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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축성, 축복, 봉헌: 참, 복도 많지!■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2|조회수35 목록 댓글 0

축성, 축복, 봉헌: , 복도 많지!

 

지난 달에 '축복'이라는 용어에 관한 논의를 설명한 다음,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 하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강복'이라 하기로 하였다는 결정을 알려 드렸습니다. 또한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서, 우리가 하느님께 ''을 빌 때에 현세적인 복만을 비는 이른바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러 길게 전달하여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현세적이든 초월적이든 모든 복의 근원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온갖 생물과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실제로 교회는 인간 자체는 물론 하느님 경배와 현세 생활에 필요한 온갖 사물을 두고 하느님께 복을 빌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에서, 곧 성사와 준성사의 거행에서 여러 형태의 '축복' 예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바로 지난 달에 설명한 셋째 의미의 축복으로서, 전례에서는 '축성''축복'의 형태로 나뉩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축성''축복''봉헌'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고 거의 다 '축성'으로 써 왔기에, 이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가며 구분하여 보겠습니다.

 

축성(Consecratio)

'축성'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어떤 사물을 세속의 일반적인 용도에서 떼어 내 신성한 용도로만 쓰도록 분리하거나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하느님을 섬기는 경배에만 봉헌하는 것을 일컬으며, '성별'이라고 옮겨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별이나 봉헌은 구약성서에서부터 흔히 나오는 것으로, 그 예식은 대개 분리와 정화(또는 성화), 봉헌의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탈출기(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시나이 산의 계약을 비롯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의 사제 임직 예식(출애 29)이 그러한데, 그 축성의 표징을 안수와 도유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의 축성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태어나는 모든 맏아들을 대신하는 레위인들의 봉헌(민수 8)과 스스로 서원을 하는 나지르인들의 봉헌(민수 6)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성전과 제대, 맏물과 전리품 등의 성별 예식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구별 없이 쓰이는 이 말은 한번 성별되고 나면 영구히 신성한 것 또는 거룩한 사람으로 남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축성''축복'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변천이 있었겠지만, 여기에서는 현행 [주교 의전서](Caeremoniale Episcoporum)[축복 예식서](De Benedictionibus)를 바탕으로 몇 가지만 구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특별한 조건을 달지 않고 그냥 '축성'이라고 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축성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하고 말할 때에 빵과 포도주는 그 표징이 가리키는 의미만이 아니라 바로 실체가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지는 이 실체 변화는 동서방 교회가 항구하게 믿어 온 정통 신앙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축성이 이루어지는 성사가 성품성사입니다. 성직자들, 곧 주교와 신부와 부제는 성품성사로 축성됩니다. 이 축성의 주요한 표징 또한 안수와 도유입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우리는 주교 성성(Consecratio, 成聖)을 비롯하여 성직자의 축성도 그저 서품(Ordinatio)이라고만 합니다.

축성과 축복의 구분이 그 중요성에서 반드시 우열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차이를 두어 왔습니다. 축성과 축복으로 세속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거나 하느님의 보호에 맡겨지는 새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예식에서는 축성이 축복보다 더 장엄합니다. 축성의 통상 집전자는 주교이고, 축복의 통상 집전자는 신부입니다. 축성에는 언제나 성유가 쓰이지만, 축복에서는 주로 성수가 쓰입니다. 축성으로 들어 높여진 사람이나 사물의 새로운 지위 또는 상태는 영구적인 것이고 축성 예식은 다시 되풀이될 수 없지만, 축복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축성과 결부된 은총도 축복으로 받는 은총보다 훨씬 더 많고 크다고 합니다. 축성된 사람이나 사물을 더럽히면 전에 독성죄(瀆聖罪)라고 하였던 신성 모독의 죄를 짓는 것이지만, 축복을 받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경우에는 언제나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로마 [주교 예식서]에는 주교 축성과 더불어 네 가지 사물, 곧 고정 제대, 제대석, 성당, 성작과 성반의 축성 예식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발행된 [주교 의전서][성당 봉헌 예식서]를 보면, 주교 축성은 서품식에 들어가 있고, 성당과 제대는 봉헌(Dedicatio)으로, 성작과 성반은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1) 따라서 지금 성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축성은 크리스마의 축성만 있습니다. 주교가 성목요일에 축성하는 세 가지 성유 가운데에 견진성사를 비롯한 여러 성사에 쓰이는 '축성 성유'(크리스마)2)'축성한다'고하고, 병자 성유와 예비신자 성유는 '축복한다'고 합니다.

