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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 성체 보존에 관한 지침 (주교회의 2008년 춘계 정기총회 승인)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1|조회수39 목록 댓글 0

주교회의 2008년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일부 사목자들이 성체를 사제관이나 개인 집에 모시는 경우, 일부 수녀회에서 각 분원에 감실을 설치하고자 하는 경우, 한정된 구역 내에서 여러 곳에 성체를 모셔두는 경우 등, 한국 교회 차원에서 성체를 예외적으로 보존하는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는 사목적 요청에 따라 예외적 성체 보존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였습니다.

 

예외적 성체 보존에 관한 지침 (주교회의 2008년 춘계 정기총회 승인)

일부 사목자들이 성체를 사제관이나 개인 집에 모시는 경우, 일부 수녀회에서 각 분원에 감실을 설치하고자 하는 경우, 한정된 구역 내에서 여러 곳에 성체를 모셔두는 경우 등, 한국 교회 차원에서 성체를 예외적으로 보존하는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는 사목적 요청에 따라 예외적 성체 보존에 관한 지침을 마련한다.

 

1. 성체 보존에 관한 일반 원칙들

(1) 교회법전

교회법 제934-940조에 따르면 성체 보존에 관한 일반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성체는 일반적으로 성당(주교좌 성당이나 그와 동등시되는 성당, 사목구 성당, 수도회나 사도생활단의 부속 성당) 또는 경당에 보관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9341항 참조).

성체는 주교의 예배실과 교구장의 허가를 받은 다른 성당이나 경당 및 예배실에 보존될 수 있다(9341항 참조).

수도원이나 그 밖의 신심 단체의 경우 그 집에 부속된 성당이나 으뜸 경당에만 성체가 보존되어야 하지만, 교구장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 집의 다른 경당에도 보존되도록 허가할 수 있다(936조 참조). 그러나 그러한 장소에 성체를 보존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성체가 보존되는 거룩한 장소에는 이를 관리하는 이가 항상 있어야 하고, 사제가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하여야 한다(9342항 참조).

축성된 성체는 신자들의 필요에 충분한 양만큼 성합에 보존되어야 하고, 오래된 성체는 자주 새 성체로 교체해 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939조 참조).

성체가 보존되는 감실 앞에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시하고 현양하는 특별한 등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한다(940).

 

(2) 전례 규정

2002년 출간된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Institutio Generalis Missalis Romani) 314-317항은 교구장에 의해 인준된 성체 보관 장소의 설비에 대해서 주로 언급한다. 감실은 빼어나게 고상하고, 잘 드러나야 하며, 우아하게 장식되고 기도하기에 적합해야 한다. 또 원칙적으로 하나이며 고정되어 있고 견고하여 깨지지 않는 재질로 불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룩함이 모독될 위험이 전혀 없도록 닫아 두어야 한다(314).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감실 옆에는 기름이나 초를 사용하여 항상 특별한 등불을 켜 놓아 그리스도의 현존을 가리키고 영광을 표시한다(316항 참조).

미사 없는 영성체와 성체 신심 예식서(De Sacra Communione et de Cultu Mysterii Eucharistici Extra Missam) 총지침 9-11항도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과 성체 보존에 관한 동일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으나, 예식서의 특징상 성체 보존 장소가 경신례의 자리가 되도록, 즉 성체 조배와 공경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3) 교회 문헌

성체 보존에 관한 최근 교회 문헌인 교황청 경신성사성 훈령 구원의 성사(Redemptionis Sacramentum, 2004.3.25.)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감실은 성당이나 경당에 하나만 있어야 하며, 특히 성당 구조에 맞고 고상하고 품위 있게 또 위치상 조용하여 기도하는 데에 알맞아야 한다(130항 참조).

교구장 주교의 권위 아래 안전하게 보관할 수 없거나 신성 모독의 위험이 있는 장소에 성체를 보관하는 것은 금지된다. 만일 그러한 경우가 생기면, 교구장은 이전에 내어 준 모든 성체 보존 허가를 즉시 철회하여야 한다(131).

어느 누구도 법 규범을 거슬러 성체를 자기 집이나 다른 어떤 장소에 가져갈 수 없다. 또한 신성 모독의 목적으로,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치우거나 보유하는 행위, 또는 그것을 버리는 행위도 사도좌에 사면이 유보된 중대한 범죄’(graviora delicta)임을 명심해야 한다(132항 참조). 교회법 제1367조에 따르면, 성체를 내던지거나 독성의 목적으로 뺏어 가거나 보관하는 자는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 성직자는 그 외에도 다른 형벌로도 처벌될 수 있고, 성직자 신분에서의 제명 처분도 제외되지 아니한다.

