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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에세이

내력(來歷)

작성자싱그러움|작성시간26.06.10|조회수21 목록 댓글 0

포도나무가 있는 윤 할머니 집에서 추도예배를 드리는 날, 몰래 떼어 놓고 갈까 봐 엄마의 포대기 자락을 단단히 쥐었다. 대나무 얼개 밑으로 뽀얗게 분이 오른 포도송이를 구경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어른들이 숙연하게 예배를 드리를 동안 작두샘 옆 포도나무 곁을 슬슬 맴돌았다. '왜 먹음직스러운 이 포도를 아무도 따먹지 않을까.' 포도 넌출이 똬리를 틀어 올라간 시렁, 어쩌면 여기는 포도알이 주렁주렁하지만 따먹는 날에 큰일 나는 에덴동산일지도 모른다. 동그란 보랏빛 포도 알은 젖이 불은 엄마 젖꼭지 같았다. 마루위 치마폭에 싸인 세 살 먹은 막내는 엄마의 포도 알을 입에 물고 뱉지 않았다. 그러자 단내 풍기는 포도를 올려다본 아이도 꾹 참았던 침이 꼴깍 넘어 갔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포도나무를 키우는 기와집, 한복을 정갈하게 입고 새벽마다 주일마다 종을 치는 윤 할머니는 세상과 어울리지 않았다. 왜소했지만 목소리가 우렁찼고 성직자로 두 자녀를 둔 분이셨다. 일찍 혼자 됫고 교회 종지기를 자처했다. 종을 흔드는 끈을 붙잡고 발을 굴리며 중얼중얼, 종소리는 할머니의 기도 소리와 함께 골목으로 퍼져 나갔다. 뎅그런, 바람을 타고 종탑 끝에서 부서진 뇌성은 들녘의 나락을 키우고 벌레를 깨우며 구름 속 종달새를 부추겼다.

 

​호기심이 일었다. 할머니를 졸라서 끈을 잡으니 도리질 치는 종의 무게가 내 어린 몸을 쑥 잡아당겼다. 겁에 질린 채 훅 올라가는 내 몸을 통과했던 천둥소리, 끈을 잡고 허공을 올랐다 내렸다 하며 할머니처럼 기도를 했다. 공기를 가르며 들을 지나 섬진강을 따라 갔던 할머니의 종소리를 나도 따라갔다. 정해진 시간마다 드리는 할머니의 타종 예식, 어쩌면 할머니는 "천지간에 나만큼 서러운 사람이 있겠느냐"며 하늘을 향해 종을 두드려 하소연한 것이리라.

 

​마을 제일 높은 동산에서 울려 퍼진 종소리는 촌부의 무지를 깨우기도 하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때로는 잠밭 들에서 코를 박고 일하는 농부들의 시계가 되기도 했다. 캄캄하도록 들일을 하다가 초종 소리가 울리면 마을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집으로 향했고 따뜻한 저녁을 차려 놓고 하루의 피곤을 풀었다. 동쪽 견두산에서 솟은 해가 서쪽 동악산으로 넘어가는 하루 동안 종소리는 잠밭 들에서 자고 머물렀다. 종소리가 들리는 곳까지가 잠밭 땅이다. 종소리는 여명을 불러들이고 붉은 노을을 짊어지고 왔다. 봄이면 종소리를 따라 봄볕이 황금빛을 뿌렸다. 하얀 눈이 내리는 성탄절 새벽에는 종소리에 평화가 실려 고샅에 쌓였다.

 

​일제 말 일본 헌병을 피해 마루 밑에 파묻어 두었던 동종을 꺼내 다시 달았던 해방의 날, 예배당을 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는 자유의 상징. 개발의 바람이 불 때 찾아온 은밀한 회유, "높은 값을 쳐줄 테니 동종을 팔라"고 조르던 골동품 상인들의 유혹을 물리친 결단이 서린 신앙의 성물. 그것은 끝내 종각의 꼭대기에서 내려오지 않고 안으로 안으로 속가슴을 때려가며 누군가의 기도를 금빛 나도록 새긴 하늘에 핀 나팔꽃이었다. 이제는 백 년의 기독유물로 지정되어 꼭대기에서 내려와 예배당 마당에서 쉬고 있다.