 

축복(Benedictio)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와 달리, 축복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제정한 준성사입니다. 물론 미사 끝의 강복이나 장엄 축복을 비롯하여 모든 성사 예식과 성무일도 등의 여러 전례에서 축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성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축복 예식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축복의 통상적인 집전자는 신부라고 하였지만, 중요한 축복 예식은 주교가 집전합니다. [주교 의전서]에 수록된 예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도원 대원장의 축복, 동정녀 봉헌, 수도 서원, 성당 머릿돌(부지)의 축복(기공식), 성당과 제대의 봉헌, (임시) 성당과 (이동) 제대의 축복, 성작과 성반의 축복, 세례대의 축복, 공적 경배를 위한 십자가의 축복, 종의 축복, 묘지 축복 등입니다. 또한 교구장 주교로서 베풀 수 있는 교황 축복 예식3)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신부는 교황이나 주교에게 유보된 것들4)을 제외한 모든 축복을 줄 수 있습니다. 부제는 법으로 부제에게 명시적으로 허가된 축복들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축복들은 주교나 신부의 위임에 따라 또는 그 사안의 성격에 따라 평신도도 줄 수 있습니다. 1984년에 발행된 [축복 예식서](우리말로는 1986년에 발행)에서는 집전자의 자격 규정이 많이 완화되어 평신도까지 여러 가지 축복 예식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축복 예식을 집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럿일 때에는 그 가운데에서 가장 윗사람이 집전하여야 합니다. 축복이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 7,7 참조).

축복의 대상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가정이나 부부, 어린이, 병자, 선교사, 교리 교사, 순례자들처럼 직접 사람을 축복할 때는 물론이고, 신자들의 각종 활동이나 건물, 전답과 목장이나 온갖 동물들,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 기물이나 성물의 축복, 신심 증진을 위한 묵주나 성의 등의 축복도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을 위한 축복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삶과 거기에 관련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시며, 교회는 또한 그 모든 일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축복을 베풀어 줍니다. 인간 생활의 온갖 사건들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신앙 감각으로 새로운 사건이나 사물들에 대하여 축복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물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도록 간청하고 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의식이 없으면 축복 예식은 단순한 기복 신앙 또는 천박한 미신이나 주술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축복 예식의 표준 구조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 그리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과 천상 도우심의 간청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부분에서는 모든 축복이 하느님의 말씀 선포에서 그 뜻과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여 줍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 선포를 중심으로 권고나 격려, 강론 등으로 참석자들의 믿음을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부분에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의 말씀 곧 교회의 기도로 이루어지는 이 부분에서는 신자들의 기도도 덧붙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와 성수 뿌림, 분향, 십자 성호 등이 축복의 표징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때에는 간단히 십자 성호를 긋는 것만으로 축복을 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 없이 간단한 표징만으로 축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제가 묵주에 십자 성호를 그어 주고 이를 '방사'(放赦)라 하였으나, 이 말도 '축복'으로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쓰는 묵주나 다른 성물들도 본당 공동체 등에서 어떤 날을 잡아 공동으로 축복 예식을 거행하는 일 또한 바람직하겠습니다.

