고 울었던 선교 사제들은 교구로 돌아온 뒤에 교구 사제단에 선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가 한국 천주교회가 겪는 주요 어려움으로 성소의 위기, 선교의 위기를 꼽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 교회가 날마다 거행하는 성체성사의 정신, 곧 나눔의 정신에서 점점 멀어지고, 때로는 자기 안에 폐쇄되는 것에서 안정감을 찾는 자족적인 교회가 되어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교회의 위기는 나누지 않는 것의 결과라기보다, 나누지 않는 것 자체가 교회의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을 나누지 않는 만큼, ‘밖으로 향하는 교회’ ‘세상에 파견된 복음의 증인이라는 교회의 근본 정체성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의 기쁨을 자신 안에서 생생히 회복하는 길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이웃들과, 특별히 받은 도움을 갚을 수 없는 이들과 나누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모르는 이들에게 세상 그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주는 신앙을 나눌 때, 우리는 파견된 자의 소명을 살게 되고, 그렇게 하느님의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게 될 것이다(루카 6,38 참조).

 

 

 

 

[경향 돋보기 우리 시대의 선교와 복음화] 현대 교회의 상황과 선교’ ‘복음화개념의 변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선교 · 복음화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사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곧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고(마르 16,15 참조),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마태 28,19-20 참조)이다. 또한 제자들은 나아가서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참조). 교회의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역사가 바로 선교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천하고자 노력해 왔다.

선교 역사에서 주목할 점은 초세기를 제외하고 중세와 근대에는 수도자 성직자 중심의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세속 정치의 도움으로 교회를 확장하였고, 내세에서의 영혼 구원을 선교의 일차 목적으로 삼았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사회 약자를 돕기 위한 활동은 자선 수준에 머물렀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간 발전과 해방, 존엄성의 수호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히려 교회의 확장을 위해,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도외시하고 세상의 지혜와 타협한 적도 있으며(노예 제도, 차별과 착취-식민 선교), 인간의 역사를 선도하기보다 흡수되어 만민 평등의 형제적 사랑보다 위계적 힘의 질서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종족과 민족, 언어와 문화, 종교들을 만날 때,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특정 지역(로마-그리스) 문화를 우월시하였고, 다른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열등한 이방인의 것으로 대하였다. 비록 당시 교회가 지역 문화에 적응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대안을 제시했으나 이상과 현실의 격차로 실행이 부족했다. 이는 긴 안목에서 볼 때 선교의 장애가 되었고, 교회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면 오늘날의 선교는 어떤 상황일까? 복음이 온 세상 모든 곳에 선포되었다는 공간적 차원의 선교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 보고서(2015 Pew 통계)에 따르면 인류의 31.3%가 그리스도교 신자(천주교 17.6%, 개신교 13.7%)이고, 이슬람교 24.1%, 힌두교 15.1%, 불교 6.6%, 민간 종교 5.7%, 유다교 0.2%, 그리고 아무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 16% 등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신생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였고, 젊은 교회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반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교회는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이 생겨난다. 다른 종교와 문화에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세상의 곳곳에는 지역 교회가 존재하고, 이들이 자기 관할 지역의 선교 활동에 책임진다면 굳이 자신의 나라를 떠나 선교할 필요가 있는가?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가치관이 달라진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인간의 구원은 현세의 삶과 상관없는 내세에서의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답은 오늘날 선교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고, 지난날의 선교 역사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보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공의회와 그 이후 50년 동안 선교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개념의 확장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인류 구원을 위해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로부터 파견된 존재임을 깨달았다(교회 헌장, 1항 참조). 그 이전까지 선교 목적이 교회 확장에 집중되었다면, 공의회는 교회 확장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선교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교회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면, 세례를 통해 교회의 일원이 된 평신도들 또한 선교 사명을 부여받는다(선교 교령, 2항 참조), 이는 바로 공동체로서 선교 활동에 참여했던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다.

