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 말씀만 하소서

[교회상식 더하기] (7) 시노달리타스? 왜 우리말 번역은 없을까 번역어로는 ‘시노달리타스’ 온전한 의미 담기 어려워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3|조회수31 목록 댓글 0

[교회상식 더하기] (7) 시노달리타스? 왜 우리말 번역은 없을까

번역어로는 시노달리타스온전한 의미 담기 어려워

- 17일 교황청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특별 추기경회의에서 레오 14세 교황이 추기경들과 원탁에 둘러앉아 안건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교황은 시노달리타스를 교회의 중요한 여정으로 제시하며 회의를 정례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교회의 여러 문헌이나 교육 등을 통해 많은 분이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을 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이 아니어서 그런지 자꾸 들어도 무슨 뜻이었더라?’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곤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면 기억하기도 쉽고, 이해도 빠를 것 같은데 왜 시노달리타스는 우리말 번역어가 없는 걸까요?

실은 시노달리타스라는 말을 번역하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2021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원어 그대로 시노달리타스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번역어로는 새로운 개념인 시노달리타스의 의미를 온전히 담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에서 온 말입니다. 시노드(synodus)는 그리스어로 함께(syn)’(hdos)’을 합성해 함께 가는 길이란 뜻에서 온 말로, 라틴어 콘칠리움(concilium)과 더불어 공의회를 일컫는 말로 쓰여왔습니다. 이 시노드의 형용사형 시노달레’(synodale)에 명사형 어미 타스’(-tas)를 결합시킨 단어가 시노달리타스입니다. 문자로만 보면 공의회적인, 그러니까 공의회가 보여준 활동의 방식·특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노드의 경우 하나의 사건으로, ‘함께 모여 무언가를 결정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반면, 시노달리타스는 시노드라는 용어에서 유래했고, 의미 면에서도 많이 통하지만, 의사결정에 대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삶의 방식, 교회가 사명을 수행하는 활동에 대한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라는 번역으로는 시노달리타스를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교회의 삶과 사명은 2000년 넘게 이어져 왔고, 초대교회나 지금의 교회나 같은 교회인데, 이것이 왜 새로운 개념일까요? 물론 교회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시대나 상황에 따라 교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새롭게 달라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정의합니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6) 시노달리타스가 말하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선언합니다.(9)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활 신분이나 처지에 있든 각자 하느님께서 주신 길과 품위가 있다고 가르칩니다.(11항 참조) 시노달리타스란 이를 바탕으로 교회의 사명을 위해 서로를 협력자로 존중하고 소통하면서 함께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을 찾아 실현해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민주주의나 의회주의와 다릅니다. 구성원의 소리를 경청하지만, 구성원의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식별한 성령의 말씀에 따라 각자의 고유한 은사에 따라 서로 다른 직무 안에서 제 몫을 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교회의 사명을 향한 길을 걸어갑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반과 성작

 

지난 24일 거행된 사제ㆍ부제 서품식에서는 새 사제들에게 성반과 성작을 수여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사제는 미사 때마다 성반에 담긴 빵과 성작에 담긴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로 축성합니다. 오늘은 미사 때 사용되는 거룩한 그릇”(미사 경본 총지침327)인 성반과 성작에 관해 알아봅니다.

성반(聖盤)은 미사 중 축성될 제병을 놓는, 둥글고 평평하면서 약간 오목한 접시입니다. 성작(聖爵)은 축성될 포도주를 담는 잔인데, 일반적으로 윗부분의 잔(poculum)과 중간 마디가 있는 대(nodus) 그리고 받침(fundamentum)으로 구성됩니다. 때로는 만드는 사람의 재량에 따라 성작의 형태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 형태는 전례 용도와 그 지역의 관습에 부합해야 하고, 일상 용도로 쓰이는 잔들과 구분되어야 합니다(미사 경본 총지침332).