 

축성, 축복, 봉헌

구체적인 의미로 이러한 말 쓰임새를 정리하여 보자면 이렇습니다. 성체성사와 성품성사에서는 축성이라는 말을 쓰지만, 성사 밖에서는 '축성 성유'(크리스마)만을 '축성한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준성사의 경우에는 '축복'이라고 합니다. 성당과 제대 등의 '축성''봉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축성식은 성전 봉헌식이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임시 성당이나 경당 또는 이동 제대는 '축복'이라고 합니다. 성작이든 묵주든 모든 성물은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준성사에서 일컫는 축성과 축복의 우열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만, 교회법전 초판에서 '축성 생활'(Vita Consecrata)이라고 하였던 말을 용어위원회의 심의와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봉헌 생활'로 바꾸었습니다. 교회법위원회가 번역 시안에서 '봉헌 생활'로 옮겼던 것을 수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축성 생활'로 바꾸었고, 이를 다시 '봉헌 생활'로 바꿀 때에도 남녀 수도회 장상 협의회 또는 연합회의 의견을 물어 바꾸었습니다. 장상 연합회 등의 지도부가 바뀌어서 의견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용어위원회의 심의 결과와 주교회의의 결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축성'(consecratio)이라는 말이 우리 나라에서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하느님께 봉헌한다''성별'(聖別)의 개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데에다 실제 용례에서도 '축복'(benedictio) 등의 용어와 혼동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법전에서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로 번역하여 또 다른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수도 생활은 본래 축성 생활보다 봉헌 생활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보아, 교회법전 번역 이전까지 수도 생활을 일컫던 좋은 말인 '봉헌 생활'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라틴 말의 consecrare는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현대 이탈리아 말에서는 consacrare, dedicare, deificare, divinizzare, immortalare, eternare, santificare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여 쓴다. 이를 consacrare로만 알아들어 '축성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수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더 좁은 개념이고 이에 대해서는 'vita religiosa'라는 또 다른 말이 있으므로, vita consecrata'봉헌 생활'이라 한다.(다음 호에 계속)

 

 

각주

1) 성당과 제대의 축성이 '봉헌'이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예식이나 의미에서는 축성과 동일합니다. 성당 축성 예식서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두 가지를 다 '축성'으로 옮겼으며, 경당이나 이동 제대의 '축복''강복'으로 옮겼다.

 

2) '축성 성유'에 관한 용어 설명`'크리스마'(미론)가 곧 기름이고 성유이므로, '크리스마 성유'라는 말은 잘못된 용어일 뿐 아니라 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이며, 축성을 위하여 사용하는 성유가 곧 크리스마이므로, '크리스마 성유' '축성 성유'로 바꾸어 쓴다.

 

3) 교구장 주교나 그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성직자는 자기 교구에서 한 해에 세 번 대축일 같은 날에 미사를 집전한 다음 그 미사에 참석하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한 신자들에게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전구를 통하여 축복하며 교황의 이름으로 전대사를 베푼다. 이 축복을 교황이 직접 수시로 베푸는 축복과 함께 '교황 축복'이라고 한다.

 

4) 예를 들자면, 관구장 대주교가 착용하는 견대(Pallium)는 교황만이 축복할 수 있으며, 수도원 대원장의 축복은 주교만이 할 수 있다.

 

 

 

 

 

, 축복, 강복: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빌까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지나친 욕심을 부리든 체념에 빠지든 저마다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의 개념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작은 일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라고 배워 왔습니다. 그것은 경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보통으로 수(), (),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오복(五福)이라 이르며, 이 오복을 다 갖춘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덕을 즐겨 닦고 제 명대로 살다 잘 죽는다는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에, 어떤 사람들은 귀()와 자손중다(子孫衆多)를 오복에 넣기도 합니다. 여복과 여난이 겹쳐 든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요. 건강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는 요즘에는 오관이나 오장의 건강을 오복으로 여깁니다. 어떻든 행복이란 그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행복은 무엇입니까? 산상 (평지) 설교에서 가르치신 참 행복(眞福)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만물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재창조가 이루어져야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겠지만, 실제로 가난한 사람도 제 마음만 잘 다스리면 지금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적인 행복을 넘어서서 영원한 참 행복을 바랍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은 모두 다 현세적인 복(특히 子孫衆多)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갖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새끼를 많이 낳아 번성하여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라." 선택받은 하느님 백성의 조상 야곱은 속임수로 아버지가 장자에게 빌어 주는 현세적인 복을 가로챘고, 하느님과도 밤새 씨름을 하여 억지로 복을 얻어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무속 신앙의 풍토에서 자란 우리는 전에 어디에다 무엇을 빌었습니까? 하늘에, 일월성신에, 칠성님께, 산신령님께, 삼신 할머니에게, 바위에, 당산 나무에다 빌며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복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이른바 '기복 신앙'(祈福 信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을 바라는 기복 신앙을 극복하여 초월적이고 영신적인 진복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는 현세적인 복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무슨 말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그 복 자체가 다른 것이냐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제로 구분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먼저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다 또는 우리가 복을 빌다는 뜻으로 옮겨지는 benedicere (bless; 명사 benedictio, blessing)가 어떻게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 관련하여, 성서에서는 이 말말고도

