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신앙 찾기] 아름답게 져 주기 연습 - ‘아빠는 딸’, 나는 네가 아니므로
감히 이런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기까지 무척이나 고심했다.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지, 부모의 책임이란 어디까지인지 아주 괴롭게 자문해 봤다. 실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도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너의 성장통, 나의 흉통
사실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나는 여전히 ‘부모’ 쪽이라기보다는 ‘자식’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읽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 또한 얼결에 부모가 되어 살고 있지만, 솔직히 정신적으로도 ‘부모’가 되어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벽에 부딪혔을 때, 이 나이를 먹고도 부끄럽게도 여전히 부모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고, 나도 이젠 부모라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곤 한다.
그런데 최근 내내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헤집게 했던 이가 딸이기 때문이다. 흔한 말로 ‘중2병’ 증상을 보이는 그 애의 복잡한 심경과 뜻밖의 행동들을 최대한 헤아려야 했다. 이게 어떻게 지난 14년간 보아 온 내 딸이란 말인가!
낯설다 못해 두려웠다. 다 내 탓이라는 자책감과 내 탓이 아니라는 변명 사이를 수시로 오락가락했다. 자식이라는 ‘너’의 성장통은, 나의 일상과 사고 체계까지 압도해 버릴 것 같았다. 자식은 어쨌든 가슴으로 이어져 있는 존재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 가지만을 바라게 되었다. 너의 방황이 나의 흉통으로 직결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다만, 서로를 갉아먹기 전에 잠잠해지기를 빌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회의에 빠졌다. 이 또한 나의 욕심일까? 아이가 원하는 것은 대체 뭘까?
그래도 이 문제를 피해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이 질문들 말고 다른 주제에 대해 집중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쩌면 이 또한 현재의 나에 대한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일단 쓰고 나중에 생각이 깊어지면 고치기로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코미디 영화를 보는 일은 기분 전환에 꽤 도움이 되었다. 실컷 웃고 적어도 두어 시간은 만사를 잊게 되니 말이다. 봄에 개봉한 우리 영화 ‘아빠는 딸’은 일단 재미있다. 역지사지라는 말을, 실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에도 적당한 영화였다.
‘아빠는 딸’, 최악의 바뀜이 불러온 기회
영화는 주인공 원상태(윤제문 분)와 딸 원도연(정소민 분)의 행복한 한때로 시작한다. 아빠 어깨에 목말을 탄 채로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거는 예닐곱 살 무렵의 딸. 약속 내용은, 커서 반드시 아빠랑 결혼하겠다는 맹세다. 이거야말로 어린 딸에 대한 아빠들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인가 보다.
딸의 야무진 목소리 “약속!”이 어째 환청처럼 지나치게 청아하다 싶을 즈음, 화면은 흔들린다. 혼자 청승맞게 ‘옛’ 녹화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아빠의 독백이 현재 시점이다. 아빠의 처량함은, 옛사랑을 휑한 가슴으로 추억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보는 순간 바로 웃음이 터진다. 다들 속아 봐서 잘 아는 농담이 아닌가.
딸은 이제 열일곱 살 여고생이다. 원도연은 사춘기 아니 반항기의 한복판이다. 부모와는 말도 거의 섞지 않는다. 엄마도 아빠도 도연이 눈치만 본다. 어느 날, 아빠와 딸은 시골 외가의 천년 묵은 은행나무 앞에 서게 된다. 엄마도 없이 둘이 입씨름을 벌이다 서로 화를 내며 내뱉는 말이 똑같다. “내 인생 딱 하루만 살아 보면 그런 말 안 나올 걸?”
영화 ‘아빠는 딸’은 일본 작가 이가라시 다키하사의 소설 「아빠와 딸의 7일간」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일본에서 2007년에 7부작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영화는 각색의 한 좋은 예라고 해도 될 만큼, 한국적 상황과 코드로 현실감 있게 재탄생했다. 이 작품은 흔하다면 흔한, 이른바 ‘보디 체인지’ 이야기다.
어쩌면 몸이 바뀌는 극단의 상상력 없이는 타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벼락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갑자기 몸과 영혼이 바뀐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전개를, 관객들도 이제는 ‘공감’을 끌어내는 장치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영화는 오해와 이해 사이를 오가며 웃음과 함께 관객을 설득한다. ‘아빠와 딸’은 몸이 바뀌는 것 중에서도 최악의 경우를 택했다. 47세 만년 과장 아빠와 열일곱 살 딸이라니, 도저히 수습 불가능한 조합이 아닌가? 딸이 입에 달고 사는 말처럼 “극혐”이 따로 없다.
