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세상보기] 우리 아이들의 마음 고생
우리나라에서 가장 극한 직업은 무엇일까요?
올해 초 천육백만 명이 넘는 관객수를 기록한 ‘극한 직업’이란 영화가 있었지만 우리 학생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늦은 밤에 퇴근하고, 퇴근 후에 잠도 마음껏 자지 못하고 야심한 밤까지 야근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매일 반복해서 해야 하니 얼마나 힘든 직업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남들과 비교당하고, 비난받고 더 열심히 일하기를 강요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생들의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꼴찌에 가깝습니다. 이런 청소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더 험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치솟는 청년실업으로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에선 망했다)’이라는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닥칩니다. 학업과 장래에 대한 높은 부담감이 짓눌려 지내야합니다. 이로 인해 청소년들은 학업 스트레스, 학교폭력, 인터넷 중독, 방임, 사이버 폭력에 시달립니다. 문제는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8년 청소년들의 자해와 자살이 유행처럼 번져 갔습니다. 청소년 SNS에 ‘자살·자해 인증 샷’이 확산되면서 초등생에까지 번져나가게 되었습니다. 2018년 통계청·여성가족부의 통계를 보면 청소년 사망 1위가 자살이었으며 청소년 자살, 자해 시도자 수가 매년 2천명 이상 유지한다는 중앙응급의료센터 2017년 자료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청소년들은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자해와 자살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자해는 자살 목적보다는 고통으로부터 잠시 도피하고 싶은 욕구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죽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자해 청소년 대상 심층 인터뷰 자료를 보면 크게 두 가지 가족요인과 학교요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자신의 몸 망가뜨려 부당한 삶을 세상에 알리려 해
가족요인을 보면 부모님 맞벌이로 같이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거나, 부부갈등으로 인한 무관심, 나에게 관심 없이 각자의 삶을 사는 부모, 도움이나 상담을 받고 싶은 마음을 무시하는 가족, 가족 앞에서 자해를 했지만 방관, 무조건 나를 비난하는 부모, 힘들다고 말했을 때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는 부모 때문에 자해를 선택한다고 청소년들은 답하고 있습니다. 학교요인으로는 어려운 수업을 따라 갈 수 없는 답답함, 공부를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경험, 왕따, 학교 폭력 등 이제 학교가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삶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자해 행동은 나를 처벌하기 위해, 또한 화가 나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나의 힘듦을 보이기 위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공감을 받지 못할 때, 다른 사람에게 앙갚음 하려고, 특히 더 이상 감정을 누를 수 없어서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자해를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이 생애의 부당한 삶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네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학교 운동장도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운동장이 있다하더라도 동네 어른들이 점유해버리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한창 뛰놀고 커야할 아이들이 부모들의 욕심으로 빽빽한 학원 스케줄에 쫓겨 편의점에서 컵라면, 김밥, 햄버거를 먹어야 합니다. 초등학생의 혼밥족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우리 어른들이 이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 핸드폰입니다. 자신의 불안, 우울, 분노, 억울함 등등 자신이 모르는 그러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스마트 폰의 게임 속으로 들어갑니다.왜 이렇게 아이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을까요? 이것이 청소년들의 잘못된 행동 탓일까요? 얼마 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SKY 캐슬’ 드라마에서 보여주듯이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가치가 권력과 돈으로 평가되면서 권력과 돈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에서 부적응 자가 되었고, 이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가르쳐 준 것은 남을 짓밟아 권력을 잡고, 돈을 많이 가지는 방법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어른들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을 불신하고, 미워하면서 반항하고, 그러다 학교 부적응자가 되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고 맙니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청소년들에게 씌웠던 절망의 굴레 다시 벗겨줘야
서울대교구 청소년국 주최로 “가톨릭은 청소년을 사랑합니다”라는 주제의 2019년 청소년 심포지엄이 5월에 청소년법인 20주년을 맞아 3차로 진행되었습니다. 청소년의 위기, 주일학교의 위기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교회가 새롭게 청소년들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청소년 사목의 새로운 사목방향을 찾기 위한 심포지엄이었습니다. 1차에는 “청소년 교육환경과 사회적 보상 체계”, 2차에는 “청소년사목의 현실과 방향”, 3차에는“청소년 아웃리치”로 정해 학교 밖 청소년 사목, 찾아가는 사목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청소년 담당 정순택 주교님은 개회사에서 “‘약동하는 생명과 기쁨의 존재’로서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청소년에게 부여하신 고유의 본성이라면, ‘서로 경쟁하는 가여운 존재’로서의 모습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에게 부과한 아픈 굴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본래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대로 밝고 희망찬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에게 씌웠던 절망의 굴레를 다시 벗겨 주어야 합니다. 교회와 사회가 함께 힘을 합하여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처한 제도적인 환경을 실질적으로 개선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청년사목의 개혁안을 다룬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젊으신 분이시기에 너그러운 봉사와 선교 사명을 통해 젊은이들과 동반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전쟁과 인신매매, 성적 착취, 여러 가지 형태의 중독 등 젊은 자녀들이 처한 현실 앞에서 함께 울어주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찾아’ 모으고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공명정대한 사랑의 언어 등을 실천하고,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대중 친화적인(popular) 청년사목’을 펼칠 것을 주문했습니다.
