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하느님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 핵심, 결론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서 마지막에는 ‘복음서를 쓴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믿음과 고백은 요한복음의 결론이자, 신약성경의 중요 주제이며, 결국 그리스도교 전체의 핵심입니다.
‘신학’(神學 Theo-logia)이란 ‘하느님’(Theos)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Logos) 학문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인간은 스스로 깨닫거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을 초월해 존재하시기에 인간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절대 알 수 없고, 오직 ‘계시’(啓示 Revelatio)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계시란 ‘하느님께서 하느님에 대해 알려주신 것’이고, 계시의 대표적 형태가 ‘성경’과 ‘성전’(聖傳, 교회의 전통 내지 전승)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직접 체험한 후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이 사람이 되신 분’(요한 1,14 참조)이 예수님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시고, 한 처음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하셨기에,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라고 합니다. 예수님 = 하느님 말씀 = 로고스 = 하느님의 외아들 = 유일한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이 요한복음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려주셨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시 중 가장 완전하고 충만한 계시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는 사람입니다(요한 14,7 참조).
신학이란 로고스(Logos)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Theos)을 알고 깨닫는 학문입니다. 또한 신앙의 목적이 ‘하느님을 직접 마주 뵙게 되는 것’(=지복직관, 1코린 13,12; 1요한 3,2)이라면, 신앙의 중심인물 역시 예수님입니다. ‘로고스’(Logos)를 서로 나누는 것이 ‘대화’(Dia-logos) 혹은 ‘친교’이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인간과 인간 사이 친교의 중심이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신학과 신앙의 출발점, 핵심, 결론이라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인간의 은총과 행복과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 본질은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께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모든 답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결국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성장과 갈등
오늘날 교회의 어려움과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간혹 초기 교회 공동체와 비교하면서 당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를 상상합니다. 초기 교회는 살아있는 공동체였지만 그 당시도 문제는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을 갖게 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유다교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문제를 놓고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사도 15장 참조) 율법을 강조하는 유다교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이었는데, 특히 이방인들의 ‘할례’ 문제 때문에 자칫 교회가 분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약속되었기에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상황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 사도들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했다가 믿게 된 몇 사람이 나서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사도 15,5)하고 말했고, 결국 사도들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그리스도교 첫 공식 회의인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개최합니다.(AD 49년경)
이 회의의 중심 주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할례가 기본인 유다인들의 율법과 관습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사도들은 이 회의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놀라운 활동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구약의 예언자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하는 규정을 제정하며 율법의 규정을 새롭게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는 구원은 우리의 행업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초기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내용입니다.
무한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
‘아모르 파티’(Amor fati), 이 말은 삶을 파티(Party)처럼 즐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운명(fatum)을 사랑하라’, ‘네 운명을 받아들이라’라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 격언이고, 근대 독일 철학자 니체를 통해 유명해진 말입니다. 좋고 나쁜 것을 포함해 자신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것이 운명적인 것이며, 그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체념’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희망을 버리다’라는 뜻이 있고, 동시에 ‘도리를 깨우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후자의 의미는 단념함으로써 더 큰 것을 깨우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기 운명에 체념함으로써, 즉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보다 분명히 깨우침으로써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체념은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인간은 한편으로 무한하고 긍정적인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완성에 이를 수 없고, 절대자의 도움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면 비참해지지만, 자신의 존재를 모르고 살면 비천해집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요? 그리스도교의 모든 답은 예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자 인간이기에 하느님에 대한 답이자 인간에 대한 답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말씀과 행적을 통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하느님 은총을 통해 일치할 때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대로 살고,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며 감사하며 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길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9) 가톨릭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양의 피에서 예수님의 피로… 성체성사로 완성한 파스카