이런 초대 교회의 선교 활동을 회복하고자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선교의 동기가 그리스도의 파견에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전환되었고, 선교의 목적이 영혼 구원과 더불어 현세 질서 안에 하느님 나라의 구현으로 확장되었다. 지난날의 선교가 주로 성직자와 수도자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은 평신도(수도자)와 성직자의 상호 협력을 필요로 한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회와 젊은 교회가 모녀 관계에서 자매적 관계로 변하면서, 각 대륙의 지역 교회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는 선교 방법을 성찰하고, 지역 교회들 간에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나눔을 통한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복음 선교 방법으로 독백이 아닌 대화(문화와 대화,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대화, 종교 간의 대화)의 중요성이 제시되었다

바오로 6세 교황 현대의 복음 선교(1975) : ‘복음화

과거 식민 선교의 이미지를 지닌 선교라는 용어보다 인류의 내부로부터 변혁(18)을 지칭하는 복음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교회 안과 밖에서의 활동 모두를 포괄하는 다섯 가지 차원의 활동을 뜻한다. 교회적 : 회개와 세례를 통한 교회 건설, 신자들과 교회에서 멀어진 이들을 돌보면서 생동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 인간학적 :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한 인간의 해방-발전을 위한 활동 사회학적 : 인간 삶의 현장,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안에서 공동선, 사회 정의와 공정한 분배의 구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의 구조 변화를 위한 노력 문화적 : 복음의 빛으로 세상 문화의 도덕적 가치를 정화하고 승화하려는 노력 범세계적 : 인류 평화와 정의, 국가 간의 올바른 부의 분배, 연대와 발전 협력, 생태, 환경 보전을 위한 노력. 복음화의 방법으로 대화와 토착화 또한 재차 강조되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회의 선교 사명(1990)과 베네딕토 16: ‘새로운 복음화

복음화가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소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임을 강조하였고, 1990년 외방 선교를 담당하던 포교성성(1622)인류복음화성으로 개명했다. 복음화의 장을 세 가지로, 곧 신앙의 부재, 신앙의 현존, 신앙의 미약이나 상실에 빠져 있는 상황들로 구분하였다(33.34항 참조). 그리하여 마지막 부류에 속한 이들을 위해 새로운 복음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새로운 복음화가 필요한 이런 상황은 전통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많이 나타나지만 젊은 교회에 속하는 한국 천주교회에도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개인과 교회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현상, 새로운 사조를 따르는 사회, 문화, 현대의 아레오파고스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의 감수성을 가지고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기술과 방법, 심리적 자세로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로써 개인과 교회가 재복음화되어 성령 강림의 경험을 재발견하고, 엠마오의 길에서 제자들이 체험한 뜨거운 감동을 느끼는 공동체로 거듭날 것이다.

그런 다음 세상의 국경과 정치, 경제 체제는 물론 문화와 문명과 발전의 광대한 영역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증거(평신도 그리스도인, 35항 참조)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 구조의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두 교황은 그 가능성을 평신도 선교에서 보았다. 따라서 평신도 스스로가 선교 단체를 조직하고, 전문적 능력으로 다양하고 창조적인 활동에 투신하도록 장려하고 지지했으며, 이들의 여정을 동반해 주었다. 이 시대 서구에는 수많은 교회 운동과 새로운 공동체가 태동하였고, 오늘날까지 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교적 교회의 회복

복음의 기쁨에 선교적인 공동체로 거듭나는 방법을 명시하였다. “교회는 자신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구조가 자기 보전을 위하기보다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27)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생생한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세상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주는 야전 병원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교회가 야전 병원이라면, 신자들 개인은 야전 병원의 간호사가 되어야 한다.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위험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처럼, 교회의 안팎에서 복음화를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제를 만드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회보다, 문제를 일으키고 여기에 대해 함께 대화하고 방법을 찾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현대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신앙의 감수성, 창조적인 활동에 열린 마음,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교회 구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선교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한 제언 - 단순함, 진정성, 열정

세상의 복음화, 교회의 재복음화, 새로운 복음화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현대 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선교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한 키워드로, 단순함, 진정성, 열정을 제안하고 싶다. 이를 통해 신앙과 삶의 괴리를 줄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가 미리 준비한 프로그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현장에 있는 평신도들이 교회의 격려와 지지를 받으며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때 가능해질 것이다. 그 열매로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거부감이 들지 않고 실천이 어렵지 않은 언어로 자신의 신앙을 전달하게 될 것이다.