아빠와 도연은 은행나무의 영험함 탓인지, 난데없이 교통사고 뒤 몸이 바뀐다. 당연히,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외할아버지 말씀이, 둘이 안 싸우고 7일간 잘 지내면 원상 복구가 된다는 게 은행나무의 전설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도리 없이 둘은 엄마에게 비밀로 하고 바꿔서 산다. 아빠는 등교하고, 딸은 출근한다. 서로의 핸드폰 속 정보가 이 난관을 헤쳐 나가게 해 줄 유일한 열쇠다. 일상은 순간순간이 예측 불허의 악전고투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꾸 엇나가는 사고만 생긴다. 그런데 이 모습이 볼 수록 재미있어진다.
배우 윤제문에게서는 여고생의 발랄함과 귀여움이, 배우 정소민에게서는 아저씨의 결단력과 중후함이 물씬 배어 나오기까지 한다. 관객도 어느 순간 이 둘의 영혼이 정말로 바뀌었다고 믿게 된다.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하지만 웃다 보면 어느덧 코끝이 찡해진다. ‘딸바보’지만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빠와 단절된 딸의 속사정을 들추면서 관객들에게 황당한 현실감마저 느끼게 한다. 영화 속 설정이나 대사들이 그럴듯할수록 웃다 찔리고 뭉클해진다.
분명 고교 시절을 우등생으로 살아 봤음에도 딸의 학교생활은 외계인의 나라처럼 기이하다.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고 큰소리쳤는데, 꼴찌를 맴도는 성적표를 받아들고 딸 앞에 민망할 뿐이다. 원상태는 자신이 그간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아저씨였던 듯 팍팍하게 살았음을 깨닫는다.
원도연은 아빠에게도 꿈이 있고 여린 감수성이 있음을 배우게 된다. 어른은 그저 나이만 늘어난 사람들이 아니며, 저마다의 책임을 용케 짊어진 이들임도 절실히 경험한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본디의 몸으로 돌려진다.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지라도, 둘은 이제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한다.
관객은 사춘기 여고생이나 중년의 부모나 ‘세상 귀찮은 나이’라는 동병상련의 처지에 미소 짓게 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속이 꽉 찼다. 다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줘야 어른이든 아이든 “인생 종착역은 어차피 치킨집”이라는 허무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관계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힘이 날 것이다. 그런 게 소통이 아닐까?
배려, 서로의 가치를 지켜 주기
딸 도연이의 관심은 온통 밴드부 선배 ‘지원 오빠’에게 가 있다. 아빠에게는 팀원들과 준비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 할 임무가 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얄궂은 운명의 장난으로 두 사람은 ‘대역’을 해내느라 진땀 흘리며 ‘진짜’의 맛은 빼앗겨 속상해한다.
딸이 귀히 여기는 게 있고, 아빠가 온몸을 바쳐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다만, 그것은 어쩌면 본인에게만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상대방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지점이다. 몸이 바뀌어 처지까지 바꿔 살아야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도, 깊이 이해할 수는 없었던 평행선일 것이다.
딸이나 아버지나 서로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은, 제발 나의 소중한 부분에는 손대지 말라는 점이다. 부디 내가 제자리로 돌아가 스스로 챙기게 될 때까지, 내 자리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간절한 바람이다. 실제로 자기가 옳다고 이기려고만 들면, 상대방의 ‘공간’을 파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지켜 주는 쪽이 훨씬 더 힘들고 어려웠다. 최대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야 했다. 상대방이 사수하려는 가치들을 지켜 주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내 고집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지 고민하는 것. 그런 노력이 아마도 ‘져 주는’ 연습일 것이다.
누군가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사실상 인간이 해내기 가장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예수님의 말씀이 요즘다라 퍽 가혹하게 들린다.
판타지가 아니어도, 영화 속 장면이 아니어도 ‘역지사지’가 아주 잠깐씩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사랑, 참 어렵다. 하지만 포기는 않으련다.
[영화 속 신앙 찾기] 꿈이 없다면, 꿈만 꾼다면, 라라랜드
꿈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 꿈이 없는 사회는 빛이 없다. 꿈은 삶의 동기이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 꿈이 얼마나 크고, 높으며, 아름다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에게는 저마다 꿈이 있기에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고통과 슬픔도 참아 낸다.
우리는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꿈은 간절하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고. 그래서 기도한다,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 인내와 행운을 달라고.
삶이 팍팍할수록, 희망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곳에서 꿈은 더욱 절실하다. 그리고 그 꿈은 이기적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 그 ‘무엇’으로 지금보다, 남들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꿈.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꿈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그 꿈이 모여 세상을 발전시키기도 하니까.