 

여러 낱말을 여러 가지 형태로 씁니다.)

첫째,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찬미)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시편 34,2).

둘째,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다, 그래서 우리가 복되다(행복하다) 또는 복을 받는다, 또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 주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창세 1,28). "그 자손이 복을 받으리라"(시편 37,26).

셋째,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봉헌하거나 축복하거나 축성(성별)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마태 26,26). 넷째, 나병을 나은 나아만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드리겠다는 것처럼, 선물을 가리킬 때에도 이 말이 쓰입니다. "소인이 감사하여 드리는 이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2열왕 5,15).

우리 나라의 교회 전통을 보자면, 성당에서는 '강복''축성'이라는 말을 쓰고, 예배당에서는 주로 '축복'이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밑줄 부분 비교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에페 1,3.6: 공동 번역, 대한성서공회). "천상으로부터 온갖 영신적 강복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강복하여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신 천주 찬미함을 받으실지어다"(서간 성서, 성분도수도원 역).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개역 성경전서, 대한성서공회). "Benedictus Deus et Pater Domini nostri Iesu Christi, qui benedixit nos in omni benedictione spiritali in caelestibus in Christo"(Nova Vulgata Bibliorun Sacrorum, L.E.V.).

 

<비교 2>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다"(마태 26,26: 공동 번역, 대한성서공회). "저들이 저녁 먹을 때에 예수 면병을 가지시고 축성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며 가라사대"(서간 성서, 성분도수도원 역).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개역 성경전서, 대한성서공회). "Cenantibus autem eis, accepit Iesus panem et benedixit ac fregit deditque discipulis et ait"(Nova Vulgata Bibliorun Sacrorum, L.E.V.). "예수께서는 수난 전날 거룩하신 손에 빵을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전능하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축복하시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Qui, pridie quam pateretur, accepit panem in sanctas ac venerabiles manus suas, et elevatis oculis in caelum ad te Deum Patrem suum omnipotentem, tibi gratias agens benedixit, fregit, deditque discipulis suis, dicens"(미사 통상문, 91: 감사기도 제1양식).

일찍이 리델 주교님을 비롯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펴냈던 [한불자뎐](韓佛字典, Dictionnaire Coreen-Francis)에는 ''이라는 말과 '츅성하다'는 말만 나옵니다. (): bonheur, prosperite, aisance, felicite, beatitude, chance, fortune. 츅성하다(祝聖): benir, indulgencier, consacrer, dedier. 그리고 [한어문전](韓語文典, Grammaire Coreenne)에는 '춍복을 밧다'(recevoir la benediction)는 말이 나옵니다. '총복'이라는 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성모송에서 써 왔습니다. "주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여인 중에 너 총복을 받으시며, 네 복중에 나신 예수 또한 총복을 받으시도다." 현재의 성모송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Dominus tecum, benedicta tu in mulieribus, et benedictus fructus ventris tui, Iesus). 중국어(타이완, 홍콩)에서는 讚美, 讚頌, 祝頌, 頌謝, , 萬福, 祝福, 眞福, 祝禱, 祝聖, 降福, 賜福이라고 하는데, 주로 축복과 강복을 많이 쓴다고 합니다. 일본어에서는 讚美, 降福, 祝別, 聖別, 掩福, 祝福, 祝聖, 眞福, 福樂이라는 말들을 쓴답니다.