끝으로 김현수 선생님의 책 ‘요즘 아이들 마음고생의 비밀’에서 아이들이 바라는 어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아이들은 따뜻한 어른과 만나길 바랍니다. 바쁘고 차갑고 채권자처럼 구는 어른은 사양합니다.
–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말해달라고 합니다. 망했다고 하지 말아주세요
– 누군가에게라도 한 번쯤은 괜찮은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 진짜로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달라고 합니다.
– 잘난 척 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어른부터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이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게 하는 첫 번째 일입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6월은 우리 민족에 가장 아픈 달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남과 북은 철천지원수가 되어 미움과 증오 대결을 넘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적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전쟁을 대비해 엄청난 국방비를 들여 군인을 양성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천문학적인 무기를 도입합니다. 남북의 극한 대치 속에 더 강한 군대, 더 강력한 무기가 우리를 지켜주고 안보를 튼튼하게 해서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반공의 믿음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한미동맹을 통해 미국이 우리를 지켜 주리라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항상 북의 위협에 대한 불안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에 비해 몇 십 배의 방위비를 쓰고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이 옆에 있는데 우리는 왜 전쟁의 불안 속에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원합니다. 다만 그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고, 이를 어떻게 유지 할 수 있는가에 있어서는 저마다 자신들의 입지에 따라 다릅니다.
군대 없는 나라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평화를 위해 과감하게 군대를 없앤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남북이 대치중인 나라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 세계에 군대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가 24개국이며, 전시에도 징병제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는 캐나다, 인도 등 4개국입니다.
군대가 없는 나라 중 대표적인 나라가 코스타리카입니다. 코스타리카가 1948년 12월1일 군대를 폐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전의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1948년 2월 선거 결과에 동의하지 않은 독재자를 타도하기 위해 내전이 벌어집니다. 비록 독재자를 끌어내기 위한 내전이었지만 44일 만에 약 2000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재자를 끌어내고 대통령이 된 피게레스는 끔찍한 내전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코스타리카 내에서 군부 조직의 정치 개입, 무력의 오용을 막기 위해 군대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고 1949년에 군부 해산이 헌법에 공식적으로 명시되면서 군대는 합법적으로 폐지 절차를 밟게 되었습니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예산을 쓰는 대신, 공공 교육과 의료에 과감하게 투자함으로써 국민들의 복지를 향상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상처와 갈등이 많았던 국민들은 교육과 의료, 복지를 통해 국민들의 상처를 씻어 내고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도 높아져 정부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평화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습니다.
‘군대를 버린 나라-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에 보면 일본인 평화활동가가 초등학교를 찾아가서 6학년 한 학급에 들어가서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평화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자 6학년 대표가 손을 들고 주저 없이 답변을 합니다. “평화는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생태입니다.”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던 것은 이미 1학년 때부터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교에서 철저히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1980년 중후반에 집권한 코스타리카 아리아스 대통령인은 1987년에 ‘아리아스 평화플랜’을 성사시켜 중미5개국 평화협정을 이끌어 냄으로써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아리아스 대통령은 평화와 안전이 대규모 군사 시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육, 직업, 건강에서 온다는 사실을 전 세계인들에게 알리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코스타리카는 세계에서 ‘주관적 행복도가 가장 높은 나라’ 1위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종식, 진정한 평화는 적대간 무기 경쟁에 있지 않아
성경에서도 끊임없이 군대와 강대국에 의지하지 말라고 예언자들은 경고합니다.