모두의 소원대로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하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까? 아마 우리는 더 큰 불행을 만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불평하고 절망한다. ‘그렇게 수없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주님께서는 왜 그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건가?’, ‘모든 힘을 다했는데도 왜 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꿈이다. 꿈이 기도와 노력만으로 모두 실현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누구나 꿀 수는 있지만, 모두 이뤄지지 않기에 꿈이다. 모두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않기에 주님이시다. 꿈이 아름다워야 하고, 신앙이 이기적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꿈의 가치는
꿈에도 선악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 되는지’에 있지 않다. 그 무엇으로 ‘어떤 것을 하는지’에 있다. 꿈의 가치는 나를 아름답게 만들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며, 이웃을 따뜻하게 하고,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찾는 것에 있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하느님의 길을 따라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라면 가장 미천한 자리도 마다하지 않았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미아(엠마 스톤 분)에게는 꿈이 있다. 지금은 비록 커피숍의 점원으로 일하지만 언젠가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품팔이 피아니스트에 불과하지만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에게도 꿈이 있다.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재즈를 멋지게 부활시키는 것이다.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라라랜드’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다. 아니 뮤지컬 영화이니 노래로 보는 영상이라고 해야 맞다.
꽉 막힌 고속 도로, 빽빽하게 멈춰 선 자동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노래한다, “내 꿈을 향해 나아가자. 때론 넘어져도 아침은 다시 오고 태양은 뜨니까.”라고. 그들 가운데 미아와 세바스찬도 있다. 두 사람은 추운 겨울, 꿈과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의 흐
름을 따르듯 사계절을 거친다.
겨울과 봄, 아직 꿈은 먼 곳에
꿈은 아직 저 먼 곳에 있다. 미아는 온갖 오디션에 지원하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세바스찬은 식당에서 사장이 요구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아닌 즉흥 재주를 제 맘대로 연주하다 쫓겨난다. 춥고 외로우며 우울하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나에게 날개를 달아 줄’ 사람을 기다리고, ‘불사조처럼 다시 날아갈’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둘의 겨울은 지나간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알 수 없지만 만나고 또 만나면서 연인이 될 것이란 사실도 모른 채.
세 번째 만난 수영장 파티에서 미아는 말한다. “이상하게 계속 마주치네요. 인연인가.” 남자는 부정한다. “내 스타일 아니에요.” “아무 느낌 없어요.” 그러나 봄은 이미 둘의 ‘사랑’을 싹 틔우고 있었다, 수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봄은 오고 있지만, 꿈은 아직도 팍팍한 땅속에 묻혀 있다. 여자는 오디션에 낙방을 반복하고, 죽어 가는 ‘재즈’를 나 혼자라도 지키겠다는 남자는 생계를 위해 잡동사니 연주나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세바스찬은 미아에게 1인극 대본을 직접 써서 연기하라고 용기를 준다.
연기와 재즈, 영화와 음악, 사랑과 꿈은 모두 판타지다. 그 속에서 둘은 제임스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을 보고, 길거리와 공원과 복도에서 ‘탑 햇’, ‘쉘부르의 우산’,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뜬 낭만적인 복고풍 춤을 추고, 밤하늘로 두둥실 떠올라 가 왈츠도 추면서 구름 위를 걷는다. 봄은 이렇게 그들에게 꿈과 사랑의 싹을 키워 주고, 희망을 속삭인다.
여름과 가을, 사랑은 가고 꿈은 오고
젊은 날의 사랑은 여름 태양 같다. 설레는 마음, 뜨거운 시선, 감미로운 목소리에 미칠 듯이 뜨거워진다. 그 사랑의 감정이 남자에게 잠시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자신의 꿈을 잠시 접고 미아를 위해, 돈을 벌려고 친구가 제안하는 밴드에 참여한다. “나는 안다, 우리 꿈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란 예감을. 그건 사랑이 원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위안한다. 여자를 위해 직접 감미로운 사랑의 주제곡까지 만든다.
그러나 여자는 안다. 아무리 인기와 돈을 얻고, 스스로 만족한다고 말해도 그 선택이 남자가 말하는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점점 다른 세상에 머물면서 음악도 사랑도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꿈을 버린 남자와 1인극에 도전했으나 참패해 꿈을 접은 여자의 사랑은 여름날 요란한 천둥을 울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끝난다, 그것이 진심이 아님을 알면서도.
세상은 그들과 같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도, 꿈도 실패와 좌절로 끝나고, 길 잃은 별들이 되는 그런 현실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까지 모든 희망을 접고 멈춰 버리게 하여야 할까? ‘라라랜드’는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딛고 다시 시작할 용기와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간직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도 우연과 운명을 통해 기회를 주신다. 그 기회를 얻은 미아가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볼 수 있는 색깔을 주고자 기꺼이 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던진 이모를 노래한 것은 자신이 배우가 되어 무엇을 하고 싶은 지에 대한 답이다.
다시 겨울, 꿈의 나라에서 꾸는 꿈
마침내 둘의 꿈은 이루어진다. 미아는 할리우드 스타가 되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이름을 딴 재즈 바를 운영한다. 그렇게 되기에 5년이 걸렸고, 그 긴 시간은 대신 둘의 사랑을 어긋나게 했다. 추운 겨울, 다른 사람과 결혼한 미아가 우연히 들른 세바스찬의 재즈 바에서 둘은 재회하지만 끊긴 사랑을 다시 이을 수는 없다. 미아에게 세바스찬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위해 만들었던 사랑의 주제곡 연주였다. 연주하는 세바스찬의 미소와 그 연주를 들으면서 슬픔에 젖는 미아를 위해 영화는 상상으로나마 행복한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과 가정을 그려 본다.