 

2. 한국 교회의 예외적 성체 보존 지침

현재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교구장의 허가를 받아 예외적으로 성체를 보존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원로 사목자(은퇴 사제)의 숙소에 딸린 예배실에 감실을 두는 경우

아무도 성체를 자기 집에 두거나 여행 중에 가지고 다닐 수 없다. 다만 긴급한 사목적 필요성이 있고 교구장의 규정을 지키면 가능하다(교회법 제935조 참조). 곧 원로 사목자(은퇴 사제)가 홀로 자신의 숙소에 기도실이나 예배실을 갖추고 감실을 두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도 교구장의 서면 허가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미사 거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며, 여행이나 다른 사유로 장기간 숙소를 비울 경우에는 성체를 보존하지 않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2) 본당과 다른 수도 공동체(분원)의 경당에 감실을 두는 경우

사목구 본당 구역 내 사목 활동에 동반하는 수도회나 사도직 단체는 별도의 감실을 갖출 필요가 없다. 별도의 수도 공동체라도 가까운 곳에 감실을 방문할 수 있는 본당 공동체가 있다면, 일차적으로 그곳을 이용하도록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당 공동체의 사목 활동 시간과 환경 등의 어려움으로 별도의 성체 보존이 필요한 경우에는 반드시 교구장의 허가를 서면으로 받아야 하고, 다른 용도로도 사용하는 겸용 공간이 아닌 성체 보존만을 위한 독립적인 경당이나 예배실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그 일차적인 관리 책임은 사목구 주임 사제이나, 교구장의 명을 받은 사제가 정기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 보존과 관리의 책임을 질 수도 있다(교회법 제9342; 936조 참조).

 

(3) 본당 내 별도의 성체조배실에 감실을 두는 경우

성체가 보존되는 성당은 매일 적어도 몇 시간 동안 신자들이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대한 이유로 방해 요인이 있다면 개방하지 않는다(교회법 제937조 참조). 흔히 성체를 모신 주 경당이 아닌 곳에 예배실을 마련하여 성체 신심(지속적인 성체 조배 등)을 위한 별도의 감실을 설치하거나 성체 현시를 해 두는 경우들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교구장의 허가를 서면으로 받아야 하며, 충분한 조배 시간과 조배자들을 확보하여야 한다. 지속적인 조배를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수의 인원으로 무리하게 성체를 지키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예배실을 잠그는 시간도 마련해야 한다. 또한 그 공간이 불특정 다수의 출입이 이루어지는 곳이므로, 기도 환경에 부적절한 요인을 확실히 제거해야 하며, 범죄나 안전사고 등의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매우 세심하게 배려하여야 한다. 특히 성체 모독을 막기 위하여 성체를 눈에 보이게 현시하는 시간은 제한적으로 운영하여야 한다.

 

3. 예외적 성체 보존을 위한 강조 사항

 

(1) 교구장의 허가와 지속적인 감독

교회법과 전례 규정은 한결같이 교구장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성체를 예외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오직 교구장의 허가로만 가능하므로, 교구장은 성체 보존의 장소를 허락해 줄 뿐만 아니라 보존된 성체가 지속적으로 남용 없이 관리되도록 감독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체 보존을 허가할 때에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적당한지 그 요건을 꼼꼼히 점검하고 사안별로 허가해 주어야 한다. 또한 성체 보존 장소가 오용 없이 잘 관리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구원의 성사176-178항 참조).

(2) 성체 보존을 위한 고유한 공간 확보

성체 보관 장소는 기도와 성체 공경을 위해 유보된 별도의 공간이어야 한다. 이 공간은 최소한 경당이나 별도의 예배실이어야 하며, 벽장이나 커튼의 형태로 가리개를 설치하여 그 공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교회법과 전례 규정은 한결같이 성체가 보존되는 감실이 성당이나 경당 안에서 눈에 잘 띄는 뛰어난 곳에 아름답게 꾸며져 기도하기에 적합하게 설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성체가 상시적으로 보존되는 감실은 견고하고 불투명한 재료로 만들어 고정시키고 잠가 놓아야 한다(교회법 제938조 참조). 다만 보편 교회법과 성좌가 인정한 수도회의 회헌과 회칙이 규정하는 경우는 제외된다.