이사야가 생존했을 당시, 유대왕국에는 내전과 외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며, 아시리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공격 당하여 유대왕국이 존폐의 기로에 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전란의 와중에서도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2,4)
모든 전쟁의 무기를 농사도구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죽임의 무기들을 생명살림의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전쟁을 위한 연습과 훈련을 모두 중지하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의 종식, 진정한 평화의 정착과 유지는 적대간 무기 경쟁에 있지 않습니다. 서로간의 힘의 경쟁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죽임을 위한 전쟁의 무기들을 없애는 것만이 평화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군마에 의지하는 자들을 불행하다고 선언합니다. “불행하여라,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 군마에 의지하는 자들! 그들은 병거의 수가 많다고 그것을 믿고 기병대가 막강하다고 그것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을 찾지도 않는다.”(이사 31,1) 특히 이사야는 이집트의 군사 원조를 구하러 가는 이들을 비판하며 이집트의 군마는 영이 아니라 “고깃덩어리”라고 말합니다. (31,3)
호세아 예언자도 이사야 예언자처럼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호세아 14,4) 이 절에서는 군마를 타는 것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같은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
이처럼 예언자들이 바라보는 평화란 가난하고 억눌린 이, 소외된 약자들이 더 이상 짓밟히지 않는 세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회 기득권자들의 불법과 불의가 사라지는 세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정의와 공정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각 민족들 간의 모든 분쟁들을 종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청와대에서 한 연설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강조했습니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대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지난 4월27일은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 선언’을 한 지 1주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판문점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종전선언을 통해 전쟁을 끝내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서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군사적 긴장 해소와 신뢰의 실질적 구축을 위해 단계적 군축을 선언하였습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 중인 한국 정부의 노력을 강력히 지지한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며 한반도의 평화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판문점 선언 1주년이 모든 한국인에게 평화의 새 시대를 가져다주기를 기도한다”며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또한 “인내심 있고 끈기 있는 노력으로 화합과 우호를 추구함으로써 분열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다”며 “이번 기념행사가 일치, 대화, 형제적 연대에 기반한 미래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희망을 모두에게 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물결이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 내에서 더 이상 대결이 아니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아도 되는 날이, 평화의 세상이 빨리 오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오월의 어머니 마리아
오월하면 “맑은 하늘 오월은 성모님의 달……”을 흥얼거리며 아름답게 봉헌했던 성모의 밤이 떠오릅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에 곱게 옷을 차려입고 아름다운 성가 속에 묵주기도를 드리고 꽃과 초를 봉헌하며 성모님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아름다운 밤입니다.
특히 신학교 성모의 밤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서서히 어두워짐과 함께 아름다운 조명이 성모님을 비추는 가운데 기도와 성가와 성모님께 바치는 글과 함께 꽃과 초가 봉헌됩니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모의 밤이 슬프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던 80년대 초중반 시대는 암울하고 무자비했던 군사독재시절이었습니다. 특히 5월이면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3학년쯤으로 기억되는데 그해도 밖에서는 학생들의 함성과 함께 최루가스가 신학교 마당에 흘러 들어오는데 신학생들은 성모상 앞에 모여 아름다운 성모의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치고 잡혀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고 성모님께 아름다운 편지와 기도를 드리는 성모의 밤이 부끄러웠고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아들을 잃고 가장 아팠던 생을 사신 분인데 우리는 그것은 잊어버리고 천상의 어머니, 영광의 어머니 마리아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마리아의 모습은 강한 여성, 시대에 순응하고 맞춰간 여성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고통을 겪은 여인이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이 성무일도 저녁기도에,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의 ‘마리아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1-55)
마리아의 노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염원이 담긴 노래
아름답게만 들리는 이 노래는 사회, 정치, 경제의 변혁을 노래합니다. 교만한 자들을 흩고, 높은 사람은 낮추고 낮은 사람은 높이고,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실제로 ‘마리아의 노래’는 당시 이스라엘 민중들이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담긴 노래라는 것이 일반적 통설입니다. 그것을 루카복음서 저자는 ‘마리아의 노래’로 기록하여서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를 예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빼앗기고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 수탈당했습니다. 당시 지배층들은 백성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강대국의 붙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고, 당시 지식층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자기 백성을 무식하고, 율법을 어기는 개, 돼지만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개, 돼지 취급당하며 천덕꾸러기 취급당하던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의 마지막 희망은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켜 주실 메시아를 고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염원이 담긴 노래입니다.