이렇게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앤젤레스(LA)의 별명이자,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나라인 ‘라라랜드’는 꿈은 얻고, 사랑은 잃는 것으로 끝난다. 왜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꿈과 사랑, 모두를 멋지게 만드는 ‘해피 엔딩’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라라랜드’에서는 꿈만 판타지로 선택했는지 모른다. 사랑은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상처와 아픔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너무 영화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 싫어서 하나쯤은 현실이라 말하고 싶어서이거나.어떤 선택에서 비롯했든 그것으로 ‘라라랜드’는 오로지 꿈에 빠진 영화에서 벗어났다. 꿈의 나라에서, 꿈처럼 꿈을 이루지만 사랑만은 꿈의 나라의 모습도, 꿈도 아니다. 그것이 달콤한 영화를 마지막에 씁쓸하게 만들지만, 더 깊게 다가오게 한다. 만일 그 사랑마저 꿈에 빠지게 했다면 꿈만 있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세바스찬이 “사람들은 왜 낭만적이란 말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라고 반문한 이유를 밝히기라도 하듯, ‘라라랜드’는 정말 1960-70년대 스타일의 음악과 춤과 노래를 낡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은 환상적 무대로 보여 주었다. 단지 보여주거나 대사를 대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으로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과 생각조차 자연스럽고 진솔하게 드러냈다.
음악도 춤도 인간의 진실을 표현할 때 시대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음악 영화도 어설픈 노래 연극이 아닌 드라마가 된다. ‘라라랜드’가 뮤지컬 영화로서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이유도 감독의 음악, 특히 재즈와 춤, 사람들의 꿈에 소중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꿈을 얘기하는 영화는 늘 주인공에게 묻는다. “너는 왜 그 꿈을 꾸는가?” 그 질문은 우리를 향한 것이다. 꿈꾸는 자는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 정말 꿈조차 꾸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영화 속 신앙 찾기] 돈에 대해 진짜 바라는 것들 - ‘마스터’, 현실과 영화 사이의 시소 타기
이것은 언뜻 누군가의 완벽한 ‘드라마’ 또는 ‘성공 신화’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거짓으로 이루어진 사기의 연대기다. 지난 연말 개봉한 조의석 감독의 영화 ‘마스터’는 건국 이래 최대의 사기극을 벌이는 원 네트워크의 대표 진현필(이병헌 분)과 김엄마(진경 분), 전산실장 박장군(김우빈 분)의 화려한 등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을 검거하는 동시에 비리의 윗선까지 소탕하려는 형사 김재명(강동원 분)과 지능 범죄 수사대의 활약이 펼쳐진다.
영화가 파헤치는 의문점은 하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피해자 수천수만 명의 계좌에서 흘러나간 3조 원이 별 ‘무리’없이 국경을 넘고 공중에서 ‘세탁’을 거쳐 한 개인의 사익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거의 마술에 가깝다. 실제로는 어이없게 종결되어 버린 ‘조희팔 사건’을 참고했다고도 한다. 숱한 권력 실세들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다.
돈은 왜 자꾸 모호한 숫자가 돼 갈까
새삼스럽게 돌아본다. 돈이란 무엇인가?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실은 거의 실감이 안 난다. 무엇보다 ‘조’라는 단위의 돈에 대해 감각이 무디다. 그게 얼마나 큰돈인지 어림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세종대왕이 그려진 1만 원권 지폐로 1조라는 돈을 쌓으면, 그 무게가 대체 얼마나 나갈지, 운반하려면 트럭이 몇 대나 필요한 것인지 부피와 무게에 대한 계산 감각이 없다. 10의 12제곱이라는 개념은 그저 머릿속에만 있다.
이미 돈은 개수나 무게나 부피를 가진 물체가 아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관념’이 된 듯하다. 돈에 지배받으며 돈에 찌든 풍조를 흔히 ‘물신주의’라고 일컫지만, 21세기 금융 자본의 시대에는 이 또한 들어맞지 않는 단어 같다. ‘물신’(物神)이 아니라 ‘신’에 가까워진 게 아닐까? 구체성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데도 과연 여전히 ‘물’ 일까? 모두 알(物)고 있다. 돈은 이미 사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마스터’는 새롭다. 이 영화의 미덕은 돈을 막연한 숫자가 아닌 구체적 실체로 보여 주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돈은 어느새 아무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 종류의 것이 되었다. 마치 원격으로 어디선가 오는 방식을 취한다. ‘플라스틱 머니’, ‘사이버 머니’ 등으로 돈의 이름은 계속 고안되고, 갈수록 ‘환상적’으로 진화한다.
