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 줄지라도 날마다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닮는다는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에서 ‘믿는다’라는 동사(動詞)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믿는 것은 그냥 믿는 것이지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믿는다’라는 동사는 받든다, 신뢰한다, 따른다, 동의한다, 등등의 말들로 치환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서 ‘믿는다’라는 동사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진술과 명제가 참이며 사실임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동의한다,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인 누구를 믿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신뢰한다는 뜻이 강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매우 포괄적이고 다양한 뉘앙스를 지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신앙한다)’고 말할 때, ‘믿는다’는 동사의 의미는 머리(이성, 사유)로 안다는 것과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믿는다는 마음(가슴)으로 느낀다, 체험한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더 나아가, 믿는다는 몸(행동, 삶)으로 따르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마음으로(인격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예수님을 이 시대에 재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는다는 것은 닮는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설명에 의하면, 신앙(믿음)은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가톨릭 교회 교리서’, 155항)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앎(지식)과 하느님에 대한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 강조됩니다. 즉, 믿는다는 것이 주로 ‘안다’와 ‘동의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신앙은 하느님을 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안다’는 동사도 다양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안다는 것과 마음으로 안다는 것과 몸(삶)으로 안다는 것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머리로만 안다면 위선적이 될 위험이 있고, 마음으로만 안다면 변덕스러울 수 있고, 몸으로만 안다면 습관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맥락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 마음으로, 몸으로 아는 것은 다 포함합니다. 결국,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느님을 안다는 것 역시 하느님을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신앙인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일입니다. 복음서 전체에 예수님의 다양한 가르침과 모습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행복 선언은 그리스도인에게 신분증과 같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3항) 즉,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행복 선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행복 선언의 맨 마지막 선언(구절)은 앞의 일곱 구절들과는 대조됩니다. 가난, 온유, 슬픔, 의로움, 자비, 깨끗함, 평화라는 복음적 덕목들을 실천하면서 겪게 될 힘듦과 어려움에 대한 격려가 이 여덟 번째 구절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여덟 번째 선언은, 행복 선언의 내용에 따라 살면, 즉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면, 필연적으로 힘듦과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예언적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과 힘듦이 있습니다. 또한 그 삶의 모습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다 환영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산다는 것은 때때로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삶의 방식으로 사회에 도전을 제기하고 결국 성가신 존재가 되기까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0항)
십자가는 거룩함의 원천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산다는 것은, 즉 복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분명 행복하고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때때로, 아니 자주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편한 삶을 열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마태 16,25)이기 때문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0항) 물질적 번영과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불편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때때로 편안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길을 걷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정의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가 어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더라도, 그 십자가는 성장과 성화의 원천입니다.”(92항)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편한 삶에 대한 욕망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권력에 대한 야심과 세속적 이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1항)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세속의 사람 관계는 힘(권력)의 관계입니다. 권력 욕망은 단순히 정치적 지위와 명예의 자리에만 작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성찰과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다면, 사람의 모든 관계는 욕망이 빚어내는 힘의 역학에 의해 불평등적이고 위계적이 될 위험이 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 기득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여성에 대한 섬세한 이해가 없다면, 남성들은 잠재적으로(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성에 대해 차등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 관계에 작동하는 힘의 역학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피부색, 나이, 성별, 그(녀)가 가진 돈과 권력과 지위와 명예, 등등 숱한 요소들이 관계를 차등적이 되게 합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역학에 대한 섬세한 성찰과 반성의 태도를 갖는 일입니다.