마리아는 어린 처녀의 몸으로 자기의 생명을 걸고 천사의 말을 받아들이고 순명합니다. 역사의 부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당시 여성으로 주어진 당연한 길에서 벗어나 아기를 통하여 올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당시 이 노래의 의미와 민중의 열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리치시고 보잘것없는 자들을 높이시는 정치혁명, 배고픈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는 하느님의 경제혁명에 대한 기대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하느님의 나라를 노래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회변혁을 통해 평등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염원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복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산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자리에 아들을 눕혀야 했고, 출산을 하자마자 헤로데의 죽음의 손길을 피해 난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요즘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향과 나라를 떠난 난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가정의 경제를 담당해야했던 남편인 요셉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아는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생활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키운 아들이 이제 집을 떠나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합니다. 들리는 소문은 좋지 않습니다. 위험한 인물로 찍혀 감시와 사찰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는 당시 지배계급과 기득권들에게 대립하고, 날을 세우면서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과 함께 하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결국 다 장성한 아들이 국가반역죄, 국가 전복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수가 되었지만 힘없고 빽없는 촌로의 어머니는 아들을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국가 반란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앞장서서 구명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제자들마저 다 도망간 상태입니다. 누구하나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반란을 꿈꾼 사형수의 어머니 마리아… 빨갱이의 어머니… 친척들마저 거리를 둡니다. 결국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만 봐야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미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마리아는 차갑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죽음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픔과 절망을 딛고 슬픔을 뛰어넘어 제자들과 함께 아들의 뜻,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 살아있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평등한 세상, 하느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이제 또 다른 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아들이 다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이제 마리아는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마리아의 부활입니다.
우리 시대의 성모님을 알아보고 만나면 더 의미 있는 성모성월
실제로 주변에서 굴곡의 세월에서 많은 어려움을 딛고 살았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들에게 죽음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편지와 수의를 보냈던 안중근 도마의 어머니 조마리아, 7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울부짖음과 진상을 밝히기 위해 수 십 년을 싸워 오신 분들, 또한 민주화 과정에서 젊은 자식을 잃고 자식이 다 이루지 못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피눈물 나는 세월을 싸우며 살아오신 민가협 부모들, 최근엔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의 성모님을 떠 올려 봅니다. 최근 위험의 외주화로 죽음으로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인 태안 서부발전소 고 김용군 노동자의 어머니가 떠오릅니다. 다시는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기 아들처럼 죽지 않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비롯해 산업 현장의 안전규제를 대폭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일명 ‘김용균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우리 시대의 부모님들은 자식을 잃고 통곡했지만,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더 이상 이 같은 죽음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생명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는 평등과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자식을 얻고, 더 넓은 세상을 위해 마음 쓰시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힘을 얻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 되셨습니다. 아픔을 딛고 다른 이들에게 힘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변하신 분을 ‘복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그런 분이십니다.
오월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우리 시대의 성모님을 알아보려하고 만나 뵐 수 있으면 더 의미 있는 성모성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가짐 없는 큰 자유, 부활의 삶
사순과 부활시기입니다. 본당사목을 할 때 사순절 특강과 공동보속에 대해 교육분과장과 논의를 하였습니다. 공동보속에 기도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어떤 보속이 좋겠냐는 의견에 ‘냉장고 비우기’를 제안해주셨습니다. 외국에서 생활경험이 있으셨던 분이신데 외국에서 냉장고 비우기를 보속으로 해보았는데 힘들긴 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순시기동안 만이라도 장을 덜 보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부터 다 비우면서 소비를 줄여 쓰레기를 줄이고 나눔을 실천해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그 이후 본당을 떠나 빈민사목을 하면서 선교본당에 온지 2년 반이 되었습니다. 꽤 넓은 공간에서 남이 해주는 밥과 빨래와 청소에 의존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제생활 25주년과 함께 빈민사목으로 옮기면서 자취생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밥과 빨래와 청소를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밥하는 것도 서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혼자 밥을 해먹는다고 하니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몇 분은 냉장고가 너무 작고 낡았으니 좀 큰 것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고 유혹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냉장고가 크면 클수록 음식물도 더 많이 저장하고 못쓰고 버릴 것 같아 바꾸지 않았습니다. 냉장고는 금방 가득 찼습니다. 냉장고를 비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것 먼저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어오는 음식으로 거의 채워져 있습니다. 가끔 냉장고가 비워져 빈공간이 생기면 작은 기쁨을 맛보기도 합니다. 꽉 차 있는 냉장고는 내 마음의 욕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혼자 밥을 해먹으면서 냉장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냉장고가 사라진다면 어떨까? 냉장고 없이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전에 교육방송에서 방영한 ‘냉장고 없이 일주일 살아보기’라는 프로그램을 본적 있습니다. 냉장고 없이 산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는 세상입니다. 프로그램에서 두가정의 일주일 체험을 통해 가족들뿐만 아니라 저 역시 새롭게 느끼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나의 소비 생활은 결코 이웃의 삶과 생태계와 무관하지 않아
대형마트의 등장에 따라 냉장고는 대형화되어 과잉 저장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루가12,18) 말씀처럼 더 큰 냉장고에 많은 음식들을 저장합니다. 그로 인해 추가로 발생하는 전기요금과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 양도 늘어납니다. 대형마트와 냉장고의 연결고리로 인해 잃게 되는 경제적 손실은 생각보다 큽니다.