돈을 만져지는 상태로 들고 다니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이제 돈은 다만 한순간, 어딘가에 잠시 찍혀 있다가 사라지는 부호일 뿐이다. 그나마 어쩌면 유일한 돈의 ‘기록장’이던 통장도, 폐기 절차를 밟고 있다. 일부러 귀찮음을 무릅쓰고 은행 창구에 가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어도 좋다는 식의 절차를 밟지 않으면, 통장 사용을 고수하는 일도 쉽지 않다.
돈은 점점 더 모호한 숫자들 속으로 아니 컴퓨터 화면 속으로 깜빡이다 사라져가는 점 같은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입력하고 ‘엔터’키를 치면 끝나는 게임 같은 것으로 현실감을 상실해 간다. 돈을 아무도 ‘세지’ 않는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에 ‘앱’으로 깔아 누구나 ‘통째로’ 들고 다니는 식이 되었다. 기업들은 편리함만을 광고한다. 그러나 안전에 관해 얘기하는 경우란 없다. 돈은 사이버상의 것이 되어 버렸다. 내가 사용자 또는 소비자일 때에 한해서는 그렇다.
그러나 피해자가 되었을 때 돈의 얼굴은 확연히 달라진다. 돈이 ‘갚아!’라는 명령어를 띠고 한 개인에게 다가올 때는 폭력 그 자체가 된다. ‘돈 사고’가 난 뒤의 상황은, 그야말로 원시적이다 못해 야만적이다. 피해자의 몸은 노예처럼 속박 당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사기의 그물망으로 돈을 깔고 거둬들이는 모든 ‘시스템’의 모든 절차 뒤에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금융 시스템이 숨기고 있는 진실이다.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단계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손이다. ‘보이지 않는 손’ 따위는 없다.
‘마스터’, 진동하는 돈 비린내의 향연
‘마스터’는 돈더미를 관객의 코앞에 들이밀 듯이 전개한 영화다. 그리고 금융 시스템의 국제적 맥락과 공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감도로 그리며, 말도 안 되는 그 연결 고리마다 대단히 탁월한 ‘창조적’ 전문가 집단이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절대로 ‘변종’이 탄생할 수 없다. 공부를 끝까지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마스터’하고도 모자라 완전히 대칭되는, 그러니까 (범죄적) 심연 판도라의 상자까지 열고 만 ‘달인’들이 대형 사기 사건을 움직이는 실체다.
평범한 사람이 접근하거나 위반하거나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모든 조감도를 굴리는 것도‘ 돈’이다. 돈은 뻥튀기가 되고 세탁되며 저수지가 된다. 물론 극히 적은 숫자의 ‘의뢰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돈 자체는 절대로 생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통화량은 정해져 있다. 사기 사건이 대형화될수록 피해자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해진다는 뜻이다. ‘조 단위’ 사기에는 별보다 더 많은 피해자의 이름과 계좌가 은하수를 이루고 있다. 피해자에게 그 돈은 한 장 한 장 세어서 갚아야 하는 구체적 살점이다. 무슨 사이버 신선놀음이 아니다. 최대한 환상적으로 보여야 하는 게 마케팅의 핵심이다. ‘마스터’가 응시하는 과녁은 그것이다.
희대의 사기꾼임이 드러나기 전 진현필의 직업은 ‘금융 스페셜리스트’이다. 대체 무엇이 그리 ‘특별’했던 것일까? 진현필의 특별했던 ‘신분 보장’에는 수많은 지폐 더미가 동원되었다. 그는 이른바 장부 관리의 도사였다. 그의 집에는 장부만을 위한 별도의 방이 있었는데, 어찌나 철통 보안 속에 고이 잘 모셔져 있는지, 그야말로 영화 속 세트 같다. ‘마스터’는 대단히 공들여 이 장부의 방을 꾸몄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이 어쩌면 이 한 권의 장부라는 듯이 말이다.
꼼꼼하게 손으로 기록된 장부에는 수많은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름별로 직통 휴대 전화도 따로따로 있다. 전화기는 한 번 사용하면, 사용 즉시 그 자리에서 폐기해 증거를 없앤다. 차명계좌와 대포폰의 관리는 그렇게 철저한 ‘스스로 꼬리 자르기’에 있다.
꼬리 자르기의 방편 중에는 살해도 있었다. 청부업자들에게 은밀히 연락해 ‘무제한 스페셜’을 주문하는 장면은 소름을 끼치게 한다. 우리가 뉴스에서 접한 어떤 죽음들이 겹쳐지기도 한다.
제자리로 돌려놓기의 가치
‘마스터’는 한국 영화 최초로 필리핀 도심을 통제하고 촬영했으며, 마닐라 대성당 등 볼거리도 풍성하다. 필리핀까지 진현필을 쫓아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목숨을 건 추격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영화 곳곳에서는 돈 비린내가 진동한다.
