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놀라의 성 바울리노 주교
ㅡ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 † 오늘 성구(聖句) [1독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열왕기 하권 17,5-8.13-15ㄱ.18)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는 5 온 나라를 치러 올라왔다. 그는 사마리아까지 쳐 올라와 그곳을 세 해 동안 포위하였다. 6 마침내 호세아 제구년에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 7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8 또한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풍속과 이스라엘 임금들이 만들어 낸 것에 따라 걸어갔기 때문이다. 13 주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와 선견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셨다.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보낸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 14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15 그들은 그분의 규정과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자기들에게 주신 경고를 업신여겼다. 18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노하시어 그들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
| [2독서] |
|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오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 《복음 묵상(默想)글》 『마음 사전』의 저자 김소연 시인은 이해와 오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오해해 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 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만일 시인의 관찰이 정확하다면, 너에게서 나의 약한 모습을 능히 감출 수 있는 ‘오해의 가면’을 쓰는 게 나의 본성이며, 오해의 가면을 넘어선 나의 진짜 얼굴을 네가 ‘이해’하는 순간 나는 발끈하며 네 판단이 틀렸음을 항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얼굴에 쓴 가면이 두껍다는 것, 또 내 가면이 벗겨질 때마다 너에 대한 공격과 심판이 빠르다는 것, 그것은 감추고 싶은 나의 약함이 그만큼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말씀하십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 한 내가 “뚜렷이 보는” 일은 요원합니다. 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한, 진실된 자아를 발견하는 길은 아득합니다. 타인에 대한 습관적 판단과 심판만이 내 가면을 지키는 수단으로 이용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이해’를 믿습니다. 그분은 내가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판단하지 않고 다만 안아 주십니다. 거기에서 나를 만나시고, 거기에 당신 사랑과 구원의 자리를 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해’는 나의 약함에 대한 가장 따뜻한 위로이며, 진실된 나로 살아가도 괜찮다는 초대입니다. |
| 《오늘의 묵상》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 명령은 산상 설교에서 “걱정하지 마라.”(6,25)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미래를 향한 불안이라면, 심판은 다른 이를 향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크리노’는 법정의 판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하여 성급히 결론 내리는 가벼운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심판을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로 보고 꾸짖습니다(4,11-12 참조).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고대 유다 전승에도 “사람이 헤아린 그 잣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저울이 인간의 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 저울을 가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는 그 잣대는 사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냅니다. 심판의 시작은 나의 밖을 겨누지만, 그 끝은 결국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티와 들보의 비유는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옹졸함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교정하는 자의 어설픈 폭력성을 향합니다. 훈계는 사랑의 행위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훈계는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이르십니다. 다른 이의 흠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안의 갈라진 틈은 어둠 속에 숨기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지요. 다른 이를 판단하고 심판할수록 우리의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형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2026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잘 알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생각나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답은 “내 빤스 어디 있지?”라고 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진짜 로댕이 그런 의도로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의 자세는 너무나 불편합니다. 오른팔을 꺾어 턱을 괴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오른 팔꿈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리는 것도 너무 불편합니다. 한 번 이 자세를 취해 보십시오. 아마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기 힘들 것입니다. 로댕은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작품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불편한 생각을 불편한 자세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 작품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새롭게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알려는 노력보다 그냥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쉽게 판단하고, 그 뜻을 가지고 나의 이웃을 함부로 판단, 단죄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원하실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여기서 심판한다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정당한 비판이나 판단 능력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상대방의 동기나 영혼의 상태까지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짓고, 그를 단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금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향해 들이대는 그 엄격하고 냉혹한 잣대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재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타인에게 자비가 없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바르게 돕고 교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자기의 죄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보다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
| 『오늘의 말씀 카드』 |
하늘에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느님 께서는 미천한 종들의 구원을 위하여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니
오늘 저희 삶의 매듭에 고통받는 당신의 종들을 가엾이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또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영광으로 세상을 떠난 모든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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