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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영성심리] 가치의 우선순위 세우기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3|조회수31 목록 댓글 0

[영성심리] 가치의 우선순위 세우기

 

인생은 B(birth, 탄생)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삶을 아주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침에 눈 떴을 때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매순간 선택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라면 선택의 폭은 크지 않습니다. 늘 선택하던 방식 또는 습관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일이거나 새로운 상황에서라면 선택의 폭은 훨씬 넓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까요? 왜 그것을 선택할까요? 선택에는 알게 모르게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바가 있죠. 이 목적을 다른 말로, 추구하는 가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쉬는 날 근교에 있는 산을 오른다면, 그 사람은 건강또는 운동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똑같이 쉬는 날인데 하루 종일 집에서 잠을 잔다면, 그 사람은 또는 피로 해소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겠죠.

이처럼, 우리는 많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려움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지금 얻고자 하는 가치가 하나가 아니라 둘, 셋이라면 어떻게 하죠? 가치는 말 그대로 값어치 있는 것, 좋은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나쁨의 우열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내게 어느 가치가 더 먼저인가?’ 하는 우선순위, 곧 질서가 있을 뿐입니다.

몸이 약해서 운동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면, ‘건강이라는 가치가 더 우선하기 때문에 산에 가겠죠. 반면에, 건강한 편이지만 요즘 계속해서 피로가 쌓인 이라면, ‘이라는 가치를 우선시하여 집에서 쉴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몸이 약해서 운동을 통해 체력을 키워야 하는 상태인데,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기만 한다면 어떨까요? 몸이 약해서 힘들게 느끼고 그래서 쉬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쉬기만 한다면 그 선택이 이 사람에게 참된 도움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결국, 우선순위(질서)의 문제입니다. 흔히 세상의 가치복음의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나눠 세상의 가치 말고 복음의 가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가치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세상의 가치인 ’(물질)만 보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선조들에게 부의 축복을 내려주십니다.(창세 26,12-13; 잠언 10,22 참조) 건강, 명예, 성공 등도 마찬가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것도 우리에게 축복으로 내려주십니다.

문제는, 이 많은 가치 중 어느 것을 우선하느냐입니다. 어떤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하고 계시는지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영성심리 칼럼] 마음 다스리기

다른 데서도 종종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전에 신학교에 있을 때 매달 신학생을 면담했습니다. 그런데 학기 시작과 마치는 면담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있죠. 바로 영성 생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학생이 이번 학기에는 영성 생활에 더 마음 써야겠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학기를 마치면서는 이번 학기에도 영성 생활에 소홀했다.’라고 반성을 많이 하죠. 늘 반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새해가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새해를 맞아 세우셨던 결심을 잘 지키고 계시는가요? 하느님과 함께, 올 한 해 기쁘게 영성 생활을 해 나가야겠다는 다짐도 잘 세우셨나요?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복음 말씀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늘 있는데, 왜 잘 안될까요? 하느님을 닮고 싶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자기 모습을 돌이켜 보면 늘 부족한 것 투성이고 제대로 못사는 모습만 잔뜩입니다. 왜 늘 반복일까요? 영성 생활이 뭔지 잘 몰라서 어렵기도 하지만, 때론 잘 아는 데도 왜 그대로 살기가 어려울까요?

심리학을 동기의 학문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하는지, 생각과 달리 내 마음은 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그 이유와 동기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라는 뜻이지요. 심리학 하나로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도움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심리학적 지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일상생활과 영적인 삶이 별개가 아닌 하나의 삶이기 때문에도 그렇거니와, 일상생활이든 영적인 삶이든 그 삶을 사는 이는 같은 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적인 삶에는 성령의 이끄심과 은총의 작용이 더 분명히 드러나지만, 심리학적 지식을 통해 영성 생활을 잘해 나가기 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심리를 통하는 영성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이지요.

앞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볼 요량입니다만 먼저 도움 될 말씀을 하나 드린다면, 많은 경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든 영적인 삶에서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고 힘들 때,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 뭐였지?’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라고 물어보고 기도 안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면, 출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내가 정말 바라면 좋을 것,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을 찾게 될 마음이 생기죠.