이 영화의 눈물 나게 뭉클한 결말은 (현재로써는) 완벽한 판타지다. 하지만 보는 동안 깨닫게 된다. 이거야말로 우리가 진정 원하는 바로 그것이다! 원천 무효, 돈이 흘러나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려지는 일. 그게 현실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다.
돈을 받은 자들은 돈으로 죄를 갚지 않는다. 돈을 빼앗긴 자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위에 돈도 얹어 내야한다. 때로는 사용해 보지도 못한 그 허망한 숫자들을, 모든 것을 바쳐 구체화해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규칙은 애초에 불공정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금융 감
독원’을 사용한 방식이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돈으로 된 ‘상품’이 ‘판매’될 때는 교환이나 환불도 얼마든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상품이다. 한 번 잘못 결정해 ‘독이 묻은 돈’을 골랐다가 파산당해도 하소연할 데조차 없는 현행 금융 시스템은, 한마디로 시장 논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천벌’이나 다름없는 식이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단 하나, 원천무효일 것이다.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그렇게도 불가능한 일일까?
영화 끝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은 보기 좋았다. 714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마스터’의 흥행 비결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우리가 정말 보고 싶은 세상은 어쩌면 단순하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권선징악의 해피 엔딩이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6).
[영화 속 신앙 찾기] 되돌릴 수 없는 되돌리고 싶은 시간
시간은 선(線)이다. 선은 흐름이다. 그 흐름은 누구에게든, 어디에서든 일정하다. 아무도 정지시키거나, 건너뛰거나, 늦출 수 없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벤자민’처럼 시간이 거꾸로 갈 수도 없고, ‘터미네이터’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멋대로 왔다 갔다 할 수도 없다.
시간은 차별하지 않는다. 언제, 누구에게나 같다. 지나간 시간은 ‘삶과 역사’를 만들고, 지금의 시간은 삶과 역사에게 ‘선택’을 준다. 때문에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삶을 다시 선택하고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삶과 역사를 뒤흔들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피카소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된다.”고 했지만, ‘시간 여행’만은 그 ‘모든 것’에 넣을 수 없다. 과거는 과거의 현재이고,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고, 삶은 그 흐르는 연속 위에서의 순간순간 선택의 결과이다.
시간 여행은 그 선택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시간 여행이란 욕망을 만든다. 그러나 어쩌랴. 삶도 시간도 두 번은 없다. 반복 또한 절대 불가능하다. 기억과 상처 또한 좋든 싫든 새로 만들거나 지울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생에 무슨 걱정과 고민이 있겠는가? 인생에 무슨 회한이 있겠는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프랑스 소설가 기욤 뮈소의 말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실수를 바로잡고 싶은지, 우리 인생에서 어떤 고통을, 회한을, 어떤 후회를 지워버리고 싶은지, 진정 무엇으로 우리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리라. 만족한 삶이나 후회 없는 삶이란 없으니까.
과거가 될 현재에 최선을
현재의 ‘내’가 과거로 돌아가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고, 그것으로 미래까지 바뀐다면 나는 지금보다 행복할까? 후회도 말끔히 사라질까? 자신할 수 없다. 그 새로운 선택과 삶에도 미련은 남을 것이다. 두 가지의 시간과 삶을 동시에 선택하고 가질 수는 없으니까.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인 팀이 과거로 돌아가기를 반복해 계속 다른 선택을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끝내 얻지 못하듯,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세상을 떠난 소설가 박경리 씨와 박완서 씨는 생전에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진 세월 다시 만나고 싶지 않고, 한 번 본 것 두 번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살고 싶지도 않고, 설령 간다고 해도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의 삶은 지나온 시간이 쌓은 것이다. 그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지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 여행은 인생에서 이미 결정된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이제부터 과거가 될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인생에 최고의 선택이란 없다. 어느 것이 최고인지 인간은 알 수 없다. 그것은 신만이 알며, 신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조금이라도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다. 인생에서 후회는 최고의 선택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을 통해
기욤 뮈소의 소설을 한국 영화로 만든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폐암으로 죽음을 앞둔, 50대 후반의 소아과 의사인 주인공 한수현도 최선의 선택을 다시 하려고 캄보디아 노인이 준 이상한 알약을 먹고 30년 전의 자신을 만나러 간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영화는 엘리엇에 한수현을, 그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여자’인 일리나를 최연아로 변신시키고, 시대를 6년 정도 뒤로하고,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플로리다를 서울과 부산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프랑스 재료로 우리 음식을 만들었지만 본디의 맛과 향기는 잃어버리지 않았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가 특별하고 독창적인 이야기와 구성을 가지고 있어 아무렇게나 변주해도 그 매력이 사라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기욤 뮈소의 소설이 영상 언어로 변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영화적’이어서도 아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의사로서의 사명감, 가족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희생, 친구에 대한 우정 등 그 안에 담긴 보편적 가치와 정서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지역과 인종, 시대와 종교의 벽이 있을 수 없다. 소설과 영화가 다를 수 없다.