종종 길거리에서 ‘유월절’을 알려주시겠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요. 그 설명을 듣다 보면 ‘가톨릭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과월절’, 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성경」에서는 ‘파스카’라고 번역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를 말합니다. 우리에겐 파스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요. 파스카(πασχα, Pascha)는 ‘거르고 지나가다’라는 의미로, 유월(逾越)·과월(過越) 모두 이 뜻을 한자로 옮긴 말입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가 죽는 재앙을 내리실 때 어린 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재앙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탈출 12,13)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탈출 12,14)면서 파스카 축제를 제정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파스카 축제에는 어린 양을 잡아 불에 굽고,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습니다. 심지어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쥔 채 서둘러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런 예식을 한 기억이 없으실 겁니다.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통해 파스카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난 전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라 하시며,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지내던 파스카 축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님의 피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새로운 파스카 축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를 거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특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간 첫날, 즉 주일에 기념하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 특히 주님 부활 대축일에 더욱 장엄하게 거행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주일에 모여 기도하고, 또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1코린 11,26)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사순시기를 통해 파스카 성삼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파스카는 단순히 기념일이나 축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파스카를 통해 옛것을 버리고 새로 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 요셉 성월
가톨릭교회는 매해 3월을 성모님의 배필이며 예수님의 양부(養父)인 성 요셉을 특별히 공경하는 “성 요셉 성월”로 지냅니다. 이달에 신앙인들은 특별히, 의인이며 신앙인의 모범이고 전 세계 교회의 수호자인 성 요셉의 덕을 기리고 본받고자 노력합니다. 2020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셉 성인이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된 지 150주년을 맞아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Patris Corde)를 발표하였습니다.
여기서 성인의 몇 가지 모습을 소개합니다.
① 사랑받는 아버지,
② 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
③ 순종하는 아버지,
④ 수용하는 아버지,
⑤ 창의적 용기를 지닌 아버지,
⑥ 노동하는 아버지,
⑦ 그림자 속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성 요셉 대축일에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이는 요셉 성인을 공경하는 이유가 성모 마리아의 배필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교황 레오 13세(1878-1903년 재위)는 성 요셉이 가족들에 대한 보호와 배려의 산 표본이라고 하면서 “아내에게는 사랑, 마음의 일치, 충실의 모범이고, 미혼자와 독신자, 수도자와 성직자에게는 정결의 이상적인 수호자”라고 하였습니다. 성 요셉은 전 세계 교회의 수호자이며, 특히 노동자, 가정, 동정녀, 환자, 임종 환자의 수호자입니다. 또한 수공업자, 벌목자, 목수, 기술자, 개척자, 여행자, 묘지관리자, 추방자, 신혼부부, 처녀, 고아, 회의에 빠진 자, 눈병 환자의 수호자이고, 유혹을 당할 때와 머물 곳이 없을 때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성 요셉 공경의 최초 흔적은 4세기 초 동방 교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800~900년대 콥트 교회의 달력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성 요셉 축일이 3월 19일로 정해진 건 12세기 무렵인데, 당시 십자군은 나자렛에 성 요셉을 공경하기 위한 교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후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과 축일은 14세기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통해서 전파되었습니다. 1479년 작은형제회 회원이었던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년 재위)는 이 축일을 전 세계 교회로 확산시켰습니다. 1678년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교황(1676-1689년 재위)은 성 요셉을 중국 교회의 수호자로 인가하였고, 184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년 재위)는 당시 조선대목구장 성 앵베르 주교의 요청을 받아 성 요셉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조선 교회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865년 복자 비오 9세 교황(1846-1878년 재위)은 3월을 특별히 성 요셉에게 봉헌된 달로 설정하였고, 1870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언하였습니다. 한편, 1955년 교황 비오 12세(1939-1958년 재위)는 매해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지내도록 선포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 ἐκκλησία (에클레시아, 그리스어)
‘교회’를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밖으로 불리어 모인 이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칠십인역 성경이 이스라엘 회중을 뜻하는 ‘카할’을 번역할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약의 새로운 백성,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선택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인 회중, 곧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사도는 이 단어를 단수로 사용하기도 하고, 복수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가 단수로 쓰일 때는 보편 교회, 곧 세계의 모든 교회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복수로 쓰일 때는 개별 교회, 곧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분명, 세상에는 다양한 지역에 여러 교회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이 개별 교회들은 각자 독립성 있게 살아 움직이지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단일한 몸, 곧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지역에 있든지 간에 하느님의 백성, 곧 하나의 교회에 속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자비의 적극적 실천, 자선(慈善)
지난 2월 18일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봉독된 마태 6,1-6.16-18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 덕목들은 특별히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 시기에 더 강조되어야 할 실천 주제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자선’에 관하여 알아봅니다.