사람은 이해관계가 형성될 때 그(녀)의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해관계가 없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에 대해 너그럽고 훈훈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우리는 계산적이 되고 이기적이 됩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결국 숱한 세속적 이해관계 속에서도 주님을 닮은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누구나 다 호감을 받고 싶어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힘의 역학 관계와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세속 안에서, 예수님을 닮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길이 항상 사람들의 이해와 인정과 환영과 환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피를 흘림으로써 박해를 당하든, 다른 교묘한 수단 곧 비방과 거짓말로써 박해들 당하든 오늘날에도 우리는 박해를”(‘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4항)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이 때로는 “오명과 의심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91항) 자본(돈)의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복음(신앙)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고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가끔 아니 자주, 예수님을 닮는 삶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에게 유난 떨지 말라고, (세속의 방식이 아닌 복음 방식을 택함으로써) 괜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지 말라고 힐난하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사는 것은 분명 기쁨과 행복이지만, 때로는 어렵고 힘든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실천적 거룩함
예수님을 닮는 거룩함
신앙인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덕의 소명은 신앙인의 의무이고 책임이며 당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다양하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성덕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권고문을 통해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문헌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성찰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거룩함, 성덕, 완덕 등의 개념을 자꾸만 종교적 특별한 경험과 업적으로 좁혀서 이해해 왔습니다. 순교와 영웅적 덕행들을 통해 거룩함에 도달하거나, 내면적 관상과 묵상을 통해 어떤 성덕에 다다를 수 있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또 아니면 어떤 종교적 관습과 행위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완덕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옆집의 성인들’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처럼, 거룩함은 일상의 삶 안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교황님께서는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덕의 소명은 전업적 종교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요청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황님께서는 권고문을 통해 우리를 거듭 일깨우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알고 동의하는 것이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재현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닮는 일이라고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실천적인 방식으로서 산상 설교의 내용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산상 설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거룩함의 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는 성덕에 이르는 길을 산상 설교의 여덟 가지 가르침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것, 온유한 마음과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것,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 정의를 갈망하고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 자비로운 마음과 행동으로 사는 것,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 숱한 오해와 조롱과 모욕과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 산상 설교의 이 여덟 가지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일상적 실천의 길이라는 것을 교황님은 강조합니다.
거룩함의 판별 기준
거룩함의 길은 다양합니다. 신앙인은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덕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가난, 온유, 공감, 정의, 자비, 정화, 평화 등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거룩함을 향한 다양한 실천적 행위들을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모든 행위들의 기준점은 마태오 복음의 최후의 심판 장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교황님께서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을 알아보라고 한 이 부름은 그리스도의 마음 그 자체, 곧 모든 성인이 닮고자 하는 그분의 생각과 선택을 드러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6항)
참다운 신앙적 행위, 거룩함을 향한 실천적 행위의 귀결은 이웃 사랑입니다. 물론 휴머니즘적 행위로서의 이웃 사랑이 자동적으로 신앙적 행위, 즉 거룩함의 행위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 행위는 이웃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말장난 같지만, 이웃 사랑 그 자체가 거룩함은 아니지만 거룩함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거룩함은 이웃 사랑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웃 사랑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거룩함은 거짓이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함의 인간적 차원
이웃 사랑은 모든 신앙인에게 요청되는 의무입니다. 변명과 핑계를 대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신앙인은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의 단호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7항)
거룩한 신앙인은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 아버지께 무한한 사랑을 받는 피조물, 하느님의 모상,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는 사람임을 뜻합니다.(98항) “모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생생한 인식 없이”는 성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98항)
인간의 존엄성이 경시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존엄성과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우리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산업 재해로 죽어가고 있어도 우리는 무관심합니다. 한국 땅에 와서 일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 알기를 귀찮아합니다. 여성의 존엄성과 인권을 위한 노력에도 점점 시큰둥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범위를 잘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경계를 넘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성덕은 일종의 무아경에 빠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96항) 성덕은 언제나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고, 그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거룩함의 사회적 차원
거룩함은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거룩함은 단순히 내면의 사유와 성찰, 관상과 묵상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언제나 실천적 행위의 차원에서 표현됩니다. 또한 거룩함의 실천적 행위의 차원, 즉 이웃 사랑의 차원은 단순히 선행을 베푸는 차원에 그치지 않습니다.