(3) 성체 보존 장소의 안전 확보

성체 보존 장소는 신성 모독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이 보장되는 장소이어야 한다. 따라서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곳은 반드시 견고한 감실 안에 성체를 보관하여야 하며, 성체에 대한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곳에서 성체를 현시해서는 아니 된다(교회법 제938; 구원의 성사131항 참조).

또한 성체 조배를 목적으로 성체 보존을 하는 공간은 화재 등의 사고와 외부의 침입이나 범죄 등으로부터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Q&A)

 

Q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음식과 음료로 우리에게 주시는가?

A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영적 양식인 성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생명의 나눔은 우리의 세례에서 시작되는데, 성령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그리하여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 또한 이것은 견진성사로 강해지고 증가되며, 성체성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더욱 성장하고 깊어진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한다(요한 6,56). 그리스도의 인성에 결합해서 우리는 동시에 그분의 신성과 결합한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누리시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한 입양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성전이 되며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르심으로써 우리는 성화은총으로 거룩해진다.

복음의 궁극적 약속은 우리를 성삼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이런 신적 생명의 참여를 신화(神化, theosis)라고 불렀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단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적 생명,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루시는 친교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감사를 의미하는) 성찬례의 거행에서 우리는 이 탁월한 선물에 대해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

 

 

Q 왜 성찬례를 희생제사라고 하는가?

A 우리의 죄는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장애를 제거해 주셨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은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셨다. 성찬례는 이 희생제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기억하고 재현하고자 모이는데, 사제의 행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교회는 여기에 참여한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늘 성부 앞에서 인류를 위해 중개 역할을 하시는 영원한 대사제이시다. 여기서 그분은 수세기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죄인을 위한 희생제사를 바치던 많은 대사제들을 능가하신다.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을 영원한 희생제물로 바치신다(히브 9,12). 그분은 참으로 인간이 되시어 역사 안에 들어오셨기에 예수님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삼위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곧 그분은 시간이나 역사 안에 한정되지 않으시는 영원한 성자이시다. 그분의 행위는 창조의 일부인 시간을 초월한다(히브 9,1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하늘나라를 떠날 필요는 없으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우리를 위해 성부께 중재하고 계시면서 당신의 희생제사를 바치시며, 천사와 성인들이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분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천상 전례에 우리를 초대하신다(묵시 5,13). 더군다나 성부 앞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희생제사의 재현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사제와 예배 공동체는 여러 방식으로 성찬의 희생제사를 행한다. 제대에 있는 사제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세례 받은 모든 신자는 사제이며 동시에 희생제물이신 그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성찬례는 또한 교회의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인 교회는 당신의 머리이고 신랑인 분의 희생제사의 제물에 참여한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하나의 희생제물을 이루는 그리스도와 결합된 그분 몸의 지체들의 제사가 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8).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성사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 결합된 우리는 성부께 하나의 희생제물로 스스로를 봉헌한다.

 

 

Q 언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며, 왜 빵과 포도주는 여전히 그렇게 보이고 그 맛을 내는 것일까?

A 성찬례의 거행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는 독특한 방식, 성찬례에 적합한 방식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신다. 교회의 전통적인 신학 언어에 따르면, 성체의 축성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 동시에 빵과 포도주의 외양이나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다. 여기서 실체(實體, substantia)”우유(偶有, accidens)”라는 철학 용어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비롯한 중세 신학자들이 신앙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빌려온 것이다.

이 단어는 여러 측면에서 빵과 포도주로 보이는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데 사용된다. 빵과 포도주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이런 실체 수준에서의 변화를 우리는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라고 부른다. 가톨릭 신앙에 따르면, 이 실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커다란 신비이다. 우리는 교회의 성전과 성서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세상 안에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는 우유성이나 특징들의 변화를 포함한다. 때때로 실체가 그대로 있는 동안에도 우유적인 것은 변한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의 특징들은 여러 가지로 변하지만 그 사람의 실체는 동일하다.

어떤 경우에는 실체와 우유가 모두 변화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사과를 먹을 때 그 사과는 사람의 몸 안으로 결합되어 그 사람의 몸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런 실체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그 사과의 우유나 특징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사과가 사람의 몸으로 변화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몸의 우유나 특징들을 띠게 된다.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은 독특한 것인데, 비록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실체에서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지만 단지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이나 특징들을 가진 반면에 인간 몸의 우유성이나 특징들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Q 빵은 빵으로 지속하기를 멈추고 포도주는 포도주로 지속하기를 멈추는가?