초기 교회에서는 성작이 나무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유리, 구리, 청동, 천연 수정, 줄무늬 마노 같은 재료들도 사용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년 재위) 시대에 이르러 금이나 은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 역시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성작이 만들어졌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금과 은을 제외한 다른 재료들이 금지되었는데, 1310년에 열린 트리어 교회 회의에서는 성반과 성작을 금으로 만들되, 그럴 수 없을 땐 적어도 은으로 된 성반과 성작에 도금해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주교회의의 판단과 사도좌의 승인에 따라, 용도에 맞으면 그 지역에서 고상하다고 여겨지는 견고한 다른 재료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1969년 교황청 경신성성(현 경신성사부)은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구리, 주석, 청동으로 제작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잔의 안쪽은 반드시 도금해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칠보나 자개처럼 귀하고 값진 재료를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쉽게 깨지거나 부서지는 건 아닌지 주의해야 합니다(미사 경본 총지침329). 또한 성작은 주님의 성혈을 담기 때문에, 잔 부분은 물기를 흡수하지 않는 재료이어야 합니다. 받침대 부분은 단단하고 품위 있는 다른 재료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330). 예로부터 가톨릭교회는 미사 때 사용하는 여러 기물 중에서 포도주와 빵을 담아 봉헌하고 축성하며 받아 모시는 데 쓰는 성작과 성반을 특별히 소중하게”(327) 여겨왔습니다. 이는 단순한 격식을 넘어, 성체와 성혈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몸소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흠숭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체성사의 놀라운 신비를 마음에 새기면서, 사제들 특히 앞으로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는 사제직에 첫발을 내딛는 새 신부님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교회의 언어] Salt(소금 맛)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닙니다. 미식 애호가들에게는 한 타이어 회사가 만든 식당 리스트가 마치 권위 있는 해설서가 된 듯합니다. 진짜 맛있는 맛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 두 가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좋은 것을 모두 다 합쳐서 과도하게 드러낸 맛이 있습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과 지혜의 과장됨(sublimity of words or of wisdom, 1코린 2,1)을 언급합니다. 코린토는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로 향하는 두 항구가 맞닿아 있어 그리스 문화권과 로마 문화권이 만나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유명인과 달변가가 거쳐 가고 얼마나 많은 산해진미가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곳에서 바오로는 과장된 맛이 아닌 담백한 맛으로 복음을 선포했음을 역설합니다.

한편, 복음에서 말씀하신 소금의 짠맛을 떠올려 봅니다. 겨울이 지나가는 요즈음 소금 간만 한 담백한 봄나물 생각이 납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타이어 회사 음식 가이드에 따른 산해진미 말고 사찰 음식을 찾는 이유도 비슷한 연유겠지요. 소금 간으로 담백하게 재료 본연의 맛을 드러내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했다고 말합니다.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께서 드러나는 방식으로(1코린 2,4) 말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빛과 소금의 삶도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마태 5,13) 착한 행실을 과하게 드러내면 위선이 섞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어 선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담백하게 드러낼 때 우리의 착한 행실은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이끄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 사랑의 질서

요즘 생긴 고민이 있습니다. 방학 중이라 약간의 시간이 남는데, 너무 무미건조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해야 할 일을 위해 에너지 비축도, 연구도 중요해. 나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우선이지. 나를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2025년 초, 미국의 부통령 JD 밴스는 미국이 이주민을 돌볼 의무가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먼저 가족을 사랑하고, 그다음 이웃을 사랑하며, 이어서 공동체를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조국의 국민들을 사랑합니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나머지 세상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노의 사랑의 질서’(ordo amoris)를 인용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또한 나자렛 출신의 이민자로서 피신한 경험이 있음을 언급하며, 이민자의 고통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시켜 밴스의 의견에 반박했습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노의 사랑의 질서, 우리는 자연스레 가까운 이에게 먼저 책임을 느끼지만, 이는 결코 먼 사람을 배제하라는 논리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밴스는 이를 국가주의적 자기 우선 논리로 단순화함으로써 모두를 사랑하되, 관계적 책임에 따르는 질서가 있다는 본래의 맥락을 배제하고 배타주의 논리로 축소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이에 교황님은, 사랑은 동심원의 확장처럼 자기만족적 질서로 한정되지 않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경계를 넘어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강경한 이민 정책이 실행될 경우, 극심한 빈곤, 박해, 기후 변화 등으로 자국을 떠난 이들의 존엄성을 훼손하게 되며, 특히 불법 이민자의 지위를 범죄로 간주하는 조치에는 옳게 형성된 양심이 반대해야 한다. 무력에 기반한 정책은 끝이 좋지 않은 법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비판은 무작정 단순한 이민자 수용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 접근과 엄정한 인권 존중을 기반으로 가장 취약한 이들을 환대, 보호, 통합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가까운 이웃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관계가 없는 타인은 내 이웃이 아닌 것처럼 지나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 가족, 내 공동체만 우선이고 그것만으로 내 사랑은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루카 6,32) 이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순위 매기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순차적으로, 모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있는 사랑의 질서는 어떠한가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저도 서둘러 봉사를 하러 떠나야 하겠습니다.