 

 

 

 

 

[경향 돋보기 우리 시대의 선교와 복음화] 선교적 교회를 향한 한국 교회의 방향 전환

 

선교로 번역되는 미씨오’(missio)라는 말은 주님에 의한 파견, 주님이 맡기신 사명, 파견된 이들의 임무 등을 뜻한다.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유럽을 떠나 세계 각지로 복음을 전하러 나간 예수회를 비롯한 선교 수도회의 활동 시기부터 유럽 열강이 선교를 식민지 쟁탈에 이용했던 20세기 초반까지 선교는 세례와 교회 설립을 강조하는 만민 선교내지 외방 선교로 이해되었다. 1950년대 이후 선교는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구현,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강조하는 복음화내지 선포로 이해되었으며, 다원화된 현대에는 종교 간 대화나 믿지 않는 세상과 대화를 강조하는 증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시대에 따라 변형되고 있음을 시사하며 이는 주님께서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형편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교리반 모집이 어렵고 주일 학교에서 학생들이 점차 사라진다. 교중 미사 때도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인다. 본당에서 봉사자를 구하기가 점차 어려워진다. 외적 현상은 분명 우리 교회가 위기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글에서는 무엇이 선교의 장애 요인이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 운영에서 합의체적 운영으로

한국 대부분의 종교에서 성직자의 위상은 상당히 높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삼보인 불(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수행자) 가운데서 승이 특히 강조된다. 불교 신자들은 승려를 매우 존경하며 그들의 개인 생활 문제를 논하는 것조차 불경한 일로 여긴다. 장로교단이 다수를 이루는 한국 개신교의 경우에는 성직자인 목사와 공동체의 책임을 지는 장로들이 공동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제로 그 원칙을 지키는 교회는 많지 않아 보인다. 목사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장로는 그 공동체가 아니라 목사가 지명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전통적인 무속에서는 신령과 인간 세계를 잇는 무당이 있어야만 굿판을 벌일 수 있다. 성직자 중심의 모습은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지난날 한국 교회는 신부들이 하기에 달려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위기를 사제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없겠지만 오늘날 문제는 사제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점이다. 해방 뒤에 본당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그 운영은 사제와 전교 수녀, 그리고 사무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날 본당의 규모는 훨씬 커졌지만 본당 운영의 기본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다.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사제에게 권한과 책임이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일방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나타나기 쉽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성직자와 평신도 단체 사이의 이견 조정은 대화와 타협보다 성직자의 권위적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모든 이의 동등한 권리와 자율성, 상호 협력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천주교회는 낡은 제도로 인식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젊은 세대는 권위에 따라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성직 지망자가 감소하는 추세이다. 기존의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수직적 역할 분담을 극복하고 책임과 권한을 지닌 구성원들의 협력과 합의를 통해서 운영되는 본당 공동체로 바뀌어야 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삼중 직무를 인정함으로써 이를 위한 신학적 전제를 마련했다. 또 오랫동안 교회가 실천하였고 최근 공의회가 다시 발견한 교황과 주교단 사이에 단체성(collegialitas)의 구현이 현재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함께 관찰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함께 가는 길’(synod)은 세계 교회 차원뿐 아니라 지역 교회와 본당 공동체 차원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청소년, 노인, 교육, 본당 운영 등에 참여할 수 있는 전문가의 양성이 요구된다.

기복적인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사회 문제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고, 1990년대 사회 취약 계층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것과 달리 그 뒤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의 내실화라는 명목으로 밖을 향해 있던 시선을 안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를 통해 신앙과 생활의 연결이 완화되었다. 오늘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보다 입신양명, 무병장수, 자손 번성 등 소원 성취가 신앙의 주요 목표가 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세의 뿌리는 무속의 기복적이며 의타적 신앙이다. 무속 전통에서 사람들은 현세의 건강과 재화와 평안함을 추구한다. 또한 문제 해결이 신령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며 개인의 주도적 행동보다 정성을 다해 신령에게 비는 의존적 모습을 취한다.