냉장고는 문명의 이로운 제품이지만 인간의 욕심과 허영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부유한 나라의 냉장고에 식품이 남아돌아 썩어가고 있는데 지구 한편에서는 기아로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곡간만 채우면 되는 삭막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고 합니다.
‘냉장고 없이 일주일 살기’ 체험자들은 냉장고 없이 살아보니 불편한 것은 많고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혜가 생겨납니다. 오래 보관할 수가 없기에 그때그때 먹을 필요한 양만 조금씩 장보는 습관이 생기고, 음식도 적당히 먹을 만큼 하게 됩니다. 장은 자주 보지만 장보는 비용은 예전에 비해 조금 나오고 음식물 쓰레기 또한 줄어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히려 더 신선한 음식을 먹을 뿐 아니라 소비와 쓰레기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넓은 사제관에서 좁은 집으로 옮기면서 무조건 물건을 줄여야 했습니다. 집이 좁으니 버리고 줄여야 하는데 참 어려웠습니다. 더 넓은 공간에 더 많은 것을 채우는 것이 편리하고 당연다고 믿는 세상에서 가짐 없는 자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유에 얽매여 중요한 자유는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회칙인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에서 2017년 해외원조주일을 맞이하여 발표한 담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을 인용해 생태적 삶을 통한 나눔을 강조하였습니다.
“현대에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는 인류적이고 지구적 차원의 것이면서 이에 대한 해결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과 파괴된 지구에 대한 성찰로 접근해야만 가능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비 생활은 결코 이웃의 삶과 생태계, 곧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내 이웃의 생활 태도는 나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권리나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제한하고 수탈함으로써 내게 온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환경으로부터 오는 혜택을 누리는 동안 우리의 후손들도 정당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돌아봅시다. 자연을 단지 자원으로써만 인식하는 태도 때문에 어머니인 땅(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 곧 공동의 집인 지구가 수탈당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 깨닫도록 합시다.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권리와 재화들은 사실 애초부터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할 선물이었던 것임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한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빈 무덤을 통해 참된 자유의 삶인 부활을 보여주셔
지난 2월은 빈민운동의 대부 고 제정구 바오로 선생님 20주기였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본받아 ‘가짐 없는 큰 자유’를 강조하시며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도 그리스도교 영성은 삶의 질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합니다. 회칙에서는 소비에 집착하지 않고, 깊은 기쁨을 누리는 관상적인 생활방식을 독려하며, 절제를 통해 성숙해지고, 적은 것으로도 행복해지는 능력을 제안합니다.