거룩함의 사회적 실천은 단순한 선행을 넘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데로 나아갑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99항) 우리는 흔히 거룩함을 개인적 차원과 내면적 차원으로 좁혀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거룩함은 개인적이고 내면적 차원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섭니다. 거룩함은 언제나 사회적이고 실천적 차원을 포함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셨듯이, 성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거룩함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캐나다 주교단의 성명서를 인용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의 사회적 차원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99항) 거룩한 신앙인은 자기 세대의 기득권 수호가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우리 주변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우리 삶의 핵심 태도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에 대한 설명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행복은 세상의 여느 것과 분명히 다릅니다. 물질적 풍요와 외형적 성취를 통해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 실천과 수행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우리가 고찰할 것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화를 위해 노력할 때 행복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사전적 의미에서 “전쟁과 갈등이 없는 평온함”을 뜻합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공동체와 공동체 관계에 갈등과 다툼이 없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오면서 절감합니다. 갈등과 다툼이 없는 상태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우리의 생은 늘 갈등과 다툼의 연속임을 우리는 압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다툼이 상시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였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과 인류의 역사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는 늘 평화를 갈망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사람들과 세상은 점점 더 평화로워지기보다는 갈등과 분열과 다툼의 모습과 태도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감정과 욕망을 강조하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점점 더 이기적이 되게 합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타인을 그저 한정된 재화를 둘러싼 분배의 경쟁자로 여깁니다. 이기적이 되어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점점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더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갈등적이고 분열적이 됩니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노력을 통해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인류의 평화, 동아시아의 평화, 한반도 안에서의 남과 북의 평화, 등등의 세계적, 국가적, 역사적, 민족적 과제로서의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흔들고 또 우리를 집중하게 하는 평화의 문제는 그런 거창한 과제라기보다는 자신과 그 주변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이루는 평화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화의 적들: 뒷담화, 험담, 중상모략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직 수행 초기부터 강조해온 것이 있습니다. 험담과 뒷담화에 대한 비판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갈등과 분열을 발생시키는 것의 대부분은 말에서 비롯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갈등의 원인이 되거나 적어도 오해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군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다른 데에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심지어 그 이야기를 각색하여 퍼뜨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7항)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말이라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일 수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어떤 것에 대해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한 판단과 말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들은 것, 소문으로 접한 것들에 대한 말과 전달의 문제입니다. 말은 건네지는 순간 변합니다. 말은 전달의 과정 안에서 항상 각색되고 편집됩니다. 모든 말에는 발화자의 감정과 해석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말을 통해 표현되는 객관적 사실이란 쉽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말의 전달 과정에서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해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위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힘듦과 어려움에 대해 전달할 때에도, “감정은 구체적 실재를 왜곡하고, 그 사실을 해석하여 변형시키며, 결국 주관성을 더해서”(88항) 전달할 위험이 있습니다.
언제나 말이 문제입니다.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해석을 통해 왜곡된 말, 이런 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갈등과 분열을 낳고 자기 자신마저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타인에 대한 가벼운 수다와 악의 없는 뒷담화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수다와 가벼운 뒷담화가 스트레스를 해소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수다와 뒷담화는 늘 험담과 중상모략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험담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담긴 뒷담화입니다. 중상모략은 타인에 대한 자신의 악의적 판단과 이기적 욕망이 실린 뒷담화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상모략은 폭력주의적 행동입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험담의 세계는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평화의 적들입니다.”(87항)
평화의 장인: 열린 정신과 마음의 소유자, 평정심과 창조성과 감수성을 가진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참으로 평화를 ‘만듭니다.’ 그들은 사회 안에서 평화와 우정을 다져 나갑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8항) 하지만 “복음적 평화의 건설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적 평화는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다소 이상한 사람,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 서로 다른 사람, 삶에 지친 사람, 그저 무관심한 사람조차 포용합니다.”(89항)
복음적 평화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치와 평화입니다. 복음적 평화는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평화보다는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평화를 지향합니다. 소수의 특정인들만을 위한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고 편의적인 평화와 일치가 아닙니다. 복음적 평화는 단순히 갈등과 분열을 무시하거나 은폐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직시하고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고 그것을 새로운 전진의 연결고리로 만드는 것이 복음적 평화입니다.