새해 첫 달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또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정말 얻고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2)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성탄, 바오로딸, 2010, 109)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한 성탄 강론에서 동방 박사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전형이다. 마태오 복음서가 기술한 그대로 그들이 실존한 인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걸은 여정이 바로 우리 각자가 걷는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별을 쫓아 길을 나섰다. 그들은 익숙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더 좋고 진실한 것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길 위에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여행길의 이정표인 별이 사라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별이 자취를 감춘 곳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고 화려한 도성, 온갖 권력가와 지식인, 종교인이 운집해 있는 곳에 계실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기준에 맞추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느님의 길은 분명 인간의 길과 다르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고을 베들레헴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다시 나타난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베들레헴의 연약한 아기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엎드려 경배한 후 예물을 드렸다.

우리도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을 쫓아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평범하고 때로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아름답고 기쁜 수많은 일들로 가득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 그들과 함께 쓴 역사들, 맞닥뜨린 사건들과 경험들, 그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더 좋고 나은 삶, 더 진실한 삶을 찾았고, 우리의 별이신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

박사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가 걸은 길은 고뇌와 번민, 좌절과 절망, 위기와 역경, 실패 등으로도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더 힘을 내어 앞을 향해 나아가도록, 가진 짐을 내려놓고 우리의 기준을 버리게 하는 계기들이었다. 우리는 조금씩 가난을 배우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배웠으며, 화려한 도시나 권력과 지식이 아닌, 가난하고 소박한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용기를 내어 길을 걷는 법을 배웠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박사들의 여정은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별을 쫓아 하느님을 찾으며, 조금씩 하느님의 방식과 기준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분의 가난과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수용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런 자신과 하나 되심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들어 높임을 받았는지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 가고 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동방의 박사들과 함께 경배하며, 무한한 거리를 뛰어넘어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 오신 하느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우리 또한 당신처럼 별이 되는 여정을 걷도록 우리를 숭고하고 고귀한 존재로 들어 높여주심을 깨닫게 된다.

동방의 박사들이 걸은 여정의 마지막은 다른 길이다. “그들은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마태 12,12) 하느님을 발견한 후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더는 이전처럼 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박사들과 구유 경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리고 이웃을 더는 과거처럼 대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1) 놀라우신 하느님

저 위가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신부님,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우지 못해 냉담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죄고 짐이네요.” 많은 신자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가 자녀들 신앙일 것이다. 자녀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할 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할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그들이 정말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 혹시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상 속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지?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하느님 상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신부님, 신앙 때문에 갈등이 많아요.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왜 자연재해나 대형 참사가 일어나도록 하느님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서, 혹시 우리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나 깊은 산 연못 속의 산신령님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아기적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어릴 때에는 하느님을 대체로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그리지만, 시간이 지나 하느님과 친숙해지며, 그분을 무서운 분보다는 친구처럼 가까이 계신 다정다감한 분, 인생길에 동행하는 분으로 알게 된다.

누군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거나,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각자의 삶 속에서 만난다. 교회와 삶을 오가며, 우리는 조금씩 자기만의 하느님 상을 깨뜨리고, 교회가 알려주는 하느님을 알게 되며, 우리 삶 안에 살아계신 분으로 직접 만나게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크신 구원 계획안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직접 만나 알게 된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삶의 주인이자 목적으로 고백하게 된다.

해마다 성탄이 되면 우리는 허름하고 누추한 말구유에 누워 계신 한 아기 앞에 선다.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경배드리며 하느님의 탄생을 경축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하느님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느님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듯 저 먼 하늘 위에 머물며 우리를 내려다보는분이 아니라, 역사 안에 오신 하느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교묘히 피하시거나 인간의 겉모습만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 죽을 운명까지도 당신 것으로 하신 하느님이시다.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시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잠깐 왔다 하늘로 올라가시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 오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육화곧 인간의 육을 취하시고,(요한 1,14 참조) 인간과 하나 되는 방식을 택하셨다. 화려한 성전이나 궁전이 아닌 허름하고 위험천만한 마구간을 택하셨다. 화려하고 밝은 도시가 아닌, 어둠과 쓸쓸함이 뒤덮고 있는 우리의 일상 안으로, 그늘진 삶의 영역으로 들어오시기 위해서다. 인간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시기 위해,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간을 돌보시고 함께 운명을 나누시기 위해서다.