 

[미사 통상문]을 새로이 개정하면서 우리는 '축복'(祝福)이라는 말을 우리말 어법에 맞게 쓰자고 하여, 사람이 하느님께 복을 빌 때에만 '축복'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정 과정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용어위원회에서는 본디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 미사 경본 등의 용례에 따라, '축복'이라는 말을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란 두 가지 뜻으로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1991122일 회의). 이 심의 결과는 주교회의 1992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그대로 확정되고, '강복' 또한 '축복이나 복을 내려주다'는 뜻으로 '축복'과 병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례위원회에서 마련한 [미사 통상문] 개정안에서는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을 바로 쓰자, ''자가 빈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빌 수 있겠느냐 하는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강력하게 제기된 것입니다. 이러한 의견에 반대하는 주장의 요지는 대개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적합한 어휘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일을 '강복'이라고도 하고 '축복'이라고도 한다. 과거에 가톨릭에서는 '강복'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개신교에서는 '축복'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왔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일치 운동을 강조한 직후 1960년 중반에 가톨릭 공용어 심의위원회에서 일치 운동의 차원에서 '강복''축복'을 혼용하기 시작하였다. '강복'은 복을 내리신다는 뜻이므로 그 때까지 '우리를 강복하소서' 하던 것을 '우리에게 강복하소서''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로 하였던 것이다. 말이란 어느 나라 말이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뜻이 바뀌기 마련이다. 어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주 많다.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빌 수 있다고 '하느님의 축복'이란 말을 쓰느냐?" 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국어 사전에서는 '축복'을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1) 행복하기를 빎, 또는 비는 일, 2) 남의 복된 일을 기뻐하며 축하함, 3)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신자에게 복이나 은혜를 내림을 이르는 말(주여, 축복하소서. / 깊은 믿음에 축복이 있으리라.), 4) , 행복(축복을 누리다). 그런데도 만이 옳고 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주장일 수는 있어도 대중의 언어 생활에서는 고립될 수밖에 없는 고집이다. '축복'은 이미 '''행복'이란 뜻으로 널리 사용되는 말마디로 변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국어 사전에서 '강복'이란 단어는 '가톨릭 용어'로 못박아 설명하고 있다.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개신교에서 널리 쓰고 있고 이미 한국 사회에서 '하느님의 축복'이란 말을 아무 저항 없이 쓰고 있는 것을 가톨릭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말에서 온 단어들이 우리말이나 일본말에서 뜻이 변한 것은 무수히 많다. 일본 성경에도 루가 복음 142절에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인 중에서 당신은 축복받은 분입니다." 하고 축복이란 단어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이 누구에게 빌 수 있단 말이냐?"란 주장도 교리를 모르고 하는 것이다.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성부께 빌어 주실 터이므로 무엇이든지 당신 이름으로 구하면 다 들어주실 것이다."(요한 15,16)라고 약속하셨고, 성령께서도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하였다. 인류의 구원 사업은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하느님의 은총은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내려오는 것임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고 있다. 하느님의 축복은 삼위일체 안에서 빌고 간구하시는 성자와 성령의 작용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기본 교리를 아는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이 누구에게 빌 수 있단 말이냐?" 하는 주장은 교리 무식의 소치임을 깨닫게 되리라. 신앙의 진리를 부족하게 아는 국어학자의 의견을 수렴할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에서 '축복'이란 말과 '기복'이란 말이 어원상으로는 똑같이 복을 빈다는 뜻이지만 '축복'은 좋은 뜻으로 쓰이고 '기복'이란 말은 나쁜 뜻으로 쓰이고 있다. '축복'은 하느님께서 원해서 주시는 복이고 '기복'은 사람이 현세적인 복만을 빈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축복'은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기복 신앙'은 배척받고 있는 것이다. 한두 분의 국어학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말이 안 된다고 우겨대도 대중은 계속 '하느님의 축복'이란 말마디를 사용할 것이다.