평화를 이루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평화를 건설하는 일은 평정심과 창조성과 감수성과 기술을 요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89항) 복음적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많은 복음적 덕목들이 요청됩니다. 갈등과 분열의 현장을 목격할 때, 우리는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고 감정적이 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하고 평온한 마음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고 복합적인 요인들로 구성됩니다. 정서적이고 심리적 요인,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요인, 경제적 이해타산의 요인, 정치적 힘과 권력관계적 요인 등이 작동됩니다.
이러한 복합적 요인들을 헤아리면서 갈등과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또한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는 마음들을 섬세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정과 정서를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람과 삶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조정할 수 있는 마음과 영성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깊은, 끈기 있고 부단한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곧 거룩한 사람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대
날은 덥고 코로나 사태는 여전히 수습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무감각해져 갑니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벌어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코로나 감염자가 세계적으로 천만 명이 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 시청하는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숫자와 구경의 대상으로 비칠 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실시간으로 타지역의 감염 상황과 소식을 알게 되지만, 그것들은 그저 가상의(virtual) 일들로 여겨집니다. 즉, 구체적 실감으로 잘 다가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실상보다 영상과 가상에 더 익숙합니다. 실제 모습과 실제 상황들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영상과 가상의 모습과 상황으로 변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일들에 생각보다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대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더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
사람은 생각하는(사유하는) 동물입니다. 역사 안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생각과 사유를 강조해왔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나도 감정이 있다 고로 나는 나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무엇보다 내 욕망이 중요하다.”입니다. 생각과 사유보다 감정과 욕망을 중요시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생각과 사유보다 감정과 욕망은 더 충돌적이고 이기적인 경향을 지닙니다. 내 감정과 내 욕망이 중요합니다. 타인의 감정과 타인의 욕망은 고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쟁과 충돌의 대상일 뿐입니다.
감정과 욕망은 본능적이고 충동적이고 일차적입니다. 생각과 사유는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고 이차적입니다. 타인의 사정과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사유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현대의 문명은 점점 생각과 사유를 위한 시간 여유를 잘 허용하지 않습니다. 설혹 시간의 여유(여가 또는 휴가)가 주어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 시간을 감정의 충족과 욕망의 쾌락을 위한 물질의 시간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여가 시간마저도 사유하고 성찰하는 정신의 시간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향유하는 물질의 시간으로 사용합니다. 물론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의 능력이 때때로 타인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감정의 변덕스러움은 금방 자기의 감정에만 충실하게 합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는 우리를 점점 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의로움에 대한 갈망
오늘의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마저도 획일화하고 이기적 쾌락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통제하고 조절합니다. 우리의 생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소중히 살피고, 우리의 욕망을 건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 안에는 분노와 혐오의 감정과 물질과 쾌락의 욕망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올바르고 건강한 욕망은 점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사회의 전체적 풍경은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에 “열렬히 정의를 바라고 의로움 갈망하는 사람들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7항) 있을 것입니다. 세상 구석구석에는 정의를 지향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와 신앙인은 무엇보다 의로움을 갈망하는 공동체와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속의 정의
오늘의 한국 사회와 정치의 장에서 자주 듣는 말이 정의와 공정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 안에서 정의와 공정이라는 말은 그 참뜻을 잃어버리고 그저 이데올로기적 선전구호처럼 여겨집니다. 모든 이의 정의가 아니라 자기들만의 정의, 모든 사람에 대한 공정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위한 공정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또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사회 안에서 정의는 자주 왜곡되고 조작됩니다.
