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린선생 묘(포천시 향토유적 22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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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21차 능원묘 답사시 광릉과 포천 권역의 능원묘를 돌면서 성석린선생과 같은 권역에 있는 성여완선생 묘를 찾았으나 네비게이션은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 주어서 길 옆의 표지판을 보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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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여완선생 묘(좌측)와 성석린선생 묘(우측) |
▲ 성석린선생 묘역 전경 |
마을에서 들머리와 두 기의 묘가 있다는 것은 확인하고 들어갔으나 가도가도 묘지는 보이지 않고 그냥 돌아가기는 너무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와서 갈때까지 가 보자는 심정으로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니 저 멀리에 두 기의 묘가 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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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석린선생 묘역 아래에 위치한 묘지 |
앞에 있는(우측) 묘가 성석린선생의 묘이고, 안쪽(좌측)에 있는 묘가 성석린선생의 부친인 성여완선생의 묘입니다. 두 묘지 모두 조선 초기의 묘지로서 600년이 된 석물들이 묘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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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부인 화숙택주(和肅宅主) 순홍군 안씨와 합장묘로서 묘 앞에는 상석2개, 장명 등, 그리고 좌우에는 신 구 묘비와 문인석이 2기씩 각각 배치되어 있다. 성석린선생은 1338(충숙왕 복위7)-1423(세종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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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자수, 호는 독곡, 본관은 창녕, 부원군 여완의 아들로 1357년(공민왕6)에 문과에 급제, 전리 좌랑.전교 부령.전리총랑을 지낸 후 신돈에 아부하지 않아 해주 목사로 나갔다가 다시 불리어 성균 사성이 되고, 밀직 대언.지신사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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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4년(우왕10) 밀직 제학으로 있을 때 왜구가 승천부에 쳐들어오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원수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출전하여 적을 격퇴하고 수성좌리공신이 되었다. 후에 이성계등과 함께 우왕에 뒤이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워 그 공으로 찬화공신에 창성군 충의군에 봉해졌으며, 예문 대제학.문하찬성사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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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색.우현보의 일당으로 한때 추방, 문하시랑찬성사.판개성부사를 거쳐 판한성부사를 역임, 1415년 영의정이 되었다. 시사(詩詞)에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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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린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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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산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