 

 

 

 

[신약 외경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외경의 성모님

 

 

 

 

 

교회는 11일을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로 지낸다. 성모송 둘째 부분도 천주의 성모라는 호칭으로 시작한다. 미사 때 우리가 기도를 청하는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성모의 순우리말에 해당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천주의 성모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언제부터, 왜 이 호칭으로 불리신 것일까? 이 호칭만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기도문이나 전례력 그리고 예술 작품들 안에서 성경이 전하지 않는 마리아의 여러 호칭들과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피에타와 성모 승천 대축일이 그 대표적인 예다. 성경에는 마리아가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은 채 비탄에 잠겨 있는 장면(피에타)이나 하늘로 들어 올려지셨다는(몽소승천) 보고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마리아 신심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신약 외경이 그 답들 가운데 하나다. 신약 외경에는 하느님의 어머니호칭도 들어있고(니코데모 복음) 주님께서 마리아의 영혼과 몸을 데리고 올라가셨다는 전승도 담겨 있다(마리아의 영면).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예비하는 듯한, ‘하느님 앞에 흠없는 마리아라는 표현, 그리고 성모자헌이나 평생 동정 축일의 기원도 외경에서 찾을 수 있다(야고보 원복음). 이번 호부터 살피려는 것이 바로 신약 외경이 증언하는 초대 교회의 마리아 신심과 공경이다. 성모님 호칭과 성모님 축일의 근거를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신약 외경의 이야기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신약성경과 마리아

 

 

 

외경의 성모님을 다루기에 앞서 성경의 성모님을 먼저 살펴야 한다. 외경의 이야기들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물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라는 물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의 신원을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그 어머니에 대한 질문도 따라온다. 그 질문과 답변을 복음서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마리아가 가장 비중 있게 등장하는 곳은 단연 예수님 탄생 및 유년기 대목이다(루카 12; 마태 12). 여기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신 분(루카 1,35), 그리고 그분의 유년기를 함께 한 어머니로 묘사된다(루카 2).

 

 

 

마리아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에도 등장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카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예수님이 첫 기적을 일으키시는 데 모종의 역할을 하셨다(요한 2,1-12). 그 일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요한 2,11). 다른 장면(마르 3,31; 루카 11,27-28)에서도 드문드문 등장하던 마리아는,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무게감 있게 등장한다.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서 그분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사도 요한의 어머니로 선포되셨다(요한 19,25-27). 마지막으로 예수님 승천 후 마리아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줄곧 기도에 전념했다(사도 1,14). 그들의 기도는 오순절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는데,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고 한다(사도 2,1-2). 그 자리에 분명 성모님도 계셨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요한의 어머니로 선포되신 이후 줄곧 사도들과 관계를 이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신약 외경에서 확인하게 된다.

 

 

 

 

 

신약 외경과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초점을 맞춘 성경에서는 마리아의 이야기가 최소한도로만 전해지지만 신약 외경에서는 마리아가 제법 비중 있게 다뤄진다. 신약 외경은 앞에 언급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확장하고 새로운 정보들을 덧붙여 더욱 풍성한 이야기로 만들어 전하고 있다. 신약 외경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초대 교회 저작물들 가운데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작품들을 가리킨다(외경 본문은 송혜경, 신약 외경 1신약 외경 3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이 작품들도 초세기 교회의 삶과 믿음을 반영하기에 매우 중요하다. 신약 외경은 마리아와 관련해서 특히 의미가 깊다. (성경에 없는) 마리아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보들을 모두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정보들이 정경에 담긴 공적 계시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들이 신약 외경에도 담겨 있음은 분명하다.