이는 검소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것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기회에 감사하며, 내 것에 집착하지 않고, 갖지 못한 것에 탄식하지 않는 삶입니다. 지배의 논리를 피하고 쾌락을 쌓는 일을 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찬미받으소서 222장) 또한 회칙에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절제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순간순간을 더 잘 즐기며 사는 이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계속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의미를 체험하고 가장 단순한 현실에 익숙해져 이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며 신앙인의 삶을 제시합니다.(찬미받으소서 223장)
부활시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자신의 무덤까지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빈 무덤을 통해 참된 자유의 삶인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욕망의 상징인 큰 냉장고, 큰집의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비움으로써 소유에 얽매임 없이 나누는 ‘가짐 없는 큰 자유’ 삶이 나와 우리의 부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지난해 11월 종로 국일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로 7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번 참사로 고시원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시원들은 대부분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은 데다 성인이 두 팔을 뻗기도 어려울 만큼 통로도 좁고 미로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도 없는 방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화재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사고의 사상자 18명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고시원이나 쪽방 등은 도시에 기반을 두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저소득 빈민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열악한 주거 공간입니다. 이번 화재 참사가 일어난 고시원도 저소득 장기 투숙자들의 인명 피해가 유난히 컸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에 사는 청년, 일용직 노동자, 노인 등 주거 취약 계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 계층별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더불어 장기적인 차원에서 집값 안정화와 함께 집을 투기가 아닌 생활의 공간으로 보는 주거권 개념 확대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요즘은 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방을 구한다고 합니다. 이제 집을 구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집이 아니라 좁은 공간인 방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집이 아닌 작은 공간인 일명 ‘지옥고’(지하, 옥탑, 고시원) 라고 불리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택보급률이 100%가 넘어선지 몇 년이 지났지만 집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도시빈민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국민의 50% 이상은 평생 자기 집하나 갖지 못해
국민의 50% 이상은 평생 자기 집하나 갖지 못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 도저히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주거환경에서 비싼 월세를 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2018년도 국토부 통계를 보면 한사람이 임대주택 604채를 가진 사람도 있고 상위 10명이 4599채를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2살 아이도 임대사업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심각한 불균형과 불평등이 있습니다.
2015년 6월22일 제정되어 같은 해 12월23일부터 시행된 ‘주거기본법’은 국민의 주거권을 ‘물리적·사회적 위험에서 벗어나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주거비 부담을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임대주택 우선 공급 등을 통해 주거취약계층의 주거수준이 향상되도록 해야 한다고 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주거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거문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가정에는 집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짐승들의 먹이통에 뉘여 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헤로데의 추격을 피해 집을 버리고 이집트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가족들이 집이 없습니다. 집을 가져본 적이 없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족과 집은 같은 의미입니다! …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현대적 도시에 살면서 우쭐거리고 심지어 헛된 삶을 살기도 합니다. 도시는 소수의 기쁨을 위해 편의시설과 복지시설을 제공하지만, 수많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 형제들, 아이들에게는 살 집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집은 상품처럼 사고 파는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어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 54항에서 무관심의 세계화를 개탄하시며 “알게 모르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지 우리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문화가 우리를 마비시키고, 시장에 새 상품이 나오면 사고 싶어서 안달을 합니다. 반면에 기회의 박탈로 좌절된 모든 이의 삶은 우리 마음에 전혀 와 닿지 못하고 단순한 구경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세계적 위기는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서 인간이 최우선임을 부정하는 것이 세계적 위기”라고 강조합니다. 권력욕과 소유욕에 빠져서 “이익 중대를 목적으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 하는 이 체제 안에서, 절대 규칙이 되어 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자연환경처럼 취약한 모든 것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복음의 기쁨56항)라고 말합니다.
교황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문제들, 또는 이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불평등은 사회 병폐의 뿌리입니다.”(202항)
교회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처럼 “돈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돈의 주인이다”를 선포합니다. 따라서 돈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고 특히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최우선임을 확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할 때 우리 모두가 같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집은 상품처럼 사고 파는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어야 합니다. 돈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 가난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주거 정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가난한 사람들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 아이 일하던 곳을 갔었습니다. 갔는데, 너무 많은 작업량과 너무 열악한 환경이, 얼마나 저를 힘들게…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이런 곳에 우리 아들을 맡기다니. 아무리 일자리 없어도, 놀고먹는 한이 있어도, 이런 데 안 보낼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인병기에 내몰겠습니까.”(고 김용균 씨 어머니의 말씀 중에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입사한지 3개월 만에 죽임을 당한 24살의 고 김용균 노동자 어머니의 절규입니다. 이 절규는 젊은 노동자 어머니의 절규가 아니라 위험에 노출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어머니들의 절규이고 분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절규이며 분노이고, 하느님의 절규이고 분노입니다.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공장을 둘러보고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빨리 나오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작업현장에서 자기 아들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죽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미 이 발전소에서 지난 9년 동안 무려 12명의 노동자가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올해 국회국정감사에서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제발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더 이상 옆에서 죽는 동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호소했던 곳이었습니다. 왜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수년간 많은 노동자가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한마디로 돈 때문입니다. 이윤과 효율만을 추구해온 자본에 있습니다. 인건비 절감을 이유로 위험한 일은 하청을 줘서 위험을 외주화 했고, 2인1조로 일해야 하는데 입사 3개월 된 신입사원을 혼자 일하게 했습니다.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작업환경을 개선하지 않아 매년 많은 산업재해로 인해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지난해에도 노동자 1명이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최근 3년 동안 4건의 사고가 발생해 4명이 숨졌습니다.
