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선생 묘 및 신도비(시흥 향토유적 2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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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선생(효종의 장인) 묘역 후경 |
장유선생 묘역은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남골묘와 장유선생 부친인 장운익 신도비를 보시고, 바로 전방에 있는 장유선생 묘역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신도비는 장유선생 묘역 우측 하단 70여미터 전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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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에 위치한 우측에 위치한 납골묘. 장유선생 후손 납골묘인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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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선생 부친인 장운익(張雲翼)선생 신도비 모습. 원래 서초구 방배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이 곳으로 옮겨... |
장유(張維, 1587~1638)선생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문장가로,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所)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광해군 원년(160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주서, 대제학, 나주목사, 예조ㆍ이조판서ㆍ우의정 등을 역임하고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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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술(醫術), 병서(兵書) 등 각종 학문에 두루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등이 전해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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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비 인선왕후의 부모인 신풍부원군 장유/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안동김씨 합장 묘역 전경. |
봉분 앞에는 묘비와 그 앞에 혼유석ㆍ상석ㆍ향로석이 놓여 있고 좌우에 문신석인 두 쌍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져 있다. 신도비는 2.5m×4.2m, 높이 1.3m 규모의 귀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비신의 규모는 높이 2.65m, 폭 1.3m, 두께 32cm이며, 비개(碑蓋)는 옥개(屋蓋) 위에 용(龍)이 조각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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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선생 묘역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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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내 석물들이 검은 반점들이 상당하네요... |
▲ 장유선생 묘역에서 바라 본 신도비 모습 |
이 신도비는 현존 우리 나라의 신도비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묘소에는 현종 어제(御題)의 표액(表額)과 그의 아들 선징의 음기(陰記)로 된 표석 및 정두경(鄭斗卿)이 찬(撰)한 지석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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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선생 신도비 전경. 광나루가 신도비 상당히 많이 보았습니다만... 굉장합니다. |
선생의 사망 39년 만인 숙종 2년(1676) 10월에 세운 이 신도비의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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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의 좌우측면 모슴. 옆에 사람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부친 장운익(張雲翼, 1561~1599 이조판서) 신도비를 비롯하여 아들 장선징(1614~1678 예조판서), 손 장훤(천안군수), 증손 장진환(張震煥, 1646~1722 예산현감) 등의 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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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유선생 신도비 후경 |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부친(장유)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법연사지가 있고, 현재의 법연사는 1989년에 건립하였는데 묘역에서 북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법연사 아래에는 선생의 종택(宗宅, 조남동 21)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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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큰 귀부를 한 돌로 조각하였습니다. 비신이야 이 정도 크기는 간혹 있습니다만, 귀부의 크기에 놀랐습니다. |
장유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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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시작 지점에 차를 세우고 납골묘와 장운익 신도비를 보고 좌측 시작 지점의 장유선생 묘역으로 갔다가 좌측 상단의 신도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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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시흥시 조남동 산1-5 우측 상단의 화살표 지점에 장유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