자선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경제적 원조입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교에서 자선은 회개한 사람이 행하는 중요한 보속 중 하나였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자선은 하느님 사랑을 증명하는 이웃 사랑의 직접적 표현이자 구체적 실천입니다.
구약성경은 궁핍한 이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자선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신명 15,11; 이사 58,4-7 등). 또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자선 의무도 언급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염두에 두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놀리고 묵혀야 할 의무(탈출 23,11), 수확하면서 남은 몫을 밭에 남겨 두어야 할 의무(레위 19,9-10; 신명 24,20-21; 룻 2,2-8), 외국인에 대한 의무(레위 19,33-34)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다 신약에 이르러, 자선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마태 25,31-46)에서 언급되듯,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베푼 자선은 단지 그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께 해드린 것이라는 점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따라서 자선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초기부터 가난한 사람, 고아, 장애인, 환자 그리고 다른 어려운 이들을 도왔습니다. 부제들과 과부들을 뽑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게 하였고(사도 6,1-6; 1티모 5,9-10), 초기 교부 시대에는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호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치, 사회, 생태환경의 큰 변화를 겪으며 가난의 범위와 도울 대상과 정도 같은 새로운 질문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1978~2005년 재위)이 제시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사회적 관심」 42항)은 여전히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에 극기와 희생으로 모은 봉헌금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헌금을 모읍니다. 또한 올해 사순 저금통을 통해 모여진 헌금은 이주사목위원회의 난민 기금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도 ‘자선’을 다짐하고 실천하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언어] Adios(아디오스, 하느님께로, 스페인어)
‘Adios’는 보통 앞으로 오랜 시간 못 보거나 다시 보기 힘든 사람과 헤어질 때 나누는 작별인사입니다. 그래서 “안녕.” 또는 “안녕히 가십시오.”로 번역될 수 있지만, 본래의 의미는 ‘하느님께로’(A+Dios)입니다. 이 말은 조금 더 긴 문장을 축약한 말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하느님께 당신을 맡깁니다.”,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또는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기를!”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 ‘Ad Deum’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 유럽 언어에서 비슷한 말이 쓰이는데, 대표적으로 프랑스어의 ‘Adieu’(아듀)가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과 함께 회개의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의 다른 말로 ‘회두’(回頭, 머리를 돌리다)라는 말도 쓰이는데, 우리 인생 여정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 성찰해 보고 다시 하느님께로(A Dios) 정향하는 것이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회두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 하느님께 돌리고, 그분께 나아가는 은총의 사순 시기 되시기 바랍니다. ¡Adios!
[교회상식 더하기] (8) 기도 끝에 꼭 ‘아멘’을 해야 할까?
의무 아닌 ‘믿음의 고백’… 기도를 완성하는 마침표
우리는 기도를 “아멘”으로 끝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 끝에 아멘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기도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아멘이 뭐길래 이렇게 자주 말하는 걸까요?
실은 아멘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기도 끝에 하는 아멘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아멘은 ‘믿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와 ‘견고함, 신뢰성, 성실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확실하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으로, 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멘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를 확인할 때, 하느님의 심판이나 저주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표현할 때, 하느님을 찬양할 때 그리고 시편의 찬미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주로 기도와 찬미의 끝에 아멘을 사용합니다. 서간을 보면 기도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끝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 바오로 사도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초심자가 어떻게 그대의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1코린 14,16)라며 신령한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기도 하는데요. 초대교회에서도 오늘날 우리처럼 교회 공동체가 모여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멘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멘은 예수님도 자주 사용하신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멘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에서 “진실로”로 번역된 부분의 원문이 사실 아멘입니다. 얼마나 많은가 하면, 마태오복음에서 30번, 마르코복음에서 13번, 루카복음에서 6번, 요한복음에서 25번 말씀하십니다.