교리라는 정형화된 언어로 표현되기 훨씬 전부터 교회는 재미있는 이야기, 아름다운 문학의 형태로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기도와 전례로 이어지고 마침내 교리로 선포되기도 했다. 먼저 믿었고 나중에 교리화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를 신약 외경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신약 외경을 성경과 함께 읽으면서,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올바른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마리아를 제대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호에 다룰 것은 천주의 성모호칭이다. 이 호칭은 하느님을 낳으신 분’,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그리스어 테오토코스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하느님(테오스)을 낳으신 분(토코스)’이라는 뜻의 테오토코스는, 마리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호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이자 동시에 하느님이시기에,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 예수의 어머니이시라는 뜻이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 부름으로써 마리아에게서 탄생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했듯이 우리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그 아들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요한 20,28)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머니는 마리아론적 호칭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론적 호칭이다.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마리아가 테오토코스라고 공표되기 전부터 외경에는 이를 예비하는 믿음들이 전해진다. 2세기 야고보 원복음은 이 호칭을 직접 쓰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하느님임을 여러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4~5세기부터는 다양한 외경에서 테오토코스나 메테르(어머니) 테우(하느님의)’가 마리아의 일반 호칭으로 사용된다(니코데모 복음). 이콘에서 성모님 위에 메테르 테우의 약자(ΜΡ ΘΥ)가 그려진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이콘 참조).

<이콘 설명>

<감미로운 동정녀> 정태현 신부 - 모자의 얼굴이 맞닿아 있고 아기 예수는 어머니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 이콘은 모자간의 사랑의 감정과 손길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각시킨 이 이콘에서도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ΜΡ ΘΥ)라 칭해진다

 

 

 

 

 

[가톨릭 교리] 성탄의 가장 깊은 신비 - 인간이 되신 하느님과 함께!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한 처음에”(요한 1,1), 즉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의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분(1,14)이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Immanu + El)(마태 1,23)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하느님의 아들이시자 구약의 이스라엘이 믿었던 야훼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십니다. 2위격이신 천주 성자께서 한 여인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인 마리아(Maria)는 라틴어식 표현이고, 히브리어로는 미리암(Miriam), 예수님 당시 사용되던 아람어로는 미르암입니다. 마리아는 나자렛 출신인데, 복음사가들은 그 여인을 동정녀라 합니다. 마태 1,23에 나오는 동정녀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 근거합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7,14) 여기서 젊은 여인‘70인역 성경’(LXX)에서는 동정녀(Parthenos)라 번역했습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이 구절에 근거해 메시아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 믿었고, 동정녀에 의한 출산과 메시아 탄생을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이사야가 말한 것은 젊은 여인이지 동정녀가 아니라 주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젊은 여인은 알마’(Almah)이고, 동정녀는 베툴라’(Betulah)인데, 이사야서에는 알마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흔히 젊은 여인을 가리키는 말은 알마가 아니라 나아라’(Naala)였습니다. 그리고 알마라 지칭되는 여성들은 흔히 가임기 여성이나 처녀, 동정녀 등으로도 사용되었고, 특히 70인역 성경은 이 단어를 동정녀라 번역했기에 초기 교회와 복음사가들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루카복음서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 이름을 바로 예수라고 알려주지만, 마태오복음서에서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사야의 예언을 들려줍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아베(Ave), 마리아!(루카 1,26-38)

루카복음 1장 중반부에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나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인사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 그 당시 일반적인 인사는 히브리어 샬롬’(Shalom, 평화가 너와 함께!)인데, 여기서 천사는 그리스식 인사인 카이레’(Chaire, 기뻐하여라)라 합니다. 그리스어 카이레는 라틴어 아베’(Ave 기뻐하소서)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기쁨’(chaire)은총’(charis)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이고, 서로 연결된 의미입니다. 복음에서 카이레라는 표현이 사용된 대표적인 경우는 예수님 탄생하는 때에 목동들에게 했던 인사(루카 2,10)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요한 20,20) 두 경우입니다.

