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우체국 앞에서 서성거렸다.
빼꼼히 고개를 내민 시집
'오월의 바람'이 분다.
'어제처럼 오늘도 나는 시를 그리고
그림을 쓰고'
곽도경 시인의 말이다.
역발상이다.
시는 그리고 그림은 쓴다.
불쑥 박완서 작가의 시가 떠오른다.
시를 읽는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위로 받고 싶어
시를 읽는다는 대작가의 말에 고갯방아를
수없이 찧는다.
시를 읽는다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곽도경 시인의 '오월의 바람'시집을 보는
순간 산들바람이 불었다.
좋아하는 단어.색깔.그림이다.
마치 내게 물어 보고 제목을 정하고 그림을
쓰고 시를 그린 듯 하다.
건빵 속의 별사탕이 이 보다 달달할까.
시인이 그린 그림.
남편이 찍은 사진을 삽입했다.
부창부수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산다는 건 축복이다.
시 마다 알밤이다.
찰방찰방 감성 항아리가 너울거린다.
곶감 빼먹듯 시를 먹어 치운다.
11월
곽도경
뒷모습이 닮은 두 사람이 걸어갑니다.
나뭇잎들은
물드는 것이 아니라 물 짜내는 것
바래어 가는 것이라는 진리
뒤늦게 깨닫던 날
빨갛게 바랜 단풍나무 아래 서서
나뭇잎 사이로 깊어진 하늘
올려다 봅니다
우리도 나뭇잎처럼
곱게 바래어 갈 수 있다면
바래는 일 또한 그리 눈물 나는 일 아닐 것 같아서
또 한 계절을 떠나보낼 채비를 하는 여자
어깨 위로 떨어지는 한 줌 햇살
툭툭, 털어내며 웃습니다.
그녀 얼굴
빨갛게 바래었습니다.]
낮달같은 11월이 시나브로 또렷해진다.
시인은 감정을 불어 넣는 마술사다.
노사연의 '바램'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건
왜일까.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간다는..
하심
곽도경
[소리길을 걷는다
숲을 따라 이어진 길 소란하다
물소리.바람소리.새소리
시끄러운 것들이 세상 다정하다
다시 길을 걷는다
나뭇가지 하나 길 밖으로 튀어나와
허공에 길게 누워있다
마음에 날 세운 사람들
하나 둘 머리 조아리고 지나간다
도도하고 꼿꼿하던 마음이
나뭇가지에 걸려 비로소 겸손하다
머리 숙이고 지나가야만
볼 수 있는 환한 풍경 앞에서
나를 가장 낮은 곳에 내려놓고
마음에 찍는 점
하나]
불교의 화두 방하착이다.
'내려 놓아라'
튀어 나온 나뭇가지가 스승이다.
오만방자한 인간을 말없이 가르친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찔린다.
숙이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조곤조곤
타이른다.
불쑥 새치기하는 시가 있다.
가을 햇살 닮은 시인을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좋아 한다.
정호승 시인의 '바닥에 대하여'
힘든 시절 나를
일으켜 세운 낙지다.
하심과 바닥은 결코 절망 지점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비워야 채워진다.
[바닥에 대하여 ]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곽도경 화가이자 시인의 매력은 양파다.
화수분 재능이다.
기부의 흔적이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간다.
그녀의 그림과 시를 보면 말개지고 싶다.
토끼가 눈 비비고 와서 마시고 싶은
깊은 산 속 옹달샘이다.
희망의 아이콘!
빨강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말괄량이 삐삐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을 그린다.
시나브로 젖어 든다.
긍정과 희망이 폴짝 뛴다.
마음의 찌든 때를 벗겨주는 비누같은 작품 세계다.
뽀독뽀독 씻겨 준 곽도경 화가.시인께
깊은 감사와 존경 보따리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