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소구 14과 묵상
(성경소구)
■마태오 13, 36-43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묵상)
주제 : 하느님을 대하는 사람의 자세(?)
세상 삶에서 무서운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할 때, 우리가 무엇을 무섭다고 하는지 그 말뜻을 생각한다면 삶의 자세에 조금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나이를 먹는 것이 무서울까요? 나는 없는데 다른 사람이 든 무기가 무서운 것일까요? 내가 갖지 못한 돈의 힘이 무서운 것일까요? 우리 삶의 끝에 만나게 될 천국이나 지옥이 무서운 것일까요? 질문을 하고, 몇 가지 답을 했습니다만, 그 대답의 내용은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대답들 가운데, 정말로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요?
무섭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람이 해야 할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하지 않아서, 내게 다가올 결과들을 무섭다고 표현하면 잘못일 것입니다. 그것은 내 삶의 결과이지, 내 삶과는 상관없이 자기 힘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별해놓고 본다면, 우리가 무섭게 생각할 것들은 많이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갖는 욕심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갖는 욕심이 무서운 것이라기보다는 그 욕심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더 무섭게 여겨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만하고,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입장에서 해야 할 당연한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오는 대상이 무섭게 변한다고만 말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에 속할 것입니다. 오늘 탈출기 독서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속성--사람의 말로 하면, 성질(性質)--을 드러내시는 얘기가 나옵니다. ‘나는 자비로운 신’이다.....(그런데, 뒤에 나오는 말이 수상합니다)...조상들의 죄악을 삼대 사대까지 갚는다는 소리를 더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은 본말을 바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다가서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합니다. 일의 앞뒤를 바꾸면 무슨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선한 사람은 그 선한 결과를 얻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결과를 얻는 것이 세상의 순리입니다. 때로는 그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이 흐르는데도 미뤄져셔 그렇지, 그것은 거의 진리에 속하는 말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삶을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욕심을 많이 가졌거나, 해야 할 일과 권리의 순서를 바꾸어 생각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남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된 본보기를 보이는 일을 무섭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그렇게 하는 일로써 좋지 않은 결과가 내 삶에 찾아오는 것을 무섭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습니다만, 그 순서에 따라서 달라질 것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알아들었던 모세 그래서 십계명을 다시 받아 적은 모세의 그 겸손한 자세를 우리가 본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의 본보기 중 하나가, 오늘 기억하는 성모마리아의 부모님, 요아킴과 안나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보여주신 본보기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한걸음쯤 하느님을 향해서 다가설 수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