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여행[서울 지역] 목서흠 묘

작성자광나루|작성시간10.02.23|조회수413 목록 댓글 0

충정공 목서흠 묘역(서울 기념물 27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나홀로의 제38차 답사 며칠 전에 정의공주 묘역 뒷편에 목서흠선생 묘역이 문화재로 지정을 예고한다는 신문 기사가 나서 답사 코스에 넣었습니다. 답사시에는 연산군 묘를 먼저 갔다가 목서흠선생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정의공주 묘역 우측 골목 입구에는 사천 목씨 묘역 입구라는 표식이 있었으며, 몇 십미터 정도 들어가면 정면에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 우측 산자락에 목서흠선생 묘역이 있는 줄 알고 산자락을 올라 주변을 한참 돌아 보았으나 목서흠선생 묘역은 없었습니다. 다시 사당 입구로 내려와서 사당 좌측 산자락으로 접어드니 우측에 목서흠선생 신도비가 있었으며, 신도비에서 산길을 따라서 100여미터 올라가면 우측에 3단의 묘역이 보입니다. 맨 위에 있는 묘가 목서흠선생 묘역입니다만...

▲ 정의공주 묘역 우측으로...

▲ 도로 입구에 안내석이 보입니다.

▲ 사당 좌측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신문 기사의 보도 자료로 실린 사진과는 묘역내 석물이 적었습니다. 답사 자료집에 있는 사진과 비교해 보니 현장에는 보도 사진에 있던 문인석과 장명등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묘지를 잘못 찾은 것인가 하고 묘비를 보았으나 묘비에는 분명히 충정공 목서흠지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보도 사진을 잘못 사용을 했나하고 답사 후, 한 달 뒤에 서울시 문화재 담당에게 보도 사진과 다른 점을 이야기하니,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묘역 조성 당시의 석물이 아닌 후대에 조성한 문인석과 장명등은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하여 종중에서 의견을 받아 들여서 후대에 조성한 석물인 문인석과 장명등을 철수했다고 하였습니다. 보도 사진은 철수 전의 사진을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일단 의문은 풀렸습니다.

▲ 사당을 지나면 우측에 신도비가 보입니다.

선조때 이조참판을 지낸 목첨의 맏아들인 목서흠(睦叙欽, 1571∼1652)은 인조때 양양부사, 개성부유수 등 지방관을 역임했고, 중앙에서 좌ㆍ우승지, 예조참판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숙종때(1675년) 그에게는 충정(忠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89년 그의 다섯째 아들인 목내선이 좌의정에 오르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 신도비에서 산길을 100여미터 정도 오르면 우측 산자락에 묘역이 보입니다. 맨 상단의 봉분이 목서흠선생 묘입니다.

목서흠의 묘역은 방학동 도봉산 시루봉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묘역에는 묘표와 신도비, 혼유석,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등 석물들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묘제와 석물 제작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묘역 인근에는 연산군묘(국가 사적 362호)와 세종대왕의 차녀인 정의공주 묘역이 있다.

▲ 현재의 목서흠선생 묘역(위 좌측 사진)과 신문에 실린 보도 사진(위 우측 사진)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묘역 입구에 있는 3m 높이의 신도비는 목서흠의 가계(家系)와 주요 활동내용, 그의 덕망을 기리는 시문 등이 새겨져 있는데 시는 이 비가 전서(篆書)체로 유명한 이정영과 명필로 알려진 조위명의 글씨, 조경의 문장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도 갖는다고 설명했다.                                                                                                            - 서울시 보도 자료 내용 발췌 -

▲ 목서흠선생 묘역 전경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인 목세칭은 조선 중종때 의 학자로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청운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의 아들 목첨(睦詹)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판·도승지등을 지내고 뒤에 선조 때 이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다.  목첨을 비롯  첨의 아들인 목서흠(睦敍欽) 목장흠(睦長欽) 목대흠(睦大欽) 삼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크게 현달하여 중시조 이후 목씨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목서흠선행 묘역 하단에 있는 후손의 묘역. 문인석이 굉장히 작은 것이 특이합니다.

첨의 아들 3형제 중 맏이인 매계(梅溪) 목서흠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거쳐 효종 초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둘째 목장흠은 형보다 앞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좌부승지. 청풍군수등을 지낸 후 사직했다가 인조반정 후 재기용되어 호조참판. 도승지 등을 지냈으며, 막내 목대흠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광주 목사가 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의, 강릉부사 등을 지냈다.      - 사천 목씨 종중 자료 발췌 -

사천 목씨 묘역 위치도

                                  화살표 ↑ 위치의 산자락에 목서흠 묘가 있습니다.                                   소재지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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