“세상의 정의는 가끔 사소한 이해관계로 훼손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되고는 합니다. 우리는 세상 정의가 얼마나 쉽게 부패의 수렁에 빠지는지,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다.’는 일상의 정치에 얼마나 쉽게 얽혀 드는지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가 됩니다.”(78항) 경쟁과 정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있습니다. 이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참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승자들의 대열에 편승하기를 선택합니다.”(78항) 소수의 승자가 많은 것을 누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나고 배척되는 오늘의 사회 안에서 참된 정의를 실현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신앙의 정의
거룩함으로 불리움 받은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의 정의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는 것입니다.(79항) “참된 정의는 사람들이 각자 내리는 결정에서 의로울 때에 그들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79항)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정의란 개별적 차원에서 보면, 신앙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들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또한 공동체적(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선택과 결정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주교님들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의로운 것인지, 오늘날 본당 사제들이 본당에서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의로운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그 많은 선택과 결정들이 과연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의로운 모습인지,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정치적 선택과 결정, 경제적 선택과 결정, 사회적 선택과 결정, 문화적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끝없이 질문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들이 이념과 배제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혐오와 차별의 방식으로, 소비주의적이고 쾌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또 묻고, 성찰하고 또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저 종교의 영역에서만, 교회 안에서만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고 있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기 어려운 세상과 시대를 살고 있다고, 혼자의 힘으로 감내하기는 너무 힘든 세속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변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의로움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 거룩한 일일 것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여전히 세상은 어수선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물리친다 해도 또 다른 감염병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감염병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감염병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성은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대형 집회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대형화와 외적 성장을 추구해 왔던 교회들의 삶의 방식이 변할 것입니다. 미래의 신앙생활은 작은 공동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국의 어느 신학자는 예견하고 있습니다.
즉, 가까운 이웃에 살며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신앙생활 하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대형 집회를 형성하는 부흥회 형식의 신앙 모임은 아무래도 줄어들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작은 모임들이 확산되어 좀 더 큰 모임으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처음부터 대형 집회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의 작은 공동체 운동을 촉진시키는 역설적인 매개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슬픈 일들에 응대하는 신앙의 방식
살다보면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일들도 있고 슬프고 고통스런 일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피하고 싶습니다. 자기 삶 안에 기쁨과 행복만 가득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온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응대하는 방식을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자기 생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살면서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 유난스레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운 좋게도 평탄하고 기쁜 생을 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마냥 평탄하고 기쁜 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큰 질병과 큰 고통 없이 평탄하게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생을 살아갑니다. 운명의 질곡 속에서 혹독함을 겪는 사람도 있고, 순탄하게 자기 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우리 생의 운명은 차별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자신에게 왜 어떤 일들이 운명처럼 다가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다가오는 일들을 어떻게 응대하는가 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혼동스러워 합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이 혹시 하느님의 시험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범한 어떤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연 재해와 커다란 질병의 성행이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종교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인과응보의 논리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꾸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로 하느님의 섭리를 재단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섭리는 언제나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의 얄팍한 논리로 하느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복음과 신앙의 방식으로, 즉 예수님의 태도와 방식으로 응대하는 일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복선언 가운데, 역설적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선언입니다. 슬픔은 슬픔입니다. 슬픔이 기쁨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세속적인 사람은 가족이나 주변의 질병과 슬픔 같은 문제들을 외면하고 눈을 돌립니다. …. 세상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무시하는 편을 택하고 이를 덮어 두거나 감추어 버립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5항) 하지만 신앙인은 다가온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슬픔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슬픔을 발생시킨 상황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어디서든 십자가가 결코 없을 수 없”(75항)다는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슬픔을 수용한다는 것이 단순한 체념과 굴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픔을 견뎌내고 극복하기 위해 슬픔을 정직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값싼 동정과 거짓 위로를 구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위로는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 슬픔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 우리를 위로합니다. 슬픔은 슬픔만이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슬픔이 우리 생의 슬픔을 감싸 안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슬퍼하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구원 능력을, 십자가의 그 깊은 위로를 맛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고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은, 삶의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위로를 받습니다.”(76항)
슬픔의 연대만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것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고통과 슬픔보다 먼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헤아리고 공감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고통과 슬픔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깊이 깨닫는다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슬픔을 정직하게 수용할 줄 알고,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용기를 낼 수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해 달아나지 않습니다.”(76항) 참 신앙인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고 그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위안을 줌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찾”(76항)는 사람입니다.
슬픔만이 슬픔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즉 진정으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슬픔을 수용(공감)할 수 있으며 함께 슬퍼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연대는 깊고 큽니다. 슬픔의 연대만이 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함께 아파하니 모든 거리감도 사라지게 됩니다.”(76항) 참다운 친밀성의 공동체는 오직 슬픔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함께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의 신비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