우리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누워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놀라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 각자가 성탄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놀라운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가? 그토록 놀라운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0) 하느님과의 숨바꼭질

아기 예수 찾아내기와 가난한 마음

화려한 성탄 장식으로 물든 도시와 거리로 나선 수많은 인파, 성당과 교회에 모여 미사와 예배에 참여하며 축하를 나누는 신자들, 그리고 화려한 도시의 축제 그늘에서 외롭고 쓸쓸한 밤을 지내는 사람들, 어두운 길가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새울 걱정을 하는 노숙인들. 매년 성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우리는 기쁜 얼굴로 서로에게 성탄을 축하하며 인사를 건네지만, 성탄의 깊은 의미는 헤아리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성탄을 축하해야 하는가?

성탄은 모든 이의 축제다. 누구에게나 성탄이 축제인 이유는, 성탄이라는 소식이 우리 안에 늘 어떤 희망을 솟아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희망이 아주 밝은 빛이든 저 멀리 캄캄한 밤을 거슬러 조금씩 밝아오는 여명과 같은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바로 거기에 성탄의 힘이 있지 않을까.

성탄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성탄의 빛은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어두운 삶에 더 희망차게 비친다. 그것은 성탄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가 아닌, 출산을 코앞에 두고 여행길에 오른, 여관방도 구하지 못한 가난한 신혼부부가 밤을 보내야 했던 어둡고 누추한 마구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성탄은 우리의 시선을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에 누운 한 아기를 향하도록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 어둡고 탁한 인간 삶에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아주 작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여기에는 두 개의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아기 안에 숨어 계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아야만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탄은 숨바꼭질이다. 인간을 찾아오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을 찾아 나서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며 모든 이의 이야기다. 복음서에 따르면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종교인이나 학자가 아닌, 밤을 새워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 동방에서 별을 쫓아 길을 나선 이방인들이었다.

이러한 정황은 우리의 하느님 관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다. 하느님은 겸손하신 분,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시다. 당신 것을 모두 버리시고 우리와 똑같이 되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쉽게 발견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화려한 궁전이 아닌 구유 속 아기 안에 숨어 계신 이유는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그리고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동방의 박사들이나 목자들처럼 가난한 이라야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린 과연 그러한 하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동방의 박사들이나 목자들에게 먼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들은 찾는 사람, 깨어 밤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직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엉뚱한 곳에서 그분을 찾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익숙한 곳에서만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세상일에 파묻혀서 찾지조차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것에 눈이 팔려 우리가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찾아 길을 나서라는 것, 그 길에서 가난을 배우고 구유의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라는 것, 그리고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 이것이 성탄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영성심리] 숨은 하느님 찾기

 

영성과 심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성은 곧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삶이며 따라서 각자의 삶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의 뜻을 잘 몰라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말뜻을 잘 몰라도, 이미 영성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니까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영성을 살아가는 것,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내가 알든 모르든, 혹 때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이것이 영성 생활의 기본입니다. 둘째는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는 것’, 셋째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식별하는 것그리고 마지막은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영성이 무언지 잘 모르더라도,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나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지금 나의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로마 8,5-17 참조)

그런데 이렇게 영성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만, 우리 마음이 뜻대로 안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 중에 자주 만나게 되는 걸림돌이 바로 죄책감과 죄의식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죠.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숨게 만드는 그릇된 죄책감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다가가게 만드는 건강한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의 움직임 자체마음에서 비롯된 행위 자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별을 잘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도요.

한 해 동안 주보에 연재했던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어떠세요? 나누어 드린 글이 여러분이 영성을 살아가시는 데에 도움이 좀 되었을까요? ‘아직도 영성이 뭔지 잘 모르겠다.’ ‘영성을 살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는다.’라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맨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영성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 분이라면 더 그러하시죠.

올해 영성 생활을 잘 못하며 살아왔다고 자책하기보다, 지나간 시간, 기억나는 사건들 안에 늘 계셨던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나와 함께 계셨으니까요. 나와 함께 하셨고 나의 행복을 바라셨던 숨어 계신 하느님을 더 많이 만날수록, 우리 마음에는 감사함이 저절로 우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2023년 한 해를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며 영원토록 당신 이름에 영광을 드리렵니다.”(시편 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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