영화는 ‘시간 여행’의 소설이 가진 약점이자 운명인 개연성 부족까지 받아들이고, 원작의 구성과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렇다고 차별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미국이 아닌 2015년과 1985년 한국의 정서를 꼼꼼히 묘사했고, 우리 현실에 맞지 않은 것들은 걷어냈다.
한수현에게 알약을 건네준 노인은 “삶은 당신이 잠들지 못할 때 벌어진다.”고 말한다. 그 삶을 다시 선택하려고 그는 잠을 자면서도, 잠들지 않고 30년 전으로 간다. 거기에서 그는 젊은‘나’를 만나고, 그에게 자신이 선택하고 걸어온 길과 다르게 가라고 말한다.
현재의 한수현과 30년 전의 한수현의 짧은 20분의 만남과 공존, 그것에서 오는 혼란과 놀라움,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두 사람의 소통이 이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새로운 선택을 더욱 아름답고 간절하게 드러내준다.
기억은 인간이 갈 수 있는 시간 여행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욕심이 많다.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을 통해 주인공이 과거를 바꾸면서도 그것으로 현재까지 무너뜨리지 않으려 한다. 비록 회한 가득한 인생이지만, 그 시간이 만들어준 현재의 ‘나’의 삶에도 너무나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회한도 없애고 소중한 것도 지키려고 영화는 절묘한 절충을 한다.
현재의 ‘나’는 30년 전 ‘나’와 힘을 합쳐 사랑하는 여인 연아를 살리고, 그녀만큼이나 소중한, 비록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현재의 딸인 수아의 존재도 없어지지 않게 하는 극적인 반전과 아름다운 마지막 선택.
수현에게서 이유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이별을 당한 연아가 교통사고(소설은 자살기도)로 결국은 과거 여행의 보람도 없이 목숨을 잃을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몽상에서 깨어난다.
이미 미래까지 결정된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현실’로 돌아오려 한다. 그러나 수현은 그것을 거부한다. 그것으로 시간 여행을 마치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수술)으로 그녀를 기어코 살리고 돌아온다.
시간 여행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다시 선택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그는 그렇게 했다. 함께 수술에 참여한 젊은 ‘나’는 30년 뒤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이미 그가 걸어가고 만들어 놓은 미래까지는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과거의 한수현과 현재의 한수현은 시간 여행을 통해 서로 만나 자신들에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연인과 딸)을 모두 지켰다.
그것으로 행복하다. 죽기 전에 과거에서 꼭 해야 할 일을 했고, 현재에서 지켜야 할 것을 오롯이 지켰으니까. 그래서 과거의 한수현은 미래의 자기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미래의 한수현은 “그 말은 내가 해야지.”라고 감사해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소중한 기억을 얻었다. 그 기억을 간직한 채 죽어가는 한수현은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을 때, 행복했던 때를 생각해. 그 사람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져.”
그 기억이야말로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 여행일 것이다. 누구나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다한 행복한 순간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살기에, 굳이 과거로 돌아가 바꾸지 않아도 우리의 인생은 아름답고 최선이다.
[영화 속 신앙 찾기] 판도라 - 희망의 두께
요즘 가장 ‘극적’인 분야는 뉴스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소식이 날마다 쏟아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뉴스와 픽션의 가장 큰 차이는 ‘개연성’이다. 뉴스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말이 되건 안 되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실은 뉴스 또한 일종의 ‘후일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가장 극적인 것은 아닐까? 극적(劇的)이고 극단적(極端的)이다. 현실이 상상력의 세계를 압도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판도라, 이미 ‘극적’인 재난 영화
영화는 최대한 여러 각도에서 개연성을 검토해야 하는 매체다. 관객을 가장 열심히 설득해야 하는 매체 특성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연말 개봉한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는 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개연성의 영역이 아니라 그냥 현실처럼 비치기까지 한다. 이 무지막지한 선택을 현실의 영화 개봉으로 성사시킨 제작진의 뚝심과 열정이 놀랍다.
과장이 아니라, 이런 영화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이 이미 폭발한 바 있는 일본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영화 ‘판도라’ 예고 영상에서도, 한 일본인 관객이 눈물을 참으며 “이런 영화를 만들어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참사 당시에도 그 뒤에도, 정작 일본 정부는 여전히 ‘후쿠시마’에 대해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핵 발전소 폭발 직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 ‘온화한 일상’(2012년) 등을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국민을 속이고 사고 자체를 묻어버리려 하는지 느낄 수 있다.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덮으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떠한 대처도 하기 힘든 개인들의 파괴된 삶이 ‘닫힌 사회’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온화한 일상’에 제작비를 댄 사람들의 이름은 철저히 비밀이고, 배우들도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출연했다고 한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끊임없이 방사능 간접 피폭을 우려하는 것만도 괴로운데, 더 나아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이지만) 경고하는 영화가 나왔다. 참으로 절묘한 개봉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우리 땅에 밀집해 있는 노후된 핵 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국민이 많은 대신, ‘판도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배급망을 통하여 전국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상영했으며, 심지어 흥행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이미 관객 4백만 명을 훌쩍 넘었다.