A 그렇다.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자 빵과 포도주는 남아있지 않고 그분의 거룩한 몸과 피가 현존한다. 그러므로 성찬례에서 그 빵은 빵의 실체로서 지속하기를 멈추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포도주도 실체로서 포도주이기를 멈추고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가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하셨지 이 빵은 내 몸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Summa Theologiae, III q. 78, a. 5).

 

 

Q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A 그렇다. 왜냐하면 이런 현존의 방식이 성찬례의 성사적 거행에 온전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본래적인 상징성을 이용한 형식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다. 더욱이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서 현존하신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 적절한 형식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발견되거나 식별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존은 신앙의 덕에 부합한다.

보나벤투라는 말했다. “상징으로서 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그분이 하늘에 계신 것처럼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것은 특별히 가치있는 것이다”(In IV Sent., dist. X, P. I, art. un., qu. I).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권위로 신앙에 의해 우리는 그것이 인간 능력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고 믿는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1).

 

 

Q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단지 상징일 뿐인가?

A 일상 언어 사용에서 우리는 그 자신을 넘어서 다른 어떤 것, 때로는 동시에 수십 개의 다른 실재들을 가리킬 때 상징(symbol)”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기 때문에 단지 상징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신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행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성찬례의 의미를 드러낸다. 예를 들면 자연 식품이 몸에 영양분을 주는 것처럼 성찬의 음식은 우리에게 영적 자양분을 제공한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친교를 이룩한다. 곧 성찬례에서 하느님 백성은 서로에게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누리는 친교 안으로 인도하는 식사에 참여한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성인이 말한 것처럼 성찬례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한 덩어리의 빵은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몸으로서 성령에 의해 함께 모인 사람들의 일치를 가리킨다(1고린 10,17).

또 다른 예를 보면, 포도알 하나하나와 밀알 하나하나는 각기 빵과 포도주가 되기 전에 먼저 수확되어야 하고 으깨어지고 깨어지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 때문에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난 많은 이들의 일치와 그리스도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 당신의 제자들 역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가리킨다. 상징은 여러 다양한 의미와 함축을 동반하기 때문에,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아주 많이 말할 수 있다.

 

Q 미사가 끝났을 때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닌가?

A 아니다. 성찬 예식 동안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고 이것은 그대로 남는다. 성체는 더 이상 빵과 포도주일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빵과 포도주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미사의 특수 상황이 끝난 후에 이른바 정상상황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일단 실체가 정말로 변화했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체의 형상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 그 안에 현존하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7).

축성된 빵이 그 다음날까지 남아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성화의 힘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그리스도는 변하시지도 않으며, 그분의 거룩한 몸도 변화되지 않고 축복의 권능과 생명을 주는 은총이 그 몸 안에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이다”(Letter 83, to Calosyrius, Bishop of Arsinoe [PG 76, 1076]). 교회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현존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7).

 

 

Q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적절한 흠숭의 표현은 무엇인가?

A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찬례 동안이나 후에도 장엄한 흠숭을 받아야 한다(신앙의 신비, 56-61항 참조). 예를 들면 성체가 보존되는 감실은 성당이나 경당 안에서 눈에 잘 뜨이는 뛰어난 곳에 아름답게 꾸며져 기도하기에 적합하게 설치되어야 한다”(교회법 제1982). 라틴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신자들은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 동방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감실 앞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몸을 깊이 굽혔다.

라틴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의 전례 전통은 모두 공경, 존중, 흠숭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신자들은 감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성당 안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거친 소리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는 흠숭과 기억의 표지로서 병중에 있지 않은 이상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기 전에 금식할 것을 요구한다. 라틴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성체를 하기 최소한 한 시간 전부터는 공복재를 지켜야 한다.

 

Q 어떤 사람이 신앙 없이 성체를 영했다면, 그때에도 여전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가?

A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마신 사람에게 신앙이 없다는 것이 성체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영적 은혜는 얻지 못한다. 만일 고의적으로 그랬다면 이런 영성체는 헛된 것이고 심판을 받을 것이다(1고린 11,29). 영성체는 자동적인 치료약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교를 원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강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친교에 대한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변화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을 더 크게 갖고자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해야 한다.