(이상은 가톨릭 신문 19911020일자에 실린 당시 주교회의 의장 김남수 주교님의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복은 우리가 참으로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복이 표현하는 내용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이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과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참된 복을 구별하기 위하여 진복(眞福)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복이라는 단어가 지닌 이러한 의미 때문에 '하느님께 복을 빈다'는 의미의 축복(祝福)'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의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새 번역안을 내놓은 분들은 이러한 의미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축복이라는 말은 '하느님께 복을 빈다.'는 뜻으로, 강복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다.'는 뜻으로만 쓰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강복이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심'을 뜻하기에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나타내는 명사로서 강복을 쓰기는 어려우니까 그냥 ''이라고 쓴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동양권의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이 단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리고 그 해결책 중 하나가 축복의 의미 변화인 것이다. 일본의 미사 경본을 보면 '축복'이라는 단어의 의미 변화를 수용하여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모두 축복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미사 경본에서는 가능한 한 복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 즉 복을 비는 것을 '찬송'(讚頌)이라 하였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천은'(天恩) 또는 '은택'(恩澤)이라 하였다. 그리고 강복이라는 말은 동사체나 복합 명사로 쓰일 때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축복이라는 말은 '基他祝福'(aliae beneditiones)라는 표현으로 한 곳에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 사전에서도 축복이 복을 비는 것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신자에게 복이나 은혜를 내림'을 이르는 말"이라고 쓰고 있다. 축복이라는 말이 의미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는 이미 중국에서 1931년에 발간된 사전에서도 볼 수 있다. 즉 한영(漢英) 사전에서 축복을 'to bless''to invoke a blessing'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사전은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가 만든 것이지만 어떻든 의미 변화는 있었거나 적어도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애를 쓰면서 ''이라는 단어를 직접 쓰기를 꺼려했던 이유는 복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나타내는 특성 때문이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번역안에 이 말이 너무나 쉽게 포함되어 있음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무속적인 종교 심성이 강하다. 그래서 모두들 기복적인 신앙을 염려하고 있는 터에 너무나 쉽게 기복적으로 또는 무속적으로 흐를 수 있는 단어를 전례문 안에서 스스로 받아들여 사용한다면 혼합주의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이상은 [사목] 164(19929)에 실린 윤민구 신부님의 "미사 통상문 새 번역안에 대한 소고" 가운데에서 관련 부분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위와 같은 반대 의견이 진지하게 논의되었음에도, 주교회의 1995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미사 통상문 개정안이 확정되어,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고 하였으므로, 용어위원회도 당연히 주교회의 총회의 그러한 선택을 따릅니다. 이제 우리는 '축복''강복'을 구분하여,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 하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강복'이라 합니다. 따라서 사제는 '축복'을 하고, 하느님께서 '강복하신다(복을 내려 주신다).'고 하여야 합니다. 또한 축복의 대상인 사물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으로 ''이나 '축복'에 관련된 용어 문제가 다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에, 인간은 그 보답으로 모든 복의 원천이신 분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강복은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강복은 말씀이며 베풂입니다. 사람 편에서 보면, 축복이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창조주께 드리는 흠숭과 봉헌을 의미합니다.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다 강복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곧 무한한 강복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45.1078-1079항 참조). 전례에서, 특히 성사와 준성사에서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축성과 봉헌 그리고 온갖 축복에 관한 설명은 지면 때문에 다음으로 미룹니다.