발전소는 숨진 노동자가 있는데도 무재해 인증을 받아 재해 방지에 노력했다며 정부로부터 5년간 산재보험료 22억 여 원을 감면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재해 포상금이라며, 정규직 직원들에게 4770만 원을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24살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2교대 근무하면서 월 160만원의 임금을 받다 세 달 만에 야간작업 중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사망한 것입니다. 먹지 못한 컵라면 세 개와 과자를 남겨놓고….
불안정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용은 사람들을 죽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위험의 외주화는 단지 태안화력 발전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사회 노동현장 전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고용불안과 살인으로 내모는 작업환경 속에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은 고귀한 것이고 노동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녀들에게 그 직업을 권하겠습니까?
교회는 줄곧 노동의 중요성 강조하면서 노동의 고귀하고 신성한 가르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노동은 하느님이 세우신 사랑의 계획 일부입니다. 우리는 땅을 일구고 모든 피조물에서 나온 산물을 돌보며, 그럼으로써 창조의 노동 안에서 함께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노동은 인간 존엄의 기본입니다. 여태 일해 오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언제나 행동하시는 하느님과 닮게끔 합니다. 노동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능력을, 나라의 성장에 기여할 능력을 부여합니다.”(2013년 노동자 성 요셉 축일) 라고 노동의 고귀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과 노동자는 멸시와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 노동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무시와 멸시, 착취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 회칙에서 노동이 상품으로 취급되고 나아가 집단적인 경제적 투자로서의 노동력을 대하는 자본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로인해 기업의 최대 이윤 추구와, 노동시장에서의 갈등과 착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11항)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2018년 유엔이 정한 ‘사회정의의 날’에 노동과 일자리에 대해서 “고용불안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건강을 해치고, 가족들을 피를 말리며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불안정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은 사람을 죽입니다. 일자리는 인류의 우선과제입니다.” 라며 노동은 단순히 생계수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안정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용은 사람들을 죽인다고 비판했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뿐 아니라 일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야
또한 교황은 2013년 노동자와의 만남에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노동을 바꾸고 노동의 고위함과 신성함을 되찾기 위해서 사람과 노동을 중심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사람과 노동을 중심에 되돌려놓으십시오. 위기는 경제뿐만 아니라, 윤리, 영성, 인간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이 위기의 뿌리에는 개인들과 권력집단 모두에게서 공동선에 반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태까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소득과 이익의 법칙을 밀어내고 사람과 공동선을 중심에 되돌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분명히 노동입니다. 인간의 참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노동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 사회전체와 모든 구성원들은 존엄성의 원천인 노동을 주요 관심사로 삼을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정치 및 경제 기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2013년 9월 22일 사디니아 섬 방문 노동자들과의 만남, 연설문)
가톨릭교회 교리서 2428항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타고난 능력의 일부를 발휘하고 실현한다. 노동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일의 주체이며 목적인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처럼 사람은 노동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노동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일의 주체이고 목적이 이루어질 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노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고,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윤보다 생명이, 효율보다 안전이,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뿐 아니라 일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이는 노동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살리는 노동이 되고, 노동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사형제 찬성, 반대 아직도 고민하시나요?
“신부님! 마지막 코스에서 만나지 않기를 기도한다고 하셨지요?
솔직히 저도 스산한 형장에서 신부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거든요. 음산한 죽음의 자리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한다면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한 달 뒤 미사를 약속하고 헤어지는 발걸음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운데 다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라니요!”(사형수 형제의 편지글 중에서)
12월이 되면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항상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7년의 보좌신부를 마치고 교정사목위원회에 발령을 받고 교도소를 다니며 수용자들을 만나고 미사를 봉헌한지 한 달 정도 되는 날이었습니다. 막 퇴근하려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내일 사형집행이 있습니다. 아침 9시까지 구치소로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밀로 해주십시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사형집행!!!