기계도 사람처럼 수명이 있다
솔직히 영화관에 가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원전을 다룬 일본 영화들처럼 ‘재난’은 말로만 나오는 수준의 구성이 아니라, 거대한 세트를 짓고 핵 발전소 폭발 장면과 온갖 위기를 초대형 규모로 보여주었다. ‘대작 재난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목이 조일 듯한 초반의 긴장감과 조바심을 풀어주며 눈물에 푹 잠기게 한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는 동안, 무언가를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의지가 솟구친다. 뭐라도 붙들고 살아남아야 한다. 당장 꺼야한다, 저 꺼지지 않을 불의 도화선이 점화되기 전에! 지금 당장!
영화 ‘판도라’의 내용은 어쩌면 단순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초유의 재난 앞에 한반도는 일대 혼란에 휩싸이고, 믿고 있던 통제탑마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사능 유출의 공포는 점차 극에 달하고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2차 폭발의 위험을 막으려고 발전소 직원인 재혁(김남길 분)과 그의 동료들은 목숨 건 사투를 시작한다. 기계도 사람처럼 수명이 있다. 특히 핵 발전소는, 정해진 수명을 다하면 반드시 사고로 이어진다. 절대로 ‘안전’하지 않으며 예외란 없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감히 그 지옥 불 속에서 희망을 건져올린다. 그 꺼지지 않을 불 속에서도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 눈물겹게 그려낸다. 한 가닥의 희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녀린 개개인들이 나 아닌 타인을 위한 절대적 소망으로 자신을 희생하려 할 때, 희망은 놀랍도록 두터워진다.
희망은 한번 뭉쳐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확인’되고 나면 삽시간에 불어난다. 희망의 두께는 종종 그 속으로 몸을 던진 이들조차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로 두터워진다. 그 두터움이 모든 것을 재편시킨다. 기어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다.
절망이 희망으로 몸을 바꾸는 순간
희망이란 어쩌면 구체적 감각이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시간을 입혀 숙성시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다림인지도 모른 채 기다리고, 그것이 희망인지도 모른 채 희망하는, 더디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얻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절망의 ‘바닥’을 짚었을 때 비로소 헤아려지는 간절함일 수도 있다.
아직은 이 땅을 딛고 살아야 하는 우리가 감내해야 할 몫은, 어떠한 희망도 버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희망을 가져도, 희망을 버려도 어차피 시간은 간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희망은 아무리 가느다랗더라도 질기다. 희망이 실체가 되려는 구체적 조건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그 질김의 속성을 믿고 끝내 도달해 보겠다는 용기가 아닐까? 가늘지만 질긴 그 끈이 내 손에 잡힐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은 그토록 희망의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의 증거를 조금이라도 보여주신다면, 믿음의 증거 또한 보여드리겠다는, 또는 보여드릴 수도 있다는 식의 조건부 기도를 감히 청하고 애걸하고 그러다 지쳐 쓰러져간 기록들이 성경을 채우고 있다. 인간의 나약함과 절박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음을 스스로 저울에 달았고 눈금을 재가며 제풀에 지쳐갔다. 그것을 벗어나 다른 식으로 희망을 품어보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절박함에 기초한 조건은 희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절망에 이미 기울어져버린 조건이다. 곧 패배할 것을 아는 이들의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은 깨달음 이후에 또 기록하였다. 믿음과 희망은 구체적인 ‘경험’의 문제다. 자신의 삶 안에서 발견하고 느껴지는 것이어야 한다.
희망이란 순차적인 조건과 단계를 거쳐 도출되는 게 아님을 영화 ‘판도라’는 새삼 일깨운다. 희망은 실상 이미 내재되거나 장착되어 있는 것 가운데 (숨어)있었다. 다만 그게 희망인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보았을지라도 배제했다. 배제할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산처럼 쌓인 보고서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새로운 각오였다. 그 각오를 향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도망도 겉으로는 마치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는 증명한다. 도망쳐봤자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두려움이 서로를 꼼짝하지 못하게 가두기에, 그저 밟고 밟힐 뿐 아무도 도망에 성공하지 못한다. 나 혼자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각오를 서로 다질 때만, 한 줄기 길이 비로소 열린다.영화 ‘판도라’를 본 뒤 오래도록 의구심을 가졌던 로마서의 구절을 다시 찾아보았다. 어쩌면 희망이야말로 선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유혹에만 머물지 말고 더 큰 데를 바라보라는 비유가 아닐지 요즘 깊이 생각 중이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