이러한 종교 심성은 그리스도인에게 현세의 성공을 하느님의 축복과 직접 연결하도록 하며 십자가와 그를 통한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과 자기 행위에 대한 주체적이며 윤리적인 책임감을 제거할 수 있다. 이러한 단편적 신앙은 타인과 세상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교가 전통 종교인 샤머니즘을 대체했는지, 또는 그리스도교라는 옷을 걸친 샤머니즘이 여전히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지배하는가 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되며 토착화라는 중요한 과제가 드러난다.

최근 한국 교회의 위기는 이기적이며 기복적 신앙으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성사적 역할이 약화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의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느님께 매달려 그분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참신앙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그러한 하느님 호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믿음의 내용과 믿음의 삶이 통합된 신앙, 교리 지식과 전례 참여와 삶에서의 실천이 통합된 신앙으로 발전해야 한다. 우리 고유의 종교 심성을 받아들여 한국적 그리스도교로 거듭나면서도 그동안 무속이 보여 주지 못했던 이타적이며 사회적 신앙의 지평을 열어 가는 것이 한국 천주교회가 당면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문제를 심도 있게 바라보고 이를 해결하고자 행동하는 신앙인들의 다양한 모임이 필요하다. 교회 안으로만 향하는 시각은 교회 밖을 향하는 시각을 통해서,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은 자기를 넘어 타인의 처지를 살피는 시선을 통해서 교정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 양성이 앞으로 교회의 주안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몇 명인가는 부수적인 문제이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개인적인 신앙에서 공동체적인 신앙으로

탈근대 사회로 불리는 오늘날 기존의 가치 체계는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정보화와 세계화되는 사회에서 개인주의적 삶의 양식이 보편화되고 개인의 자기 결정권이 강조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종교 또한 사사화(私事化)된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다양한 상품이 넘치는 종교 시장에서 자연 영성, 마음의 안정에 관련된 품목을 선호하며 SNS나 인터넷 등을 통해 제공되는 간편 상품을 즐겨 고른다. 전통적인 제도 종교를 통한 신앙생활보다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다양한 종교 상품들이 보이지 않는 종교로서 더 큰 매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본당에서 봉사자들이 사라져 가는 현상과 주일 미사 참례를 부담스러워 하는 경향은 바로 종교 사사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영역의 분화가 일어날수록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통괄하는 가치 체계, 그리고 인류의 공동 문제를 다루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종교를 더욱더 갈망한다. 오늘날 교회가 받는 도전은 개인화된 신앙의 단편성을 거슬러 충만한 기쁨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적 신앙을 제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탈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가치 체계와 사회 통합을 더욱 요청한다. 가정이 붕괴되는 현실에서 사랑의 유대와 안식이 가정의 본디 가치로 드러난다.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세계화 시대에 기회의 평등이 지니는 기본 가치가 드러난다. 각 분야에서 이행되는 다원화에서 상호 존중과 협력의 가치가 명확해진다. 무분별한 착취로 신음하는 환경 앞에서 인류에게 주어진 공동 선물인 자연에 대한 책임이 요청된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당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은 이러한 기본 가치를 구현하는 교회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 교회에 요청되는 것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포괄하는 사회의 플랫폼 역할이다.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한 이는 그 기쁨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곧바로 마음을 쓸 수 있으며,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하도록 그들을 초대할 수 있다. 우리 교회가 겪는 위기는 죽을병이라기보다 성장통이다. 성숙을 위한 시각의 변화가 요청된다. 교세 통계가 아니라 신앙 내용이, 기도의 효험을 넘어 사랑의 공동체 구현이, 성전의 크기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이 복음화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와 성숙에 교회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것이 복음화를 향한 우리 교회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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