특히 아멘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고 아멘을 두 번씩 반복해서 사용하시는데요.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권위가 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아멘의 하느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사 65,16)으로 번역됐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멘’이시다”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5항)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2코린 1,20)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 아멘이십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아멘을 받아서 완성해 주십니다.
기도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아멘만큼 훌륭하게 기도를 마무리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전례 동작과 자세
미사 때 신자들은 하나의 자세만을 취하지 않습니다. 전례의 순간에 따라, 앉고 서고 절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모든 동작과 그 자세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만큼, 교회는 오랜 시간 문화적 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통일된 동작과 자세를 전례에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동작과 자세는 “거룩한 전례에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원이 이루는 일치의 표지”로서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감각을 표현해 주고 길러”(「미사 경본 총지침」 42항) 줍니다. 오늘은 미사 전례에서 취하는 동작과 자세에 관해 알아봅니다.
전례에서 “절은 어떤 이나 그의 표상에 공경과 영예를 드림”(275항)을 뜻합니다. 그 방법으로는 허리를 굽히는 깊은 절과 고개를 숙이는 절,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허리를 굽히는 깊은 절은 사제가 입당 행렬을 하여 제단 앞에 이르렀을 때(122항 참조), 신경 중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 구절에서(137항 참조), 축성된 빵과 성작을 거양한 다음과 영성체하기 전에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흠숭을 드러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입당 때를 제외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닿게 하는 무릎 절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깊은 절로 무릎 절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274항 참조). 고개를 숙이는 절은 하느님의 세 위격을 한 번에 부를 때, 예수님이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부를 때, 어떤 성인을 공경하여 거행하는 미사에서 그 이름을 부를 때(275항 참조)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영광송 중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부분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13세기부터 자리 잡은 것으로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을 드러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들어가 몸을 굽혀 경배드리세. 우리를 만드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시편 95,6)라는 성경 구절은 이스라엘에서도 이 동작이 하느님께 경배드리고 겸손을 표현하던 자세임을 알려줍니다. 미사 때 건강상의 이유나 자리가 좁거나 사람이 너무 많거나 다른 합당한 이유가 아니라면, “성체 성혈 축성 때는 무릎을 꿇어야”(「미사 경본 총지침」 43항) 합니다.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변화 순간에 겸손의 자세를 취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한편, 신자들이 미사 때 가장 오랫동안 취하는 자세는 서 있는 자세와 앉은 자세입니다. 서 있는 건 긴장하고 깨어 있으며 준비된 사람의 자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서서 양팔을 들고 기도했다고 하는데, 이는 카타콤바의 벽화 ‘기도하는 사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앉은 자세는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곧 말씀 전례 때, 봉헌 예물을 준비하는 동안, 영성체 후 거룩한 침묵을 지킬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이렇듯 미사 중 신자들이 행하는 동작과 자세에는 적절한 시점과 각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요성을 생각하며 미사 전례에 참여한다면, 하느님께는 더 높은 흠숭을, 성모님과 성인들에게는 더 뛰어난 공경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언어] Si vales bene, valeo(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 : 당신이 잘 지낸다면, 나도 잘 지냅니다.
우리는 설날을 맞아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옛 로마인들은 편지의 첫머리에 “당신이 잘 지낸다면, 나도 잘 지냅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첫 글자만 따서 “S.V.B.V.”라고 씁니다.
‘시 발레스’는 ‘만약 당신이 잘 지낸다면’, ‘베네’는 뒤에 생략된 동사 est(에스트, ~이다)와 함께 ‘좋다, 다행이다, 잘 되었다’는 뜻입니다. ‘발레오’는 앞에 ego(에고, 나는)가 생략되어 ‘나는 건강하다, 평안하다, 잘 지내다’는 뜻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잘 지낸다’는 것은 단순히 건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요한 20,19) 속에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누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이웃이 하느님 안에서 평안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교회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6-27 참조)
설을 앞두고 서로 이렇게 인사합시다. “당신이 주님 안에서 평안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 역시 그 평안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