이제 교정사목에 온지 겨우 한 달 되는데… 일반 수용자들을 만나는 것도 어색하고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데…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형수를 사형집행장에서… 정신을 차리고 위원장 신부님과 밤늦게 연락이 돼서 위원장 신부님이 집행되는 사형수를 위해 함께 하시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사형수와 사형집행, 사형폐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사형수와 사형집행이라는 것이 눈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다음 날 총 23명의 사형수가 5곳의 사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위원장 신부님은 하루종일 사형수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그것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1997년 12월30일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정권을 인수인계하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다음날 2명의 사형수를 위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사형집행장에 안 들어갔지만 엄청난 경험을 했습니다. 심신이 피폐해지고, 제 감정을 어떻게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집행형장에 함께 있던 신부님은 어떠하셨을까.
다음해 4월에 처음으로 사형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사형수를 만나러 가던 날은 긴장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긴장감과 두려움은 직접 사형수들을 만나자 마자 사라졌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는 최고수(사형수를 최고의 형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최고수라고 부름)들을 보면서 ‘아! 우리와 똑같네. 사형수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형제도는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반 생명의 문화
교정사목을 하기 전에 사형제도에 대한 깊은 고민과 관심이 없었습니다. 빈민과 교정사목을 함께 하시던 존경하던 선배 신부님이 사형수에 대한 얘기를 하셨지만 관심 없이 흘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형집행형장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집행이라는 것이 눈앞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사형수들을 만나 그들이 겪었던 삶의 애환과 아픔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참회하면서 매일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보면서 사형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 사형수들을 오랫동안 만났고 함께 했던 신부님, 스님, 목사님과 변호사님들이 중심이 되어 사형폐지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형집행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교정사목을 13년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계속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 역시 가톨릭출판사 사장과 교정사목을 하실 때 사형집행에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집행형장에서 사형대가 부러져 사형수가 두 번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가 당시 젊은 김수환 신부에게 태연하게 다가와 “제가 지금 제일 죽기 좋은 때입니다. 모든 준비가 다 돼 있습니다.”라며 위로하더랍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형수 미사를 요청할 때마다 마다하지 않으시고 사형수를 찾아가 미사를 봉헌해 주시며 사형폐지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셨습니다.
추기경은 사형폐지에 대한 반대의견이 많은 시절에도 “사형제 폐지에 대한 국민의 찬반 논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이때 생명 존중 사상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면 사형 제도를 폐지할 수 있을 것”라며 사형폐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사형제도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반생명의 문화”이며,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흉악범을 엄벌에 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생명만큼은 살려둔 채 용서하고 화해하려는 노력 또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사형제도에 반대하면서도 명확히 규정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미 매년 11월30일을 사형 반대의 날로 선포하고, ‘시티 오브 라이트’(City of Light) 운동을 벌여, 이 날이 되면 사형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콜로세움에 불을 밝혔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형폐지에 적극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사형폐지 운동은 생명운동
사형폐지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8월2일 사형을 조건부 허용하던 기존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67항을 “사형은 용인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개정할 것을 지시하며 사형반대로 입장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공정한 절차를 거친 사법부의 권한으로 행사된 사형구형은 몇몇 중대한 범죄에 대한 적합한 대응으로, 또한 그것이 극단적이라 하더라도 공동선의 보호를 위해 동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심각한 범죄를 범한 후에도 인간의 존엄은 침해할 수 없다는 인식이 더욱 생명력을 지닙니다…. 교회는 복음에 비추어 ‘사형은 개인의 불가침성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전 세계의 사형제 폐지를 위한 결의를 통해 가르침을 살아갑니다.”교회가 사형폐지를 명확히 하는 것은 생명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제 폐지는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운동입니다. 어릴 때부터 잘못한 사람은 죽여도 괜찮다는 교육을 받으면 자신의 생각과 가치, 이념이 다른 사람들은 죽어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생명 유무를 판단한다면 그보다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어릴 때부터 잘못한 사람은 벌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생명만큼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가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치관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명까지도 존중되고 지켜지는 사회가 된다면 국민 모두가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고 보호하는 문화가 싹트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형폐지운동은 사형수의 형 집행을 막자는 것을 뛰어넘어 이 사회에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생명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