 

Q 대죄를 범했다고 의식하는 신자가 성체를 영했다면 그 사람이 모신 것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가?

A 그렇다. 영성체하는 사람의 태도나 처지가 성체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본래 참된 현존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인과 주님 사이에 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이다. 영성체를 하러 나가기 전에 우리는 주님과 또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와 올바른 관계, 곧 은총의 상태, 모든 대죄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필요가 있다.

죄가 상처를 주고 심지어 그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지만 참회의 성사는 그것을 회복시킬 수 있다. 대죄를 범했다고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기 전에 참회의 성사를 통해 화해해야 한다. 이 경우에 그 사람은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2) 완전한 통회를 할 의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완전한 통회는 가능한 한 곧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굳은 결심을 동반해야 한다.

 

Q 성체나 성혈의 어느 한 형식으로만 영성체를 해도 그것은 온전한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는 것인가?

A 그렇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 안에서 빵이나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온전히 현존하신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축성된 제병의 조각 어디에나 또는 귀한 성혈의 방울마다 온전히 현존하신다. 그럼에도 성찬례 동안 빵과 포도주의 두 형상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가 충만함 속에서 완성될 세말에 주님과 함께 거행될 축제의 전조인 잔치로서 성찬례를 완벽하게 보이게 한다(성체신비 공경에 관한 예부성성 훈련, 32항 참조).

 

Q 성체 안에서의 실재적 현존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성찬례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가?

A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성찬례에 현존하신다. 그분은 미사의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인격 안에 현존하신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7)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께서 현존하신다. 더욱이 그분은 다른 성사들에도 이와 같이 현존하신다. 예를 들면 누가 세례를 줄 때에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현존의 특별한 본성을 강조하려고 실재적이라는 말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서 말한다. 빵과 포도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실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하느님과 인간,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의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성찬례에서 현존하시는 다른 방식들이 정말로 비실재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방법은 다른 것들을 훨씬 능가한다. “성체 안에서의 현존이 실재적인 것이라 불리는 것은 마치 다른 현존 방식이 실재적이 아닌 것처럼 배타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탁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심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요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 현존 방식이다”(신앙의 신비, 39).

 

 

 

 

 

Q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해 말하는가?

A 먼저,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몸에 대해 말한다. 성찬례 동안에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몸을 갖고 있다.

두 번째로, 바오로 사도가 그의 서한에서 가르친 것처럼 인간 몸을 유비적으로 이용하여 말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많은 지체들은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다(1고린 10,16-17; 12,12-31; 로마 12,4-8). 이 사실은 종종 그리스도의 신비체와도 연관된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한다. 이것은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신비적 일치이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그리스도의 성체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교회의 신비체인 교회에 들어가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는 강해지고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건설된다. 교회의 중심 행위는 성체성사의 거행이다. 곧 모든 신자는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게 된다.

성찬례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의 두 가지 의미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다. 한편,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제사가 바쳐지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감사기도의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에서 사제는 성령을 보내시어 이 빵과 포도주의 예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달라고 성부께 청한다. 동시에 사제는 성령께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오직 한 마음 한 몸이 되게”(가톨릭 교회 교리서, 1353) 해주시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성부께 청원한다. 그리스도의 성체의 선물이 우리에게 오고,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일치하고 그리스와 일치하는 것은 모두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성찬례가 서로 고립된 고독한 개인으로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결합된다. 그러므로 성찬례의 거행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나아가, 그 신비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모셔올 의무가 있다.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 것인지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할 책무를 갖고 있다.

우리는 또한 모든 불의를 포함해서 복음에 반대되는 우리 세계의 모든 힘에 대항해서 싸울 의무가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우리에게 성체성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되게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1397)라고 가르치고 있다.

 

 

Q 왜 우리는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신비라고 부르는가?

A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계획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비이다. 우리는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성체성사의 여러 모습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계속해서 인간의 기대나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요한 6,60-66). 예를 들어, 제자들이 처음에 메시아는 죽은 후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마르 8,31-33; 9:31-32; 10,32-34; 마태 16,21-23; 17,22-23; 20,17-19; 루가 9,22; 9,43-45; 18,31-34 참조). 더욱이,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나 우리는 인간적 개념으로 결코 전체적으로 하느님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제한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시에 의해서 인간 이해의 정상적 한계를 넘어서 나아가길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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