포도를 하얀 접시에 담아 마루에 앉았다. 포도송이 안에 할머니의 종소리가 탱글탱글 박혔다. 씨를 발라내느라 오물오물 입속에서 포도 알을 뭉개는데 변함없이 새콤달콤하다. 할머니는 잘 익은 포도를 외손주 며느리인 내게 따 주셨다. '윤 할머니'는 남편의 외할머니니 나도 외할머니라 불렀다. 대목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심으신 포도나무도 많이 늙었다. 외갓집은 여전히 삐걱대는 마루 송판 하나 없이 손수 지으신 기와집에 대목의 꼼꼼함이 곳곳에 서려 있다. 외할머니느 그것이 늘 자랑스러우셨다. 맏딸이 한동네 청년을 만나 결혼을 하고 외손주가 또 한동네 처녀를 만나 결혼을 했다. 한마을 호사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며 대를 이어 아들이 동네 처녀에게 장가를 간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기뻐하셨던 시아버지는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는 말을 어찌 생각하실까.

 

​첫아들을 낳고 아직 삼칠일이 지나지 않았다. 지팡이 소리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밤새 한숨 못 자고 아기를 달래고 겨우 잠이 들었는데 누가 오시는 걸까. 외할머니가 몰래 산방을 방문하셨다. 시어머니가 말리셨지만 한 마을에서 증손자가 태어났다는데 아이가 보고 싶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으셨으리라. 차갑고 거친 손으로 기저귀를 젖히고 아이의 사타구니를 보셨다. 아이를 안아 올리는데 아이도 울고 할머니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아들 손이 귀한 집안에 첫 손자를 낳았으니 반갑고 귀한 아기였으리라. 할머니가 쌈짓돈이 든 하얀 봉투를 내 이불 속으로 슬며시 넣어주셨다. 그리고 굽은 등을 이끄는 지팡이 소리는 조용히 마당 밖으로 사라졌다.

 

​어느 새벽 무람없이 포도나무집을 쳐들어온 전언은 '주의 종'으로 서원했던 맏아들의 사망 소식이었다. 황망한 소식은 할머니의 모든 기력을 뺏어 갔다. 평생을 두고 종을 치며 올렸던 기도는 도대체 어느 아수라를 돌아 할머니께 되돌아온 것일까. "이래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물음의 대상이 왜 하필 종지기 할머니어야 했을까. 아들을 묻고 흙 담벼락을 짚고 긴 골목을 걸어 들어가신 후 자리에 누워 버린 할머니는 함부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일을 우리 앞에서 더는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아마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 엎드려 눈물로 끝없이 하늘의 뜻을 헤아렸을 것이고 결국 모든 것을 당신의 탓으로 돌리셨으리라.

 

​포도나무집 할머니가 아들 곁으로 가신 지 십 년이 넘었다. 치마폭에 종소리를 곱게 싸서 아쉬움 없이 떠나셨다. 잠밭을 울리던 종소리는 기억에서만 울린다. 제일 실한 포도송이를 골라 내게 따 주시던 할머니의 부재.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단단한 무쇠 방망이로 온 삶을 울린 할머니의 맑은 종소리가 이제야 가슴에서 울린다. 시어머니는 밤마다 무릎을 꿇으시고 손부인 나는 밤마다 무언가를 끄적거린다. 누구나 인생의 내력이 다르니 필연적으로 기억되는 이야기도 다르다. 잠밭 예배당에는 종의 내력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평생 그 종을 두드렸던 종지기 할머니의 잊혀진 내력도 누군가 새겨야 하리라. 가끔은 '쓰는 자'의 사명감을 잊지 않는다.

 

 

- 김삼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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