기뻐하여라라는 인사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구약의 스바니아 예언서의 구절이 대표적입니다. “기뻐하여라, 딸 시온아, 주 너의 하느님이 네 한가운데 계시다.”(3,14-17) 기쁨의 이유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고, “네 한가운데 계시다라는 표현은 네 모태 안에 계시다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스바니아서의 이 구절은 시온에 있는 계약의 궤 안에 하느님이 거처하심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서 마리아는 시온의 딸로 여겼고,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예수님 탄생 예고 때에 마리아가 바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계약의 궤, 즉 주님이 머무시는 거처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에서 사셨다라는 그리스어 단어가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인데,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천막을 치다입니다. 즉 구약 때 성막을 치고 계약의 궤를 모신 것처럼, 신약이 시작되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성막과 같은 마리아의 태 안에 들어오심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서 눈에 띄는 장면은 성령을 통한 잉태 예고입니다. 이런 상황은 구약의 계시 방식과 비슷하면서도, 구약을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심은 예수님 탄생이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에 의한 신비로운 사건이며,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경의 고백처럼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기에 성령께서는 동정녀에게서 하느님 아드님을 태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원리이십니다. 이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알려줍니다.(루카 1,31)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처럼 살기!

요한복음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강조가 중심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이 시작되고, 낮과 밤이 생겼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세상이 시작되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신데, 요한은 그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 분’(참조 요한 1,14)을 예수님이라 증언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후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이 되셨을까요? 한 마디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불완전하고 고통 가득한 인간 삶 안에서 참된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예수님은 하느님께 가는 길, 구원의 길입니다. ‘’()을 깨우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따라가는 것이고, 이 길이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행복의 길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까요?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의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처럼 살면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결국 이 길이 옳다고 믿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이 살면서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해 때론 말로, 때론 삶으로 직접 올바른 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가신 길을 잘 따라오라고 초대하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삶에 지치고 힘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처럼 해봐요, 요렇게!”

 

 

 

 

[교회상식 더하기] (6) 교회에는 아빠가 많다?

아빠스 · 교황 · 신부하느님께 이끄는 영적 아버지

 

아기가 태어나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역시 엄마’, ‘아빠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아기가 발음하기 쉬운 발음이다 보니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많은 언어권에서도 어머니아버지를 부르는 유아어가 엄마’, ‘아빠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합니다.

아람어에서도 아버지의 유아어는 아빠(abba)’입니다. 아람어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중동지방에서 널리 사용되던 언어인데요. 우리말과 의미도 비슷해 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를 부를 때, 또 성장한 뒤에도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를 때 아빠(abba)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아빠에서 유래한 호칭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바로 아빠스입니다. 이집트, 시리아 등 동지역에서 수도자들은 영적 아버지라는 의미로 자신들의 스승을 아람어로 아빠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에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을 따르는 수도원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아빠스의 직무와 역할이 체계화됐습니다.

오늘날 아빠스는 주로 성 베네딕토의 수도 규칙서를 따르는 대수도원에서 장상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대수도원이 아빠티아(Abbatia)’입니다. 아빠티아는 수도원을 일컫는 영어 ‘Abbey’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여자 대수도원장은 아빠티사(Abbatissa)’라고 부릅니다. 모두 아빠에서 온 말입니다.

사실 아빠스 말고도 교회 안에는 아빠가 많습니다. 일단 교황님을 뜻하는 파파(Papa)’가 그렇습니다. 발음 면에서도 아빠와 유사한데요. 파파는 아버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파스(πάπας)’에서 온 말입니다. 본래 교구장·대수도원장 등 지역 교회의 최고 장상을 부르던 말인데, 8세기 이후부터 로마교구장, 바로 교황님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사도들을 이어 교회를 이끌고 신앙을 가르치는 교부(敎父, pater ecclesiae)’도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의 말입니다. 더 가깝게는 신부(神父, pater spiritualis)’님도 영적 아버지라는 의미의 호칭이지요.

교회 안에 이렇게 많은 아빠가 있지만 사실 이 모든 아빠들은 한 분이신 아빠를 향해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앞서 ‘abba’가 아람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아람어는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언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소리와 같은 의미로, 아이가 아빠를 부르듯이 아주 친밀하게 아빠라고 부르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해주셨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됐다고 가르칩니다.(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22, 갈라 4,6 참조)

혹시 하느님이 멀고 어려우신가요? 그렇다면 한 번 아빠라고 친근하게 불러보면 어떨까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