 

 

 

 

 

성수(聖水 [] Aqua benedicta [] Holy water)?

 

물은 생태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물질의 구성 요소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물이 지닌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거의 모든 종교에서 물은 독특한 상징과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뿌리라 할 수 있을 유다이즘에서도 물은 종교적으로 정화의 힘을 발휘하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을 지녔으며 이는 민수기 19장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전통이 그리스도교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물로 죄를 씻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 예식을 통해 이제 물은 결정적인 새로남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세례 때 사용되던 물은 세례 후에 전례 안에서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성수라고 한다. 성수는 물이 지닌 신학적, 성서적인 의미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전례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

성서 안에서 물은 다양하게 그 의미를 드러내지만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로 물은 모든 생명의 기원이 된다. 천지창조 때부터 처음으로 창조되었던 물은 모든 생물의 다산과 풍요에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둘째, 동시에 물은 또한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노아의 홍수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육상 동물에게 물의 범람은 치명적이다. 마지막으로 물은 정화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더럽혀진 몸과 의복, 도구 등을 물로써 닦아내는 이러한 정화의 의미가 종교적으로 죄를 씻어내는 영혼의 정화라는 의미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생명수로서의 물(시편104,10; 집회24,25-27; 에제47,1-12; 마르9,41)과 죽음과 단죄로서의 물(창세기7; 시편124), 그리고

정화수로서의 물(시편51; 에제36,25-27; 마르7,2-4; 요한13,1-15)이 모두 전례 안에서 사용되는 성수 안에 그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하겠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씻게 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이 모두 물을 통한 세례성사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가 성수를 통해 확장되어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성수는 세례수와는 구별된다. 성서상의 요한의 세례에서와 같은 형태의 그리스도교 세례는 이미 디다케(90-100년경)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세례수 축복기도문도 이미 아프리카 교부 치쁘리아노(+258)가 증언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성수의 사용은 2세기경의 베드로 행전이라는 위경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세라피온의 기도서(Euchologion : 3-4세기)에서는 기름과 함께 병자들을 위해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리스도교에서 처음으로 세례수와 구별된 성수를 사용하게 된 것은 로마의 이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로마에서는 통상 거주지를 축복하는데 물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도 처음에는 거주지 축복을 위해 성수를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성수의 사용이 확장되었는데 서기 538년에 이르러 교황 비질리오가 새로운 성당을 축복하는데 성수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성토요일날 집과 들판에 성수를 뿌렸다는 기록이 7세기경의 로마예식7(Ordo VII in Les Ordines Romani)에 남아 있기도 하다. 이후 서방에서는 성수의 사용이 모든 사물과 사람의 축복 뿐 아니라 구마(Exorcismus)를 위한 예식에서도 사용되게 된다.

 

 

 

세례수는 통상 세례성사 전에 또는 부활성야 예식 중에 축복되어 새 입교자들을 위한 세례용으로 쓰이는 반면 성수는 미사 때 또는 미사 밖에서 축복되어 전례의 여러 부분에서 사용된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세례수는 1614년 로마예식서(Rituale Romanum)에서 지시하는 대로 소금을 넣어 축복하였다. 이 옛 축복예식은 이미 7세기경의 젤라시오 성사집(Sacramentarium Gelasianum)과 그후 그레고리안 성사집(Sacramentarium Gregoriana)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아주 오래된 교회의 전통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새 예식서는 미사경본의 부록에서 <성수축복과 성수예절>을 할 때 성수를 축복할 수 있는 전통양식과 미사 밖에서는 행하는 새로운 예식인 축복예식서 33<미사 밖에서의 성수축복예식>을 소개하고 있다. 현행 예식서는 소금의 사용을 선택적으로 하고 있으며 물이 부패되지 않는다면 소금을 사용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이는 소금의 의미보다는 물의 성사적 의미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 특별한 성수로 그레고리안 성수(Aqua Gregoriana)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물과 포도주, , 소금을 섞어 만든 것으로 성당 축성 시에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전통적으로 성수예절(Ordo Aspersionis Aquae Benedictae)이라고 부르는 전례는 교황 레오4(+885)의 명령으로 서방교회에서 매 주일 미사 때 성수를 뿌리는 예절을 지칭하는데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는데 그 뜻이 있다. 오늘날은 미사경본의 부록에 나와 있으며 주일에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현재 전례 안에서 성수는 물건(축복예식서 참조)과 사람의 축복(병자성사, 장례식, 성세서원갱신예식 등) 뿐만 아니라 성당에 들어올 때와 나갈 때, 가정 방문 때도 사용하며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는 주요 수단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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